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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무엘하 3장 21절~39절 - 내가 오늘 약하여서
    주일설교 요약 2022. 5. 17. 11:04

    본문: 사무엘하 321~39절 (2016년 11월 20일)

    제목: 내가 오늘 약하여서

    설교자: 김양재 목사

     

         요즘 시국을 보면서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본문이라고 생각해서 다시 하려고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오직 믿음만을 지키려고 신대륙으로 건너갔던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의 대선이 얼마 전에 끝났다.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고 백인 우월주의를 부르짖는 트럼프가 되었고, 트럼프 반대 시위가 한창이다. 정치란 무엇일까요. 이 사무엘하 31절에 보면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가고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여 간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점점 강하게 되는데도 다윗의 치명적인 약점은 고쳐지지 않았다. 사울이 쫓아다닐 때는 그의 음란이 활동을 못 했는데 사울이 죽고 결정적인 적이 없어지니 전쟁을 하면서도 여자를 계속 취한 본문이 오늘 이 본문 직전에 나온다. 다윗의 극복할 수 없는 약점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여전한 약점으로 공개되더니 오늘은 약함으로 이어집니다. 다윗은 무엇이든지 훌륭하고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약한 모습을 계속 보여주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한 이유다. 다윗이 내가 오늘 약하여서 여러 가지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내가 약하여서 기회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다윗의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니 원수가 스스로 분열해서 나라를 가져왔다. 할 말이 없는 인생이지만 다윗이 인내했기 때문이다. 전쟁은 무엇이나 어디서나 힘든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것이 전쟁이다. 기본전투에서 다윗 쪽에서 승리했음에도 끈질기게 다윗을 괴롭혔다.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이제 승리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악한 이웃, 불우한 이웃을 선으로 이기려면 인내가 요구된다. 언약 신앙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더 큰 인내가 요구된다. 성도들에게 사단의 끈질긴 공격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야고보서 14절에 말씀하고 있다. 온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 되고자 사울 쪽의 군대 장관 아브넬은 치밀하고 계획 짜고 다윗에게 사자를 보내고 이스라엘 장로들을 규합하여 다 동의를 구했다. 9절부터 12절까지 보면 아브넬이 얼마나 기회주의자인지 알게 된다. 지금까지 다윗을 대적했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는 것처럼 다윗을 높이고 있다. 아브넬은 다윗이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알고 있어요. 그것은 사울도 알고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사울이 죽은 것은 자기 삶의 결론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에 사울은 인본주의의 심볼로서 죽기까지 도움이 안되는 기회주의 간신 아브넬을 끼고 돌았다. 분별이 안 되니 신접한 여인들을 찾아가고 선지자 사무엘도 찾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아첨만 하는 아브넬을 평생 끼고 돌았다. 저는 어떻게 2년 전에 이런 설교를 했는지.. 사울은 정말 사람 분별이 안 되었다. 죽을 때까지 아브넬을 믿고 죽었다. 그러나 사울이 죽은 후의 아브넬은 나라를 다윗에게 넘겨주었다. 사울 쪽에서 보면 가장 큰 배신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울이 자신의 왕권을 위해서 피 흘리는 전쟁을 했지만 믿으면 안 되는 사람을 죽을 때까지 믿고 죽을 수도 있다. 아브넬은 사울에게 충성을 다한 것 같지만 사랑 없이 충성했을 때 나도 남도 죽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충신이 아니었다. 사울의 충신이었다면 어떻게 사울의 첩을 범하겠습니까? 무능하고 힘이 없다고 어떻게 그의 아들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지식을 행하는 것이 지혜라고 했는데 사울과 아브넬은 왕과 신하로서의 서로를 배려하는 지식은 있었다. 그러나 지식은 있는데 돌이키는 행함이 없는 것은 지혜가 없는 것이다. 과거 최태민은 2주에 한 번씩 예배하면서 박대통령은 크게 될 사람이라고 날마다 왕과 신하로서의 서로를 배려하는 지식은 있었지만 백성을 향한 사랑으로 돌이키는 행함은 없었기에 지도자로서의 지혜는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이 가득해도 자기 죄를 못보는 진짜 인생이 무엇인지 사울과 아브넬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유익과 자리를 위해 뜻을 정한 것이기 때문에 다윗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아브넬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윗에게는 약함이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기회주의로 볼 수 있다. 만약에 반대편 장수인 아브넬의 뜻을 받으려면 사울의 딸인 자기 부인 미갈을 몰래 데려오라고 하면 안 된다. 이스라엘의 왕인 이스보샛이 사울의 아들이니 이스보샛에게 의논하고 설득해서 공개적으로 이 일을 진행해야 한다고 조언을 해야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편을 안 드셨겠습니까? 안드셨다고해도 상관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무서운 사울이 죽었기 때문에 이제 그 다음서부터 치명적인 약점인 여자를 계속 들이다보니 당연히 약함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무엇을 할 때 뜻을 정하기가 어렵다. 정말 이것이 거짓인가 진실인가, 상대방에게 유익인가, 이것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인지 상처주는 것은 아닌지 항상 끊임없이 생각해서 뜻을 정해야 하는데 그것을 Think한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아브넬이 문제가 아니라 잘 믿는내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아브넬의 기회주의를 다윗도 결국 기회주의가 되어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상대방으로 인해서 할 수 없어서 그랬다고 넘어가려는 마음이 너무 많다. 물론 다윗에게는 이 일이 자신이 할 일을 아브넬이 완벽하게 해 준 것이다. 그래서 합력해서 선을 이뤘다. 피 한방울 안 묻히고 나라를 얻었다. 그렇다고 다윗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내가 아브넬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런 적용으로 나가야 한다. 정말 아브넬은 나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이 본문을 설명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었다. 내가 얼마나 아브넬인가. 저는 진실한 것처럼 4대째 모태신앙이니까 항상 진실해야 되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척 하면서 얼마나 나의 유익을 구했는지 생각해보게 했어요. 아브넬은 이 세상으로 말하면 성공이 목적인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굉장한 성공한 각료의 거기에 내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는 잘 참는 편이라서 화내는 사람보다 저의 유익을 구하기가 참 쉬웠던 것 같다.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잘 참으니까 내가 인내하고 뜻을 잘 정한 줄 알았는데 세월이 지나고 말씀을 볼수록 별 인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 환경에서 내가 살아야 하니까 참을 수 밖에 없으니까 참았던 것이다. 지금보면 너는 왜 못참니 그렇게 말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내가 참았으니까 남들보고 식구들보고 너는 왜 못참니 이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하니까 제 옆의 사람들이 저를 힘들어했다. 내가 얼마나 기회주의자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아브넬처럼 기회주의자가 되어 가난한데 여기까지 왔구나. 내가 얼마나 처신을 잘했으면, 선생님을 잘 봐줘서 예고 강사도 돈도 없이 되었는가. 요즘 정유라를 보면 하나님 백이 최고 아니겠어요? 엄마 빽이 얼마 못가서 삼천포로 빠졌어요. 하나님 빽이라기보다 믿음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내가 처신을 잘했기에 가능했던 거라 생각한다. 여러분 중에 처신을 잘하지 않고 싶은 사람이 어디이겠습니까. 저는 믿음도 없는데 어떻게 학착시절을 잘 보냈는지 잘 모르겠다. 나의 도덕과 윤리는 남이 보는대서는 무조건 너무나 훌륭하고, 또 장학금을 받아야 하니까 저는 그것의 저의 절박한 문제니까, 심지어는 컨닝을 한적도 있다고 했다. 실기시험때 모두 앞에서 피아노 연습 안했다고 하고, 공부 하나도 안했다고 하면서 거짓말인지도 모르고 거짓말을 일삼았다는 생각이 들고, 공부를 잘하려면 얼마나 이기적이어야 했는지 뒤돌아보게 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부유한 우리 아들은 공부를 안했으면 안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하고도 안했다고 하니 굉장한 차이가 있더라고요. 아브넬 같은 면이 저에게 있었구나를 깨달았다. 정말 큐티하면서 생각지 못한 것을 깨닫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벌고 생활비까지 대야 하니까 인생이 항상 절박했어요. 아플수도 없고 죽을수도 없다는 말을 했잖아요. 이번에도 큰 수술을 하고 3주되었는데 정말 3주동안 아플수도 죽을수도 없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는거에요. 여러분들때문에요. 아픈데도 영상 기도제목을 보내고 음성으로 보내고요. 내 옆에는 부자도 너무 부자인 친구들이 항상 있었어요. 지나고 나서 보면 부자 친구들을 보면서 제 속에서 제 비굴함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니 살아남아서 내가 그렇게 못될 것이 어디 있겠냐며 나의 쌓아논 간판으로 부자인 신랑에게 시집을 갔다. 아브넬이 이스보샛 왕 보다는 다윗왕을 택해야 되겠다는 뜻을 정한 것처럼 제가 이 두 왕중에 학교에 남는것보다 다윗처럼 믿음이 있는 장로님댁 그것도 부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훨씬 유익이라는 생각을 했다. 말씀으로 인도함 받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물론 저도 결혼을 해서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셋팅입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좋아서 행한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 다윗처럼 너무 약해서 한 결정들인데 하나님이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성공지향적으로 나갔던 아브넬은 죽이셨는데 저는 죽이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하셨구나 생각하니 정말 은혜가 아니면 이렇게 설 수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되었다.

     

    적용질문

    여러분의 기회주의는 어디까지인가, 여러분의 욕심이 기회주의에 넘어가는 것을 인정하는가.

     

         두 번째, 다윗이 약해서 심복의 배반을 처리하지 못했다.

         2223절에는 요압이 전쟁을 이기고 돌아와서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고 평안히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아브넬이 평안히가 아니라 평안히 갔고, 지금 죽으러 가는 아브넬이 평안히 갈 수 없는데 평안히 갔다고 자꾸 강조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던 암시였다. 그러나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의 편에서 보면 평안히 갔지만 그리고 다윗과의 회담은 성사되었지만, 다윗이 평안을 보장하지 못했다. 아브넬의 평안은 일시적인 평안이다. 다윗이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아브넬의 평안을 보장하고 하나님의 가치관이 그 속에 들어갔을 때 평안한 것이지 다윗이 그 평안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평안히 갔지만 아브넬은 죽게 된다. 누군가 나의 앞날을 보장해 줄 것 같지만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나님이 보장을 해 주신다. 그런데 거기서 요압의 심복이 아브넬이 왔는데요 평안히 갔어요. 이러면서 요압과 다윗을 이간질하는 발언을 한다. 자기의 원수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 평안히 갔다고 하는 것은 요압에게는 가장 뒤집어질 말인 것이다. 통일 왕국이 눈앞에 왔는데. 부하는 상대방에게 하나도 욕하는 것 같지 않게 하지만 아브넬이 평안히 갔어요 하면서 들으면 뒤집어질 그것을 알면서 말하는 여러분의 속셈이 또 얼마나 많겠어요. 하나도 욕하는 것 같지 않게 평안히 갔어요. 상대방에게는 너무 뒤집어질 말이에요. 보니까 제가 나도 그랬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항상 교양있게 이야기하면서 제가 뒤집어질 이야기를 많이 한다. 제 전공이에요. 나는 뭐든지 잘 참으니까. 이것을 보니까 또 제 이야기 같다. 2425절 보니까.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어찌 그를 잘 보내냐고 한다. 요압은 아브넬이 화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왕을 속이러 왔다고 따진다. 이럴 때 다윗은 자기 심복 요압의 말을 들어야겠는가 원수인 아브넬의 말을 들어야하겠는가. 리더를 하려면 무엇인가 결정을 해야하니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 한다. 어제까지 아브넬이 원수였지만 지금은 아브넬을 믿어서가 아니라 다윗은 아브넬이 또 배반할 것을 알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나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아브넬이 약속을 지켜서 자기 부인 미갈을 데려왔고 이십명을 데려왔기에 이 때는 아브넬을 믿어야하는 거에요. 그런데 요압이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항상 요압은 아브넬은 나쁜 놈인거에요. 다윗같이 열다섯 광야를 지나도 구속사가 안 깨달아지니까 날마다 나쁜 놈은 나쁜 놈이고 좋은 사람은 항상 좋은 사람이다. 같이 이렇게 혈전을 거치면서 구속사를 지나왔어도 아브넬은 사울의 군대장관이니까 나쁜 놈인거에요. 나쁜 사람도 오늘 달라질 수 있어요. 아브넬과 다윗은 원수였지만 이때는 영적교류가 이루어질 때였다. 다윗은 요압이 따질 때 왜그러냐고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요압이 너무 무서운 사람이다. 왜 전혀 못알아들으니까. 15년동안 너무 자기를 위해 일을 해 주었기 때문에 한마디도 말을 못하고 있다.

    26-27절에 다윗과 친척인 요압은 원한이 많고 작은 일에 집착 한 사람이어서 왕에게 가서 따지고 아브넬을 자기 동생을 죽인 그대로 배로 찔러 죽였다. 나라를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동생 아사헬을 위해 한 것이다. 이렇게 원한이 가득 찬 사람이 몇십 년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앉아 있는 거에요. 그래서 요압의 식구들 형제들이 한결같이 열심당원으로 다윗왕국에 올 때 너무 도움을 주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을 하고 있다. 예수를 믿을 때 인간론에 대해서 이렇게 배워야 한다. 창립공신이라고 해서 언제든지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창립공신이 다윗을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이렇게 원한이 가득찬 사람이 너무나도 심복으로 일을 잘하는거에요. 참 어려운 문제이다. 악역을 믿음 때문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야망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악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에서도 오직 야망을 위해서 직분 때문에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정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귀가 막힌 것은 요압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이 가야 할 사람이 있는 것이다. 원한을 잘못 샀다가 나라를 망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래서 아브넬이 이 한사람 때문에 너무나도 개죽음을 당했습니다. 일이 안 되려면 그렇게 안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아브넬이 좀 빨리 갔으면 했는데 다윗은 미리 보냈는데 1분 사이에 일이 일어났어요. 세월호도 그때 배를 틀지만 않았다면, 탈출하라고 명령만 했어도. 1분에 모든 것이 결정 나는 것들이 우연 같지만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부르고 기도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에요. 제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날 오전 집회를 가던날 점심 먹고 운전하고 오는데 제가 삼풍백화점에 뭔가 바꿀일이 있었어요. 거기가 가기 어려우니까 오늘 오다가 바꿔야지 계획을 세우고 그쪽을 길을 접어 들어 갔는데 무의식적으로 안 가는 길이니까 지나쳤어요. 직진해야 하는데 우회전으로 온 거에요. 유턴해서 돌아가야 되겠다 했는데 하나도 바쁜 일이 없는데 그냥 집으로 왔어요. 생각은 유턴으로 가야 되겠다, 아무 일도 없는데 가야 되겠다 했는데 왔더니 우리 집이에요. 집에 오자마자 삼풍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리는거에요. 그날 일이 너무 생생한겁니다. 사명이 아직 남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제 발검을 주님께서 지켜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생이에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마지막에 하나님을 부르고 갔을 거니까 저는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믿고 기도하는 사람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제가 안죽어서 간증이 아니에요. 그런 일도 저한테 있었다는 거에요. 믿으면 만사형통이니 병도 안걸리면 좋겠지만 열심히 목회했는데 암이 걸렸어요. 하나님은 저의 죄를 물으시는 것이 있다고 수요일에 죄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 중의 한명이 암이라는데 암환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제가 암을 모르니까 한번 체휼해 보라고 암을 주셨다고 생각이 든다. 암이 권세로 쓰여 제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이길 원합니다. 그런데 홈피에 보니까 세계적인 암박사가 한국사람과 미국사람의 암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고 한다. 31년 동안 암환자를 대하면서도 미국인 환자나 가족이 우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 대화를 나누다가 울음이 복받혀서 대화를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래요. 미국인은 기본적으로 삶과 죽음은 하나님이 결정한다고 믿는 다는 거에요. 그사람들이 믿음이 없어도요. 그리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집중한다는 거에요.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한답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회사에 출근 한 대요. 심지어 죽기전날까지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거에요. 그러면 암에 대해서걱정하는 시간이 훨씬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인 암환자들은 항암치료 하면서 구역질 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그렇게 구역질 한 대요. 이것이 믿음의 문제일까요 체력의 문제일까요. 한국인은요 암에 걸리면 일단 직장부터 그만두고 산으로 들로, 하루 종일 암과 죽음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한대요. 그건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해요. 걱정을 해서 인지 구역질은 한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제 본교의 일을 하라고 하니까 저도 다음주에 컨디션이 허락되면 우리들교회가 주관하는 아프라키 선교대회에 갔다와서 항암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들교회 전체가 서포트하고 선교사 400명 넘게 오시고 주일학교 아이들도 오고, 청소년, 유년 주일학교 등 우리들 교회가 모두 주관하는데 제가 기가막힌거에요. 1년을 넘게 준비해왔는데 오직 목회자 세미나하고 아프리카 선교대회 때문에 암 선고 받는데 이것 갈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제가 지난 주까지 가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김의신 박사가 일을 하라잖아요. 이건 노동이 아니고 기쁨으로 하면 안식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컨디션이 회복되어 가는 것 같아 갈수도 있겠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기관지 수술 23일 하고도 바로 끝나고 도저히 못할 것 같았던 목회자 세미나를 해서 암수술 할 때 하나님이 많이 도우셨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목회자 세미나도 신들린 듯이 하루에 9시간씩 강의를 소화하고 수술했거든요. 성령이 수술해 주시는 것이 있죠. 그래서 정말 이것이 노동이 아니고, 돈 주고 하라면 하겠습니까? 사명이니까 하는 거죠. 묻고 하나님의 시간이라 생각해요. 제가 기뻐서 면역이 막 올라가면 항암도 잘 받지 않을까요. 아브넬이 죽은것도 하나님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의 사건과 시간을 지켜주시기를 늘 기도하는 것이다. 남편 구원을 위해 내 생명을 내 놓았는데 내 남편을 구원시켜 주시고 나를 이땅에 남겨주셨으니 내가 날마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겸손하게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지금부터 모든 식구들을 주님께 인도하셔서 우리 아이들도 하나님의 시간을 알고 기도하는 인생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주님께 인도해야 한다. 가장 좋은 선물은 예수그리스도를 알려주고 하나님께 맡기고 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주께 인도하고자 오늘도 안식으로 나왔다. 오늘 추수감사줄일에 정말 한사람이라도 구원시키고자 나왔다. 정말 오늘 구원 다 받으셔야 한다.

    2829절에 다윗은 즉시 이 문제에서 요압을 저주했어요 이건 공평한 결정이었다. 다윗의 부하로 있던 요압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아브넬도 하나님이 처리해 주실 것을 믿었어야 했는데 그것을 못 믿고 자기가 원수를 처리했기 때문에 그 저주가 자녀에게 간다는 것을 근거가 있는 말이다. 내가 원수를 갚으면 우리 자녀에게 그대로 내려간다. 내가 원수 갚으면 나의 모든 사연, 바람에서 바람으로, 술에서 술로 내려가는 것이 끊어지지 않고 내려간다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느 저주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 피로 새사람이 된다는 것도 맞다. 그래서 그 사연과 저주가 다 끊어지기를 축원한다. 아브넬은 워낙 무식하고 자기 죄를 못보기 때문에 원한을 많이 샀기 때문에 요압에게 죽은 것이기에 이 모든 것이 아브넬의 결론이다. 그런데 다윗의 부하로 있던 요압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떻게 그렇게 원수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그러나 다윗이 요압을 이렇게 저주 했는데 미리 요압이 물어보았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아브넬을 죽인 다음에 이렇게 저주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약함이라는 것이에요. 다윗은 그냥 요압이 무서워요. 요압을 편하게 대할 수 없었다. 아브넬도 죽은 마당에 요압까지 없으면 통일 왕국이 되지 않는 거에요.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맨 처음 믿을 때는 하나님 나라와 인간 나라가 분별이 안된다. 교회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인간 나라와 똑같다. 다윗도 통일 왕국을 세울 때 아브넬의 힘을 의지하고 요압의 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지금 요압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요압이 야망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식구들을 못 보고 내 동생을 누가 죽였냐고 사사로운 원한을 갚은 것이고 아브넬을 보니까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솜씨가 날렵하고, 다윗과의 화해를 청한 그 노련함을 봤을 때 통일왕국의 군사령관은 아브넬이 될 것이라는 권력욕 때문에,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아브넬을 죽인 것이다. 나라와 다윗왕을 생각해서 한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힘든 것이 자녀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사소하게 보이는 자녀 우상에서부터 사건이 터진다. 이혼은 도시락 싸들고 막아야 하는데 가정을 깬 것도 지도자로서는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무서운 요압은 오랜 시간 다윗에게 한마디도 대들지 않고 다윗을 절대 따르다가 자기 자리가 위협을 받으니까 요압이 달라졌다. 권세가 있고 자리가 있을 때 이렇게 달라진다. 몇 십년을 모를 수가 있다. 왜냐하면 내 자리라는 목적이 있기때문에, 목적이 있을 때는 무조건 참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분별하기가 너무 어렵다. 요압이 결정적으로 다윗의 부하로서 구속사가 안깨달아지는 것, 다윗의 원수 아브넬이 죽었다고 요압이 슬퍼하겠습니까? 원수를 용서하라는 것도 이해가 안되고 또 그러니까 이런 요압이 다윗의 심복이니 다윗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아이러니칼한 일은 다윗의 결정적인 원수를 요압이라는 제갈공명이 다 무찔러 줬어요. 아브넬이 그렇고 우리야가 그렇고 압살롬이 반역할 때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을 때 요압이 자기의 야망으로 원수를 차단한것인데 다윗이 점점 요압에게 약점을 잡히니까 점점 더 무서워져서 함부로 못하고, 배신을 막지도 못하고 배신 후에 죽이지도 못했다. 그러나 말씀에 의거한 저주를 했다. 30절에도 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요압 뿐 아니라 아비새도 관련되어 요압의 형제들이 전부 공모해서 죽인거다. 다윗과 고난을 같이 겪었는데 인간의 이해는 어디까지여야 합니까. 요압은요 다윗이 이해가 안되요, 심복인데도 이해가 안되요. 왜 다윗이 자기에게 경배하고 원수 사울의 왕관을 가지고 온 아말렉 소년을 죽이는지 이해안되요. 원수 아브넬을 죽인 부하 요압을 왜 저주하는지 이해가 안되고, 기름부은자 사울을 슬퍼하면서 아브넬을 위해 애가까지 짓는 것이 구속사인데 이 모든 것이 요압은 이해가 하나도 안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똑똑한 사람은 제 설교가 이해가 안되는거에요. 그런데 무서운 것은 다윗의 의중을 꿰뚫어 보고 있는거에요.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거에요. 이 앞에 긴장 할 수 밖에 없는 사람과 끝까지 같이 갈 수 밖에 없어요. 내가 할 수 없는 인간관계에서 다윗의 지경이 넓어지듯이 인간관계가 힘든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여러분은 요압이고 아브넬이구나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 시험이 어렵기 때문에 76개월을 기다리게 하시고, 사울과 아말렉과 시험을 치르게 하신다. 부부간의 부모자식간에 구속사가 안깨달아지는 사람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다. 돈 있고 먹을 것 있고 잘 해주니까 하나가 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바람피고 돈 없고 명예 떨어지고 그때 진짜가 하나가 되는지 그때 시험해 봐야 한다. 바람 핀다고 죽네 사네 이러는데 하나가 되겟습니까. 바람 펴서 예수 믿은 집이 한두집이 아니에요. 이런 모든 것을 해봐서 진짜인가 가짜인가 가려봐야 한다. 우리는 바람도 안피고 돈도 잘벌고 하나게 되는데 이는 구속사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심복으로 몇십년을 있었어도 깨달아지지 않는다. 나를 반대하는 자 중에 나를 돕는자가 있고 나를 돕는 자 중에 나를 해치는 자가 있다.

     

    적용 질문

    가장 가까운 사람이 뒷통수를 치는 배신을 겪어본 적이 있는가.

    같이 갈 수도 안 갈수도 엇는 사람이 내 옆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 번째, 오늘 내가 약하여서 너무 어렵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은 다윗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화홰를 하러 간 아브넬을 죽였으니까요. 다윗을 보고 믿겠습니까. 우리도 아브넬처럼 죽일 거야. 사울은 이스라엘이고 다윗은 유다입니다. 다윗 최고의 위기가 왔어요. 그러나 다윗은 위기때 강해요. 그 기름부은 자를 위하여 여전한 방식으로 애가를 부르고 슬프 하면서 사울 왕가의 아브넬을 위해 애가를 불렀어요. 다윗에게 위기가 왔지만 상여를 따라가고 장사를 해 주고 요압을 말로 저주하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소리높여 울고 옷을 찢으라고 하며 금식하고 내가 음식을 먹으면 벌 위에 벌을 내릴 것이라며 본을 보였어요. 자기의 왕권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 때문이다. 자신이 통제하지 못한 요압과 아비새를 아브넬이 와서 견제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의 객관적인 상태를 보고 사람들에게 하소연하지 않고 하나님 내가 오늘 너무 약하여서 이일이 너무 어렵습니다. 저는 이것이 다윗의 강함이라고 본다. 요압 같은 인본주의 세력이 다윗을 끝까지 방해를 한다. 약점은 계속해서 드러나고 약하여서 기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배반을 막지도 못하고 처리하지도 못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상관이 없다 내가 그를 죽였냐 그러면 안된다. 아브넬과 요압은 자기의 자리 때문이었지만 다윗은 하나님 나라 때문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눈 앞에 왔는데 멀리 간 것 같아서 자기를 이렇게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울고 기도하게 해 준 사울이 감사하고 아브넬이 자기 나라를 가져오겠다고 하니까 너무 감사해서 구속사를 이루게 해 준 그 사람들이 감사해서 웁니다. 이것이 되면 하나님 만난 사람이다. 끝까지 기름 부운 사울왕가를 위하여 계속되는 시험을 치르고 있는 다윗을 본다. 내 속에 기름 부운 자를 끝까지 대접하라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고 관계 질서를 지키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라는 것이다. 끝까지 사울을 기뻐하고 용서하는 것이 기름 부운 자를 죽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심복이 일을 그르쳤다. 이 나라는 하나님 나라지 세상 나라가 아닌데 목장도 세상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라구요. 구원 때문에 내가 일을 행하는데 어떤 사람이 세상 방법으로 그르치며 얼마나 애통한지 몰라요. 그래서 애가를 같이 부르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럴 때 이런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바로 이것이 예배가 회복되는 것이다. 오늘도 슬픈 기도 제목 가지고 오셨을텐데 이렇게 힘들 때 교회 와서 찬양하고 말씀 보고 기도해야 한다고 제가 가르쳐드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진심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부하가 잘못했어도 책임은 전적으로 다윗이 져야 한다. 제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도 교회를 위해서 눌린다고 했어요. 모든 것의 책임은 저에게 돌아오니까. 제가 모른다고 말할 수 없는 거에요. 사도바울이 교회를 위해서 눌린다고 한 말이 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굶고 배고프고 주리고 매맞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교회를 향해서 눌린다고. 제가 교회를 위해서, 여러분들 기도 제목 때문에 눌리는 것이 많다. 여러분들의 아픈 기도제목 때문에 제가 성경 말씀 보면서 얼마나 회개하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늘 드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제게 영혼을 보내주셨으니까 제가 책임자 아니겠습니까. 교만한 사람들은 절대 이것 못합니다. 즉시 끓어 엎드려 옷을 찢고 금식하고 요압을 저주하고 야단칠 사람 야단치고 내가 할 것을 행하는 것아 안되고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나는 책임없다는 말만 하게 된다. 아브넬처럼 높은 자리에 있다 보니까 절대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드디어 이제 다윗의 진심을 알고 백성들이 와서 그래서 다윗 보고 밥은 먹어야 하지 않냐하니 내가 밥을 먹으면 내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다 하니 드디어 온 백성이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해도 기뻐하게 되었다고 드디어 백성들을 설득해 낸 것이다. 항상 목장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도 설득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설득해 내야 한다. 그런데 39절이 오늘의 결론이다. 1절에는 점점 강하여 갔다고 하는데 마지막절에는 다윗은 오늘 내가 약하여서 내가 너무 어렸다고 고백한다. 같이 갈수도 제거할 수도 없는 이런 문제가 다윗에게 있었다는 것을 보면서 수레아의 아들과 친했던 이유는 수레아는 훗날 자신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내의 이복 누이고 그녀의 아들들은 다윗의 조카가 되었는데 다윗의 형들이 무시하였고, 계모의 아들들과 나이가 비슷하니까 그때 설움 받는 사람들끼리 하나가 되어 친해졌는데 수레아의 아들들은 상처가 해결되지 않아 서로 하나가 딱 되었지만 자기도 남도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된다. 힘든 처지끼리 모여서 어려서부터 서로 도왔는데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 되었다. 다윗보다 더 오래 살면서 다윗을 괴롭혔어요. 다윗보다 요압이 더 오래살았어요. 다윗은 사울을 하나님이 처리해주시길 바랬지만 요압도 처리해 주시기를 바랬어요. 그러니까 이 고백처럼 오늘 내가 약합니다. 오늘 내가 너무 약하여서.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믿는 사람은 오늘이 항상 어렵고 오늘 그렇게 항상 약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려니, 거룩하게 살려니 오늘이 항상 어렵습니다. 기도 제목만 들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다윗은 요압과 아비새를 통제하지 못하고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아주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보고 이제 어렵다고 간구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공정함을 알았다. 그래서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요압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십시오. 구속사가 안 들리니까 요압은 다윗이 자신의 집에 나병환자 끊이지 아니할 거라 하면서 자기에게 저주했는데 요압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도 안보이니까 자기 자리가 보장된다면 말로하는 저주는 저주로 여기지도 않는다. 수업이 예배를 와도 성경으로 하는 저주가 나에게 하나도 저주로 들리지 않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무서운 저주인데. 요압은 인간적으로 다윗과 정치를 해야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거야 라며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다. 다윗은 끝까지 평생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요압과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약점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요. 그러니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데도 이런 기가 막힌 일들이 많은데 이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예수를 믿는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할 수 없는 인간관계가 있기 때문에 다윗의 지경이 넓어져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교인들은 끊임없이 의심을 한다. 가짜인가 진짜인가. 그런데 다윗의 진실한 적용 때문에 백성이 기뻐하게 되었다. 교회는 할 일 없는 사람이 오지 않는다. 한번 발걸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발걸음인데. 우리 교회가 날마다 새가족이 오니까 한주일만 되어도 한가족이 되어 금새 헌가족이 되고 관심이 없는데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윗은 일관성 있게 기름부운 자를 사랑했다. 자기 자신을 던져서 아브넬을 애도했다. 구원 때문에 사랑하고 구원 때문에 가야 하고 구원 때문에 우리는 결혼도 해야 하고 진로도 결정해야 하고 구원 때문에 뭐든지 끝까지 기름 부운 자라는 것, 말햇듯이 질서에 우선 순위가 있고 부부간에 부부가 최고이다. 부부가 잘 살아보려고 하는데 엄마 때문에 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 엄마가 나에게 책임전가 하지 말라는 그런 말 하지 마시고, 아빠 때문에 결혼을 했다고 하면 맞다고, 다 내 탓이라고 내가 너무 약하다고 이야기해야지, 부모가 돼서 난 책임 없고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면 안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요. 살 수 없는 부부생활을 산다는 것이 너무 어렵다. 부모, 부부, 자식 간에 내가 오늘 가족이니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어렵지만 살아야 한다. 부부가 끝까지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이 물어보신다. 사울 왕가의 실력자인 아브넬은 사라지고 요압이라는 실력자가 다윗의 방해 요인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저는 이렇게 다윗의 치명적인 약점과, 여전한 약점과 약함의 가운데서도 점점 강해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니 겠습니까? 은혜로 밖에 우리는 설수 없습니다. 우리는 15 광야를 지나고 예수 믿으면 뭐든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 믿는 우리는 약해서 어렵다고 고백 해야 한다.

    오늘 내가 약하여서 기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배반을 막지도 처리하지도 못하고, 그것이 다윗이 15광야를 지나고 나서 하는 고백이라고 생각이 드는가요. 오늘 내가 약하오니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 어렵다고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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