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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7절 - 팔복산의 통로주일설교 요약 2023. 5. 21. 06:34
팔복산의 통로
마태복음 5장 7절
김양재 목사
미국에 잘 다녀왔어요. 여러분은 팔복산에서 잘 지내셨나요? 여섯 개 교회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대부분 큐티인을 쓰겠다고 하시고 너무 감동적인 말씀을 전해주셨죠. 너무 감사하고 옛날에는 제가 그냥 그렇게 들고 다녀도 정말 거의 안 쓰셨거든요. 그런데 요새는 크나 작으나 가는 곳마다 이렇게 열매가 있는 만큼 가정을 지키고 이혼을 말리고자 하니까 사단의 방해도 크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민 사회에서 큐티인 간증이 ‘세다’ 라는 평도 있어요. 그런데 가장 센 간증은 성경에 나오는 간증 아니겠습니까? 야곱, 유다, 다윗, 등 돈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고 사기꾼의 거짓말쟁이 간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분들이 모두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어요. 저 혼자 갔지만 여러분들의 이야기로 같이 갔기 때문에 그것이 살아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호응해 주시는 교회들이 우리들과 같이 미국에서도 팔복산의 통로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런 희망을 보았어요. 계속 중보하며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게 되어서 영적 배부름을 경험하게 되면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팔복의 중앙에 있는 의의 주림은 ‘너는 나보다 옳도다’ 하는 이 마음은 팔복산 지름길 통로인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는 미션인 긍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의인은 ‘너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긍휼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도 끝에 긍휼히 여겨달라고 날마다 제가 창자가 끊어지듯이. 이 긍휼은 주님이 올라가시면 따라서 함께 올라가고 내려오시면 또 함께 내려와서 이 사명 감당이 시작이 되는 거죠. 오늘은 팔복산의 통로인 다섯째 복 긍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첫째로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니까 긍휼은 이제 매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데 남의 아픔을 자기 아픔처럼 아파할 만큼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요.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긍휼은 인간 자체를 아무 차별 없이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박애는 아니에요. 긍휼은 이제 사람의 동정도 아니고 조건적인 차별적인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오늘 이 소대지로 세 개를 좀 살펴보려고 하는데 첫째로 긍휼은 동정이 아닙니다. 나보다 훨씬 못한 여러 가지 조건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동정은 긍휼이 아닙니다. 우리가 동정이라는 것을 가만히 잘 생각해보면 그 안에 숨어있는 비교의식, 우월의식, 이런 자기 만족감을 볼 수가 있는데요. 이게 참 인정하기 쉽지 않은 우리 본성인데요. 뭔가 좋은 일에 기부하거나 동정을 베풀었을 때 그런 후에 짧게 혹은 길게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 감정이나 생각을 솔직히 직면해서 점검해보면 인간이 참 100%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다 기부를 했는데 있던 것이 없어지면, 그 다음에 나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그렇게 돕고 베풀었던 일들에 대해서 생색이 생기는 법이에요. 내가 그렇게 선하게 살았는데 내게 왜 이런 일이 왔는가 이런 생각을 안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녹취했는데, 목장 섬겼는데 그러면 이제 그 자체가 기쁨이 아니고 아니 하나님이 계시긴 한 거야? 이런 생각하죠!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래서 늘 이렇게 동정은 예전에 자신의 선함을 기억하고 억울해하는 거예요.
두 번째는 이 긍휼은 조건적인 것도 아니에요. 아르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이라는 책에서 긍휼을 그 고난을 당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악을 당하는 것을 우리가 볼 때 느끼는 고통이라고 정의하는데요. 모든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우리가 고통당하죠. 한마디로 남이 부당하게 고통을 당할 때 내 마음에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긍휼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제 헬라 문화에서는 피고는 재판정에서 이 배심원들의 마음에 이 긍휼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호소하고 그래서 피고는 변호 중에 울기도 하고 약자를 데려다 놓고, 어린아이들 데려와서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면 그 모습에 넘어가서 처벌을 면하곤 했다는 거예요. 여기서 강조점은 이 부당한 고통에 있습니다. 그럴 그런 일을 당할 사람이 아닌데 당해서는 안 될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우리는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맹자가 측은지심을 설명하면서 든 예도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졌을 때, 빠지려고 할 때 불쌍히 여겨 도와주려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건강한 장정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강도나 원수는 말할 것도 없겠죠. 만약에 그런 사람이 우물에 빠지려고 한다면 측은지심이 생긴다고 했을까요? 고통당해 마땅한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죠. 그렇죠? 이렇게 세상의 상식이나 윤리의 기준에서 긍휼은 조건적이고 차별적이에요. 죄인이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한 벌이니까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어.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니까 다 불쌍히 여겨서 도와줘야 돼. 사실 이런 판단이 있어야 죄인들이 모여 사는 인간사회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도덕이고 법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제 세 번째 주님의 긍휼은 이 상식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오해를 이렇게 딱 바로잡아 주시는 거예요. 한마디로 이제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시잖아요. 주님은 여기서 오늘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실 때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붙이지 않으세요.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라거나 긍휼히 여길만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자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저 긍휼히 여기는 자에요. 가족, 친구, 이웃, 친분이 없는 사람이든 원수든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어요. 상식과 도덕과 윤리로 우리는 기복산에는 오를 수가 있지만 팔복산에 올라 진정한 복을 누릴 수는 없어요. 인간의 옳고 그름은 팔복산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팔복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세상 윤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모두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왜 긍휼히 여겨야 하나요? 우리 모두 밑둥 잘린 나무 상태로 차별하지 않고 죽음이 다가오는 거예요. 원수까지 뭐 선하던 다 포함해서 모두에 대해 불쌍히 여겨야 될 내용은 우리 모두 죄인으로 지금 이제 죽음이 차별 없이 찾아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신이 이때 불쌍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은 화가 아니라 복인 거예요. 그런데 지금 알지도 못한 채 떨어지고 있던 통로가 죽음의 낭떠러지로 가고 있는 것을 이제 알게 됐어요. 본인이 죽음의 낭떠러지로 지금 밑둥 잘린 나무인데도 그걸 인지하지 못하잖아요. 그걸 알게 되는 것이 너무 복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건강하든 아프든 부하든 가난하든 유식하든 무식하든 성격이 좋든 나쁘든, 착하든, 악하든,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한 불쌍한 존재입니다. 고난이 있으면 있는대로 불쌍하고 없어도 없는대로 불쌍한 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긍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평생 겪는 모든 고난과 고통과 환란과 재앙은 결국 죄의 뿌리를 두고 고난은 장차 당할 마지막 고난인 죽음의 예고편일 뿐인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은 완전히 나중에 죽는 죽음의 예고편일 뿐이에요. 그런데 이 작은 고난을 통해서 두려움을 경험하면 장차 임할 죽음을 생각하게 될 수 있어요.
제가 항암을 해보니까 진짜 지옥은 있더라고요. 그게 너무 저한테 유익했어요. 근데 아무 고난이 없으면 그런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우리가 죽음을 향해 가잖아요. 따라서 어떻게 보면 아무 고난이 없는 사람은 많은 고난을 당한 사람보다 훨씬 불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나 자신이 내 가족이 이웃이 심지어 내 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긍휼히 여겨야 하는 불쌍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이 팔복산의 이 통로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긍휼히 여기는 게 뭐 대단한 게 아니고요.
나눔이에요. 어제는 남편이 피자를 사놓겠다고 하더니 집에 와보니 피자 안 식게 따뜻하게 해놓겠다고 했는데 베란다에 내놓았더라구요. 그래서 어이가 없고 예전 같으면 이 남편 보고 너 장난해 하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하며 싸웠을 텐데 왜 베란다에 피자를 놓았냐고 물으니 대답을 하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오늘 여자 목장에 가서 얘기를 했더니 여자 목장 화내지 말고 물어보라고 어제 왜 베란다에 놔뒀냐고 싸늘하게 말하니까 남편이 얼버무렸을 것이라고 그래서 집사님 남편도 항상 그래서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우리 여자 목장 이렇게 잘 알죠. 그러면서 저는 이렇게 말을 늘려서 상세히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었는데 그러면서 목장에서 그래도 이불 속에 안 넣은 것이 어디에요? 또 이랬다는 거예요. 참 우리 여자 목장 최고야. 그래서 천천히 남편에게 물어보라고 그래서 오늘 천천히 왜 거기 놓았냐고 물어보았더니 천천히 물어보았더니 햇빛이 따뜻해서 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얘기를 왜 그랬냐고 이런 물어보면 남자들이 말을 못해요. 남자들은 흙이잖아요. 먼지와 티끌 같아서 윽박지르면 주먹이 먼저 앞서고 그래서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것은 큰 일이 아니고 이 말 한마디에서부터 작은 일부터 시작돼요. 이런 것이 대화가 막히면은 다 이혼으로 가고 이러죠. 사소한 것부터 적용하셔야 돼요.적용 질문이에요.
남을 불쌍히 여기니 나보다 못한 사람 동정입니까
맨날 옳고 그름을 얘기하는 의인과 죄인을 차별하는 긍휼입니까?
좋은 사람만 맨날 긍휼히 여기고 저 나쁜 인간은 죽어야 돼 이럽니까? 아니면 무조건적인 주님의 긍휼입니까?
우리 모두 밑둥 잘린 나무라는 인식이 있습니까
팔복산의 통로는 무조건 긍휼히 여겨야 되는데요. 두 번째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으면 또 긍휼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면 긍휼히 여김을 받고 이제 7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며 그러나 누구나 긍휼히 필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기란 쉽지 않아요. 게다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사실 같이 죽어가는 상태라면 누가 누굴 긍휼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죽어가는데 남 걱정할 여유가 없겠죠. 그래서 죄 가운데 죽는 모든 인간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은 구원의 반석에 오른 사람 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을 알기에 죽음이 흔들 수 없는 구원의 반석 위에 내가 서 있기 때문에 그 반대인 죽음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가 있는 거예요. 신약에서 이 긍휼로 번역한 헬라어 엘레오스는 구약에서 히브리어 라함과 헤세드가 합친 번역어로 많이 쓰였어요. 그런데 라함은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뜻으로 막 그냥 창자가 끊어지듯이 아파하는 이 슬픔과 애통이란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슬픔과 애통으로 이제 공감을 해주고 이 자비란 뜻의 헤세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공감에서 실제적으로 손과 발이 나가는 행동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런데 긍휼은 그 어머니의 사랑을 내가 먼저 받았다는 거예요. 애기가 뭘 알아요. 그렇죠? 그래서 먼저 내가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는 거예요. 이사야 49장 15절 16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낳은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항상 너를 생각하되 그 당시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이 무너졌거든요. 이 무너진 성벽인 너의 성벽은 항상 내 앞에 있다는 거예요. 네가 잘나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무너진 그 성벽이 그냥 항상 내 앞에 있어요. 무너진 내 가정, 무너진 내 사랑, 무너진 내 인생을 주님은 보고 계세요. 자기 태중에 나온 자식이기 때문에 아무리 형편없어도 하나님 손바닥에 새겼다는 거예요. 그게 나의 공로가 하나도 없잖아요. 즉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과 애통으로 공감해 주시고 그 헤세드를 베푸셔서 나의 주홍 같은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을 말한 것이 긍휼이에요. 그거의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인 거죠.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의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는 우리가 가늠할 수가 없는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일곱 번씩 이른번씩 용서하시고 이와 같은 실천적인 긍휼은 얼마 전 큐티 본문이었던 마태복음 18장에 일만 달란트의 채무를 탕감 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밖에 되지 않는 채무를 진 자에게 인색하고 모질게 구는 것에 대해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비유가 나왔잖아요. 우리는 그렇게 갚을 길 없는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랑받은 자예요. 이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일만 달란트의 긍휼을 받고도 백 데나리온에 긍휼를 여기지 못해요. 본문에서 이 동사는 미래 수동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신적인 수동태이기 때문에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주체가 전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근데 그 시점이 미래라는 것 지금 긍휼을 베풀어 주시면 지금 잘 살고 감옥에 안 가고 다 그래야 되잖아요. 근데 이제 그거 믿음을 바라는 것을 실상으로 놓고 보지 못하는 것들을 증거하면서 가야 되는데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만 믿으면 되는데 전적으로 긍휼의 주체는 하나님이신데 그렇다고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그런데 내가 백 데나리온에 재물을 탕감해준 그 긍휼히 여긴 것도 하나님 다 기억하신다는 거예요. 다 기억하신다는 거. 우리 고조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엄마 그 섬김을 기억하셔서 지금 이렇게 모래같이 모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아무도 모르고 갔지만 그래서 기억하셔요. 그래서 팔복은 근본적으로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종말론적인 의미로 해석되요.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천성문을 향해서 가잖아요.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이런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된다는 거죠. 이렇게 절대 긍휼을 입은 사람만이 오늘 내 앞에 불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가 있어요. 주님께 받은 긍휼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긍휼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긍휼은 주님의 긍휼을 입지 않고서는 동정이나 자선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해요. 여러분들은 교회에다가 이렇게 헌금을 하고 십일조 하는 거 하고 내가 자선을 베풀고 동정하는 것하고 비교가 안 되는 거야. 맨날 저기 뭐야 신앙 고백이라고 그러잖아요. 신앙 고백 하나님에 대한. 즉 인간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는 다른 인간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고요. 긍휼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격과 공로가 일개가 없어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을 입었기에 내가 이제 긍휼히 여길 수 있다는 것이죠.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지 않으셨어요. 모든 사람이 그 여인을 정지하고 손에 돌을 들고 쳐 죽이려고 할 때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러셨어요. 주님의 메시지는 죄인이 감히 어떻게 같은 죄인을 정죄할 수 있느냐. 의인이신 주님도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시는데 본성이 똑같은 죄인들끼리 뭘 서로 정죄하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이 여인을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불러주셨던 ‘여자여’ 기억나시죠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그 ‘여자여’랑 똑같은 호칭을 이 귀나이라고 하는데 이 여자한테 똑같이 붙여준 거 있죠. 이렇게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차별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구원이 이런 것이에요. 그 여인을 예수님은 창자가 끊어지듯이 긍휼히 여기고 있는 거예요.
적용 질문
그 사람은 긍휼을 입을 만한 자격이 없다며 지금 정죄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긍휼인 라함과 그 헤세드 하면 긍휼의 선지자, 불타는 사랑의 선지자 하면 망하기 직전에 북이스라엘의 호세아 선지자가 아주 유명해요. 긍휼의 선지자로. 우리가 중독된 것에 가장 1위가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테스트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 바로 자식이에요. 우리는 자녀가 착실하고 공부 잘하기를 너무너무 바랍니다. 왜 바랍니까? 그 자식이 나를 대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나의 분신이 이 세상에 나왔는데 그 아이가 속을 썩이고 공부도 못하고 기대치에 못 미치면 자식이 못하는데 내가 수치스러워 살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나의 안녕과 모든 기대를 자식에게 걸고 온 사랑을 쏟아 부었는데 그 기대에 못 미치면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그것이 여러분 집착입니다. 나는 너무나 사랑해서 한다고 생각하지만 내 인생의 행복의 근거를 오직 자식에게 두기 때문에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면서 들들 볶아댑니다. 그것도 안 되면 막 때리고 욕하고 난리를 칩니다. 실컷 욕하고 나서는 내가 미쳤나 왜 그러지 그러고 또 막 자괴감이 듭니다. 정말 미쳐서 중독이 되어서 그럽니다. 이 자식 하나만 내려놓아도 정말 큰 적용입니다. 이 중독은 날마다 그 생각만 하는 거거든요. 그 자식이나 애인이나 마약이나 끊어보면 집착인지 사랑인지 금세 압니다. 글쎄 지난 주 그렇게 굶기고 때려서 죽게 한 계모도 아이의 집중력을 위해서 아침에 두 시간씩 성경 필사를 시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부를 잘하게 하려고 했나 봐요. 거기도 또 교회는 다니나 봐요. 정말 요즘에 너무 힘든 기독교의 시대를 살아요. 그럼 이제 어떡합니까? 우리가 자녀 중독 배우자 중독에 걸렸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 이때가 망하기 직전이에요. 북이스라엘이. 그러니까 호세아와 같은 역할 모델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30여 년 후에 망할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호세아 가정을 아주 통째로 통로로 지금 쓰시는 거예요. 근데 백성들이 너무나도 미련하기 때문에 이제 비웃기만 하는 거죠. 30년 후에 지금 망할 건데 당장 재앙으로 다가오지 않으니까 어떤 말씀도 안 들리는 것이 망하기 직전에 북이스라엘이 너무 갑자기 부강했거든요. 여로보암 2세 때문에. 그래서 호세아가 낳는 족족 망하고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내 백성이 아닌 자녀들이 자꾸 자꾸 이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름의 뜻이 끝이 다 한 창녀 같은 고멜 고멜 아내를 데려오라 그러시죠. 또 뭐 아내뿐만 아니고 남편도 마찬가지일 수 있죠. 흩으시고 폐하시는 그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의 아들, 또 사함 받지 못하는 로하마의 그 부정 의미로 로우로하마, 또 안미의 부정어 로안미 내 백성이 아닌 아들 이런 식구들과 살면서 전부 안 믿는 거야. 그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의 자녀인데 다 믿는 거야. 부인은 완전히 남자 찾아서 날마다 떠나고 그럼 가서 또 데려오라 그러고 자녀들은 다 그냥 폐하고, 이런 식구들과 살면서 멸망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자식을 주셔도 네가 긍휼히 여김 받아서 긍휼히 여기며 평강할 수 있냐? 하나님의 사랑을 보일 수 있는가? 이런 역할 모델로 호세아를 쓰셨어요. 그러다 그 삶이 망한 게 아니에요. 그 삶은 구원을 위한 소명의 삶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에 역할 모델을 주셨는데 자꾸 그걸로 옳다 나쁘다 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 자체가 상급인 거예요. 하나님을 신뢰해야 되잖아요. 선지서의 주제가 멸망, 포로, 회복이라고 했습니다. 계속적인 형벌은 이 땅에 없어요. 30년 후에 이스라엘이 망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망하지 않아요.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회복의 약속을 주시는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는 지금 이것을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게 할 수가 지금 없는 거예요. 너무 우상숭배가 끝까지 달아서 하나님이 망하기로 작정을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씀을 들어야 되는데 우리는 전쟁이 안 나게 해달라고 그러고, 그게 아니고요. 저는 우도 좌도 아니고 복음이에요. 저는 정치도 안 할 뿐더러 아는 사람도 없어요. 다 아시겠지만. 자식, 배우자, 술, 담배, 여자, 마약 다 못 끊어요. 근데 은혜로 한순간에 끊을 수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와서 예배드리면서 공동체에서 나의 죄를 내놓으면 죄가 힘을 잃습니다.
예전에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는데 우리들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소문이 났는데 노하우가 뭐냐 그래서 제가 날마다 큐티하는 것과 내가 누구보다 힘든 결혼 생활을 해 보았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했어요. 그러니까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도 그 아픔을 너무나 겪다 보니까 백성의 아픔을 이해하게 된 거예요. 불행한 결혼 생활은 잠시 힘들겠지만 밑둥 짤린 나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너무 좋은 약재료 인 거에요. 인생이 짧잖아요. 그러니까 네식구들의 이 불순종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행음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거예요. 호세아 가정이 이렇게 쓰임 받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인 거예요. 그 당시 여로보암의 굉장히 부강한 때였지만 북이스라엘은 아이러니카락의 지금 망하기 직전인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회는 다녀도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예요. 저는 이 시대가 그런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100년 5천 년 만에 지금 제일 잘 살아요. 그런데 동성애 뭐 성문란 이게 말도 못하잖아요. 그때 북이스라엘과 지금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결혼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고 거룩이라는 말을 이해를 못합니다. 요즘은 그냥 어디를 가도 가정 지키라는 말씀부터 저는 전해요. 아무리 전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아요. 무조건 전합니다. 큐티를 위한 큐티가 아니고요. 부흥을 위한 큐티가 아니고 가정을 지키기 위한 큐티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이렇게 진짜 긍휼히 여김을 내가 받아서 긍휼히 여기기 위한 것이 가정을 지키기 위한 그 목적 하나만 해도 우리 교회 존재의 목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지금도 교회를 나오는데도 자식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생각만 해도 죽을 것 같다면 그것은 중증 집착입니다. 내 집착 때문에 자녀들의 인생이 불행해지죠. 자식은 하나님 것이에요. 나에게 맡긴 것이에요. 우리는 청지기에요. 생각보다 강남, 판교 이곳에 불행한 결혼 생활 자녀 집착이 생각보다 많아요. 보기에는 멋있어 보이고 몇십 년 같이 교회를 다녀도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낮아지는 걸 상상을 못하고 아픔을 내놓지 못합니다. 슬픔과 애통으로 공감해 주시고 헤세드을 베푸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이 주님의 긍휼을 먼저 경험한 우리들 교회 성도들의 그 긍휼에 그 여김 받음 인 그 해세드가 지금 울려 퍼지고 있는 거잖아요. 여러분들이 그걸 먼저 받았어요. 긍휼히 여김을 받았어요. 정말 애통의 공감으로 목장에서 공감해 주시고 손과 발이 가는 또 목장에서의 행함으로..
적용해 보세요. 여러분은 사랑받고 자랐나요? 무너진 내 가정 때문에 늘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고 있나요?.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증거라고 이제 몇 % 생각이 되나요?
전부 이번 주 이제 나눔인데요. 이제 교회 다닌 지 4년밖에 안 돼서 인생 전체를 붙드는 말씀은 아니고 제일 감격한 말씀은 있습니다. 첫 해에 목사님이 열왕기상으로 설교하셨는데 엘리야가 이세배를 피해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있었어요. 그때 하나님이 엘리아야 내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시며 부르셨어요. 근데 그 말씀을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는데 집 앞에서 제가 내연녀와 저녁을 먹으러 가고 있는데 아내가 뒤에서 ‘여보’라고 불렀어요. 어떻게 불렀을지 이렇게 드라마를 좀. 그때 저를 부른 여보라는 말이 주님이 저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부르신 것임을 깨달았어요. 그때 이후로 조금씩 말씀이 들리게 되었고 무엇보다 저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런 얘기 들으면은요. 막 정말 그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진짜 하나님의 긍휼이 임했구나 이게 느껴지십니까? 우리 ANC 오늘 우리 교회 목사님 너무 적용 잘 하시죠? 그런데 거기에 이렇게 장애우 딸이 있으신 거예요. 그런데 그 호프가 이름이 호프인데 집회 내 제일 한 번도 안 빠지고 나와서 제일 크게 아멘 아멘 하는 게 호프였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 육적인 장애는 진짜 장애가 아닌 거예요. 이 교회 나오는 걸 너무 즐거워하는 거예요. 이제 목사님이 그런 근본적인 창자가 끊어짐이 있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 들었어요. 그러니까 긍휼히여김을 받으며 이런 간증을 할 때 느껴지는 거예요. 그죠 인간으로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렇죠.
팔복산의 통로는 세 번째 그래서 가장 힘든 사람을 데리고 함께 올라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 이렇게 말씀하세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우리가 불쌍히 여길 만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것은 기복산에 사는 사람들도 많이 하잖아요. 그런 긍휼은 팔복산에 오르는 통로가 아니에요. 원수를 용서하라를 넘어 사랑하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에 이렇게 일곱 번씩 칠십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모든 것을 내어 주셨기에 이것이 긍휼인 거예요. 나는 애끓는 긍휼로 사랑할 수 없어요. 힘든 사람들 많아요. 내 옆에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 단단한 사고의 틀은 절대로 깨지지 않아요.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도 피해 의식이라는 것은 정말 가정별로, 지역별로 나라별로 정말 없어지기 힘든 일인 것을 우리가 보고 있잖아요. 이 바위를 우리가 깨가려니까 정말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우리 존재의 한계가 이렇기 때문에 용서하라는 말은 그냥 한낱 구호에 지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화상을 당했던 이지선 교수는 스물세 살에 화상을 당해서 이십삼 년 만에 이화대학 교수로 금의환양을 했어요. 가해자가 아직도 사과하러 오지 않았다고 해요. 법의 처벌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나 자신은 피해자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사고를 당했다고 하지 않고 만났다고 표현을 한다고 해요. 그리고 이 사고로 얻은 것이 너무 많다고 이게 긍휼히 여김을 받아서 긍휼히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 진정한 용서의 종결자는 하나님뿐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저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 부르짖는 것부터 힘든 대상자를 팔복산에 데리고 올라가는 거 그 이름을 내서 내가 부르짖으면서 저 용서할 수 없어요.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꼭 데리고 오는 게 아니고 기도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 거죠. 내 사연 억울한 미움 등이 여전히 이렇게 남아 있겠죠. 그러나 그 고난을 겪으며 내 죄악을 깨닫고 주님을 만난 구원이 너무 크기에 그 구원이 가장 중요함을 알기에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 같은 그 사람도 구원의 자리에 데리고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나의 구원의 근거가 나에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럼 내 원수에게도 그 구원의 근거가 있을 수 있잖아요. 내가 잘나서 구원받은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성도는 긍휼히 여김 받는 존재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날마다 부족하고 넘어지고 실족해요. 그거 생각하니까 제가 이제 눈물이 앞을 가리는 거죠. 저를 보면 이렇게 사명 감당할 수 없는데 그 부활을 제자들이 다 못 믿고 완악하게 못 믿는다고 그랬어요. 그래도 거기 세 방언에 표적을 주면서 증인 삼으셨잖아요. 잘나서가 아니라 그냥 오늘도 내일도 말씀 전하러 다니니까 다시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줄 믿습니다.
긍휼을 한 번 맛보았다고 완벽해지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너무 부족하니까 오십일대 사십팔 오십일 때 사십칠 너무 부족하니까 다른 부족한 사람이 보이고 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품으로 나의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메꿔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잘라서 목자를 하는 게 아니고 내가 너무나 부족한데 이 목장에 목자를 시켜줬으면은 그냥 그게 이제 우리가 눈을 뜨면은 이제 말씀 묵상하고 순종하고 하는 것들이 경건은 이제 범사에 유익하다 그랬잖아요. 육체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은 그러니까 날마다 말씀 보고 그렇게 할 때에 나도 모르게 나의 부족한 부분들이 조금씩 조금씩 채워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긍휼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긍휼히 여긴 받아야 가능하고 그래서 힘든 사람을 데리고 이제 기도하고 그 입에 담기도 싫은 이름을 이제 기도 리스트에 올리고 손과 발이 가는 적용으로 주님의 긍휼을 전하는 통로가 돼야 합니다. 진짜 이번 주도 얼마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집에서 그냥 주문처럼 외웠어요. 그냥 환경이 겸손하다고 했는데 환경이 겸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저한테 평생 주시는 것 같아요. 쉽게 말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만 없으면 내게 복일텐데가 아니고 그 사람이 있어서 내게 복이다. 그러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덕분에 내가 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다 같이 복의 통로다 외쳐보세요. 다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도 환경이 있어서 제주도에서 부산에서 세상에 돈은 그런 데 쓰는 거예요. 여기 그러니까 호텔 얻어가지고. 그러니까 지금 가까운데 이 현장 예배 다 안 드리시고 계시잖아요. 그죠 그분들은 정말 멀리서 들릴 수 있는 저기 그 이유가 다 있잖아요. 너무 죽을 것 같으면은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적용 질문이에요. 용서해야 하지만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임을 얼마나 인정합니까? 주님만이 용서의 종결자이심을 믿습니까? 그래서 부활절 전도 축제 때 내가 팔복산의 통로가 되기 위해 어떤 순종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되면 그래서 이제 긍휼히 여기게 되는 거예요. 내가 죄인이니까. 긍휼히 여김받으면 창자가 끊어지듯이 아픈 거예요. 정말 그냥 끊어지듯이 아픈 거를 전 늘 이렇게 경험을 하는 것 같아요. 어떤 여인이 지도자와 간음을 했어요. 근데 간음한 여자의 남편이 그 지도자를 죽이고 감옥에 갔습니다. 신문에 그 일이 났어요. 이 간음한 여자를 입에 있는 자는 한마디씩 손가락질하며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어요. 지도자 죽고 남편 감옥 가고 지금 가장 아픈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화살을 쏘지 않아도 이미 벌을 충분히 받고 있어요. 가정생활이 너무 힘들었으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죠. 근데 하나님은 성경에 보니까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자라고 그러셔요. 우리도 환경이 주어지면 그런 환경이 된다면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잖아요. 그렇죠? 우리 TV에 아이돌 스타 나오면 오빠 이러잖아요. 여러분이 그게 이렇게 수없이 이미 간음을 했는데 우리가 들키지 않았습니까? 이미 창자가 끊어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인 거예요. 그것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서 엄마의 자궁 속에 같이 보호되듯이 그 모든 형제, 자매와 함께 잉태된 내 형제고 자매로 여겨지면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기도해 줘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내 죄를 본 사람은 하나님의 이 주홍같이 붉은 죄에도 불구하고 나를 긍휼히 여겨주신 그 주님을 생각하면 이 죄인이 어떤 죄인을 보고 손가락질 하겠어요.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보고도 주님은 여자여 최고의 존칭을 붙여주셨는데 그러니까 내 자신이 얼마나 긍휼이 필요한가를 아는 사람만이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힘든 사람과 같이 갈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이고 이제 그 팔복산에 통로로 입성할 수 있는 그러니까 이게 미션이 되는 거예요. 네가 옳도다 나보다 네가 옳도다 하는 사람은 날마다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거밖에 할 말이 없어요. 불쌍히 여기 나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것이 미션이에요. 다른 사람을 전도하려고 주님께 이끌려면 그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창자가 끊어지듯이 그렇게 기도하셔야 이제 힘든 사람들을 하나님에 존전에 올려드리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어요. 팔복산의 통로는 그러니까 이제 동정도 아니고 조건적도 아니고 무조건적인 긍휼 긍휼히 여기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주님의 이제 이런 창자가 끊어지는 그 슬픔과 애통으로 공감을 받으며 헤세드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이 긍휼히 여김 받는 이런 대단한 신분이 된 거예요. 그럼 이제 우리는 가장 힘든 사람을 데리고 나의 긍휼을 전해야 되겠죠. 우린 너무 연약해요.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날마다 연약하기 때문에 정말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주일설교 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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