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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9절 - 팔복산의 상속자주일설교 요약 2023. 5. 21. 06:45
마태복음 5장 9절
팔복산의 상속자
김양재 목사
우리는 계속해서 지금 마태복음 5장 팔복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요. 팔복산에서 가난한 자가 누릴 애통과 온유와 의의 주림으로 배부르게 되고 팔복산의 통로인 긍휼로 팔복산의 시력인 청결을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청결함으로 오늘 화평으로 나가게 된다고 해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상속자의 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복은 가장 수준 높은 복이에요. 그런데 제가 결혼하고 날마다 이제 식기도 할 때마다 말씀은 하나도 모르니까 제가 날마다 남편과 어머니가 화내지 않게 좀 화평하게 해주세요. 그냥 오직 그 기도한 것이 너무 기억이 나는데 군대 같은 시집살이니까 하루 세 끼를 꼬박 먹으면서 세 번은 식기도 때마다 눈을 감아야 되잖아요. 그때 진짜 이렇게 화평을 읊조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상속자의 화평의 개념과는 너무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은 팔복산의 상속자가 되는 일곱째 복 화평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볼게요.
팔복산의 상속자는 첫째로 상대와 함께 화평을 누립니다. 9절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러니까 화평하게 한다는 것은 싸움과 갈등을 없앤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잖아요. 그러니까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가 바로 이런 것이었어요. 로마가 힘으로 상대를 제 앞에서 로마의 뜻을 거스를 그 대적이 없는 것이 로마의 평화였어요. 그런데 이것은 로마 입장에서만 평화지요. 제압당한 상대 입장에서는 절대 평화라고 할 수 없잖아요. 옛날 중국의 중화사상이나 근대 서구의 제국주의도 다 같은 부류입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의 유대인 학살은 전 세계에서는 천인공노 할 사건이지만 독일인 히틀러는 고대 3대 문명을 멸망시킨 아리안족이 자기 민족으로서 이제 유럽을 제패를 하게 되니까 이제 세계를 지배해야 되는데 이때 가장 걸림돌이 되는 유대인은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인종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반유대주의에 다 깊이 가담을 해가지고 이 600만 명을 죽이는데 온 나라가 기차로, 우편으로, 행정기관, 은행, 교회 등등이 아무도 저항이 없이 같이 동참 했다는 것이죠. 그들을 죽이는데 개종을 해도 소용없고 3대 혹은 4대 위에라도 유태인 조부가 있는 사람은 그들의 조부가 1871년 1월 18일 이전에 개종한 것이 아니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몰살을 당했어요. 독일은 이제 승자의 나라니까 화평했겠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참혹 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악해도, 나, 내 가족, 내 고향, 내 나라는 똘똘 뭉쳐서 자국의 이익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가 다 죄인이라는 징표인 거예요.
화평하게 하는 자라는 헬라어 단어 에이레노포이노이는 성경에서 여기 단 한 번 쓰인 단어인데요. 워낙 화평은 히브리어로는 샬롬,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근데 여기 이제 에이레노포이노로 이제 복수로 이렇게 쓰여 졌는데 평화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데 이러한 표현은 이 세상은 인간 사이나, 나라 사이나, 생태계나 이미 평화가 깨어진 세상이기 때문에 아주 평화가 복원 돼야 하는 세상임을 전제하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세상을 의미해요. 지금 우리나라도 자기 편이 말하면 무조건 옳다 의 시대를 살고 있어요. 예전에는 가난하고 살기 힘든 때는 다 교회로 피했어요. 그래서 유례없는 기독교의 번성을 가져왔는데요. 번영을 주시니까 이제 인권의 시대가 도래했어요. 이게 좋은 것 같지만은 저는 태어나서 가장 무서운 시대를 지금 살고 있다고 생각이 돼요.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림을 받는 것은 정말 처음인 것 같아요.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렇게 갑자기 부흥하니까 굉장히 기독교에 대한 피해의식도 있어 보이고요. 문제만 났다 하면 기독교라고 지금 부각이 되고 실제로 눈살 찌푸릴 일이 참 많습니다.
그 반유대주의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유대인들의 원죄가 있죠. 그래서 항상 문제가 생길 때는 거슬러 올라가 봐야 돼요. 그 원죄는 예수님을 죽인 죄예요. 빌라도가 예수님을 그렇게 살려주려고 했는데 끝까지 죽이라고 하니까 나는 예수의 피에 대하여서 무지하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 마태복음에 읽어보세요. 그러면서 피를 우리 자손들에게 돌려도 좋으니까 예수를 꼭 죽여라. 사람이 죄를 모르면 이렇게 엄청난 말을 함부로 하고 결국 성경대로 이루어졌어요. 이스라엘이 2천년 동안 예수 죽인 값을 아주 톡톡히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남편과 아내가 부부 싸움을 할 때, 화해할 때 또 이렇게 힘 있는 사람이 기준이 되잖아요. 돈, 성격, 외모, 뭐 여하튼 어떤 힘이 조금이라도 더 있는 힘센 사람이 정한 질서에 따라 한쪽이 양보하면 이제 겉으로는 화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참던 쪽이 인내심이 폭발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다시 싸움이 나잖아요. 그럼 또 화해하고 또 싸우고 이러기를 반복하는 것이 우리 부부 생활 아니겠습니까. 이런 반복을 부부 사이의 화평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죠. 온전한 화평을 다투고 대립하던 양쪽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해요. 이것은 질서에 따른 조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상태인데요. 힘 있는 어느 누구의 질서가 아닌 온 우주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질서가 기준이 된 것이 가장 완전한 조화이고 이것을 화평 바로 샬롬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의 모든 질서도 화평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생각지 말아야 할 일시적 화평이 있어요. 마태복음 10장 34절부터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집안에서 싸울 수 있죠. 그런데 복음 없이 화평해지는 것은 영원한 화평이 아니라는 것이죠. 싸움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지 화평을 위해서 가족의 화목을 위해서 싸움만 그치는 것을 생각지 말라는 거예요. 진정한 화평은 가족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인데요. 이럴 때 이 거짓된 연민과 위장된 감정과 이런 일시적 화평이 깨지는 것을 생각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건 깨져야 된다는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나 딸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는 거예요. 진정한 화평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유난히 핏줄 타령을 하는 한국에서도 식구들끼리 죽이고 다투는 사건이 날마다 뉴스에 나옵니다. 바로 그 핏줄 타령 때문에 불화가 생긴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요. 인간적인 화평을 원하면서 가족에게 집착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정말 싸움이 많은 이유는 정이 많기 때문이라거든요. 그러니까 정이 많으니까 기대한 만큼 안 돌아오면 분노하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다 미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새엄마 새 아버지가 잘해도 핏줄은 그냥 마지막에 저절로 뭉치는 것이 있어요. 남북 이산 찾기에도 다들 부부는 안 찾던데요. 더군다나 재혼은 더더욱 안 찾아요. 그러니까 핏줄만 찾아요. 그래서 이혼은 절대 안 해야 해요. 정말 이혼은 삼사대로 온 가족이 원수가 되어서 미워하고 분노하고 아주 멘탈이 붕괴되는 것을 수없이 봅니다. 그런데 권세와 제물을 포기하면 싸움도 복음 때문에 담대해지고 진정한 평화가 넘치는데요. 이 진정한 화평을 위해서 주님은 일시적인 화평을 깰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적용 질문이에요.여러분의 화평은 한쪽짜리 이기적 화평입니까? 양쪽을 위한 이타적인 화평입니까? 일시적인 화평을 지키려고 주일을 어기는 배우자 자녀를 지금 못 본 체합니까? 그러다가 마지막에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원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백마디 듣기 좋은 말은 한마디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임을 실천하십니까?
한 목자님의 아버님이 갑자기 주무시다가 잘못됐습니다 부처님 하나님! 하시길래 무슨 꿈을 꾸셨냐고 물어보니까 꿈에 하나님도 보이고 부처님도 보였대요. 여러분 그렇다고 양쪽의 화평을 부처님, 하나님에게서 찾으시면 안 됩니다. 이 아버님은 세례 받으시기 바래요. 아들이 원하시니까 꼭 받으시기 바래요.
팔복산의 상속자는 양쪽의 화평을 다 원해야 되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룹니다. 9절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 화평하게 하는 자의 동사형이 또 신약에서 딱 한 번 나오는데요. 골로새서 1장 20절이에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러니까 이제 화목하게 되는 길은 십자가 밖에 없는데요.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한 사람이 죽어지고 썩어지고 밀알이 되었을 때 하나님과 모든 사람을 화목케 했어요.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이 구절이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단어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상속자라는 표현이 나오는 유일한 구절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똑같이 상속을 받는 상속자 신분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빠질 수 없는 게 뭐예요? 지금 고난을 함께 받으라고 그러잖아요. 영광을 받기 위한 이 고난, 면류관을 쓰기 위한 이 십자가의 가시관을 받아야 그게 혼자 받는 게 아니고 주님과 함께 받으니까 힘들지만 따라갈 사람이, 돈을 보고 따라갈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공동으로 상속자가 됐다 이겁니다. 공동상속인 아시겠죠? 우리가 대단한 정말 신분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어요. 고린도후서 보면.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화평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가족과 이웃을 십자가를 길로 놓고 화목하게 해야 할 사명을 받은 거예요. 십자가로 화목하게 해야 돼. 입으로만 아니고요.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 2장 5절에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케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셨다는 것을 들을지어다의 명령으로 지금 우리가 들어야 해요. 그러니까 여러분 뭐가 가난해요? 재물과 용모와 스펙과 여러 가지 환경 등 인정받고 있는 부분에서 가난해지기란 인간의 죄성으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쁜 사람, 돈 많은 사람, 뭐 스펙 있는 사람 불가능해요. 가난해지지 않아요. 그러므로 그 부자가 믿음에 부요하면 너무 좋겠지만은 그런 모델을 찾기가 쉽지가 않아요. 부요한 사람이 믿음에도 부요하면 좋겠는데. 자 그러면 아내나 남편이 인생의 원수 같은가요? 근데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마음에 쏙 드는 배우자하고 살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최고의 신랑이신 주님을 사모하시겠어요? 배우자가 마음에 안 드는 만큼만 내 신랑 주님을 사모하게 돼 있다니까요. 제가 뺑덕엄마이라서 드리는 말씀은 아니구요. 그러니까 자꾸 배우자 바꿀 생각 하지 마시구요. 주님 신랑 만나는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별 인생이 없으니까 고쳐 쓰세요. 정말 아주 진심으로 드리는 말이에요.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에요. 육이 무너지는 것 만큼만 영이 세워져서 주님이 보이는 거예요. 지금 완전히 다 금그릇인데 보이겠습니까?
38절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우린 특별히 여기서 자녀가 더 많이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자녀 아까 핏줄 타령도 했지만 나의 분신 같은 자녀를 주님보다 사랑하지 않으려면 자기 부인이 필요해요. 그런데 내 자녀 품질이 좋으면 교만해서 자기 부인이 필요하고 품질이 나빠도 열등감으로 닥달을 해대기에 자기 부인이 필요해요. 이 땅에서 썩어질 것을 버림으로 얻는 종교가 기독교라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를 따르라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의 처형장을 바라보면서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길로 놓는 거 이게 너무 중요하다고요. 그러니까 자꾸 이혼하고 뭐 그만두고 이러면서 나를 따르라 그러시면 안 돼요. 힘든 아내 남편과 사는 게 얼마나 자녀를 주께로 인도하는 비결인지 몰라요. 거기서 이혼하고 이게 환경을 바꾸라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 똑같이 예수님과 똑같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화평을 막아요. 여러분들은 그 환경을 피해서 내가 좋은 이 싸움이 없어 그냥 저기 뭐야 술 먹고 난리를 쳐서 헤어져서 화평을 주려고 하지만 그거가 깨어져야 할 일시적인 화평이라는 거예요. 그 주님보다 더 사랑하여서 그렇게 갔는데 본질적인 화평, 주님과의 화평을 을 막는 거예요. 그 일시적인 화평을 깨지를 못해가지고 그게 막는 거예요.
유대인들은요 이천 년 동안 죗값을 지금 받아옵니다만 그들이 1941 년에서 44년까지 유대인들이 유럽 전역에서 잡혀왔어요. 독일이 이제 승기를 잡았기 때문에 모두가 독일의 식민지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4대째까지 유태인이라고 유자만 들어가도 다 잡아왔는데 그 무서운 가운데서도 이들은요 가스실에 들어가서 한결같이 항거하지 않고 순종하며 조용히 죽어갔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세계는 그 후에 종전 후에 너무 놀랐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600만 명이 항거하지 않아서. 그럼 여기서 제가 이제 이거는 무슨 책에 나온 얘기가 아니고 제가 묵상한 거기 때문에. 그럼 이게 자기 부인일까요? 이게 자기 부인일까요? 생각해보세요. 유대인들은 정말 예수님의 친족이잖아요. 바울이 그 유대인들을 위해 그다지도 기도했지만 그 기가 막힌 학살을 당했는데도 그들의 조상은 누군가 하면 아브라함과 다윗, 모세인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의 가정교육 외치면서 앞다퉈 가면서 탈무드, 토라를 다 읽히잖아요. 세계도 그들이 너무 똑똑하고 부자이기 때문에 다 따라합니다. 그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세계 경제를 지금 주름 잡고 있잖아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지나간 아브라함, 다윗, 모세 다 존경하는데 지금 있잖아요. 이 땅에 사생아 목수로 온 예수님, 이 십자가의 예수님, 도저히 자기 자기 집안인데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를 믿어지질 않아. 믿을 수가 없어요. 이들은 금그릇 중에 금그릇인 그들은 영육간에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히틀러도 암암리 유대인들을 죽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하나님의 제사장 된 민족이라고 문자적으로 생각을 하니까 아리안족이 세계를 제패 하는데 가장 걸림돌인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몰살을 시킨 거예요. 히틀러는 자기 민족이 우월하기 때문에 장애아 뭐 이런 사람도 다 죽였어요. 그래서 1100만 명인가를 죽였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선민의식이 하늘에 달아서 핍박당하는 것만 억울합니다. 유대인인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예수 믿고 돌아오면 그다음부터 하나님이 일하실텐데 2000년의 고난과 유대인 학살 그 참혹한 가운데서도 안 믿어지는 게 예수더라구요. 저는 아주 뭐 알았지만은 여러분 2000년을 무시 당해도 못 믿는 게 예수님이네요. 그들은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죠. 우리 다 이런 나 하나님 믿어 다 이러죠. 그리고 교회 안 나오고. 하나님 믿어 그러면서 목장 안 나오고 이런 사람 많아요. 예수님 믿는 거 하나님 믿는 거의 차이를 아무리 설명해도 이게 성령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행위로는 유대인들을 따라갈 자가 없어요. 우리가 안 믿는 사람이 행위 구원을 외치면 따라갈 자가 없잖아요. 제가 우리 남편을 보면서 봤어요. 그러므로 정말 구원은 선물 중에 선물인데요. 이것이 지금 총리 요셉과 며느리와 동침한 유다의 차이와 마찬가지인 거예요. 여러분이 유다가 이해가 안 되는 이유와 똑같애요.
지지난주에 유다와 요셉을 이해했냐는 질문을 제가 드렸어요. 그래서 이제 몇 분의 나눔을 좀 읽어드릴게요. 어렸을 때 성경학교 퀴즈할 때 성경에서 가장 존경한 인물이 누구냐고 해서 손 들고 유다요 그랬대요. 왜냐하면 유다가 우리 유씨인 줄 알고 그랬다는 거예요. 이분의 이름이 유진주예요. 남자분인데. 그분을 어저께 주례 하면서 엘레베이터에서 만났어요. 그래서 이름이 유진주라고 그래서 어머 유다 내가 얘기하니까 어떻게 아세요. 목사님 제가 이렇게 알아요. 여러분 그분은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이번 주일에 그렇게 목원으로 나눔을 했는데 그러니까 이분이 지금 생각하니까 대답 잘했잖아요. 그걸 우리들교회에 와서 답을 찾았습니다. 요셉을 살리는데 큰 역할을 미리 했던 싹수가 있던 사람이고 선한 마음을 갖고 있잖아요. 결국 이 분도 유다가 구원받을 만한 행위가 있다고 지금 얘기를 하는 거예요. 또 한 분은 성경적으로 목사님이 말씀하시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사람으로서는 절대 이해 안 되죠 유다. 내가 다른 거면 다 모르겠지만 며느리와 동침 했다는 건 정말 아닌 거 같아요. 요셉이 자기 버린 형들을 솔직히 용서해 주고 받아주고 돌봐주고 그랬는데 하나님이 끝까지 안 봐주신 거예요. 뭘 안 봐줬냐고. 그러니까 자기 죄를 못 보면 그럴 수 있으니까 그냥 그 정도까지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며느리하고 동침 했으니까 이해 안 간다는 거예요. 여기도 행위를 못 넘어가는 거죠. 하여튼 드러나는 행위 가지고 우리는 죽여라 살려라 하는 거예요. 우리 인생 전체가. 또 한 분은 아니 야곱이 믿음의 조상인데 콩가루라니 말이 돼요? 저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요. 아니 야곱 시대가 지금부터 3천 년 전인데 고대 시대에 지금 현대 시대를 비교하는 거는 그렇죠. 당시에는 당연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성경적으로 구속사는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그거하고 이거하고 뭔 차이가 있죠? 성경적으로 이해가 가는데 어떻게 야곱을 콩가루라 그러냐. 목장에서 다시 한번 물어보세요. 또 한 분은 선데이 서울에서 나올 법한 19금 같은 이야기라서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됐어요. 성경에 있는 걸 어떡하라고요. 인간 말종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고 제가 바른 생활과이다 보니 더욱 이해가 안 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이런 분들이 특별히 유다가 안 믿어지는 거예요. 난 신앙생활 잘했다. 그런 듣도 보다 못한 유다 이야기는 여기 와서 처음 들었다. 또 한 분은 저는 구원을 위한 추상적인 그런 거에 사명감 없어요. 저는 공동체에 지금 붙어 가는 것이 억지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구속사의 팔복산과 기복산을 놓고 설교하시는 이 시간이 제게는 고통이에요. 저게 어떻게 다를 수가 있지. 그런데 또 기도하실 때는 아이디어가 잘 되게 해주시고 프로젝트가 잘 되게 해주시고 이게 앞뒤가 안 맞지 않아요? 그러니까 뭐 말로는 무슨 뜻인지 알아도 나한텐 적용이 안 돼요. 그런데 작년 남편의 사고 또 딸의 사건은 내 인생에 그것만 구속사로 받아들여집니다. 여러분 이런 이원론이 어디있어요. 고난 당한 것만 구속사로 받아들여지고. 그래도 예전에는 떠날 궁리 했는데 지금은 그건 아니고 없었으면 여기 앉아 있을 수도 없지요. 교회를 이제 많이 다니신 분들이에요. 그래도 저는 우리들 교회가 목장마다 이렇게 솔직하게 나누어 주시는 게 이게 너무 감사한 거예요. 최고예요. 하나님의 자녀 된 사실이 참 별것 아닌 것 같고 카멜레온처럼 자꾸 세상으로 한쪽 눈이 돌아가지만 그때마다 말씀으로 돌이키는 거 이것도 영적 싸움에 이기는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힘들고 지치고 정말 낙망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내가 전자동으로 큐티하고 목장 가고 예배 드리는 것이 119 구급차에 올라탄 것과 같다고 했잖아요. 이 팔복산행 기차 천국열차를 타고 있으면 내가 거기에 타고 있다는 것으로 내가 못생기고, 집 없고, 망하고, 분조장이라고 해도 같이 천국에 입성한다는 거예요. 바로 이거예요. 그런데 내가 스펙이 좋고 대단하고 내 열심, 헌신, 구제, 성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구원 열차, 팔복 열차에서 내리면 꽝이라 이거예요. 그 사람이 잘나서 지금 기차 타고 가는 거 아니잖아요. 탔다는 것으로 지금 가는 거잖아요. 끝까지 타고 있어야 돼요. 그런데 저는 뭐가 제일 감사한가 하면 제가 뭘 믿음이 좋겠어요. 그런데 이제 굉장히 힘든 일이 많았잖아요. 그리고 정말 죽고 싶은 일이 많았잖아요. 그런데 그래도 제가 하나님 부인하고 교회를 안 가거나 그런 일은 이제 없었다는 거 이것이 은혜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데 여러분 팔복산행 기차에서 하차하지 말기를 바래요
적용 질문이에요.여러분의 집은 자녀가 문제아예요. 부모가 문제아입니까? 여러분은 독일이 이해가 돼요? 유태인들이 이해가 돼요?
굉장히 어렵습니다. 어떤 쪽이 이해가 되는지. 근데 최고의 목표는 구원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독일은 엄청나게 사죄를 했죠. 그거 끝나고 나서 거기는요 믿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요. 생겼어요. 진짜 천인공노 하지만 회개를 했어요. 유태인들은 아직도 안 돌아오고 있죠 그죠? 그러니까 진짜 금수저가 무서운 거예요. 이 세상에서 갖춘 것이 많으면 이렇게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오늘 팔복산의 상속자로 여러분 최고의 모델이 누구 같아요? 성경에서 팔복산의 상속자로 이 화평의 모델로 최고의 모델을 꼽는다면 누구를 꼽고 싶으세요? 1부에서 예습을 했기 때문에 네 그래서 정말 그 유다를 다시 한 번 소개하고 싶어요. 화평의 모델 유다를 따라갈 자가 없어요. 예수님의 조상이 괜히 된 게 아니죠. 그런데 그 유다를 하여튼 소개하는 자체가 지나고 보니까 좁은 길 같아요. 왜냐하면 조금 전에도 설명을 소개해 드렸지만 오래 다녀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그 유다거든요. 그러니까 이거 성령님한테 저도 맡겨드려야지 제가 설교해서 여러분들이 유다가 이해가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팔복사의 상속자 세 번째는 당신이 나보다 옳습니다예요. 당신이 나보다 옳습니다. 여러분 이타적인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거 아니잖아요. 구원받은 사람들이 오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구원 때문에 설득해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항상 나에게 무엇이 이익이 될까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교회 오면 사람도 많이 알고 이득이 될 것도 좀 제시할 수 있어야 돼요. 유명한 사람도 많고. 그런데 교회에 오면 처음부터 희생해야 되고 뭐 그러면, 그렇게 부르짓기만 하면 누가 오겠습니까? 믿음의 분량이 다르고 그것을 인정하고 그 눈높이에서 설득을 해야 되잖아요. 지금 이 구속사도 처음 오는 사람 이해가 안 돼요. 그런데 놀라운 거는 힘든 사람들은 오자마자 다 이해가 됐어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어요. 더군다나 맨 처음에는 제가 더 무시받을 여자 목사니까 정말 힘든 사람들만 왔어요. 요새하고는 또 다른 거예요. 그런데 유다가 이 설득을 가장 잘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는데요.
창세기 43장 44장을 우리가 자세히 보면은 그 내용이 뭔가 하면은 유다가 요셉 팔아먹고 그다음에 이제 막 이방 여인 결혼하고 첫째 아들, 둘째 아들 다 죽고 그 다음에 이제 일에 미치고 그 다음에 신전 창기하고 놀아 났는데 그 창기가 며느리인 거예요.그 며느리를 죽여라 불에 태워 죽여라 했는데 도장 끈 지팡이를 갖고 온 거예요. 며느리 다말이 음행 때문에 온 게 아니고 이 집에 씨를 잇기 위해서, 아들이 거기는 영적 후손을 구약에선 의미하거든요. 그런데 유다가 그냥 그녀는 나보다 옳도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회심했어요. 유다가 깨졌어요. 깨지고 나니까 인생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제 믿음의 조상이 너무 이렇게 중요한 것을 알게 되고 연약해도 이제 영적 아비인 야곱을 사랑하고 야곱이 사랑하는 요셉을 사랑하게 됐어요. 그리고 아버지 사랑, 베냐민 사랑은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아이를 대신하여 자기 생명을 담보하고 요셉에게는 자기가 종이 되겠다고 했어요. 여러분 구원이 되면 사랑은 저절로 되어 집니다. 그러니까 유다의 사랑을 보니까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데요. 예전 야곱 아버지가 요셉을 편애할 때는 증오심으로 복수의 감정까지 있었어요. 그렇지만 자기도 죄 짓고 요셉을 팔았잖아요. 요셉을 팔고 22년이나 지나는 동안에 아버지의 한결같은 슬픔을 보아왔어요. 야곱 아버지가 믿음이 있어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슬픔이 있었고 그 슬픔과 사랑에서 건지고 싶지만 때가 되기 전까지 딱 다물고 있는 거예요. 22년 동안 기다려야 돼요. 그러니까 저도 이혼하고 싶은 사람 너무 내가 도와주고 싶지만은 제 포지션과 자리 때문에 절대로 입을 열지 못할 시기가 너무나 많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십자가는 지혜고 타이밍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 무엇인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각자의 식구들의 그 아픔이 있는데 그들을 위해서는 왜 그래요?가 아니라 내 자신을 내어주는 방법 외에는 길이 없다는 걸 유다가 알았어요. 야곱은 여전히 요셉과 베냐민만 사랑하고 있어요. 근데 이 예수님을 만난 그러니까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 됐죠. 예수님 만난 유다가 조건 없이 자기를 낳아주어서 예수 믿게 해준 아버지를 이렇게 용납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아버지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고 껴안는 거예요. 유다의 자기를 버리는 사랑은 그 후로 아버지와 요셉을 다 설득하며 형제들의 대화합을 이루어내며 하나님이 하는 일마다 편을 들어주시니까 결국 예수님까지 이 가문에서 오게 된 거예요. 그러므로 요셉의 총리 되는 것보다 더 기적은 이 형들의 변화인 거예요. 형들이 변화가 되니까 마지막에 요셉도 자기 죄를 보죠. 요셉도 얼마나 자기 그 베냐민만 끼고 도는지 몰라요. 형들하고 완전히 차별을 하죠. 그걸 깨닫게 됐어요. 그 유다의 그 정말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야말로 유다는 화평의 천사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유다는 자타가 공인하는 만고의 죄인이기 때문이에요. 죄인! 이런 사람이 화평케 하는 자예요. 유다는 행위가 아닌 믿음의 조상인 아버지를 무조건 사랑합니다. 유다는 화평의 모델 맞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마지막에 믿음의 조상인 아버지 야곱을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창세기 48장 그렇게 끝납니다. 왜 자기 아들 에브라임 므낫세의 장자, 차자를 거꾸로 안수합니까. 아버지 틀렸어요 하고 행위의 옳고 그름으로 화를 내는 장면이 요셉과 야곱과에 마지막 대화 장면이에요. 그러니까 화평이 아니고 화를 내면서 분쟁으로 끝났어요. 요셉과 아버지는. 그에 비해 유다는 끝까지 야곱을 22년 동안 기다려주고. 요셉 자기가 나서지 않았죠. 때가 되니까 야곱 요셉 형제들을 화해시키는 이 화평의 천사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야말로 구속사의 종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시 지금 팔복을 듣게 하시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제가 한 주일에 이어서 팔복 설교를 다 했는데 그때도 여러분들이 구속사로 들으니까 이제 놀랐는데 이거 지금 구약 전체를 지금 제가 다시 요약하고 있는 거예요. 구속사로 완전 구속사로 이것만 다시 읽어도 성경 전체를 여러분들이 알게 되니까 팔복 설교 끝나도 계속 좀 들어보시기 바래요. 남편은 생각지도 않게 내가 생명을 담보하고 기도하게 하셔서 구원받았어요. 그러면 우리 남편이 구원받을 만한 공로가 있어서 내가 생명 내놓고 기도했나요? 그런데 나에게는 눈 한 번만 딱 떠도 알았어요 그리고 목숨 내놓고 기도해 줄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 봤어요. 그거보다는 아직도 제가 알았어요 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아요. 우리 남편은 왜 그렇게 그야말로 사랑을 받고 갔을까 이런 목회자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세 전부터 사랑하셔가지고 제가 이 순종케 하신 게 아닌가 그러니까 이제 화평케 하는 자도 공로나 자격으로 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얘기예요. 이게 뭐가 다들 지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다 행위로 어떻게 며느리하고 그런 사람이 전부 다 행위로 본 행위로. 독일도 행위로 이 모든 것 전부 다 행위로 행위로. 저에게 알았어요 하는 사람들은 목회자도 되고 목회도 잘 할 것 같은데요. 그러나 그것도 제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겠죠. 다말이 자기 집안에 씨를 위해 그 수치를 감당했기 때문에 유다는 며느리보다 못한 자신을 지금 보면서 그냥 일생 겸손하게 살았어요. 믿음의 적용은 며느리가 한 거예요. 여러분 이런 또 질문이 들어요. 똑같은 사건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딸들과 동침했지만은 그거하고 뭔 차이가 있어요. 시아버지 며느리하고 아버지하고 딸 이게 뭔 차이가 있어요. 이게 분별이 안 되죠. 그런데데 여기는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 됐고 롯의 딸이랑 동침한 모압과 암모는 여호와의 총애에 못 들어왔어요. 이단의 괴수가 됐어요. 여긴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 됐어요. 이게 분별이 안 되실 거예요. 다말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가지고 영적 기업인 자손을 위해서 왔다는 얘기인 거예요. 수치를 무릅쓰고. 음행 때문에 온 게 아니고 그 수치를 무릅쓰고 우리가 목장에서 다 오픈하잖아요. 우리 집안의 구원을 위해서 아이들이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이건 거예요. 근데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유다가 화평의 메신저가 됐다고 해도 사는 날까지 칭송을 받은 사람은 요셉이에요. 이걸 봐야 돼요 유다는 며느리 사건 이후 회심하고 그 후로 그림자 같이 있다가 22년 만에 화평의 중재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일컫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등에 짊어지고 살기 때문에 그는 비교하지 않아요. 요셉을 시기 하지 않아요. 야곱 보고 정죄하지 않아요. 자기 죄를 알아요. 주제를 알아요. 그래서 늘 입을 다물어요. 이 땅에서 그렇게 산다고 유다가 나는 그렇게 살기 싫어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등에 짊어졌기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는 찌질해 보여도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가 그에게 임했기 때문에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예요. 그 억지로 어떻게 그렇게 살겠습니까? 그러나 유다는 총리 요셉과 비교할 수 없이 나중에 창대합니다. 여러분 예수의 씨인 유다와 예수의 표상인 요셉은 하늘과 땅 차인 거예요. 아셨어요. 여기는 이 모조고 여기는 진짜인 거예요. 씨는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라는 거잖아요. 지금은 비록 땅에서 살아도 그 하나님 나라의 창대함을 이 세상에서 보일 수 있는 길이 화평케 하는 거예요. 그래서 화평이 하나님의 성격인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나보다 옳습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예수의 씨 맞습니다. 정말 여러분 연습 좀 해보세요. 하도 안 되면 거울 보고 혼자 해봐요. 당신이 옳습니다. 거울에 있는 자기 보고 당신이 옳습니다 하면은 안 될까요.
가난이 애통과 온유와 긍휼을 얻기 위해서 이제 하나님과의 화평은 내가 정말 죄가 가로막혀 있어서 화평하지 못하잖아요. 내 죄를 깨달으면 여러분들 나눔 중에서 왜 자꾸 죄를 보라고 그러냐 예배만 오면 되지. 그거 너무 싫다 이러는데 그러면 이제 막힌 담이 허물어지질 않아서 화평이 없어요. 그러면 내 자신과의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연히 이웃과의 화평도 없는 거죠. 하나님과의 화평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내 자신 이웃과의 화평이 따라옵니다. 지난 스가랴 금요일날 큐티 본문 8장 16절에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라고 하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건이 왔을 때 두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건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해서 진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 아니겠어요? 아이가 백자를 깼어요. 그런데 그거가 뭐가 무서워요. 그걸 말하지 못하는 게 지금 무섭지 그렇죠. 그런데 그거 지나갈 건데 내가 그걸 말하면 너무 불이익을 받게 되니까 이게 자꾸 숨기고 싶잖아요. 진리와 진실을 말하는 것은 너무 외로운 길이에요. 진실은 그저 모든 것을 까발리고 옳은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맨날 팩트 팩트 이러는데 우리가 구원 때문에 진리와 진실을 이야기해야 하지만 각자의 믿음의 분량과 행위의 분량이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와 진실을 말할 때는 화평이 수반돼야 된다고 하지 않아요. 금요일날 큐티하셔서 들으셨죠. 이 마음을 너무 잘 알겠는 거예요.
제가 이 세상에서 뭘 해도 그렇게 별로 재미가 없는 거예요. 학교를 가도 피아노를 쳐도 아마 귀신 같이 피아노 쳐서 음악에 도치 됐다면 또 그게 뭔가 있었을 텐데 지금 택자가 돼가지고 재미있는 것이 없다가 회개를 하니까 그 유다가 깨달아졌어요. 그다음서부터 이렇게 한결같이 오게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자리매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 사명은 다 십자가예요. 여러분이 아무리 힘들어도 저처럼 이렇게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애. 정말 과장해서 24시간 그냥 앉아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의 배우자가 당신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있어 이러면 그런 고문이 어딨겠어요? 여러분은 지금 그 상황을 하늘이 내린 복으로 알고 감사하면서 가세요. 그러니까 살려야 될 사람이 많고. 그래서 진짜 팔다리 허리 안 아픈 데가 없는데 늙었는데 책상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거 이거 고문이에요. 그런데 시간 가는 줄 모르니까 그렇게 또 이제 앉아 있는 거죠. 우리가 다 밑동 짤린 나무인데 이 짧은 인생에서 그 다른 나무까지 살리고 가야 하는 게 이게 얼마나 사람으로선 할 일이 아닌 거죠. 주님이 물과 불에 동행해 주시고 그래서 이제 통과하고 있는 거죠. 그래도 날마다 물에 들어가고 불에 들어가고 하니까 쉽지가 않아요. 아주 날마다 두려워요.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날마다 겪고 있어요. 그래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물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아들이라 아주 이번 주도 읊조리면서 지냈어요. 그런 별 인생이 없습니다.
저는 이제 유다가 이해된다는 것이 이게 십자가 길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맨 처음에는 너무 기뻐서 딴 사람들한테 전하니까 다 죽지도 않고 이혼도 안 하니까 계속 전했는데 깨닫는 것도 설교하는 것도 처방하는 것도 언제나 보면 거부감이 큰 분들이 언제나 있어 왔어요. 그래서 그냥 눈물이 저절로 흘러요. 그런데 그 제가 상속자 맞기 때문에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서 이제 지금 걸어가는 거죠. 그런데 이 성경이 구속사이기 때문에 꼭 살아나는 분들이 꼭 한 분이라도 있는 거예요. 그건 그분 때문에 내가 얘기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래도 인류는 지금까지 요셉만 좋아하기 때문에 유다는 이름도 갖다 쓰기 싫어해요. 그래가지고 드디어 신약에 와서 예수님까지 팔아먹었어요. 유다는 아주 그냥 씨를 말렸어요. 하나님이 내가 아무것도 모르니까 여기까지 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도 1인 기업의 대가로 자리매김한 이 공병호 경영연구소 소장이 전하는 성공의 비결은 너무나 뜻밖에 단순한 거예요.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 안에서 해결책을 찾으면 그때부터 부자의 길에 들어선대요 근데 문제를 타인에게 돌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가난한 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 사회 문제가 그 책임을 남탓 사회 탓으로 돌리는 데서 비롯됐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당신은 나보다 옳습니다는 손해가 아니라 부자의 비결 맞습니다. 예수님의 화평의 비결인데 복받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신이 나보다 옳습니다가 교회의 표어예요. 이거 아무리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일컫는다고 하십니다.
적용 질문이에요.여러분은 진실이라고 까발립니까? 믿음의 분량을 인정하고 화평을 수반해서 말합니까? 빙자에서 회피합니까? 거기까지 가야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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