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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2장 13절~31절 - 나를 살리는 회개주일설교 요약 2022. 5. 24. 06:47
본 문: 사무엘하 12장 13절~31절
제 목: 나를 살리는 회개
설교자: 김양재 목사
목욕탕 목회 큐티 세미나를 지난주, 여러분들의 기도와 섬김으로 잘 마쳤습니다. 눈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해주신 성도님들의 간증으로 또는 영상으로 회개가 넘치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일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성경책은 삼위 하나님을 알아야 열린다고 했습니다. 또한, 삼위의 하나님이 그 믿어지려면 100%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보면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나를 살리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감정이라고 했어요. 뉘우치는 인생보다 더 아름다운 인생은 없습니다. 나를 살리는 회개는 어떤 회개일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다 회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고요. 다윗도 평생 회개를 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가장 진실되게 한 회개가 밧세바 사건에서 한 회개인데요. 다윗이 이 회개는 분수령적인 회개입니다. 밧세바 사건 이전과 이후의 회개가 확연히 다릅니다. 오늘은 밧세바 사건 이후의 나를 살리는 회개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나를 살리는 회개 첫째는 죄고백이 있습니다. (13절)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나단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죄를 1년 동안 은폐했던 다윗을 찾아가서 비유로, 아주 지혜롭게 그러나 단호하게 책망을 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즉각적으로 회개를 했습니다. 나단의 책망에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이 다윗에게서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본문을 문자적으로 보면, 내가 죄 고백을 한번 하고 용서함을 받으면 참 수지맞겠다. 대부분의 율법주의자들은 다윗이 혹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온 고백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건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죄를 저지르고도 실수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사실 죄 고백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분수령적인 고백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죄는 음행이나 간음이나 도적질 이런 것도 다 있을 수 있겠지만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창세기 3장 5절에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 라고 했어요. 졸지에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생각지 못하던 자기 사랑에 취했어요. 다윗의 자기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자리에 바로 자기도 모르게 가 있었어요. 그러나 참지식의 시작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윗의 밧세바 사건 이전 이후의 회개가 무엇이 다른가요? 다윗이 사울과 싸울 때는 죄를 지을 시간이 절대적으로 없었습니다. 그때는 무차별 핍박의 시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하나님은 그때 다윗이 기도할 때마다 모두 응답해 주셨어요. 핍박을 당할 때는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내면의 죄까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기도하니까 돈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다 주셨다며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그렇다는 간증을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리에 있고자 하는 것 중에서 최고봉은 인정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드디어 다윗이 최고의 인정을 받는 자리에 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권세가 생기니 그 자리에서 죄를 짓는 것을 보게 되었다. 환경이 그런 죄를 짓게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고봉에서 죄를 지으면 이 죄를 고백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고든 맥도널드는 세계적인 영성 베스트 10에 들어가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분이 아내와 함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라는 책도 쓰셨는데 그 내용 중에 우리는 위험의 순간을 겪고 지금 정상에 서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는 순간까지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내용으로 부부가 같이 이 책을 썼는데 이렇게 책을 쓰고 난 후에 여자 문제가 터졌습니다. 다윗처럼 정점에서 이 문제가 터졌습니다. 결국, 고든은 모든 직분을 내려놓고 은둔했습니다. 그래서 징벌의 기간을 보내고 무너진 세계를 재건하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고든은 나는 세계가 무너진 사람을 가장 지독하게 비난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왜 자신을 비난하느냐 너는 네가 스스로 날마다 죄인이라고 했고, 그것이 증명되었는데 왜 그러느냐는 내면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다 자신을 외면하고 떠나버릴 것 같아 용서받은 자의 삶을 살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고백을 했다. 그러나 회개 안에서 산다는 것은 늘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자기 주제를 알고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죄지은 일만 찾아 헤매어 좌절시키는 병적 근성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은 항상 창조주에 대한 반역과 불순종으로 흐려지기 쉽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누구만 회개하고 나는 회개 안 해도 되는 그런 것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평생 회개를 해야 합니다. 고든 부부는 그들의 말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결혼을 한 어떤 부부가 두 달도 안되어 이혼한다고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했기에 서로 지옥을 살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신결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제 책 결혼 매뉴얼 ‘프로포즈’가 이제 나왔는데 어떻게 하면 배우자를 찾고 신결혼을 하고 지킬 수 있는가를 너무나 모르기 때문에 너무나 결혼을 쉽게 하고 이혼도 쉽게 하기에 결혼에 대한 모든 것을 책으로 냈습니다. 결혼을 지키는 것도 항상 내 죄를 보는 것이 가장 비결입니다. 사무엘의 이 본문 설교를 했을 때 어떤 목사님이 드디어 다윗의 회개가 끝났습니까? 그렇게 물어보셨어요. 그러나 회개는 평생 계속되어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다윗은 앞으로 계속 회개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회개는 일회성이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후 이어진 회개는 자신의 내면을 직면하는 분수령적인 회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막에 교부들이 말하기를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은 죽은 자를 일으키는 사람보다 위대하고, 자기 죄를 위해 한 시간을 진실로 울부짖는 사람은 온 세상을 가르치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약함을 아는 사람은 천사를 볼 수 있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나의 약함과 부족함을 아는 것이 얼마나 지식인지 모릅니다. 자기 죄를 보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얼마나 위대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안되는 거지요. 부부간에도 이것이 안됩니다. 나단의 책망을 받은 다윗의 회개가 비록 여기서는 한줄로 나와도 그는 즉각적인 회개, 변명이 없는 회개, 겸손한 회개를 했습니다. 그가 쓴 참회의 시편 32편과 51편을 보면 음란과 간행과 살인죄를 범하고 있는 중에 나단이 와서 책망할 때 그가 처절한 회개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1편의 4절 5절에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주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는 것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죄를 지은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런 죄에 대한 이야기가 사무엘하 11장 전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모든 것을 잘 살다가, 도덕적으로 잘 살다가 어쩌다 한번 지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윗이 깨달은 것은 스스로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를 물처럼 먹고 마실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모태에서부터 죄악 중에 출생했으며 죄 밖에 지을 것이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사실을 알았다는 거에요. 여러분 이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아주 죄악 중에 잉태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셨기에 엄청난 약속의 자손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네 나라를 영원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시면서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으로 그 죄를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축복입니다. 노아도 120년동 안 수치와 조롱을 받았지만 방주에 들어가면 거기 사람이 없어요. 오직 자신과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어디가서도 못살 곳이 없습니다. 노아처럼 방주안에서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이상한 부부생활을 하더라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이상한 자녀하고도 살아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알면 어디에서도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옳고 그름으로 생각하니 어떻게 저 인간이 저럴 수가 있느냐며 못살아내는 것입니다. 마침내 다윗이 이것을 알았습니다. 끊임없이 여자를 취하고 취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몰랐던 다윗은 후반부 인생에서 자기와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눈물의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더는 말이 없어지고 인내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오늘 간증해준 자매가 그렇게 바람 피고 나왔는데 나이도 남편이 거의 30년이나 위고 지금 돈은 하루에 만원 밖에 못 벌고 그야말로 노령연금으로 살아가는 이때 저 자매는 모든 것을 갖췄는데 그래도 이제 이혼하지 않고 살아내고 있어요. 이게 참 기특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취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바람을 폈으면 지나가는 것을 또 버리고 갈 텐데 우리들교회 와서 말씀 들으니까 잘 살아내고 있습니다. 시편 6편 6절에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했는데 다윗이 하도 울어서 침대가 둥둥 떠 다닌답니다. 우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보셨죠? 계시록 5장 4절도 사도 요한이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아서 크게 울었더니라 했는데 죄 때문에 울고 성경 보고 깨닫는 자가 없어서 울었다고 계속 우는 이야기가 성경적으로 나옵니다. 저보고 자꾸 운다고 그러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분해서 울고.. 시편 32편 3-4절에도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이것은 내 죄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 때 종일 신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든도, 다윗도 얼마나 죄 짓고 나서 눌렸겠습니까? 그들이 최고의 정점에서 죄를 지었는데 아마도 저는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눌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은 전세계적으로 이것을 쓰셔서 이들을 통해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시편 51편 7절에서도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우슬초는 문등병자를 치료해주는 풀입니다. 문등병자는 감각이 없어서 자기 죄를 모르는데 자기를 문등병자보다도 더 못하게 여긴 다윗은 제일 형편없는 우슬초로 자신을 씻어달라고 했어요. 다윗이 여기까지 내려왔어요. 이것이 진짜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이런 죄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 한마디가 인류의 구원자가 되는 고백인 것입니다. 시편 51편 16절~17절에도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자신의 보잘것 없음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제사 자체를 드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대요. 어제 큐티 출애굽기 28장에서도 제사장도 속죄제, 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자기의 의를 보이고자 하는 사람을 내가 예배드리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헌금하니까 난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나의 추함과 더러움을 보는 상한 심령의 제사인데요. 이 상한심령의 제사를 누가 보겠습니까? 가인의 후예가 보겠습니까? 아닙니다. 한계 상황에 봉착한 아담의 4세손 에누스와 120년동안 조롱받은 노아 같은 사람이 보는 것입니다. 다윗도 하나님이 세우시기 위해 이런 처절한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진정한 참회는 단순히 과거를 뉘우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죄를 미래에는 짓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도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고, 죄를 고백한 다윗도 나단을 통해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후반부에 비록 눈물의 인생을 살았지만 그는 어느때보다 평강의 인생을 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으로 낮아짐을 경험하면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권세에 대한 욕망이 많아요. 그리고 권세의 정점에 올랐을때 다윗처럼 악과 음란으로 곤두박칠 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은 뭘 그렇게 회개를 맨날 하냐고 하시는데 저 같은 삶을 남자분들이 살기는 참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도 정점이라면 정점에 있었는데 너무나 밑바닥 인생을 오래 살면서 겪지 않아도 될 감정을 너무나 많이 겪었고, 겪고 있습니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오고 가기에 지금 날마다 이렇게 회개할 것이 있게 해주신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 누구라도 경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윗은 환난도 많이 겪었는데 큰 죄를 지었는데 그저 승승장구하다 올라가면 반드시 이런 일을 겪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다윗이 이 죄를 오픈해 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다윗도 사람도 부유할 때는 인간에 대해 참 모릅니다. 인간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죄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고 사람에 대한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언젠가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모르면 인간을 모르는데 결혼인들 제대로 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사람을 제대로 뽑겠습니까? 스펙으로 뽑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 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그 분과의 관계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결코 우리가 잘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불완전함을 갖은 우리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가장 커다란 초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건강할수록 우리는 더욱 자신을 소중하게 느끼게 됩니다. 성숙은 더 나은 행동이 아니고 나쁜 행동을 식별하고 인정하는 능력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더 나은 행동으로 살겠어요. 나쁜 행동이나 좀 분별하세요. 가지 않아야 할 곳, 하지 않아야 할 말 등. 그것이 분별이고 구별된 것입니다. 작든 크든 나의 연약함을 나의 현실이라고 인정하고 또 인정하는 것이 또 회개의 생활방식입니다. 우리들교회가 목장에서 날마다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오늘 본문에 그대로 나와 있더라고요. 큐티인의 한 간증을 보니까 이 집사님이 시댁식구들로부터 악질이라고 공격을 당하고 있는거에요. 왕따를 당하고 있는거에요. 어느 날 보니까 중학교 다니는 자기 아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데 순간적으로 동질감이 느껴져서 너는 병신같이 당하고만 사냐 하며 아들에게 비난과 분노를 쏟아냈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향한 비난과 분노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아들은 계속적으로 왕따를 당하고 있으니까 엄마가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계속 되는 거에요. 드디어 지금은 이 일의 가해자가 바로 엄마 자신이었음을 깨닫고 엎드려 울며 회개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직도 아파하는 아들을 위해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기억하며 머물러 깨어 기도하겠다는 이분의 고백을 우리가 듣기만 해도 상한 마음의 제사를 드린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녀가 바로 나이지 않습니까? 자녀가 이렇게 계속 왕따를 당하기에 이분이 저절로 상한 마음의 제사가 되어서 여기 정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해요.
[적용질문]
나는 모든 지적에 대해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 옳소이다가 되고 있습니까? 나의 회개는 밧세바 이전입니까? 이후입니까? 나의 회개는 나를 위한 고백입니까?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고백입니까?
나를 살리는 회개 두 번째는 죄는 반드시 징벌하십니다. (14절)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우리가 죄를 쉽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는 그 값을 치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은 다 용서해주신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죄를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함 받은 죄라도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죄에 대해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를 사해주시고 책임을 묻는 것이 두렵다면 여러분들은 아직 죄사함의 은총을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넘어짐은 원수들에게 득세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윗이 재대로 넘어지게 방치하셨습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폭력성이 있습니다. 사울이 자기 딸과 결혼할 때 블레섹 사람 양피 백개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자기 결혼을 위해서 양피 200개를 바쳐서 무고한 백성 200명을 죽였습니다. 도덕적으로 말하면 다윗은 이미 살인자에요. 그리고 원하지 않았겠지만 간음에 의해 진짜 문자적으로 살인까지 했습니다. 가임기간을 피해 치밀하게 간음을 했는데 임신이 되었어요. 이것은 완전히 마귀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귀도 이처럼 기적을 일으킵니다. 게다가 우리야에게 두번씩이나 동침하라고 했는데도 충신 우리야가 그것을 안했어요. 하나님이 그때도 방치하셨어요. 우리야가 죽을 것이 아닌데 전쟁터에서 너무 쉽게 죽어버렸어요. 이렇게 흘러가리라고는 다윗조차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권세를 가지고 저절로 흘러갔어요. 어쨌든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주었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두고 보셨어요. 그래서 다윗은 하는 일마다 꼬였어요. 여러분 하는 일마다 꼬입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방치하고 계시네요. 여러분들은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회개를 하셔야지 사람을 미워하시면 안되요. 하나님이 방치하고 계신는 거에요. 여러분들 회개하라고 방치하라고 하십니다. 세월호 사건은 사람이 위기를 당할 때 얼마나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네덜란드 비행기 기장은 운행 시간이 지체되면 무거운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 허가없이 비상착륙을 했다가 기존의 손실과는 비교도 안되는 584명의 목숨을 잃었어요. 하나님은 두고 보셨어요. 하나님은 다윗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하시기 위해 크게 채찍을 드셨습니다. 그래서 나단이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징벌을 예고 했습니다. 다윗은 후에 자신의 잘못으로 원수가 하나님을 이길 수도 있구나. 하나님의 구속사가 끊어질 뻔 했구나 후에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중요하게 쓰임 받는 사람일수록 다윗에게 하신 이 책망을 아주 곱씹어 봐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종이 당하기기 얼마나 쉬운지 몰라요. 우리 악한 세상에서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소경이 잘 보러 가는, 이 세상에서 매일 넘어지면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5절에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그러나 예고된 고난은 아무 준비없이 오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으로 날마다 예방 주사를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한 고난이 있고, 하나님이 치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만해도 택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서운 이야기를 다윗에게 경고를 했는데 나단이 자기집으로 돌아갔대요. 죽지 않고 살아서 갔다는 이야기 아니에요?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도 오늘 나 죽었구나. 그런데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여기 있잖아요. 복음 전하는 것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죄 지을때는 충신인 우리야가 있어서 더욱더 죄를 짓고, 회개할 때는 나단이 있어요. 정확하게 다윗을 도울 사람이 때마다 있네요. 어떻게 때마다 믿음의 동역자가 있는지 하나님은 방치하면서 지체를 붙여주신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
징벌에 따른 죄의 대가를 치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은 내 삶의 결론이야 그것이 치르는 거에요. 여러분들에게는 이 징벌의 때에 신뢰할 만한 믿음의 동역자가 있습니까?
결혼 생활 힘들어도 다 이렇게 동역자가 없어서 이혼한, 지체가 없어서 이혼하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기 때문에 아무리 목장에 인도하려고 해도 싫다고 해요. 남편만 돌아오고 아내만 돌아오래요. 그러니까 안 돌아와요. 매력이 없잖아요. 왔다가 또 돌아가는 거에요.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데 공동체도 싫고 남편만 돌아오고 아내만 돌아오래요. 여러분을 도와줄 수 있는 지체가 없기때문에 결혼생활이 깨지는 것입니다.
나를 살리는 회개 세 번째는 징벌을 순종합니다. 그래서 오늘 세 가지로 다윗이 무엇에 순종했는지 알아보겠어요.
1) 현실을 수용합니다. (16절~17절)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 하더라’ 형벌이니까 아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는 것은 형벌에 대한 태도가 아닙니다. 다윗은 아이를 위하여 마지막까지 금식하고 기도했어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래도 밤새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신실한 신하들이 아니 뭐가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 있으십니까? 말렸지만 지도자는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에 먹지도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이는 심히 아프게 됩니다. 그래도 다윗은 이미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 사실을 들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18절) ‘이레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다윗이 그렇게 기도했어도 이제 아이가 죽었어요.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런데 옆에 사람들이 다윗이 그렇게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부르짖었는데 아이가 죽은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들은 저 왕이 상심해서 어쩌나라고만 생각합니다. (19절)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신하들이 다 수군 거렸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는데 아이가 죽었대. 참 안되었어 그럽니다. 저도 남편이 갔을 때 제가 30대 과부였으니까 사람들이 징벌받아서 저렇게 되었나보다 참 안됐다.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실제로 어떤 나이 많이 드신 분이 수군거리다가 용기있게 제게 오셔서 아이쿠 무슨 죄를 지셨노라고 저에게 물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현실을 수용하게 됩니다. (20절)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다윗은 아이가 죽은 것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생각했기에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21절~23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까 하니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다윗은 회개 후에 확신의 모습을 보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 다윗은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하며 아이는 천국에 갔음을 확신했습니다. 영아구원의 확신에 대한 근거 구절이 바로 이거에요. 아기들이 죽어도 천국 가냐? 간다고 되어있네요. 걔네들이 무슨 말 할지도 모르는데 부모가 이렇게 기도했을 때 천국 갔다는 것입니다. 아이의 죽음으로 다윗이 더 절망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이제 다윗은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와 음식을 먹었습니다. 다윗이 한나님을 신뢰함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아이가 천국에 간 것을 신뢰한 것처럼 말이죠. 저도 남편이 갔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았지요. 왜냐하면 천국간 것을 믿었기 때문에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일어나서 그날 아침까지도 눈물을 흘리고 기도했는데 구원받고 갔기 때문에, 구원받고 간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면 이렇게 30년을 오겠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진짜 천국 간 날은 유가족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천국 간 것이 너무 대단해서 30년을 과부로 살고 있어요.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거에요. 진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남편이 천국 간 것을 너무나 확신하기 때문에 일어나서 사명을 향해 지금까지 걸어왔습니다.
징벌을 순종하는자 3)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24절~25절)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골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사무엘하 11장 3절에 보면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이랬잖아요. 그때는 밧세바를 보고 우리아의 아내라고 했어요. 그런데 다윗이 회개하고 나니까 그녀를 다윗의 아내라고 불러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밧세바가 임신했을 때는 우리아의 아내였어요. 그러나 다윗의 간통의 죄를 결과 생긴 아이는 죄악의 씨잖아요 그래서 본문에서는 우리아의 아내가 아니라 다윗의 아내 즉, 다윗이 낳은 아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아이를 치셨어요. 징계하신 것입니다. 죄는 용서해 주셨지만 다윗은 그 죄의 값을 치뤄야 했습니다. 다윗은 징계로 아이가 죽자 밧세바를 위로했습니다. 이 세상에 밧세바처럼 정죄감이 큰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자기로 인해 훌륭한 우리야 남편이 죽었어요. 아이도 죽었어요. 게다가 남편을 살해한 다윗과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밧세바를 위로해줄 사람은 오직 다윗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밧세바는 지금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 하고 있는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미갈은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다고 했어요. 결국 다윗이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범한 밧세바를 다윗은 위로하고 동침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결국 진정한 회개를 한 다윗이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사랑한 여자들 중에는 미갈과, 아비가엘과 밧세바가 있는데요. 이 세 사람과의 사랑에는 다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스토리의 주인공이 밧세바이후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봐서 다윗은 밧세바에게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밧세바는 자기 이름은 아니지만 마태복음 1장에 우리아의 아내로 다윗과 같이 찬란하게 구속사의 명단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을 보면 밧세바가 다윗과 서로 같은 믿음으로 사랑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땅끝까지 내려간 두 남녀이기에 다윗이 밧세바를 책임진것이고 밧세바도 구속사를 통렬히 깨달았을것입니다. 다윗의 아내가 그래도 많은데 가장 비참한 환경가운데 있었던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이라는 영적 후사를 주신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아가페적인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여자 중독자인 다윗이 이 사건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적용질문]
나는 징벌에 순종합니까? 그래서 현실을 수용합니까? 내 사건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정죄받아야 될 그 누군가를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를 살리는 회개 네번째는 회개의 결론은 거룩입니다. (26절~31절)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곳을 쳐서 점령하고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라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력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 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이 사건은 솔로몬이 낳기 전의 사건입니다. 다윗이 회개했기 때문에 암몬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이 아니고 이렇게 죄를 짓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암몬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해주셧다는 것입니다. 먼저 다윗 왕국을 견고하게 하신 이후에 강권적으로 다윗을 회개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에게 아무 자격이 없으나 언약을 지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보면서 다윗이 전율하며 통회자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데도 전쟁을 이기게 해주는 거에요. 그러니 여러분이 죄를 짓고 있는데고 회사가 잘 나가고 아이들이 잘나가면 근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런 기가막힌 죄를 짓고 있는데도 기각만힌 영원한 적 암몬과의 싸움에서는 이기고 있었다는 것이죠. 굉장히 중요한 메세지가 있습니다. 여기 요압이 등장합니다. 요압은 이미 우리야 사건을 다 알고 있는데다가 무술에도 능하고 성경말씀도 적재적소에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윗에게 랍바를 바치면서 내가 이제 다 이겨놓았는데 내가 영광을 받을까 걱정이라서 이제 나가서 마지막 도장을 찍으시고 보석이 박힌 왕관은 다윗이 쓰라고 이런 충신이 어디 있겠어요. 그에게는 반역의 냄새가 있었지만 그는 다윗에게 인간적으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요압 음부에 떨어졌어요. 얼마나 잘했으면 다윗같은 자가 요압에게 속았겠습니까? 오늘 같은 회개가 나오지 않은 다윗은 회개의 분량이 적기에 죄를 그만큼 모르고 그만큼 분별이 안되니 요압 같은 자에게 속습니다. 결국 요얍은 택자가 아닙니다. 택자가 아닌 요압이기에 일생 끌려다니면서 얼마나 전전긍긍 했겠습니까? 내가 저놈에게 그 이야기를 왜 했을가. 내가 왜 저놈에게 우리야를 죽이라고 했을가. 땅을 치고 통곡을 해도 그렇게 쥐도새도 모르게 할 뻔 했다고 생각했던 것 자체가 다윗이 그때는 회개를 몰랐기 때문이에요. 얼마나 후회를 했겠습니까? 결국 솔로몬 시대, 얼마나 무서우면 자기가 죽이지도 못하고 솔로몬 아들보고 죽이라고 유언하고 가요. 무서운 부하가 있어요. 일생 요압이 다윗의 부하인 것 같아도 다윗이 일생 요압에게 어쩔 수 없이 끌려다녔어요. 이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거에요. 아들 일도 어떻게 할 수 없고, 부하 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거에요. 다윗은 그냥 척척 죽일 수도 없잖아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범죄 기간 중에도 암몬을 잘 무찔렀습니다. 톱질, 써레질, 도끼질,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했는데 한마디로 전도도 많이 하고 선교도 많이 했습니다. 구제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싸움을 잘하고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12장 전체는 죄와 수치에 관한 심각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맨 마지막에 암몬 이야기 몇 절을 가져다 붙인 것은 무슨 의미를 의미합니까? 암몬 족속을 이긴 사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기름부운 자의 순종과 성결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외적인 다른 열매가 많아도 내적인 거룩이 없으면 끝입니다. 다윗은 비록 암몬과의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실질적인 싸움에서는 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암몬의 이야기가 뒤에 나와 있는 이유입니다. 이번 주일 목회자세미나를 인도하면서 제가 뭐가 되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목회자 세미나를 하면서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건물을 짓고 사람이 많아지고 제말이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제가 거룩하지 못한 것 같아 회개가 되었습니다. 뭔가 된 것 같은 헌당예배 때 너무 좋은 날인데 제가 너무 두렵고 떨려서, 거룩하지 못한 것 때문에 그날 너무나도 상당히 많은 애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번에도 많은 눈물을 목세기간 동안 흘렸습니다. 그리고 예외 없이 해야 하는 이번 주 본문이 예목에 주제별로 나오는 이 본문이 나를 살리는 회개인 거에요. 다위의 회개를 보며 다시 옷깃을 여밀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할 것은 역시 회개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늘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우리들교회가 회개하고 가는 것은 정말 맞는데 그렇게 회개를 자꾸 전하는 것이 너무 미안하고, 저 혼자만 회개하나, 우리들교회만 회개하나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것 같고, 내가 과연 회개를 하고 있나 생각을 하면 자신이 없고, 그래서 늘 황송하고 떨리고 그러니까 늘 회개를 해야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로버트 매케인 목사가 그랬어요. 나의 성도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것도 아니고 나의 개인적인 성결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맞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을 살리기 위해서 오직 제가 성결한 것 밖에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그러나 역시 나를 살리는 것은 회개밖에 없습니다.
[적용질문]
여러분의 회개의 결론은 행복입니까 거룩입니까?
공동체 고백입니다. 이분은 남편이 바람 피우고 감옥 간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분의 똑똑하고 훌륭한 남편이 돌아오셔서 목자로 잘 섬기셨는데 또 다시 집을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몇년동안 안돌아오고 있습니다. 아들들도 얼마나 속을 썩이는지 모릅니다. 병원에 갔다가, 가출했다가, 나왔다가 들어갔다, 돌아온 것 같으면 또 다시 속을 썩이고. 이분이 ‘다시’ 때문에 돌아버립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분의 남편이 감옥갈때는 부목자였는데 그때는 네가족 이상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남편과 아들을 비롯하여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못하니까 폭풍 성장해서 아무것도 없는 이때 평원지기까지 되었습니다. 우리들교회가 그렇습니다. 남편 잘 나갈때는 아무 직분 없다가 감옥가고 계속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포로생활 기간동안 이처럼 다른 방법을 찾지 않고 질서에 순종하고 있을 때 또다른 질서를 통해 나를 풀어주신 것이에요. 이분의 이야기에요. 그냥 있을때는 생각나지 않던 죄가 포로로 끌려갈때 온갖 것이 생각나게 됩니다. 이분이 남편이 바람 피웠을 때 공동체를 무시했던 죄를 가장 크게 회개했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그때 이분이 서울대 나오고 부자였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그럴때 공동체를 굉장히 무시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회개가 되고나서부터 지체의식이 생겼어요. 내가 강자로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걸어가는 구조속에서 함께하는 자라는 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이전의 나는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싫었습니다. 내 시간을 손해보는 것도 싫었고 여유 있으면 도와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체의식이 생긴후부터 받는것 주는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포로는 한정된 기간입니다. 길어봐야 여기서 사는 것은 인생의 잠깐일뿐입니다. 현재 묶여 있는 작은 사건을 통해 풀어주시는 경험을 해야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목장예배서 이렇게 하니까 얼마나 모든 사람들이 와서 은혜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분은 남편이 바람을 펴도 회개를 하고 감옥을 가도 회개를 하고 다시 떠나도 회개를 하고, 자식이 속을 썩여도 회개를 합니다. 오직 예배를 중수하니 이 모든 일 중에서 내적인 성전이 얼마나 강력하게 세워지고 있는지 이 분을 보면 나를 살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환경은 문제가 아니고 회개를 하고 살아갈 때 그 평강을 누구도 뺏을 수 없고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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