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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10절~12절 - 팔복산의 상급주일설교 요약 2023. 5. 21. 06:47
팔복산의 상급
마태복음 5:10~12
김양재 담임목사
드디어 팔복산을 한 절 한 절 하려다가 너무 지겨울 것 같아서 세 절을 한꺼번에 해서 마칩니다. 내가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긍휼히 여기고 청결하고 화평케 하면 이제 큰 상을 주셔야 되겠죠. 여러분 어떤 상받고 싶으세요. 이제 상도 좋지만 상급이라고 하면 좀 뽀대가 나보여서 오늘은 마지막 여덟 번째 복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급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팔복산의 상급 첫 번째는 박해로 나타납니다. 10절 11절이에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팔복은 이제 서로 구별되지만 별개인 것처럼 분리되지 않아요.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여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 복과 여덟째 복이 같은데요. 가난으로 출발해서 맨 마지막에 박해로 끝나는데 복은 다같이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 천국의 상이 앞뒤로 포진하고 있어요. 복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어지는 이렇게 이제 시작과 결론인데요. 지금까지 일곱가지 복에 대해서는 한 구절씩 그렇게 했는데 여덟 번째 마지막 복인 의를 위해 박해받은 자의 복에 대한 말씀은 10절부터 12절까지 구절 구절 박해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의를 위해 박해받은 이 축복을 아주 너무 강조했어요. 그만큼 이것이 최고의 복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밑동 잘린 나무 같은 인생에서 이제 박해를 받으면 정말 밑동이 잘렸다는 것을 인식을 하잖아요. 그죠? 인지합니다. 이 땅에서는 힘들겠지만 이 땅에서 소망을 버리게 하시는 것은 정말 상이라고 생각이 돼요. 이 세상에 누릴 것이 많다고 생각하면 정말 이 땅을 떠나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세상에서는 칭찬만 받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저주입니다. 칭찬만 받은 사람 정말 무서워요. 제가 이렇게 목회를 하는 건 어려서부터 많이 밟혔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세상에 가치관을 깨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이렇게 화평케 하는 그런 복을 받기 시작하면 이제 박해받기 시작을 하는데 누가 박해를 좋아하겠어요. 그런데 그 박해가 잘 받아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화평케 한다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화평이 듣기에는 좋지만 화평케 하는 자 입장에서는 이게 세상으로 보면 좁은 길이에요. 누군가를 중재한다는 게 얼마나 좁은 길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길이 복이라는 것이 팔복의 이제 클라이막스라는 것이죠. 이 박해를 받은 자는 완료 분사 수동형으로 이미 시작된 박해가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도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것은 쫓김을 당한다는 것인데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마지막에 박해를 무차별로 주시는 것은 우리가 그릇 행하여 각자 제 길로 가는 양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양 같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시기에 마지막 그 우리로 몰아가시는 것, 이게 박해예요. 우리가 여우가 오니 막 뛰어야 되잖아요. 그렇죠 슛 골인 해야 되잖아요. 팔복의 끝에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일곱째 복까지 겨우 겨우 왔는데 천국 열차에서 내릴까 봐 지금 주님이 걱정이 되셔가지고. 그저 이렇게 팔복은 이미 이제 거듭난 사람이 가는 성화의 복을 이제 말씀하시는데 사명의 길도 되겠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 된 자로 박해가 오면 불신자는 다 도망갈 수 있죠. 그러나 우리 군사는 이렇게 뒤를 보이면 죽잖아요. 그렇죠? 군인은 나라를 지켜야 될 때 사명이 있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서머나 교회 보고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다고 이 면류관이 상이죠. 이기는 자는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막 쫓겨가지만 목자가 지금 몰고 가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주님이 몰아가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이긴 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서머나교회를 10일 동안 옥에 던져 놓는 것처럼 의를 위한 박해가 된다는 거예요.
이제 해석을 잘하셔야 되는데 예를 들어 남편이 바람을 폈을 때 행복을 목적으로 사는 인생에서는 뭐든 그냥 조금이라도 고난, 박해가 화고 저주고 벌일 뿐이에요. 내가 행복을 좇아 살다가 그걸 잡기를 원하지 행복과 정반대인 고난에 쫓김을 당하는 박해를 당하고 싶지 않죠. 내 삶에 이 고난, 박해는 제발 없기를 원하고 내 자녀에게도 결코 있어서는 안 되기를 바라는 일이에요. 얼마나 그게 싫으면 남이 당한 박해 이야기도 듣기도 싫고 무서워요. 생각조차 하기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분 박해가 오면 날마다 하나님 계시면.. 이래요. 하나님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이게 주제 가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보통은 그 사건에 남편이 바람을 폈다. 그 사건에 닥칠 어려움과 그 후폭풍이 두렵기 때문에, 두려워할 뭔가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바람 피우면 나한테 돈 안 줄 거잖아 학비 안 줄 거잖아 이런 두려움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건에게 쫓겨 이제 도망자가 되어 막 시달리는 거예요. 결국은 남편의 바람도 자신의 유익 때문에 두려운 거죠. 그러더가 너무 슬퍼하는 사람한테 남편이 갔는데 평소에 맨날 남편 불평하더니 왜 이렇게 그냥 난리를 치시는 거예요. 그랬더니 이제 눈이 오면은 누가 휘발유 넣어주러 가고 은행에는 누가 가는 거야 이러더라고요. 너무 슬퍼하는 줄 알았더니 그 얘기를 그 일류 엄마가 하더라고요. 하지만 이처럼 어떻게 하나님 계시면 이럴 수가 있는 억울한 일을 겪으면서 힘들어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이거는 너무 이제 괴로워도 가치가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힘든 일은 힘들다고 그걸로 주셨는데 이제 세상에서도 남편을 다 버리고 마음에서 다 지워내고 먹고 살 거 충분히 있고 그러면 전혀 쫓기지 않아요. 세상에서도. 그런데 우리 성도들에게 그 힘든 일을 주신 것은 그러라고 준 게 아니에요. 괴로우라고 주셨어. 괴로워서 힘들어서 주님 만나라고. 나 괜찮아 그런 사람이 더 무서워요. 예수도 없는데 괜찮아 아이 뭐 바람 다 알겠지 뭐 그 믿음으로 안 한 그거 제일 무섭습니다.
내가 기복산의 배부름에 너무 주려서 하나님 아닌 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살았던 그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박해가 오는 거거든요. 내가 무엇을 하나님 자리에 놓았나 이거를 알려주시려고, 이처럼 구원의 사건으로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박해를 주님은 의를 위하여 당하는 박해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러니까 의는 세상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 옳음과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 받는 박해는 의를 위하여 당하는 박해가 아니에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는 백 퍼센트 옳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최고의 일인 구원이에요. 이 구원을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으로 예수님이 곧 의 이십니다. 날마다 반복하지만 날마다 들어도 몰라요. 그래서 이 10절에서 의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을 11절에서는 보다 정확하게 나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의를 위하여가 11절에서는 예수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는 자 그죠? 의가 예수님 맞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 때문에 박해를 당할 때 복이 있다는 거예요.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것이죠.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에스겔이 사로잡힌 지 5년 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셨다고 하죠.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합니다. 천국이 뭐예요. 하늘 천 나라 국 하늘 나라가 임한다는 거예요.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으면. 여러분 우리 너무나 제한적인 이 세상에서 집도 조그맣고 맨날 뭐든지 지금 얼마 살지 모르고 이렇게 이렇게 제한적인 이 세상에서 눈으로 잠시 하늘을 올려다 봐도 그 아름다운 하늘 그 무한한 하늘이 다 내 거래요 내 거. 그 하늘을 날마다 쳐다보면서 잠시의 박해 쯤 견디기 쉽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요한복음 14장 보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그랬어요. 우리는 여기서 거할 곳이 없는데 거할 곳이 많다. 주님은 우리가 늘 이렇게 시청각 교육으로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하늘나라로 지금 상급을 설명하시는 거예요. 그게 내 거라는 거예요. 하늘나라가 내 거.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주인이 내 속에 임한다는 거죠. 영향을 지금 미친다는 거죠. 의를 위하여서 박해를 받으면 하늘나라가 나한테 임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임하는가 오늘 나가면서 다 하늘 한 번씩 쳐다보세요. 저거 내 거구나 비교가 안 되는 그 하늘나라가 내 거예요. 여기서는 제한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맛보지만 저기 모형으로 지금 맛보고 있는 게 진짜다 이 말이에요.
어느 집사님의 남편이 교회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었어요. 아내가 살림을 안 해서 일주일 내내 김치만 먹었다. 목사님께서는 가정이 먼저인지 교회가 먼저 이제 알려주시기 바란다. 이렇게 이제 딱 올렸어요. 물론 안 믿는 남편에게는 잠깐 성경을 보는 것도 하루 종일 살림도 안 하고 성경만 보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어요. 제가 외출도 안 하고 집에서 살림만 하는데도 남편은 저보고 허구한 날 성경만 본다고 이렇게 나무라더라고요. 그러니까 살림을 안 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게 싫으니까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자기 속에 이제 죄의식이 있으니까 다른 거 하면 뭐라 그러지 않는데 이게 예수를 믿고 성경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 박해가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정과 직장에서 내 할 일을 다 했음에도 성경만 본다 교회에 미쳤다 소리를 듣는 것이 박해라고 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정말 믿음 때문에 받은 박해라면 어떤 말을 들어도 종달새의 지저귐 같이 들리며 여유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내 할 일을 안 해서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그거는 박해가 아니라 당연히 들어야 될 말이죠. 이거니까 이렇게 늘 분별을 해야 돼요. 내가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는 자신과 하나님만 알 것이에요. 그런데 두 말은 다 들어도 하나는 종달새처럼 지저귀고 하나는 내가 들어야 될 말이니까 여러분이 화낼 일은 하나도 없어요. 하여튼 이 땅에 화내는 사람은 절대로 리더십을 못 가져요. 이 분조장은 정말 손해를 많이 보는 거예요. 화내는 사람 믿지 않아요. 또 화낼 거니까 그런 사람 어떻게 믿어요. 그렇죠? 안 믿는 배우자를 전도하려면 얼마나 예민하게 깨어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순간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구원받을까 생각하고 깨어 있으려면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이렇게 순결이 정말 이렇게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박해를 받기 싫어하고 너무 기복적이니까 제가 병원에서 전도를 이제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이제 삼십대잖아요. 퇴원할 때 이러는 거예요. 우리 집에 부적이 너무 다닥다닥 붙었는데 그걸 떼어달라고 그러니까 이 사람 확실히 예수 믿었죠. 부족 떼어달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 평신도 집사가 가서 부족 떼기에는 그래서 교회에 전화해서 나이 많은 전도사님한테 이분이 영접을 했는데 부족 좀 떼어달라고 그랬더니 집사님이 가서 떼세요 이러는 거예요. 무서운가 봐요 이 부적을 다 떼는 거 그래서요. 할 수 없이 퇴원하는데 제가 따라가가지고 그때 얼마나 제가 새댁 같아요. 그냥 한옥 같이 다닥다닥 붙은 집에 들어가는 데부터 부적이 쫙 붙어 있고 들어가니까 다 붙어 있는데 제가 뭘 모르니까 그냥 팍팍팍팍 다 떼었잖아요. 다 떼었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박해가 오는 거예요. 그거 다 무서워서 안 떼죠? 그리고 저는 뭘 무식해요. 그냥 그냥 하라면 하는 거예요. 아무 생각이 없이 가서 박박박박 다 떼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참 기억하시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여러분의 박해는 천국이 임하는 박해입니까? 옳음을 증명하려고 참는 박해입니까?
그래서 아직 구원의 사건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고난은 이제 무엇입니까?
제가 이렇게 살아봐서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우리 시어머니가 우리 며느리 최고다, 우리 아들 최고다 그 얘기 들으라고 참고 참고 참다가 위장병 편두통 다 생겼어요. 그 참는 거하고 천국이 임하는 박해하고는 아주 다른 거예요. 겉으로 볼 때는 똑같은 행동 같은데 얼굴에 기쁨이 없어요. 여러분이 이렇게 참으면 팔복산의 상급은 이 박해로 나타났는데 두 번째는 그들만 아닌 내게도 주시는 상급이에요. 11절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3절부터 10절까지 팔복을 다 말씀해 주셨는데요. 11절 12절은 여덟 번째 복에 대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산상수훈의 청중인 너희가 누구인지 특정해 주시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10절까지는 팔복을 받는 사람들을 계속 그들에게 그들에게 천국이 임하면 그들에게 복이 있다 그러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며 그죠? 그들의 것이 근데 이제 다 끝난 이때에 10절까지 그 팔복을 얘기한 다음에 11절부터는 그들이 곧 너희다, 이걸 듣는 그들이 바로 너희다 7장까지 가서 너희에게 말씀을 해주시는 거예요.
제가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말씀 묵상과 가정 중수를 한결같이 이렇게 외치고 오는데요.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라고 이렇게 증언하고 왔어요. 세속사가 아니고 구속사라고 구원이 제일이라고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렇게 지금 십자가를 길로 놓고 이렇게 엄청난 구원을 경험하면서 이제 구속사를 살고 계세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듣기만 하는 데서 멈춰 계신 분들도 꽤 있어요. 오래됐는데 그분들 생각하면 제가 너무 애통해서 진짜 잠이 안 올 지경이에요. 주님이 복 있는 사람을 삼인칭으로 말씀하시니까 자기들이 그 안에 들어가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니 어떻게 가난한 자가 복이 있어 애통하는 자가 어떻게 복이 있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어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어 청결한 자가 복이 있어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어? 아니 복 있는 사람은 그 반대 아니야? 나는 저런 사람이 아니야 될 수도 없고 될 마음도 전혀 없어. 저 말씀은 나랑 상관없는 말씀이야. 나는 내 마음대로 살 거야 이런 분들이 계시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저마다 이유가 다 있겠지만 주님의 말씀을 그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그 말씀 오늘 내게 주시는 바로 지금 1인칭 나 너희 그러니까 그건 1인칭으로 쓸 수는 없잖아요.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지금 안 되기 때문에 맨날 역설의 진리를 못 알아듣는 거죠. 그래서 주님이 친절하게 그들이 바로 너야, 너희야 주님과 그들의 관계가 바로 나와 너의 관계라고 하시는 거예요.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난 모두에게 이 팔복의 말씀을 주신다는 거예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을 때 그래서 너희에게 주신 말씀이 뭔가 하면 구체적으로 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한다고 그랬어요. 그 박해가 구체적으로 11절에 이렇게 나타나는 거예요. 욕이든 박해든 거짓 비방과 비난이든 그것이 나랑 상관없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향한다면 내가 힘들 이유가 하나도 없죠. 그런데 내 가족, 내 친구, 어쨌든 나를 직접 간접적으로 향해 나를 괴롭게 하죠. 내 가족, 나에 대한 비난을 하게 될 때는 그게 아주 문제가 되죠. 아니 내가 싫어하는 사람 제3자를 욕하는데 내가 뭐가 힘들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욕이나 박해나 비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민감하다고요. 주님을 만나 성령으로 자존감이 높아져서 어떤 욕을 들어도 좀 자유로워야 되는데 이 자존심을 동력 삼아서 아주 욕 레이더를 스물네 시간 돌리며 살아요.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비난을 받았다고 여기면서 상처를 받아요. 꿈속에서도 네가 뭐라 그랬어. 그것도 힘들지만 사실 정말 힘든 것은 적극적인 순종으로 주를 위해 수고하고 수고하다가 욕 먹고 박해받고 거짓 모함을 받는 고난이죠.
이제 억울함과 한이 골수에 사묻힌 험한 인생을 살다가 기적적으로 주님을 만났어요. 그래서 결단을 따라 정말 힘들지만 하루하루 순종하면서 십자가 길로 주님을 이제 따르고자 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닥쳤어요. 주님을 따르고 있는 그 모습에 대해 지금 온 세상이 욕을 하고 박해를 하면서 거짓말로 온갖 비방과 비난을 이제 쏟아붓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지금까지 따랐던 그 순종을 위한 모든 에너지와 과거의 한과 억울함까지 다 합친 어마어마한 생색과 원망이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또 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구속사는 유다가 주인공이라고 했어요. 마지막에 또 유다가 빠지면 안 되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여러분들이 못 알아듣기 때문에 다시 반복합니다. 유다가 며느리 보고 그녀는 나보다 옳도다 했어요. 무엇이 나보다 옳은 건가요? 자신은 복수심으로 지금 요셉 팔고 죄책감으로 공동체를 떠나서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 아들 둘이 다 악하다고 성경이 표현하고 있어요. 둘 다 죽었어요. 그러면 그때라도 아 내가 요셉을 팔아서 이런 일이 왔구나 내 삶의 결론이야 돌이키면 좋은데 나오미도 3차 흉년이 올 때까지 말씀이 안 들렸다고 했습니다. 이게 금수저들이 말씀이 안 들리잖아 유다도 안 들렸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계대혼인법은 남편이 죽은 자부를 계속 다른 아들에게 주어서 반드시 후손을 봐야 하는데요. 셋째 아들까지 주면 죽을 것 같아서 자부를 친정으로 가 보냈어요. 회개가 안 되니까 계속 죄를 감추고 그러니까 더욱더 일에 미치고 그리고 이제 이 창기하고 놀았는데 그 창기가 며느리라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 며느리가 이 집안의 영적 후손을 위해 즉 구원을 위해 그 수치스러운 일을 행했다고 지금 나타났어요. 예수씨를 위한 적용을 한 건데 그녀를 불태워서 불에 사르라 하고 죽이려고 했으니까 며느리 다말은 박해 박해 이런 박해가 어디 있겠어요. 지금 예수를 위해서 일을 한 건데 못 알아듣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내 설교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래서 목장에서 아무리 처방을 해도 못 알아듣고 못 알아들으면 꼭 목사를 또 욕을 하고 그래서 나는 저절로 박해를 받는 거예요. 유다는 요셉을 시기하고 팔았잖아요. 아무에게도 말 안 하고 있어요. 지금 며느리는 죽을 가부로 자기와 동침했고 그러니까 구원을 위한 십자가 시혜 타이밍을 다 알았기 때문에 이때가 이때라 이때라 그래가지고 오픈해서 지금까지 인류가 알도록 전 세계가 알도록 이걸 오픈을 했어요. 오픈은 우리들 교회가 하는 게 아니에요. 이게 물론 이게 구원을 위한 오픈이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38장에서부터 그 전서부터 계속 팔아먹고 그런 죄 짓는 얘기가 계속 나오는데 죄에 대한 고백을 안 하니까 계속 아들이 결혼했는데도 죽고 다 악하고 그러니까 일에 미치고 여자랑 놀고 여기까지 유다가 전혀 돌이키지 않잖아요. 그런데 며느리가 그 오픈을 하니까 그냥 완전히 이제 이렇게 들렸어 이걸 들린다 그래요 자기 죄가 보이는 거. 그게 38장 26절에 창세기 분수령적인 이것이 바로 옳다는 것이고 의롭다는 것이에요.
유다는 그 무슨 박해를 받았을까요. 유다는 무슨 박해를 받았을 것 같아요. 유다는 그 며느리 다말이 나온 베레스가 예수님 계보에 올라갔잖아요. 그런데 며느리와 옳도다 하면서 바로 그 절에 그 후로 동침하지 않았다고 나와요 며느리하고 살았다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동침하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이건 음행이 아니라는 거죠.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리고 그렇지만은 이 일은 만천하에 드러났어요. 며느리하고 동침한 시아버지라고 이 믿는 자는 욕을 하고 비방을 했을 것이고 아들 베레스는 자기 아빠라고 해야 되는지 할아버지라고 해야 되는지 베레스도 심한 조롱을 당하며 컸으리라고 생각이 돼요. 이제 그때 다 알려진 거니까 모든 악한 말을 다 들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비방과 모든 악한 말 유다도 다말도 별 악한 말을 다 참 묵묵히 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주홍 씨를 알고 사는 거죠. 그런데 말이죠. 다말은 금세 와서 오픈을 했는데 다말을 보고 그렇게 회개를 했는데도 유다는 이십이년 동안 요셉 얘기를 아버지와 이게 못하더라구요. 기가 막힌 거예요. 이렇게 회개를 해도 못하는 게 또 있더라구요. 그러나 그 못하는 한 가지 때문에 유다는 수없이 회개하고 낮아진 거죠. 그러니까 유다가 훌륭해서라는 게 아니라는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이 들리게 인도하니까 들리는 거고 믿게 하니까 믿는 거지 유다가 믿음이 좋아서 믿고 이런 거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말이 적용한 나보다 옳도다 그 의롭다의 의는 오늘 마태복음의 의와 같은 의인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때문에 다말도 유다도 십자가 진 같은 조롱과 욕을 받아낸 거예요. 근데 이제 그게 때가 이십이년이니까 그 이십이년 만에 모두에게 천국의 창대함을 보여줄 수 있는 화해를 하게 한 거죠. 바로 이거예요. 여러분 이게 바로 구속사예요. 아무리 들려줘도 모르시는 여러분 그러니까 이게 들리면 그렇게 왜 오픈을 왜 해요. 난 우리들교회에 그렇게 왜 그렇게 센 얘기를 하는지 모르고 이게 성경적인 얘기되는 거예요. 이게 팔복의 클라이막스라는 거예요. 이해가 되십니까? 그럼 저를 향한 비방을 좀 그쳐주시면 어떨까요. 저는 유다처럼 대단한 이 구속사의 직계 조상은 아니지만 한편 이렇게 유다처럼 인정받지 못하는 저는 이제 여자 목사라는 태생적인 고난이 있기 때문에 이게 너무 와닿는 거예요. 말씀이 이해 안 되는 분들의 고정관념은 이게 대단한 거거든요. 다 여자다 뭐다 뭐다 이제 이런 거 다멜도 그랬을 거고 유다도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유교 나라인 우리나라에서 이 삼성동 판교 한복판에 이 고정관념을 뚫고 우리들교회 와주신 성도 여러분들은 정말 팔복사의 상급을 받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대단한 분들이 여기 모였어요. 여러분이 일당 백천 하실 분들이 모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이게 나에게 주신 음성이 들려야 되고 예수 때문에 갖은 비방과 욕과 조롱을 다 받아내는 것이 상급이 있는 인생이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이제 어떤 집사님이 매까지 맞아가면서 남편과 시댁에 이 심한 박해 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섬겼는데 진짜 어린 딸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목사에게 당했다는 거예요. 이게 이게 누구에게 알릴 수도 없고 덮어두자니 기가 막히고 이 교회에 알려야 하나요.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요. 여러분 그러니까 이 의를 위한 박해는 굉장히 구체적으로 우리가 정말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일들이 많이 있어요. 이 시댁은 교회라면 이를 가는 집인데 이게 어떻게 해야 돼요 더군다나 아이가 어려요. 이게 진짜 삼중 박해가 온 거예요. 이럴 때 여러분들은 옳고 그름만 생각하는 거죠. 경찰이 알리면 그 아이는 어떻게 해야 되는데 평생 그거를 어떻게 짊어지고 사는데요. 근데 어떻게 또 그냥 넘어갑니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이런 일이 우리 중에도 끊임없이 일어나요. 그럼 이 사건에서 구원의 사건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유다 얘기가 또 나오잖아요. 어떤 경우에도 내가 보여야 할 구원의 핵심은 당신이 옳도다잖아요. 내 죄를 보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뭔 죄를 봐야 될까요. 이 박해 속에서 교회를 다니는 것이 이분에게 의로움이 될까 봐 하나님이 사건을 주실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대단한 박해를 무릅쓰면서 교회를 다녔다. 지금 사건 속에서 객관적으로 내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보는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하는데요. 여기서 지금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에요. 세상은 갈수록 악하고 음란해요. 그렇다고 또 교회를 안 가야 합니까 그렇다고 교회라고 누가 지켜줍니까 또 믿음의 불량이 교회도 천차만별인 거예요. 얼마나 주차하면서 여러분들 맨날 싸워야 되는지 몰라요. 진짜 믿음이 천차만별이에요. 다 욕하고 하면 다 우리들 교회 교인이라는 거 싸움 닭들만 다 이렇게 모여가지고 그러니까 또 이 팔복산 오르겠죠. 뭐 잘 싸우니까 이렇게 그냥 먼저 가려고 그러고 그냥 그러니까 부모가 영적으로 깨워서 자녀를 지키고 가르쳐야 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박해당하면서 교회 가니까 하나님 다 지켜주시겠지 내가 기도하니까 하나님 다 책임져주시겠지가 아니라 그럴수록 나는 내 자리에서 철저히 해야 할 역할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박해를 받으니까 그 맹목적인 열심으로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이제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혜롭게 인도함을 받는 신앙생활로 이제 바꾸라고 이 사건이 온 거예요. 그래도 그 엄마가 만세 년부터 택자가 돼가지고 섣불리 말을 내지 않고 제게 메일을 보내신 것은 정말 참 성숙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해요. 당장 쫓아가서 따지고 슬프고 미워하고 세상 사람들은 돈 내나라서부터 별걸 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일 때 이야말로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일이 되는 거죠. 구원 때문에 생각하는 거 물론 이 사건이 나이와 그거에 따라서 알리고 신고하고는 때마다 다 달라요 지금 이제 예 근데 비둘기같이 이렇게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큐티와 나눔이 너무 중요합니다. 항상 묻고 나누고 해야 하는데 열심히 가는데 물을 사람이 없으니까 혼자만 교회를 다니다 지금 변을 당할 수 있어요. 근데 이렇게 해석을 잘하면 이때 주님을 만나게 되면 일생의 복이 될 수 있어요. 그분과 그 가정이 진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되셨어요.여러분 지금 듣는 욕 당하는 박해 받는 악한 비방에 속지 마시고요 천국의 복을 붙잡으시고 끝까지 믿음의 등반을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욕과 박해 거짓된 악한 말로 비방받으며 내가 복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어집니까 내가 받은 박해가 전도의 열매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팔복산 산행길에서 어느 구간을 지나고 있어요.
여러분 아까 기도하셨는데 자꾸 내리막길로 가고 싶다고 그러는데 오르막길입니까 내리막길입니까
내가 이쯤 올라갔으면 됐어 이제 내려갈 거야 그건 없어요. 우리는 올라가 올라가 팔복산의 상급은 세 번째는 지금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12절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주님 팔복 설교의 결론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명령이에요. 그런데 육체적으로 고문과 악한 말을 하는 건 참지만 나를 박해할 때 적극적으로 기뻐하는 것은 100번 어렵습니다. 변함없이 힘든 상황에서 말씀을 힘입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늘에서 우리가 받을 상이 지금 크다 그러잖아요. 그러면 하늘의 큰 상은 무엇일까요. 베드로전서 1장 6절에서 9절이에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이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 사도는 아마 예수님의 팔복 설교를 듣고 이 구절을 쓴 것 같은데요. 힘든 이 세상 사는 동안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천국의 상이 믿음에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이라 그러잖아요. 할렐리아 늘 우리들교회에서 말하는 결론이 성경에 다 있어요. 이렇게 영혼 구원 영원 권 지금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같고 아직 멀리 있는 것 같아 답답할 때도 있죠. 하지만 이 구원과 천국은 누가 줍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에요. 구원과 천국도 하나님 안에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하면 구원과 천국은 저절로 따라오는 거죠. 그러니까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희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창세기 15장 1절에 하나님 자체가 가장 큰 상급이라는 말씀이에요. 또 계시록 22장 12절에도 우리에게 내가 줄 상이 내게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받을 하늘의 가장 큰 상은 결국 하나님 자신이에요. 하나님 자체를 기뻐해야 되는 거예요. 다이아몬드 믿고 좋아하지 말고 하나님 자체 그 신랑 자체가 상급이 돼야 되지 신랑이 주는 여자가 주는 외모 이게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가 욕을 먹을 때나 박해를 당할 때나 온갖 악한 말로 비난을 받을 때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그 모든 고난을 같이 통과하시는 거예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면서 넘어질 때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고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성령의 안아주심으로 우리를 꼭 안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위해 우리가 한 수고가 뭐예요. 우리는 노력에 걸맞는 상만 받아도 너무 기쁘고 즐겁잖아요. 근데 노력에 걸맞는 상을 받습니까 살아갈수록 그거 안 된다는 거를 경험하잖아요. 전적으로 지금 수동적으로 내 힘이 아닌 오직 주의 은혜로 지금 내가 믿음 위에 서 있는 성도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합격자도 아니고 승자도 아니고 나는 바로 택자인 거예요. 합격 승자 이딴 얘기하지 말고 전적인 은혜로 택하심을 받아서 성령에 거하는 전이 된 거예요.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러분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추상적인 게 아닙니다.
첫째는 우리가 주님 안에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 안에 거하는 거예요. 공동체에 꼭 붙어 있는 게 주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 즉 말씀 묵상이라는 거죠. 말씀과 공동체가 바로 주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팔복이오 이것이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큰 상이며 지금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인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너무 열심히 교회를 갔는데 딸이 그렇게 추행을 받을 정도로 이제 너무 이 엄마가 기복산을 향하여서 갔다는 걸 깨닫게 된 거예요. 교회만 가면 다 복을 받아 내가 이렇게 매 맞고 교회 가 그러니까 교회 가는데 모든 목적을 두고 있는 거예요. 그거를 깨닫게 하느라고 딸이 수고를 한 거죠. 그 목사가 수고를 하고 그러니까 이렇게 해석을 해야 되는데 이놈 저놈 죽이고 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거야 보면 내가 막 화내는 건 결국 기복산에 있기 때문이에요. 언제나 부글부글 끓은 거는 기복산에 있어서 정죄하고 단죄하고.
적용 질문이에요. 박해받으며 기뻐하고 즐거워합니까 하나님 자체가 상급입니까 하나님이 주신다면 환경이 상급입니까?
그런데 이제 우리들교회의 성도의 적용은 정말 다른 거예요. 구속사적인 적용을 다 시행착오를 겪어야 되겠지만 이제 대표 기도를 위해서 초원 카톡방에 기도를 부탁하셨어요. 집사님의 딸이 중학교 때 학교에서 학폭으로 괴롭힘을 당하는데 그 정도가 심각한 줄 모르고 이제 가해 학생의 엄마를 전도를 한 거예요. 그래서 엄마로서 자녀의 아픔을 먼저 헤아리기보다 가해 학생의 엄마를 이제 목원으로 두고 목자 입장에서 학폭 신고를 만류한 거야 안 한 거예요. 근데 그 일로 이 딸은 엄마가 나에게서 너무 분해가지고 교회를 빼앗아갔다면서 그때부터 중학교 때부터 예배와 공동체에서 멀어져 갔어요. 그리고 중고등부 시절을 다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이제 한 삼수 해서 이제 대학을 갔는데 이제 갔으니까 청년부 목장을 권면하는 제게 딸이 온 교인이 다 보는 곳에 엄마 죄를 오픈하는 글을 올리라며 그때까지 목장은 입도 떼지 마라 이런 명령을 내렸어요. 그런데 이제 온전한 화평은 양쪽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믿음이란 미명 아래 학폭으로 힘든 가운데 있는 딸에게 참으로 희생을 강요하고 가해 학생이 또 아이 이렇게 엄마가 여러 가지 거기 힘든 것만 계속 생각을 하고 엄마와 일시적인 화평만 이루려고 했던 것이 연약한 딸을 찌르고 고통의 짐을 지우고 구원을 가로막은 문제의 엄마였음을 딸에게 진심으로 전하고 이제 사죄할 수 있도록 기도 다 올렸어요. 딸이 목장 가지 않고 내 죄를 오픈하라 기회를 주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이고 하나님이 나에게 베푼 구원의 날임을 깨닫고 딸의 심령 안에 예수 씨가 싹을 틔워주실 때까지 애통함으로 잘 기다리는 적용을 이제 하도록 그래서 이제 드디어 대표 기도 때 회개를 하셨어요. 그런데 대표 기도는 딸 얘기만 다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이제 한 구절 했어요. 열등감에 갇혀 내 안에 화평이 없다 보니 화폭으로 시달리는 딸의 괴로워하는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내 의로 가해 학생의 엄마와 일시적인 화평을 듯 이루려다 본질적인 딸의 구원을 가로막은 문제의 엄마임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렇게 하나 넣었어요. 그런데 딸이 그 기도 영상을 보고는 자기가 말한 대로 안 하고 한 줄로 딱 지나갔기 때문에 안 돼 그래서 이제 그 초원 큐티 방에 올린 이 기도 제목 이거를 보여 줬더니 진정성이 전달이 됐는지 가족 톡방에 글을 올렸다는 거예요. 엄마한테 피해받았다는 입장이라는 이유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오픈하라고 한 거 사실 미안했어 반말 그대로 제가 쓰겠어요. 얘가 또 뭘 엄마한테 존댓말까지 하겠어요. 나한테는 너무나 큰일이었기에 그 일 자체를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고 원망스러웠던 것 같아 나한테는 유일하게 용기 내서 할 수 있는 반항이 목장 나가지 않는 것밖에 없었고 엄마가 내가 나가지 않는다는 이유보다 나가지 않는 결과를 보는 게 너무 서운했었어. 근데 지금 올린 걸 보니까 그래도 엄마가 나에게 진심으로 미안했구나라는 게 느껴져 사실 오래전부터 엄마에 대한 마음은 용서했을지도 몰라 근데 내 마음속에 교회가 엄마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아 교회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부정적으로 얘기한 것 같아 그런데 이제 나도 앞으로 목장 잘 참석할게 학교 생활도 착실히 하고 잘 챙겨 나가볼게 고마워 이게 7, 8년 만에 고백이에요.그러니 청소년기를 잃어버렸으니 이 부부는 교회가 인생의 목적이에요. 과정이오 수단이오 처음이오 마지막인데 엄마가 또 답을 했어요. 용서하고 이해해줘서 고마워 지난 날 잘못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앞으로는 공감하는 엄마가 되도록 노력할게 정말 미안하다 그러니까 진정한 화평으로 인도해 주시며 말씀대로 이 문제가 해석되고 지금 이제 이걸 언제 할까 했는데 정말 너무 설교하고 지금 이게 다 맞아떨어진 거예요. 말씀대로 문제가 해석되고 적용 하고 응하는 인생을 살게 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문제로 온 집안이 박해하니 엄청난 박해를 당했지만 결국 전도한 그 학생 엄마는 지금 눈물로 말씀을 사모하는 부목자가 되었어요. 딸도 다시 교회 나오게 되어 부부는 이 문제로 날마다 회개하면서 기도하면서 바로 이런 것이 구원 때문에 박해받은 팔복산의 상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중고등학교 때 이렇게 안 나오고 목장도 안 나오는 딸을 보면서 우리들 교회를 그렇게 여기가 진짜 다 그러고 나오기가 어렵잖아요. 그죠? 그래서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그러잖아요. 천국이 저희 것이며 하늘 아래 상이 크다. 그런데 결국 전도한 거잖아요. 가해 학생을 용서하고 전도하고 예 화폭에 신고를 안 하고 그때 너무 바보같지만은 결국 지나가니까 다 해결이 된 거잖아요. 할렐루야 영원히 엄마 아버지가 잘 기다려주고 얼마나 노심초사했겠어요. 말만 떨어져도 네 그랬을 거 아니야 엄마가 딸이 뭐라 그래도 니 구원 때문에 예 그렇게 살았어요. 그걸 알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이게 축복인지 몰라요 의를 위해서 박해받는 것이 말씀 맺을게요 팔복사의 상급은 박해로 나타나는 거예요. 박해는 진정한 상급을 주시기 위한 가면인 거예요. 천국은 그들의 것이 아니고 내게도 주시는 상급이에요.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애가 학교에 교회로 돌아와서가 아니라 지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돼. 지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되고 그것이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되는 것이에요.'주일설교 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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