ABOUT ME

우리들교회/QTIn/2023 표어 이제는 안심하라 (행27:22)

Today
Yesterday
Total
  • 누가복음 15장 11절~32절 - 돌탕집탕
    주일설교 요약 2022. 5. 8. 11:22

    본문: 누가복음 15장 11절~32절(2016년 7월 31일)

    제목: 돌탕집탕

    설교자: 김양재 목사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지난주 '복이 있도다'에서 이제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로, 나라로 지경이 넓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서 포도나무처럼 아무리 잘 밟히고자 해도 오늘 본문은 한 영혼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참 어려운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내 집에서 잔치를 하는데 가난한 자들, 몸 아픈 자들, 다리 저는 자는 청하기가 어려운 것이 본성이잖아요.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청하고 싶겠는가?. 14장에 보면 청하는 1차 대상이 소 사고, 밭 사고 장가든 사람들인데 우리가 보기에 편안해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청한다. 그러나 날마다 말씀의 잔치를 베풀고 청해도 유대인,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한결같이 사양하면서 안 가는 이유가 많다. 그들이 사양하니까 갑작스럽게 가서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맹인 저는 자들은 청했는데 그들에게 청하자마자 그들이 달려왔다. 복음에는 차별이 없지만 조금만 먹을 것이 있으면 한결같이 사양을 하므로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매달리게 하시고 부르신다. 강권해서라도 채우라고 하셨으니 강권해야 할 사람도 있지만, 한결같이 사양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지금은 떠나야 할 시간이고 분별해야 한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회개도 중요하지만 누가 초청을 받아들이는 진정한 의인인지 그 시각으로 탕자의 비유를 보려고 한다. 주님은 백 마리 양 중에서 건강한 99마리보다 잃은 양 한 마리를 귀하게 보신다. 10드라크마 중에 잃어버린 1드라크마에 관심 있으시고 범위를 좁혀서 두 아들 중의 탕자인 아들을 찾는다 오늘은 유명한 돌아온 탕자, 집에 있는 탕자를 통해서 한 영혼을 찾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원한다.

     

              첫째로 돌아온 탕자이다. (11절~13절)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서 먼 나라에 가 그곳에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계신 집 안에서의 삶보다 다른 곳에 가면 큰 만족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틈만 나면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아버지를 떠나 내 뜻을 펼치며 마음대로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었겠죠. 그러니까 아버지만 보면 짜증이 나고 숨이 막혔을 것이고 아버지의 걱정 어린 말들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는 어서 빨리 죽어야 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당시 상속절차에 의하면 둘째 아들은 3분의 1을 받고 큰아들은 3분의 1을 받게 되는데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받으면 다시 그것의 3분의 1만 받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생전에 유산을 물려주었다고 해도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식은 유산에 대한 소유권만 갖을 뿐 처분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둘째 아들은 유산의 총 9분의 1밖에 못 받는데도 죽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한 것이다.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제대로 된 유산이 아니어도 된다, 내놓으라고 당연하듯이 요구한다.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그 당시 관습으로 볼 때 도덕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지극히 무례한 것이었다. 아버지를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취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버지의 권위를 짓밟고 집안의 명예를 더럽힌 이런 놈은 단지 한 집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을 어른들이 함께 치리해야 할 공동체 문제로써 이런 자식은 마을 사람들이 뺨을 때린다든지 가족 구성원의 자격을 박탈 한다든지 더 극단적인 경우 아들이 죽은 것으로 여기고 장례식을 치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준다. 수치를 안겨준 아들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본인이 그 수치를 안고 아들의 요구에 순수히 응한다. 제물을 다 모아서 갔다는 것은 돌아올 생각이 없었음을 알수 있다. 부동산을 현금으로 바꿔서 갔으니까 땅도 다 팔아서 간 것이다. 고향 땅이고 뭐고 다 싫은 것이고, 찾지 못할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무슨 상처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가족의 연을 다 끊어버리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둘째 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닌 자기 부르심으로 떠났기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그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었겠는가. 허랑방탕으로 줄 달음질 칠 수 밖에 없었다. 제물의 성경적인 가치관이 없었기에 며칠이 못 되어 다 없앤다. 몇 대가 부자여도 돈 들어먹는 것은 순식간이다. 열등감 많은 사람은 돈 밖에 자기를 치장할 것이 없기에 오직 돈만 요구하고 돈으로 해결하고 돈가지고 자랑한다. 그렇게 무리하게 제물을 요구했던 탕자의 마음속엔 근본적으로 열등감의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여기서 '허랑방탕하여'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있다. 처음에는 많은 돈 때문에 조금 풀리는 듯했지만 잠시 후에 제물과 사람 모두에게 배반을 당한다. 아들의 잘못된 동기를 잘 알면서도 허락한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아닌가 싶다. 로마서 1장 28절처럼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할 때, 그들이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 이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의 과정을 겪어야 되는 것이고 겪어야 함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제물은 낭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적용질문]

    어떤 부분에서 신앙도 가족도 다 끊고 내 뜻대로 하고 싶은 강한 욕망이 있는가. 그 욕심때문에 허랑방탕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사연이 있는가. 그 사연이 누구의 탓도 아닌 무분별한 내 삶의 결론임을 깨닫고 있습니까?

              

              (14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훙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아들도 아버지 입장에서도 다 없앤 후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든 것은 징벌이다. 그가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온갖 즐거움과 자유를 누리고자 갔던 그 나라에 흉년이 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허랑방탕도 한 몫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나랏님도 막을 수 없는 흉년인 것이다. 우리 집에 징벌이 온 것, 흉년이 온 것을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비로서 궁핍하기를 하나님께서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궁핍이 인생의 약이기 때문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는 인생을 논할 수 없다. 나의 잘못한 결정 때문에 그 나라까지 흉년이 들 수 있다.

     

              (15절~16절)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어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하지만 처음 경험해 보는 궁핍함을 가지고는 낮아지지 않았다. 돼지치는 곳까지 갔다. 그것으로도 안되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다. 그것도 아직 낮아지지 않았다. 쥐엄열매도 없어서 못 먹게 되는 데까지 가게 되어야 한다. 여기까지 가야 한다. 사실, 우리는 자식 도와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돈으로 도와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인지 잘 모르고. 부도 났을 때에는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가면 사람이 된다. 이번 주일에도 정말 죽겠다고 오신 분이 계신다. 그래서 제가 감옥 가시라고 그랬다. 감옥 가시면 된다고, 우리들 교회에 감옥다녀 오신 분(감옥 가신 분) 많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꼭 오라고 말씀드렸는데 오셨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연민으로 자꾸 도와주면 한사람 망할 것, 열 사람, 스무 사람, 백 사람이 망한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야 올라올 일이 있는 것이다. 전 재산이 허비되어서 구원이 된다면 그 편을 택할 수도 있다. 어떤 아들이 돈을 좋아하고 쉽게 써버리니까 그 아버지가 절대로 저 아들에게 돈을 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급해진 아들이 아버지에게 전보를 쳤다. ‘당신의 아들이 굶음’ 이렇게 보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답장 하기를 ‘굶어죽어라 애비’ 이렇게 보냈다. 그때부터 아들이 이를 악물고 돈을 벌었다. 그리고 20여 년 동안 아버지에 대한 상처로 연을 끊고 지내다가 어느 날 성공을 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고향을 찾아갔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일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편지를 남기셨다. 거기에는 '아들아 내가 하루도 너를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네가 정신 차리고 잘 살기를 바래서 그런 답장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네가 안 찾아오는 것을 보니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도리어 다행이다. 하루도 너를 위해 눈물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가난하기를 청하는자 외에는 모두 가난을 수치로 여긴다. 가난을 수치로 여기니까 큐티하면서도 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없이 살면서도 기쁘다고 자랑으로 여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수치로 여기는 것이 우리 믿음의 한계이다. 가난한 것이 수치스럽고 그것 때문에 주눅이 든다면 징벌이다. 징벌에서 아직 구원받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책임을 묻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고향에 있으면 금새 손을 벌렸을테니까 먼나라에 가서 허비하는 것이 잘된 일이다. 스스로 돌이킬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적용질문]

    비로소 궁핍한 단계, 돼지치는 단계, 돼지 먹는 쥐엄열매 먹는 단계, 쥐엄열매도 없어 못먹는 단계 중 나는 어떤 단계에 있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낮아지셨습니까?

     

     

              (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너무도 치사하지만 배가 고픈것이다. 이젠 내가 밥 먹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는 여기까지 가야한다. 이제 원망도, 욕심도 허풍도 다 없어지고 자기 아버지 집에 품꾼이 굶지 않는 것이 너무 부러운것이다. 여기까지 가야된다. 큰 아들하고는 감히 비교도 안한다. 이렇게 내려가서야 자기 주제를 알게 된다. 여러분은 그저 굶지 않은 것을 부러워 할 정도의 치사함과 배고픔을 겪어 보셨습니까? 요즘 누가 부럽습니까? 잘사는 친척 동창이 부럽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의 인생을 생각할 때에 감히 지금 누구를 부러워하겠습니까? 내가 내 주제를 아는 것부터가 하나님의 시작이다.

     

              (18절)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떡을 갖다줘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고난이 있으니까 그것도 먹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 유명한 100% 죄인이 저절로 깨달아졌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가 그래서 나온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니다. 마가복음에는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가난하니까 자기 죄를 보게 되었다.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면 원망만 한다. 그 사람이 날 꼬여서 망했어. 투자하라고 해서 했더니 망했어. 이민오라고 해서 갔더나 날 속였어. 갔더니 망했어. 돼지 주인이 쥐엄열매를 준다고 하고서는 사기쳤어. 이러면서 원망을 한다. 죄의 특징이 원망이다. 그러나 우리는 망하고 힘들고 쫓겨나는 사건에서 하늘과 아버지께 지은 나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누군가를 탓하고 사회를 탓하면서,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회개가 아닌 후회와 원망만 풍부해지지는 않습니까?

     

              (19절)‘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자기 죄를 보게 된 둘째 아들은 자기 주제를 알게 되니 아들로 불리게 될 자격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통감한다. 이전에는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줄 알고 아버지께 당당하게 가서 내 몫을 내놔요. 했던 둘째 아들이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품꾼의 하나라도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참 회개의 모습이 이런 겸손함이다. 내가 죄인이라는 그 깨달음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세상에 가장 좋은 감정이 회개의 감정이다. 가장 멋있는 감정도 회개의 감정이다. 우리가 립서비스로 사랑한다 이런 얘기 100번 보다도 내가 죄인이다라는 고백보다 감동을 주는 언어는 없다. 그 언어가 상대방을 변화시킨다. 내가 살고 나때문에 힘들었던 사람들까지 사는 길은 내가 회개 하는 길 밖에 없다.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죄를 미워하면서 청산하지 않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마음 먹었으면 행해야 한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주님은 벌써 아시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측은히 여겨 달려와 안아주신다. '측은히 여겨'는 우리말에서 애간장이 녹는다는 표현이다. 창자가 상할 정도로 애틋한 마음을 뜻하는 단어다. 그래서 여기서 누가 가장 아팠을까요?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보다 더 아픈 사람은 없다. 아들이 그렇게 사는 동안 아버지는 늘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것이다. 사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집안에 들이지 아니하고 죄의 댓가를 치뤄야한다. 네가 변했는지 보겠다고 하며 공개적으로 창피를 줄 수도 있었다. 둘째 아들은 그런 수모를 당해도 마땅하지 않은가. 아직 거리가 먼데도 저 멀리서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다면 분명 그 시간은 밤이 아니고 낮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대라면 마을에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아들을 알아본 사람들에 의해서 어떤 수치를 당할지 모르는 것이다. 혹시라도 그럴까봐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보자마자 아버지는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것이다. '달려가다'로 번역 된 헬라어 트레커는 경기장에서 육상 선수가 전력질주하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단어이다. 나이도 많은 사람이 체통이고 뭐고 없이. 명예와 체통을 목숨보다 중요시 여기던 당시 문화에서 아버지의 이런 행동은 파격적이고 수치스럽기까지 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명예와 체면과 자존심을 모두 버렸고 아버지로서 행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한마저 포기했다. 자식이 그 어떤 위해와 멸시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아들의 수치를 자발적으로 떠안았다. 아버지의 자발적 수치가 아들을 살린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받아 준 것이 아니다. 잘 들으셔야 한다. 탕자가 회개했기 때문에 받아준 것이 아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분이 아버지다. 아들이 변해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동일한 마음으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아버지의 고통이며 기다림인 것이다. 집을 떠나기 전 아들에게 아버지는 하나의 방해물이었을 뿐 아들은 마치 고아처럼 살았다. 그러나 낮아진 마음으로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그때서야 비로서 아버지를 얻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잃어버린 아버지를 돌려주기 위해서 아버지는 이를 악 물고 아들을 떠나보냈고, 제물을 허비했다.

     

              (21절~24절)‘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둘째 아들은 마음속으로 회개한 것을 아버지에게 입으로 시인했다. 회개는 이렇게 언어가 달라지는 것이다. 다들 말로 해야 하나? 그렇습니다. 말로 해야 한다. 사랑이 차 있으면 말을 안 할 수 없다. 말을 절대로 안하는 사람은 아직 회개가 안 된 것이다. 회개는 옆사람들에게 감동과 은혜를 끼친다. 나혼자 회개는 없다. 집을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품꾼들 중 하나가 될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알게 된 것은 아무것도 자기를 아버지의 사랑에서 분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한 없는 사랑에서 비롯한 아버지의 용서로 그가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돌아온 탕자였어도 고용된 품꾼이 된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죄를 짓거나 안 짓거나 영원한 아들이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아낌없이 기쁘게 제물을 쓴다. 아버지는 아들이 고귀한 신분의 사람임을 공개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먼저 제일 좋은 옷을 입혀서 신분을 회복시켜주셨다. 정말 의에 옷을 입혀 주셨다. 주인으로써 갖는 권위를 상징하는 인장반지 가락지를 손에 끼우고 종이 아닌 집 주인으로서 자유로운 신분을 상징하는 신을 신겨준다. 특별한 날 잔치를 베풀때 매어놓았던 살 진 송아지를 잡은 것은 아버지에게 그만큼 특별한 날이었다는 것이다. 너는 그만큼 특별한 아이란다. 너는 함부로 살아서는 안되는 아이란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낭비처럼까지 보인다. 나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을 때 나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가족과 지체의 사랑은 바로 이와 같다. 내가 미처 고백하지 못하고 회개하는 마음만 먹어도 나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진정한 그 회개의 이르기를 간구하기 바란다.

     

    [적용질문]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온 탕자처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여러분은 돌아갈 곳을 생각하면 아버지 얼굴이 떠 오르십니까? 현재 아버지의 품 속에 안겨 있습니까?

     

     

               오늘 절마다 다 적용해야 하는 것인데 여러분이 너무 힘들까봐 그냥 알아서 적용을 골라매시기 바란다. 그런데 오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전혀 기뻐하지 않는 한 사람이 있으니 맏아들이었다.

     

               두번째는 집에 있는 탕자이다. 저는 오늘 집에 있는 탕자가 참 문제라는 생각을 하면서 여기에 초점을 더 맞춰서 설교를 준비했다.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둘째 아들의 표현에 의하면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이 많은데 동생보다 많이 받은 맏아들이 품꾼들과 같이 밖에 나가서 일했다니 너무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같다. 자기일을 스스로 열심히 하니 열심히 살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운 성격이었을 것이다. 또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도 많으니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들을 것도 없고 또 할것도 없고 손가락질 받을 일도 없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런 맏아들이 그 사람들하고 같이 나가서 일까지 하니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밭에서부터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귀를 울리는 풍요와 춤추는 소리에 맏아들은 의아해 한다.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아버지와 같이 살아도 아버지에게 직접 묻지 않는다. 뒤에 나오는 것을 보지만 맏아들은 아버지가 아니고 종이기 때문에 그만큼 아버지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종을 불러서 무슨 일인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물은 것도 미완료 시제여서 이해가 안되는데 계속적으로 지속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사람이다. 여러분들 성실한 사람들 중에  우리 교회가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것과 같은 뜻이다. 13년을 교회에 온 똑똑한 분이 지속적으로 이해가 안되서 지금도 목장에 안나가고 계신다. 그분이 S대 출신이다. 지속적으로 제 설교가 이해가 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간증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탕자의 간증이 나하고 상관이 없다. 찌질한 인간들이나 저러는 거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 사람이 변하여 새사람 된 것이 나하고 뭔 상관이야 이게 맏아들이다.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도리어 종이 작은 아들을 염려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더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맏아들은 종보다 아버지의 마음을 더 모르고 있다. 집안의 종보다 남보다 못한 가족이다. 여러분은 부모님과 배우자, 자녀가 어떤 일에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알고 있는가. 그것을 꼭 말을 해야 아느냐고 하면서 외면하지는 않았는가. 그러면서 나를 몰라준다고 원망하며 고독해하지 않습니까?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함께 즐거워할 것을 당연히 기대했는데 맏아들은 오히려 분노로 반응한다. 그는 아버지가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동생을 벌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분개한다. 게다가 그가 환대를 받고 그의 행동이 너그럽게 용서함 받았기 때문에 더욱 화를 낸다. 요즘 분노 장애를 갖고 계신분이 목장마다 계시던데 노가 쌓여 있으면 혈기가 충동적으로 나와서 가족관계를 비뚤어지게 한다. 한사람의 분노가 그렇게 심각하다. 맏아들, 둘째 아들 즉, 탕자와 모범생이 예수가 없으면 다 똑같이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차별없이 권해야 한다.

     

     

    [적용질문]

    큰 일이던, 작은 일이던 매사에 오해하고 분노하는 자녀와 배우자가 있습니까. 거기에 혈기로 대응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권하며 인내하는 사랑이 있는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여기서 아버지를 섬겼다고 할 때 '섬겼다'는 원어로 '둘리오'라고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종으로 섬겼다는 표현이다.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가 부자관계가 아니고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인식하고 그렇게 살아왔음을 드러낸다. 그렇게 그런식으로 여러해 섬기고는 겨우 바라는 것이 염소새끼 바랬다. 아버지가 그렇게 사랑했는데 사랑의 사랑으로 응답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사랑한다고 했는데 거기에 충성한다고 반응한 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저는 충성하겠습니다는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앞부분을 원어로 보면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를 룩~ 이런 것은 아버지 보고 '이봐요' 이런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부른 것이다. 아버지를 사람 같이 여기지도 않았다. 여러분이 나이가 들어서 부모님께 '이봐요'. '' 이러는 분이 있다면 호칭부터 바꾸셔야 한다.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호칭부터 바꾸서야 한다.

               둘째 아들이 9분의 1을 가지고 나갔으니까 이제 나머지 9분의 8이 자기것이 될거라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더 봉사를 하며 충성의 열을 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기쁨이 충만했는데 이제 자기 몫이 없어지게 생긴 것이다. 아버지를 존경한 것이 아니라 돈을 존경하고 눈치를 본 것이다. 아버지에게 잘 보여야 되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에 함께 즐기지도 못하는 정말 절벽같은 매력이 없는 사람이다. 정리하자면 맏아들은 열심으로, 종과 같이 아버지를 섬김으로 아버지의 호의를 살 수 있고 자식의 신분을 유지해 갈 수 있다고 오해한 것이다. 형제 누구 때문에 내가 손해를 봤다고, 내가 부모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못했다고 분해하는 것이 바로 이 맏아들과 마찬가지다. 내가 정말 사랑해서 했다는 그것 자체가 복이다. 그런데 복이 사랑없이 수고하고 칭찬과 물질에 보답을 바라는 것은 제일 하위개념이다. 생색내시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기쁨이 어디이겠습니까.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맞습니까 아버지한테 대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맏아들이 자기 동생을 내 동생이라고 안하고 오히려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이 ㄴ저 ㄴ 하는 것보다 나쁜 욕이다. 맏아들은 방탕했던 동생을 정죄하고 무시했고, 감싸주기 보다는 관계를 끊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맏아들이라고 창녀들과 놀고 방탕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맏아들은 둘째 아들에게는 없는 근면함과 성실함이 있었고, 따라가지 못하는 자기 수양과 명성이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의로운 교만으로 서운함과 분노 가운데 아버지는 없고 오직 자신을 몰라주는 불공평한 늙은이만 거기 있었다. 여러분 회개 전에 둘째 아들도 그랬디. 아버지는 죽었으면 좋겠다. 이 아버지는 너무 믿음이 있지만 둘째 아들, 첫째 아들이 전부다 불효자이다.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 얼마나 외로운 인생 길을 걸어갔겠습니까. 이 맏아들은 피해의식으로 스스로를 상처주며 나홀로 외로워하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마음속에 감춰진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맏아들은 자신과 동생을 비교한다. 둘째 아들은 맏아들 비교하며 나갔고, 맏아들은 뭔가가 둘째 아들한테 자기 한테 없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착한 아이 증후군에 관한 글을 하나 읽었다. 자존감이 낮은 착한아이 증후군에 속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말 잘듣고 순종적이며 자기 주장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다루기가 편하니까 착한 아이라고 하는 것 뿐이다. 성도 자녀와 목회자 자녀가 싸우면 목회자들은 무조건 자기 자녀에게 사과하라고 말한다. 이때 아무런 저항이나 반발없이 사과하는 아이를 착한 아이라고 한다. 그 아이가 왜 사과해야 하는지 생각 안한다. 너는 목사 아들이니까 무조건 사과해. 저도 그랬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을 봤다. 그러니까 자기 잘못하지 않았는데 무조건 우리 아버지가 목사니까 나는 사과해야돼 이런 것이 쌓이다 보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목사 자녀들이 정말 많은 시행 착오를 겪지 않는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마음속의 감춰진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진짜가 아니라 가짜,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으로 산다. 자기가 없는 삶이다. 구체적인 증상들이 다음과 같다. 남의 눈치만 살피고, 싫어 못하고, 겉과 속이 다른 가면을 쓰고, 참고 또 참고, 하고 싶은 일이 없고 스스로 결정을 못 내리고,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피해의식에 젖어 있다. 섬김을 받았기 때문에 유약하고 무기력하다. 늘 우울하다.

     

     

    [적용질문]

    여러분은 착한아이 컴플렉스입니까? 진짜 착한 사람입니까?

     

               정말 이것을 보니까 저는 돌탕이 아니라 집탕이다. 살아내기 위해서 착실하게 살아 낸 것 아닌가. 여러분들께 분노했다는 이야기가 앞의 돌아온 탕자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다. 그런데 집안의 탕자, 똑똑한 맏아들에게는 분노가 있었다. 그것이 더 나쁘다. 어쩌면 큰 아들 때문에 이 작은 아들을 떠나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맏아들은 너무나 회개를 모른다. 자기가 보기에 별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방탕하고 무책임한 동생이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용서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 용서를 해 줄 일도 없다. 그런데 큰 아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다.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은 자기 동생은 풍유와 춤추는 소리로 가득찬 아버지의 집안에 들어가 있지만 자기는 아직도 집 밖에 서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큰 아들이 모르는 비밀은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애초에 죄인이기에 죄 짓는 것이다. 그 작은 아들을 보니까 차라리 큰 아들도 허랑방탕과 돼지 우리를 거쳤다면, 이 회개의 길과 회개의 눈물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생기게 된다.

     

               (31~32)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방탕한 둘째 아들을 만나준 아버지는 지금 상한 감정과 불만으로 뒤틀린 맏아들에게도 찾아간다. 분이 나서 거칠어지는 맏아들에게 '얘' 하고 부드럽게 불렀다. 이 아들이 아니고 네 동생이다. 그리고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니. 아버지의 소유가 다 자식을 위한 것이로되 아버지는 그것보다는 함께 있는 아들인 너를 원한다. 아버지의 마음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품꾼도 많은데 네가 나가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동생 찾아오는 거였다. 배신한 동생이기 때문에 차마 찾아오라고 말을 못하지만 날마다 아버지가 나가서 기다리는데 그 일을 안하는 것, 제가 교회를 하면서 가장 기쁜 것도 여러분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 잃은 양 한 사람 찾아오는 이야기를 듣는것이 가장 기쁘다. 산으로 들로 다니는 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동생 찾아오는 것을 바랬을텐데. 왜 너는 나가서 일만 하냐 이 이야기가 안들리는 것이다. 밥을 누가 먹여줘요? 가만히 하늘만 쳐다보면 돈이 나와요? 이러는 것이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들, 딸 때문에 지금도 고통받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도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때문에 아파하신다. 그리고 하염없이 기다리신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다.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비유 가운데 보여주시는 이 죄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불교에서 죄인을 다루는 방법과의 대조를 보여주는 예를 들려주겠다. 우리는 탕자라고 하는데 여기는 방자라고 한다. 집을 떠나 오랜 세월 허랑방탕하다가 완전한 거지꼴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너무 흔한 처절한 고생의 연속이었기에 심지어 아버지의 모습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딱 알아봤다. 종들을 시켜서 저택으로 데리고 와서 깨끗하게 목욕을 시켰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이 아버지를 밝히지 않고 아들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그 아들이 점점 책임감이 있는 사려 깊은 도덕적인 사람으로 변해갔다. 아들의 변화에 만족한 아버지는 드디어 내가 네 아버지다 밝히고는 공식적으로 그 아들을 자기의 친아들이요 상속자로 받아들였다. 이것하고 탕자의 비유하고 비교되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여기서는 은혜라는 개념을 찾을 수 없다다. 그것이 행위로 인한 대표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고 맏아들이 좋아할 비유이다.

               우리가 살펴본 돌아온 탕자 비유의 궁극적인 주제는 탕자가 아니라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불성심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이 궁극적인 비밀은 아버지의 집이 있기에 우리가 모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죄인들의 관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원리를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제시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회개하기 전에 이미 죄인을 사랑하시며 바로 이와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들의 회개를 가능케 하신 것이다. 그가 회개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무조건 받아들였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 그 결과로 인한 자신의 오해, 그 결과 인한 동생에 대한 오해가 이제 막 맏아들의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를 상관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맏아들의 판단은 아버지의 판단을 동의할 수 없고, 맏아들의 감정은 아버지의 감정을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오해의 뿌리에는 은혜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거저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아버지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했던 맏아들은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탕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맏아들도 당신의 넓고도 푸근한 가슴속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맏아들에 대한 것은 우리에게 공이 넘어갔다. 성경에서는 맏아들은 구원받았다는 소리가 없는 것이다. 저는 오늘 이 본문에서 맏아들에 대한 애통함이 있는 것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그 한 영혼, 한 드라크마, 탕자가 아니라 99무리의 영혼, 99드라크마, 집에 있는 탕자가 진짜 중요하고 이 사람들이 유대인이고 바리새인이고 서기관들이라는 것이다. 잘나서 말씀이 안들린다는 것이다. 오늘 정말 집에 있는 탕자가 훨씬 힘든 죄인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디.

               집에 있는 탕자, 돌아온 탕자의 모습을 다 가지고 있는 목자님의 나눔을 들려드리겠다. 이분은 제가 소개시킨 적이 있는데 학력고사 수석을 했다고 했는데 나눔에 보니까 공부를 잘해서 매스컴을 탄 적은 있었지만 수석은 아니었답니다. 공부 잘해서 샤프심 광고에 나온적은 있다고 한다. 행정고시 최연소 합격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일반행정이 있고, 교육행정이 있고, 입법 행정이 있는데 본인은 재경부처에서만 최연소 합격만 했다고 바로 잡았다. 이것 커밍아웃 하느라 힘드셨을 것 같다. 당연히 서울대학을 갔고 대단한 사람의 나눔이다. 아버지가 삼십년 동안 중소기업을 해 오셨기 때문에 재산이 있으신데 아들에 대해서는 인색하셔서 어렸을때부터 도움을 안 주셨다고 한다. 아들인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울때 감옥을 가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어렬적부터 나에게 거짓말쟁이와 엉터리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여동생은 편애를 그렇게 하셨다. 어릴적엔 한글도 못 읽는데 발표하라고 해서 울었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저를 특수학교에 보내라고 했고 컨닝하고 물건 훔치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았다. 아버지가 저에게 하신 말 중에는 거짓말쟁이와 엉터리라는 말이 압도적이었다. 여동생이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가고 의사로서 장학금도 받았는데 나도 내가 못한다는 생각을 안했는데 항상 나한테는 엉터리고 운이 좋았다고 했다. 서울대를 가든 고시를 붙든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든 엉터리라는 말을 계속 들으면서 살았는데 드디어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벤처 회사를 차려서 망했다. 40억 빚을 졌다. 갚기 위해서 지하에서 라벨을 붙이면서 스타킹에 나갈 정도로 숙련된 라벨을 잘 붙였다. 지하에서 십몇 년동안 붙였다.. 1인 경영이라고 책도 내셨다. 빚 독촉을 매일 수심통을 받으면서 지하 사무실 배수관에 끈을 묶어 놓고 몇 번이나 목을 매려고 했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결혼을 해도 식은땀이 났고 행정고시 합격을 했는데 너는 떨어졌어야 했는데 이 시험이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던 동생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었는데 동생 앞에서 아버지는 술에 취해 네가 죽었어야 했는데 하셨다. 하나님을 믿어도 아버지한테 인정을 받고 싶은 피해의식이 있다 보니까 아내의 말투에서 아버지의 말투를 볼때 아내는 피해 의식이 없기 때문에 아내 밑에서 광분을 한다고 지금도 목자인데 피터지게 싸우느라고 목자 모임을 몇 주 못나왔다고 나눔을 했다. 제 마음에 이런 불효가 있다보니 아버지의 구원보다는 돌아가시면 진 빚도 갚고 고생 끝 행복 시작이겠다 싶었다요. 아버지가 힘들게 말씀하시기를 절대 부조받지 말고 장례를 검소하게 하라고 그러나 나는 그동안 부조한 것이 얼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 양반은 내가 어떻게해도 구원을 못 받을 거라는 믿음이 굳세게 생겼다. 목사님이 사부님을 위해 기도했을때 구원을 위해 망하기를 기도하셨다고 했는데 나는 그런 기도가 안나오고 온전히 재산이 남아 있기만을 기도했다고 한다. 지금은 빚이 거의 해결이 되었다고 재산도 증식이 되었다고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감사를 해야 하는데 나의 능력으로 벗어나고 열심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십 몇 년 동안 빚갚는 과정을 보시고 너처럼 운 좋은 놈은 처음 봤다고 그러셨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생각하면 욱 하고 올라오고 오늘 돌아가셔도 놀랍지가 않고 일년 뒤에 돌아가셔도 하나도 놀라지 않을거라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돌아가시면 누구를 만나도 어떤 경우에도 영적 자존감, 자신감이 평생에 회복이 안될 것 같다고 한다. 모든 것 갖춘 이 집사님은 믿지도 않는 부모님과 죽은 동생에 대해서까지도 아직도 비교를 하고 피해의식이 있다. 참으로 돌아온 탕자이기도 하고 집에 있는 탕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분 정말 고난과 모든 것으로 돌아온 탕자이기도 했는데 여전히 잘나서 집에 있는 탕자의 이런 모습이 있다. 참으로 이 아버지 훌륭하지 않아요? 이분 단칸 방에서 십몇년을 사는데 그 아버지가 진짜 돈 있으면서 안도와줬다. 이것이 이 아들을 살려냈다고 생각한다. 돈 줬으면 40억을 갚았겠습니까? 라벨 붙이면서. 그 똑똑한 사람이 지하에서 빚을 지금 갚았다는 것 아닙니까. 그 아버지는 예수도 없이 이러는데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낮아지지를 못하는지. 그러나 그 아버지도 집에 있는 탕자가 되서 믿기는 하늘의 별 따기인것 같아요. 정말 그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적용질문]

    여러분은 아버지를 잊고 지내는 중입니까? 아버지를 떠올리며 생각하는 중입니까? 아버지께 돌아오며 회복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돌아온 탕자입니까? 집에 있는 탕자입니까? 둘증의 누구를 고르시겠습니까?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