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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태복음 5장 3절~10절 - 팔복
    주일설교 요약 2022. 5. 24. 11:50

    마태복음 53~10

    팔복

    김양재 목사

     

              우리는 참 복을 좋아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그런데 복의 내용은 거의 돈으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복도 아니고 복이 여덟 개나 되는 팔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나를 살리는 회개 후에 성화를 넘어 영화를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복의 개념이 거듭나야 한다. 그래서 그 복의 개념이 무엇일까요. 오늘 8가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성경 전체를 요약한 말이 팔복이다. 광의 펼쳐짐으로 그 복을 설명하는 것이 십계명이고, 출애굽기 1920장에 나오는 것이고, 간단하게 팔복, 팔복을 더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이다. 이것만 잘 알아도 성경 전체를 아는 것이다.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3)이다. 본문에 쓰이는 가난하다는 원어로 푸트코이 웅크린다는 말에서 유래된 말이다. 웅크린 거지의 모습, 의지할 것 없는 거지 나사로의 모습, 두렛돈을 바친 과부에게 쓰인 단어가 이 단어이다. 궁핍함보다 훨씬 심한, 절대 빈곤의 상태에 있지만 무엇을 간구하는 능동적인 모습이 아니라 삶에 찌들고 시달림을 당한 수동적인 형용사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없어서 구걸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 괴롭힘과 고난을 당하고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사람, 겸손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성경의 예를 들어보면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상속분을 달라고 해서 가출을 했어요. 그 결과 둘째 아들의 삶은 첫째로 허랑방탕하게 되고 두 번째 다 허비했으면 세 번째는 다 없이 했으며 네 번째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들었으며 다섯 번째는 궁핍하게 되었고 여섯 번째는 그 무시하던 이방 백성에게 붙여서 살게 되었고 일곱 번째는 돼지를 치게 되었고 여덟 번째는 너무 굶주려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고자 했으며 아홉 번째는 그 쥐엄열매 마저도 주는 자가 없게 되었다. 이 아홉 단계를 거치기 전에 가난한 것을 인정하고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홉 단계를 다 거치고 쥐엄열매도 주는 자가 없어서 주려 죽게 되어서야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게 되었사오니 하고 돌아왔다. 아버지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고 이제 품꾼의 하나로 여겨주소서 하며 자신의 죄와 가난함을 고백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 가난하다고, 돈이 없어요, 집이 없어요. 병이 걸렸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하는 고백이 나오지 않는 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조차도 얻을 수 없어서 주려 죽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기가 가난한 것을 인정하지 못할까요. 자기를 인정하는 것이 힘든 것이다. 그래서 굶주려 죽게 될지언정 다 자살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딱 오면 될 텐데 그게 안 되나 봅니다. 양은 산길을 가다가 맛있는 풀을 발견하면 1아래 되는 절벽으로 폴짝 뛰어내린다고 한다. 신나게 풀을 뜯어 먹다가 다 먹고 나서 배가 불러지면 1를 죽어도 못 올라온다고 한다. 아래에는 무서운 낭떠러지가 있고 진퇴양난인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목자가 줄을 내려줘서 감아올리려고 하면 자기를 잡아 가두려는 줄 알고 뒷걸음질 치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양을 살리려면 절벽을 뛰어내린 양이 그 자리에서 그냥 지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굶주림으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보고 있다가 완전히 쓰러지면 줄로 몸을 감아서 올린다고 한다. 내가 지금 쓰러질 만큼 주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이 아홉 번째 단계까지 못 갔어요. 하나님은 완전히 내가 못 이룰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저항할 수 없을 때까지, 그냥 끝에까지, 가난해질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지금 내 발목을 잡고 있는 힘들고 답답한 환경이 원수가 아니다. 원수는 내 앞에, 내 안에 있는 욕심이고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이다. 아직도 내 힘으로 잘살아 볼 수 있다고 모두 바둥거린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거절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복을 주려고 기다리시는 분이다.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이제 손들고 돌아오라고 가난하고 애통한 환경으로 나를 몰아가시는 것이 복이다.

     

    적용 질문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난의 내용은 무엇인가. 물질, 애정, 건강의 가난 다 당했는가, 그 가난이 결국 영적인 가난으로 이어져서 천국을 사모하게 되었습니까? 여러분들은 9단계 중에 어느 단계에서 아직도 가난한 그것을 못 보고 있습니까.

     

              두 번째, 애통하는 자이다 (4) 애통함은 가까운 가족이 죽었을 때 극한 슬픔을 의미한다. 정말 가슴을 찢는 슬픔이다. 바로 내 죄 때문에 그런 슬픔으로 울어야 한다. 죄를 슬퍼하며 애통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를 얻는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엉엉 우는 자를 하나님이 위로하신다. 가난함은 애통함과 같이 오는 것이다. 가난해야 애통합니다. 부유하면 애통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내가 구걸할 수밖에 없고, 내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애통함이 나온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애통이고 탄식이다.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위로가 최고다. 환경이 아니라 내 죄 때문에 가난하고 애통해야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는 그 누구도 어떤 사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

     

    적용 질문

    무엇 때문에 애통 하는가, 절박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도 필요 없다고 버둥거리고 있습니까. 믿음이 성숙할수록 나의 가난함을 보고 그것 때문에 애통하며 그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와 천국의 복을 누릴 수 있는가.

     

              세 번째, 가난하고 애통한 자는 온유한 자로 나간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어떤 자냐. 착한 사람이냐, 얼굴이 온유하고 표정과 말씨가 온유하다고 해서 온유한 사람이 아니다. 온유를 문자 그대로 보면 짐승을 길들일 때 쓰는 말로 길들여져 주인 뜻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을 날마다 인정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길들여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온유한 자이다. 그러면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부동산 등기를 내 앞으로 해준다는 뜻일까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고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했는데. 땅을 차지하고 화평을 즐기는 것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다. 등기소유가 내 것이 되지 않아도 이 땅을 즐기는 사람이 땅을 차지하는 것이다. 제가 자존심이 있을 때는 누가 저를 초청해도 내가 별장이 없으면 별장을 가진 사람이 초청을 해줘도 가기가 싫은 거죠. 그것이 온유한 자가 못 되어서, 얼굴은 온유하게 보일지 몰라도 제 속이 온유하지 못하니까 여유가 없어요. 땅을 차지하지 못해요. 지금은 제가 여유가 있어져서 이 세상 땅이 다 내 것인데 우주가 다 내 것인데 그냥 시간이 없어 못 가는거죠. 수금지화목토천해가 다 내 것인데 시간이 없어 못 가는 거죠. 그랜드캐니언, 알래스카도 하와이도 다 내 것인데. 고수부지만 해도 내 것인데 정말 시간이 없네요. 정말 모든 땅이 내 것이에요. 이것이 무엇인가.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 중에 온유함으로 유명한 사람은 모세다. 이 사람 모세는 민수기 123절에 온유함이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성경에 증거한다. 이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나왔냐 하면 민수기 11장에서 백성들이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할 때 나온 것이 아니다. 민수기 1212절에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느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모세의 친형제인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할 때에 그의 온유가 지면에서 더하다는 말씀이 나왔다. 우리가 온유함을 갖기 힘든 곳에 가정이고 형제고 부부지간이고 이것을 모세를 통해 보여주신다. 백성들은 애굽에서 고기 먹던 것을 생각하면서 불평하고 모세를 죽이려고 한다. 그 상황에서 형제들이 모세를 도와도 시원찮을 판에 도리어 비방을 했다. 그럴 때 온유하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하지만 이때 모세가 입을 딱 다물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민수기 122절 마지막에서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그러셨잖아요. 하나님이 다 들으실 것이기 때문에 모세는 참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을 바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누가 비방해도 반응하지 않고 입을 다물 수 있다.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이렇게 영육 간에 여유가 있는 것이다. 내가 듣는 것보다 하나님이 들었어요. 얼마나 얼마나 자신감이 생깁니까. 이것이 온유다. 우리는 날마다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누가 나의 죄를 지적하면 못 들어준다. 누가 날 비방할 때 네가 옳다 내가 옳다 할 것 없이 하나님이 들으시겠구나 가만히 있으면 된다. 나를 오해해서 비방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실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것을 못 기다리고 내 지위와 능력으로 상황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온유는 자신의 지위 뒤에 자기를 숨기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온유는 그래서 성품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무조건 져주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온유가 아니라 연약함이다. 늘 돈을 풀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증명하려는 것 그것도 온유가 아니라 연약함이다. 진짜 온유는 진리를 붙드는 것이고 진리를 붙들기 위해 순교까지 하는 강함이다. 온유한 사람은 외유내강한 사람이다. 겉으로 드러내는 태도가 아무리 부드러워도 십자가를 경험하지 않은 온유는 가짜이다. 십자가를 경험한 온유는 내게 많은 재주와 지위와 권세가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능력만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나를 판단해도 불편해하지 않는 것이다.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나서서 해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다.

     

    적용 질문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내가 온유하다고 착각하지 않는가 성품이 아닌 십자가로 처리된 온유, 하나님 때문에 인내하고 순종하는 온유가 있는가. 여러분들의 온유는 성품인가요 믿음인가요.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자는 네 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했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의인은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이 다 틀려먹었어. 노동자 권리를 위해서 노조는 다 있어야 돼 저런 나쁜 사람들은 감옥에 보내야 돼 이런 것이 의가 아니다. 우리가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할 의는 내 뜻, 내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마치 환자가 자기 병을 찾아 치료하지 않고 그저 고통만 제거해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들이 나는 행복하고 싶어 이것은 그냥 고통만 제거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의의 개념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에 주리고 돈에 주리고 애정에 주리고 남편에 주리고, 아내에 주리고 자녀의 성적에 주리고 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매력 없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누군가를 굶주려 하면 할수록 상대방은 도망가게 되어 있다. 남편 자식에게 굶주려 있으면 그 부담을 견디지 못해서 다 밖으로 도는 것이다. 사람에게 주리고 세상에 주린 것은 내가 주릴수록 채워지지 않는다. 더 비참한 목마름과 주림만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뜻에 주리고 목말라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채워주신다. 인생의 목적, 결혼의 목적이 거룩이라는 것을 알고 그 거룩을 원할 때 주님이 내 인생도 가정도 책임져 주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 굶주림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를 더 주리고 목마르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의를 더욱 사모하도록 나를 가난하고 애통하게 만드는 사람과 환경이 내게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그것을 깨달을 때 진정으로 주리고 배부른 자가 되는 것이다. 현재의 고난은 너무나 잠깐이기 때문이다.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를 7년 동안 모셨다는 집사님이 이런 고백을 했어요. 남편은 막내고, 형님이 두 분이나 계셨는데 남편이 어머니를 모시고 싶어 했어요. 직장도 그만두고 치매 걸린 신 시어머니를 모시는데 그냥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힘들었다고 했어요. 특히 중3 아들과 고2 딸에게 성적이 떨어질 것 같아 날마다 불안한 거예요. 그런데 집사님이 잠깐 의자에 앉아 잠든 사이에 시어머니가 거실에 대소변을 다 묻혀놓았어요. 그때 중학생 아들이 집에 들어왔고 그 광경을 본 아들은 정신을 놓고 앉아 있는 집사님을 방으로 들여보내더니 할머니를 목욕탕에 모시고 들어가서 씻겨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 엄마 잘 듣고 있을 줄 알고 내가 이렇게 과자 사 왔는데 왜 그랬어. 아들은 할머니를 씻겨 드리고는 짓무른 사타구니에 분을 발라 옷까지 갈아입혔어요. 그리고 이제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던 집사님에게 아들이 이야기했어요. 엄마. 할머니를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보세요. 그렇게 심란한 마음으로 지내려니까 엄마가 병이 들죠. 엄마나 남몰래 흘린 눈물을 제가 왜 모르겠어요. 제가 커서 다 갚아 드릴게요.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집사님은 그동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손윗동서들을 원망했던 것과 남편과 살기 싫었던 마음을 다 회개하였다. 아들이 공부할 시간에 할머니를 챙기는 것이 너무 싫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아들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이타적인 하나도 이렇게 손해가 아니다. 이 아들이야말로 이렇게 의에 주릴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몰아가서 진짜 온유한 자가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된 것 같아요. 자기가 그러고 싶어 그랬겠어요. 힘든 할머니 엄마 보니까 저절로 의에 주리게 되었어요. 스스로 사랑을 보이며 엄마를 책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엄마의 눈물을 다 보고 있다. 엄마의 아픔을 감싸 안았어요. 치매 할머니 힘든 엄마를 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환경이 되었기 때문에 이 어린 나이에 지혜와 사랑을 갖게 된 것이다. 치매 할머니를 모시면서 엄청난 복을 아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금새는 모르잖아요. 눈앞에 보기 좋은 것만 택하잖아요. 진짜 중요한 그 하나님이 주시는 팔복을 택하지 않고 눈앞에서 잘 되는 것 공부 잘하는 것 이것만 택하려고 하니까

     

    적용 질문

    내가 끊임없이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집 좋은 차 사람의 관심과 인정받는 것에 목말라 하는가. 주리고 목마른 환경을 통해 영적인 배부름을 알게 하신 것에 감사를 드리는가.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는 자는 다섯 번째 긍휼히 여기는 복을 주신다고 했다(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긍휼은 창자가 끊어지듯이 아파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아파하고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고 나를 이해하듯 남을 이해하고 내게 관대하듯 남에게 관대한 것이 긍휼이다. 한 부인이 공동체의 지도자와 불륜을 저질렀어요. 이 사실을 안 남편이 그 지도자를 죽이고 구속이 되었다. 사람들이 그 부인을 정죄하고 비난했어요. 그러나 어쩌면 가장 아픈 사람이 간음을 행한 그 여인 아니겠습니까. 하루아침에 남편은 살인자가 되고 정부는 죽었어요. 우리가 비난하지 않아도 이미 벌을 충분히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님은 음욕을 품는 것 자체가 간음이고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하셨다. 여러분은 티비를 보면서 잘생긴 탈랜트를 보고 얼마나 음욕을 품고 있습니까. 그거 간음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도 간음한 자이고 살인자인데 하나님의 긍휼로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집사님이 남편이 그러고 있으니까 제자가 차 태워주고 가니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거죠. 우리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죽이고 죽고 음욕대로 행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그런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면서 어떻게 시마다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할 수 있겠는가. 그 부인이 옳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런 소식을 들으면 그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보면서 함께 기도해야 한다. 속으로 마음을 가졌지만 행함으로 옮기지 못한 내가 잘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나는 분노와 상처가 아파서 다 정신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 때문에 창자가 끊어지도록 아파하시면서 기도하시기 때문에 내가 이 정도로 살고 있다는 것 아는가. 내가 얼마나 긍휼이 필요한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다. 마음으로 불쌍해하고 염려하는 것이 긍휼이 아니라 찾아가서 상처를 만져주고 안아주고 돕는 그 실천까지 가는 것이 긍휼이다. 하나님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으면, 내가 긍휼히 여겨야 할 사람이 옆에 있으면 그것이 나의 복이다. 저 사람만 없다면 나에게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있어서 복이 있다. 저 나라만 없으면.. 저 나라가 있어서 복이다. 이번에 파리 테러가 났다. 희생자 남편이 앙투아레이라는 사람이 자기 부인이 갔는데 글을 올렸어요. 당신이 믿는 신이 그의 모습대로 우리를 만들었다면 내 아내의 몸에 박힌 총알이 신의 마음에 상처를 내 아프게 했을 거라고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분노라는 선물을 하지 않을 거라고. 분노라는 선물을 되돌려주는 것은 당신이 저지른 것과 똑같은 무지함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당신들은 내가 두려워하기를 원하겠지만 우리는 우리 일상을 그대로 영위할 것이라. 나는 곧 내 아내와 우리 가족이 그대는 절대 오지 못할 자유로운 영혼이 숨쉬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와 내 아들 우리는 이제 둘만 남았다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군대라고 17개월된 아들과 곧 나는 점심을 먹을거고 뛰어놀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인생을 살아갈 것이라고 그것이 당신에게는 얼마나 모욕적인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제 우리는 잘 살거라고. 우리가 두렵길 바랬다면 당신은 실패했다고 바로 이것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정말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한 마음이 우리가 어디까지 기도를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침에도 보니까 아프카니스탄 양귀비 마약으로 전체가 피골이 상접해서 마약 주사를 하고 그렇게 모여 있어서. 정말 너무나 불쌍해서.. 그런데 그것이 탈레반의 수입원이고 무기 공급원이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 하게 한다. 그 땅에는 밀가를 심어도 수확이 안되고 심어도 양귀비의 십분의 일이 안되니까 사람들이 나쁜 것인지 알면서도 계속 심는다는 거에요. 도대체 이 세계를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주여 어찌하오리까.

     

    적용 질문

    비록 가족이라도 인연을 끊고 싶은 연약한 식구가 있습니까. 탈레반~ 없어졌으면 좋겠는거에요. 이것을 통해서 나를 회개한다는 것 우리가 거기까지 가야하는데 연민을 느끼지만 찾아가기나 만나기는 싫어서 돈만 부치는 얄팍한 긍휼을 보이지는 않나요. 죽으시는 순종으로 내게 베푸신 주의 긍휼을 생각하며 몸으로 실천하는 긍휼을 보여줘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정말 애통밖에 안됩니다

     

              여섯 번째,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긍휼히 여기는 자는 마음이 청결하다고 한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욕심 없는 빈 마음이나 행위의 청결만 의미하지 않는다. 다윗이 유부녀 밧세바와 불륜을 행하고 계략을 세워 그 남편 우리야를 죽게 하고 거짓말과 살인을 행했다. 행위로는 청결하다고 할 수 없다. 털어서 먼지 안 날 사람은 없지만, 당시 누군가가 도청을 했다면 다윗이 얼마나 걸릴 일이 많아지겠는가. 당장 왕위에서 물러날 만한 엄청난 스캔들이다. 그러나 다윗은 마음이 청결 한 자였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죄를 지적했을 때 즉시 죄를 인정하고 고백했다. 뱃세바 사건을 통해 모친이 죄악 중에서 날 잉태했다고 눈물로 침상을 적심이 우슬초로 나를 청결케 해달라고 자신의 죄를 씻어 달라고 간구했다. 자기 죄를 고백하며 흘리는 눈물이 우리의 마음을 청결케 합니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 나는 잘못한 것이 별로 없어 이런 사람이 청결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부도덕과 비리를 저질렀어도 그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청결한 사람이다.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거듭난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된다. 불신자는 결코 볼 수 없는 하나님이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자연 만물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두 눈을 주신 것을 두 곳을 보라는 것이 아니다. 한 곳을 정확하게 보라는 것이다. 카멜레온은 한쪽 눈은 이쪽을 보고 다른 눈은 저쪽을 볼 수 있다 보니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한다. 사람을 사랑할 때도 양쪽을 쳐다보고 두 마음을 품는 것은 배신이다. 양다리 걸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다들 자신만을 쳐다보기 원한다. 그래서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기도하지만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마음속에 두 마음이 있어 날마다 싸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청결이다. 내가 날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의 연약함과 죄 때문에 너무 아플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가 청결한 자이다.

     

    적용 질문

    하나님이 내게는 안보인다고 불평하는가. 내 죄를 회개하는 눈물로 마음이 청결케 돼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까. 어떤 힘든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일곱 번째. 이렇게 되는 사람은 화평하게 되는 사람이다.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천국에 속한 사람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다. 화평이란 단어는 성경에 무려 400번 정도 나온다. 성경은 평화를 중요시여긴다.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내 속에서의 평화가 이루어졌을 때 이웃과 화평하게 되고 그를 통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어주심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의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다면 우리도 이제 남을 위해서 화목제물이 될 수 있다. 수동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어 다툼과 원망과 갈등의 자리에 들어가 화목제물의 역할을 해야 한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한 유다가 그냥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요셉과 형제들의 중재자 화해자가 된다.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그렇게 된다. 목숨을 걸고 화해자가 된다. 구원 때문에 중재자가 된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이 정도로 수치를 당해봐야 이렇게 화해자가 되는 것 같다. 남편의 수입이 적어 생활의 어려움을 겪던 가정주부가 동네에서 구멍가게를 내고 장사를 시작했다. 정직하고 친절하게 장사를 하니까 날마다 트럭으로 물건을 실어와도 모자를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이 들어와서 여보 어쩌지 우리 때문에 다른 동네 가게들이 망하게 생겼어. 오늘 건너편 가게 문을 닫았대. 다음날부터 부인은 트럭으로 물건을 받지 않았어요. 그래서 몇 가지만 선별해서 받았어요. 물건을 사러 오면 건너편 가게나 다른 가게 가서 살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주어진 여유시간이 생겼어요. 자신이 좋아하던 여유시간이 책 읽기와 글쓰기를 마음 놓고 했습니다. 그 부인은 그 시간에 결국 소설을 썼는데 그 유명한 빙점이다. 그때 일본 돈으로 천만엔 어마어마한 액수의 그런 상금을 받아서 여유도 얻고 재물도 얻었다. 척추카리에스라는 장애를 가진 주부가 이해타산을 포기하고 여유시간에 쓴 글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웃과의 화평을 위해 이익을 포기했을 때 하나님은 돈도 주고 명예도 주셨습니다. 우리들교회 찾아오는 사람도 이 교회 가세요. 저 교회 가세요 제가 좀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이해타산으로 한다면 그래도 됩니다. 여기서 다 회복이 되면 얼마든지 다른 교회 찾아가도 된다. 여러분의 급한 불만 끄시면 여러분들이 가정을 중수하길 바라고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현수막도 그럼에도 살아냅시다. 살아줘서 고마워요. 이런 것만 쓰는 교회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해결되면 정말 가는 사람 안 막고 오는 사람 안 막습니다. 정말 이 마음이 그 마음이에요. 우리들교회에는 현재는 살아나야 되기 때문에 모든 것은 꼭 이것만 옳은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결국은 여러분들이 다 돌아가게 돼 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들교회는 그런 교회다. 다 왔다가 돌아가는 교회에요. 날마다 이런 팔복의 설교하는데 누가 붙어 있겠는가. 조금 해결되었다 하면 다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정말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성숙한 교회라고 생각하고 여러분들 누가 간다고 해도 놀라지 말고 갈 사람이 가나보다라고 생각하기 바랍니다.

     

    적용 질문

    가정과 직장 내의 갈등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인내와 섬김을 보이며 화평을 보입니까? 인간적인 의리나 이해타산 때문에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비겁한 화평은 아닌가요.

     

              마지막 여덟 번째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한다. 10절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내가 주님 때문에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청결하고 화평케 되면 뭐가 기다리고 있다고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팔복대로 사는 사람에게 기다리는 것은 핍박이다. 팔복대로 살기 시작하면 잘했다고 칭찬했다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핍박과 악한 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간디가 팔복을 너무 좋아하는데 이 부분에서 성경책을 집어 던졌대요. 다른 것은 불교나 유교나 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결국 그렇게 살았더니 핍박이 오더라. 부부가 함께 교회를 다니지만, 남편 때문에 힘들어하던 부인이 있었어요. 부인은 평소 자신을 무시하는 남편의 말과 태도로 인해 우울증을 앓았고 날마다 무기력하게 늘어져서 시체처럼 살았다. 부인이 우리들교회 와서 살아나기 시작했다. 시체 같던 사람이 얼굴도 환해지고 목장에서 교제도 잘하고 건강해졌다. 신이 나서 남편에게 교회 이야기 했더니 남편은 너 그 교회 가더니 광신도 되었구나. 교회 가지 마! 그냥 우울증으로 누워있어. 누워있는 것이 더 낫다. 비록 교회 다니는 사람이지만 뭔가 영적인 열등감이 느껴질 때 부인이 믿음으로 기쁘고 즐거워졌는데도 이렇게 핍박을 했습니다. 다 당해본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으로 고문을 당하고 거짓말을 당하고 악한 말을 듣고 누명을 쓰는 것까지는 그래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핍박 속에서 12절처럼 적극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너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신다. 내가 믿음 때문에 핍박당할 때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천국이고 부활이다. 우리는 부부싸움만 해도, 자식이 말을 안 들어도 내가 죽겠어, 못살아가 주제가인데 우리를 핍박하고, 때리고 욕하고 음해하고 모함하고 이런 사람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는 힘들 것 같지 않아요? 이것이 바로 천국일 것 같아요. 팔복의 핵심은 가난이고, 주제는 핍박이라고요. 팔복은 시작도 끝도 천국이다. 주님으로 인해 핍박받지만 환경을 초월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제자가 갈 길이다. 복음은 세상에 고정관념을 깨는 말씀이다. 그래서 복음을 외치는 사람들, 복음대로 사는 사람들을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은 그를 미워했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를 대하는 태도다. 그러니까 당장 우리가 직장에서 술 먹는데 안 끼면 핍박당하죠. 뇌물을 받아야 할 때 같이 사바사바 해서 뇌물 받자고 했을 때 안 받으면 핍박. 오 굉장히 훌륭하다 이런 사람 없죠. 너는 완전히 쪼잔하다 등 별소리를 다한다. 교회 가는 것도 얼마나 핍박받고 오십니까.

     

    적용 질문

    크리스찬으로서 뇌물을 거절하고 술자리를 거절해서 따돌림의 핍박을 받은 적 있는가? 믿음 때문에 참고 양보했다가 미련하다는 악한 말을 들었는가? 그것을 참고 인내하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믿음을 높게 보셨구나 하며 적극적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이 왕따 당했을 때 적극적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요.

     

     

    제가 팔복 말씀을 거꾸로 풀어놓으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심령이 부유한 자는 화가 있나니 지옥이 저희 것임이요. 맞지 않습니까. 안타까운 것이 없는 사람은 지옥이 저희 것이에요. 잘 들으세요. 육이 무너지지 않는 사람은 영이 세워질 수 없어요. 육이 무너지지 않은 사람은 심령이 부유해요. 마가복음에서는 그냥 가난하다고 했어요. 가난한 자가 천국이 임하기가 쉬워요. 부유한 자는 지옥이 저희 것임이요. (부유한 자는 지옥이 네 거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부유한 자가 여기 앉아 있고 싶겠어요? 저는 맨날 성도 쫓는 설교 하는데 일등이에요. 죄 때문에 애통하지 않은 자는 화가 있나니 위로받지 못할 것이요. 남편이 죽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내 죄 때문에 애통하지 않으면 남편이 살아나서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위로받는 것은 내 죄 때문에 애통할 때, 혈기 부리는 자는 화가 있나니 땅을 받지 못해요. 날마다 혈기 부려요. 진급 안 돼서 혈기 부리고, 놀러 가지 못해 혈기 부리고, 리조트 없어서 혈기 부리고. 완전히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해요. 혈기와 분노의 대마왕은 평생 혈기 부리다가 땅을 받지 못한다. 자기 의를 자랑하는 자는 화가 있나니 자기가 맨날 잘났대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대요. 그런 사람은 늘 배고프대요. 그러니까 배고파 죽겠고 불러 죽겠고, 미워 죽겠고, 싫어 죽겠고..

    긍휼히 여기지 않는 자는 화가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이요. 누가 나를 위해 창자가 끊어질 고통으로 기도해주겠습니까. 더러운 자는 화가 있나니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요. 분열케 하는 자는 화가 있나니 사단의 자식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핍박받지 않는 자는 화가 있나니 지옥이 저희 것임이라. 처음에 가난한 자와 핍박받는 자의 복이 제일 큽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으면서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은 지옥이 내거구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예수를 믿는데 핍박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핍박은 따라오는 순서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팔복대로 살기를 끔찍하기 살기를 다른 곳에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성경적으로 가장 확실한 주장은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핍박받는 것이다. 팔복대로 사는 삶이 가장 성공하는 삶이다. 천국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어떤 환난과 고통을 당해도 우리는 괜찮다. 어떤 욕을 먹고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우리는 괜찮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천국을 갈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해도 괜찮다. 잠을 자지 않으면 원하는 회사와 대학합격을 보장해 주겠다고 하면 그까짓 것 얼마든지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잠자고 싶어서 대학과 직장을 포기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 땅에서의 가난과 핍박은 영원하지 않기에 우리는 세상을 포기할 수 있다. 현재의 고난은 잠깐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포기 못 해 영원한 천국을 포기한다면 그것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문제 되지 않고 가난도 문제 되지 않는다. 울어도 괜찮고 잠 못 자는 것도 괜찮고 자존심 상해도 괜찮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부도가 나도 자식이 가출해도 문제없다. 우리의 유일한 문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약속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어떤 일을 당해도 우리는 천국을 놓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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