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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태복음 5장 6절 - 팔복산의 배부름
    주일설교 요약 2023. 3. 2. 03:36

    2022-02-26

    팔복산의 배부름

    마태복음 5 6

    김양재 목사

     

    우리의 주제가는 내가 옳다죠 그러니까 우리는 억울한 많아요. 가난해서 애통함으로 이제 온유를 알게 되었어요.  야생마처럼 그래서 채찍으로 앉아 이어서 그래서 조련이 되었는데 온유 다음은 아직도 가장 힘든 것이 눈을 뜨면 내가 옳도다 해서 네가 옳도다가 되는 겁니다. 이제 온유는 길로 나가야 되는 거예요. 이것이 가장 어렵고 힘들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팔복의 클라이막스 중앙에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네가 옳다’ 이것이 의예요. 그런데 힘으로 못해요. 의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날마다 말씀 의에 주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배가 불렀군 이러면 났어 같은 말이죠. 조금이라도 가진 것이 있을 우리는 배가 부릅니다.  그래서 배부름은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그것도 팔복산에서 오늘 배부름의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팔복산의 배부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예를 생각해 보겠어요.

     

    첫째로 우리는 기복산의 배부름에 너무 주려 있다는 실상을 봐야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배부르려면 먼저 주림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주리고 계세요. , 명예, 권세, 지식, 사랑, 부모, 자식, 남편, 아내에 주리고 계시죠? 저는 위가 처져서 처방이 항상 배고프라는 거예요. 배부르게 먹지 말라고 해요. 그래서 위에 의가 아니고 의에 주리면 복이 있나니 그럼 제가 배가 고프면 항상 기분이 좋습니다. 요한복음 4 13절에 예수님이 정오에 길러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여기서 ‘먹다는’요 계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시제예요. 세상물은 계속해서 먹어도 먹어도 다시 목마르다는 것이죠. 1차적으로 육신적인 갈증을 가르키지만 이외에도 영적 선에 대한 갈증을 나타내어 애타게 바란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단도 가고 삼단도 가고 인간은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 말고도 딴데에 굉장히. 그러므로 세상의 물은요 애통하기보다는 애타게 바라는 것이고 영원히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17 18절에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니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니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라고 말하고 싶어요. 남편이 아니니 말이 되도다

    사마리아 여인도 여러 가지 용모도 갖췄으니까 남편에게 주려서 남편을 다섯이나 바꿨을 거예요.  유명한 세계적인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그렇게 아름다운 용모로 결혼을 일곱 번이나 했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혼하고 싶은데 용모가 된다 그러면 감사하세요. 여자만 그렇겠습니까 남자들도 있고 용모 갖춘 사람들은 그냥 유혹이 많은 법인데 돈도 없고 용모도 없어서 그런 유혹에서 피할 있으면 이게 감사한 거죠. 그러나 실상은 너무 자존심이 상하잖아요. 쪽이 팔리지 않아요. 그래서 가난한 마음이 되는 이게 의의 주리고 목마른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마름과 주림을 경험하는 것은 도움이 많이 됩니다. 세상에서 돈에, 용모에 배불렀다면 아무리 팔복을 외쳐도 가난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팔복이 시작도 되지 못합니다. 개념조차 이해를 하지 못해요. 저도 학창시절에 행복의 체험에 축복의 애정에 사랑에 돈의 학벌의 평판을 세상 모든 것을 주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어보겠다고 열심히 열심히 살았지만 허무하고 목이 말랐어요. 제가 만세 전부터 택자였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지 않았지만 세상에 주려봤기 때문에 세상에 배부른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어요.  어떤 부목자님이 같이 일하는 직장에서 동료가 9살이 많은데 그분이 이제 착한 사람을 뽑으라면 나는 부목자님에게 일등을 주겠다. 그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이분이 평판에는 이렇게 주렸는데 그런데 가정에서는요 폭력을 많이 행했고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대요. 그런데 우리들 교회 와서 이렇게 나눔을 있는 교회는 없는 같다. 이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다행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것하고 각자 이렇게 다를 수가 많이 있습니다. 어차피 구원이라는 없으니 마음대로 살자는 자유로워 보이는 영혼들도 주님의 구원을 열망할 수가 없어요. 피해 의식에 차서 남탓만 하며 뒤집어 보자고 외치는 행동가들도 주님의 구원과는 거리가 멀어요. 이런 모습은 극과 극처럼 달라 보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기복산의 주림은 사람에게 주리고 세상에 목마른 사람들이에요. 정말 기복산의 배부름에서 끌어내리기 전에는 내려올 자가 없는 같습니다. 이런 인간의 몸부림으로 당장의 목마름을 채울 있는 같지만 결국 비참한 주림과 목마름만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우리들 앞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서 이렇게 알게 됩니다.

     

    예전에 어떤 집사님이 임신이 돼가지고 아들에 주려서 큐티 모임을 진짜 오래 나왔어요. 11 만에 아들을 낳고 우리 모두에게 떡을 돌리고 할렐루야 했는데 다음부터 나왔어요. 이분은 아들에게 주린 거죠. 그런데 옥이야 금이야 키운 고귀하신 아드님께서 어찌나 속을 썩이는지 올래요 수가 없어서 다시 왔어요. 하나님께서 기적을 많이 베풀어주시는데 기적 후에는 팔복산에 산상수훈 말씀이 들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팔복산에 올라오는 무리가 있고 올라와서 듣는 제자가 있다고 그랬잖아요. 가난은 모든 것의 시작의 열쇠라고 했잖아요.

     

    어떤 초등학교 5학년 아이의 영상을 봤는데요. 아이가 영재래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는 거예요. 너는 열심히 하냐 그랬더니 내가 스물여섯 정도까지 의사 공부를 해서 내가 의사가 되면 우리가 100살까지 산다고 하면은 내가 이때 공부를 열심히 해서 74년을 편하게 살지 않냐 이런 나눔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이왕할 나는 즐겁게 공부한다고 그래요. 자기를 돌보느라고 힘든 엄마도 하고 싶은 하고 자기 인생을 찾으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집도 부유한데 공부도 잘하고 효자이기까지 이런 아들님이라면 교회도 다닐까? 아니면 다니라고 그러면 너무 다닐 같아요. 엄마하고 대화를 하더라고요. 가장 이제 부러운 아침에 엄마가 나물 반찬 이런 먹으라니까 따박따박 먹는 거예요. 우리 이거 나물 반찬 먹이는 어려운데. 이게 몸에 좋다. 그러면 먹더라고요. 엄마는 아들 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환경이라면 너무 배가 불러서 어디 팔복산에 올라가겠습니까? 그렇죠 앞에 가면 위축감이 같아요. 그죠?

     

     

    적용해보세요.

    육신의 남편 혹은 아내가 자녀가 너무 좋고 의지가 되지만 믿음이 없기에 감히 ‘나는 남편(아내) 없다’는 고백을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지만 지금 남편도 남편이 아니라고 얘기하세요. 나눔이에요. 저희 친정 아버지는 도박 여자 삼종 세트로 엄마를 힘들게 했는데 주님을 영접하고는 그걸 끊으셨대요. 엄마한테 용서를 구하셨답니다. 그런데 후에는 나는 엄마 없이는 살아도 주님 없이는 산다. 자녀들에게도 공부 하는 말씀 하셔도 교회 가는 거는 야단을 치셨다는 거예요. 이분의 AD, BC 확실히 달라지셨죠.  이렇게 5 남매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셨는데 우리는 이렇게 기복산에 육적인 배부름의 허상을 보고 영적 굶주림을 경험하고 그것을 넘어 팔복산 위에서 하나님에 의해 굶주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복산의 배부름에 우리가 너무 주려 있다는 실상을 인정하셔야 됩니다.

     

    팔복산의 배부름 번째는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야 합니다. 이제 주님은 기복산의 배부름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아니라 팔복산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세요. 그러니까 의가 중요한 것이죠. 서두에서 말했지만 여기서 의는 단순히 세상에서 말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인 정의를 가리키지 않아요. 물론 세상의 정의도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심어두신 자연법에 기반하고 있죠 하지만 세상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 운동이나 정치하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거를 너무 많이 착각들을 하세요. 주님께서는 의로운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으시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세요.  의를 소유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의 주리고 목이 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거예요. 구별이 중요합니까? 신앙의 목표는 내가 의인이 되는 아니에요. 세상에 의로운 자가 누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되 하나님에 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잖아요.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그랬어요. 우리가 손가락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100% 우리는 행위로 의로울 수가 없어요. 의인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의로운 자가 아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몰라요. 다시 말하지만 의인은 헬라오로 디카이오시네인데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말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로마서 3 21절에 이렇게 말해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인이 차별이 없느니라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러니까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이에요. 의와 구원, 예수 그리스도 같은 말이에요.  스스로 구원할 있다고 여기는 교만한 사람은 의에 주릴 수가 없는 거죠.

     

    그러면 도대체 누가 주님의 구원을 열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열심과 성취가 무너지는 사건을 당하고 존재의 터전이 무너지는 고난을 겪으며 자신의 전적 무능을 깨닫고 자신의 전적 부패와 타락을 깨달은 사람 자신을 직면한 거죠. 그래서 이제는 인생의 소망이 오직 주님께 있음을 알게 사람이 주님의 구원을 열망할 수밖에 있겠습니까? 이것이 가난한 사람이죠. 그냥 구부렸어 웅크려 거지처럼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죠. 사건을 주의 말씀으로 해석하며 이것을 깨닫고 드디어 주님이 나보다 옳습니다. 고백하는 것이 입니다. 모든 사건에서 주님이 옳으세요. 억울하죠. 주님이 죄가 있어서 십자가에 박히셨습니까 그거를 깨달으니까, 예수 그리스도 의를 깨달으니까 날마다 너가 틀렸다 내가 옳아 이러니까 이혼하고 난리 싸우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들교회의 주제인 유다가 등장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여러분들이 이게 들려서 싸움이 있는 거예요.  창세기 38장에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이제 동생 착한 동생 요셉을 팔아먹고 이방 여자랑 결혼하고 자신의 아들이 죽고 그리고 괴로워서 일에 미쳐서 신전 창기와 놀아놨는데 창기가 며느리인 거예요. 그런데 실상은 자기 며느리가 집안을 살려보겠다고 자기하고 동침하겠다고 계데혼인이라 그래서 영적 우사가 계속 내려가야 되는 이제 이렇게 상징해요. 자기하고 동침하겠다고 찾아왔는데 거기서 임신을 거예요. 소문이 들으니까 자기 자기의 며느리인지도 모르고 자기 너무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며느리를 불태워 죽이라 그랬잖아요. 며느리는 예수 씨를 잉태하기 위해서 수치를 무릅쓰고 죽음을 무릅쓰고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가지고 왔어요. 이게 쾌락이 아니고 약속 때문에 가지고 다말에게 유다는 그녀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나의 옳음이 아니고 예수의 옳음인 거예요. 이것이 회개이고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의 고백인 거예요. 그러죠? 유다가 자기 죄를 직면했어요. 이렇게 고난 가운데서도 죄를 직면하지 못하더니 며느리가 수치를 무릅쓰고 자기하고 동침해서 집에 대를 잇겠다고 똑같이 동침을 해도 롯과 딸의 동침은 여호와의 총에 들어와요 그러니까 행위로 행위가 옳다는 아니라 약속 때문에 그러니까 자기 죄를 보는 거는 죽은 사람을 일으키는 것보다도 어려운데 유다가 자기 죄를 직면한 거예요. 실상을 봤어요. 자기는 야곱의 넷째 아들로서 믿음을 이어가야 되는 사람인데 동안에 그냥 요셉 죽이고 이제 그거 아무리 죄를 지어도요 정말 의에 주리지 않으면 그걸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나보다 옳토다 쉬즈 라이처스 아이 아주 유명한 얘기를 창세기 38 26절에서 하는 거예요. 눈물의 고백과 회개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며 우리와 그러니까 유다가 요셉과 아버지 사이를 중재하잖아요. 그렇죠 유다가 유다는 그냥 말이 없어요. 유다가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조상이 됐다고 그래서 짠하고 요셉을 땅에서 꺾는 아니에요.  그냥 천국 때까지 죄인으로 살아가요. 근데 항상 중재자가 되는 거예요. 화해자가 되는 거예요. 성경에는 유다 지파가 최고인 거예요. 1 지파가 되는 거예요. 이게 천국의 상인 거죠. 그래서 중심에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거죠.  이것이 바로 righteousness 의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유다와 다말이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의예요. 의에 주리는 거예요.

     

    저희 어머니는 50년도 훨씬 전에 뺑소니 차에 치여 자리에서 돌아가셨어요. 지금까지 범인을 잡았죠. 어떻게 사람을 죽여놓고 그럴 수가 있어요. 근데 자리에 영어 이니셜이 써진 군모가 자리에 있었어요. 거기가 이제 의정부가 가까우니까 아마 카추샤가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거 가지고 찾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가 권세가 있었으면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범인도 나라도 공의와 정의가 땅에 떨어진 거를 말하죠. 해석이 되죠. 우리 엄마는 새벽 기도만 댕겼는데 어떻게 그때는 기막혔지만은 지나고 보니까 제가 소녀 가장이던 그때 어머니가 병원에 계속 입원하셔서 치료를 받으셔야만 했다면 의료보험도 없는 시대에 우리 집은 쫄딱망했는데 어머니 치료를 위해 저는 학교를 다녔을 같아요. 모든 것이 지나고 보니 땅의 공의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하나님이 옳으셨어요. 그런데 범인만 미워하다가 일생 해결 못하는 것이 나의 옳음인 거예요. 이해가 여러분 이해하라고 사건 아니거든요.  근데 다들 이해가 . 이해가 되니까 주님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이해가 되면 주님 만나겠습니까 이렇게 해석을 해야 해결이 되는 것이죠.  어떤 분은 뺑소니 차에 사람을 보고 어렵게 입원을 시켜주었더니 나를 사람이 사람이라면서 고발을 했어요. 그러니까 입원비, 벌금을 뒤집어 쓰는 고통을 겪었는데 그러니까 나의 옳음으로는 이게 도저히 해석이 되는 일이에요. 우리 화병 걸려요. 그러니 좋은 하기도 힘든 세상이죠. 공의와 정의가 실종되었다고 있지만은 이분은 사건으로 가난하고 애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알게 되었다는 말이죠.  예수 믿게 되었다는 거예요. 항상 그는 나보다 옳터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틀렸어 윤리적으로 틀렸어 부르짖는 의가 아니에요. 그는 나보다 옳도다 고백하는 것이 의예요. 구원의 목이 말라야 돼요 가정의 구원을 위해 수치를 무릅쓰고 우리 집에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내가 오늘 감당해야 수치 그런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돼요. 그러려면 정말 구원을 위한 말씀에 주리셔야 돼요. 성령에 주리셔야 돼요. 주리셔야 알맞은 곳에 주리시면 하나님은 부분에서도 배부르게 하십니다.

     

    다들 다말 같은 마음이 되면 가난한 마음이고 그런 분들이 정말 말씀을 사모하셔서 말씀에 주리셔서 이곳을 채우고 채우고 채웠어요. 그러니까 나보다 당신이 옳다. 이게 의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진영 논리 지역 감정이 있을 수가 있겠어요. 날마다 그거 가지고 그냥 정치 논리로 나오잖아요. 어떤 경우도 당신이 옳다. 이게 의에요. 예수님이 무슨 죄가 있어서 십자가에 박히셨겠습니까 그러니까 십자가를 모르니까 그러니까 적어도 교회는 진영 논리 지역 감정에 휘둘리지 말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근데 구속사가 뚫고 들어가지 않으면 교회도 똑같이 그렇게 정말 한쪽으로 치우쳤어요. 씨에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해요. 책이나 음악을 믿고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필경 우리를 배반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안에 있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그럼에도 우리들교회 직분자들 중에서도 방탄과 영웅씨에 빠지는 사람들이 그렇게 팬클럽이 돼서 아미가 되어가지고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시는 분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책이나 음악은 자체로 아름다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찾지 못한 꽃의 향기 아직 듣지 못한 천상의 메아리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의 소식일 뿐이에요. 그것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져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제쳐놓고 거길 따라 다니시면 이제 배신만 당한다고요. 거기 나아가서 우리들 교회는 어떻습니까 내게 주신 고통과 질병과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녀 남편 아내를 통한 슬픔의 본질은 우리를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시는 것이라는 얘기에요.  슬픔 자체에 착념을 하니까 밤낮 네가 틀렸죠. 나를 어떻게 슬프게 있냐 이게 주제가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배고파야 돼요 가난한 마음으로 그분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 앞에 주님 제가 틀렸습니다. 주님이 옳습니다. 이거는 당신이 옳아요 남편 아내 모두가 옳아요 구원의 초점으로 고백을 한번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고백만 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부름을 주실 것입니다. 온유는 야생마처럼 앉아 일어서 훈련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을 하는데 다음에 적용해야 것이 당신은 옳도다예요 이게 돼요. 날마다 의에 주리지 않으면 아무리 온유해도 그게 되는 거예요.

     

    어제 우리 권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남편이 아주 콜라를 박스채로 사다 놓고 드시는데 어느 그냥 그것이 떨어졌다고 누가 내꺼 먹었냐고 아파트 사람 들리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는 거예요. 목장에서 흥분해가지고 남편이 그랬다고 고발하니까 목장에서 권사님 편을 들어주는 아니고 아니 남편이 그렇게 좋아하는 거를 미리미리 재워 놓으셨어요. 그래서 좋지도 않은 탄산음료는 사다가 채워놓냐 그랬더니 아유 괜찮아요. 이빨 썩어가지고 주님을 만날 수가 있어요. 이렇게 처방하는 것이 남편이 아내보다 옳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때가 되기 전까지는 무슨 말을 해도 들리는 거예요. 들려요.  그러니까 아까 11 만에 아들이 생겨도 돌리고 갔다가 왔는데 우리들교회 목자님께서는 10 만에 정말 아들이 생겼는데도 그때부터 예수가 믿어진다 이래요 이분이 학교를 에스대를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마음대로 되는 아니야. 그러니까 이제 기복산에서 배가 부르니까 그때부터 말씀이 들리시는 거예요. 그래도 굳세게 나오고 계십니다. 나오고 계시니까 소망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목자님은 아들이 여섯 살인데 핸드폰을 너무 봐가지고 이거 미디어에 너무 노출되는 아닌가 그래서 이제 소년부 이분이 교사예요. 초등학교 애들이잖아요. 그래서 이거를 나눴대요 그랬더니 소년부 아이가 아들이 살이냐고 여섯 살이다 그랬더니 그때는 선생님이 가만히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처방을 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큐티하는 우리들교회에 정말 최고예요. 이것도 아들이 나보다 옳도다 하면서 지금 속이 썩어지잖아요. 그러니까 기다리니까 속이 썩어지니까 가난한 마음으로 의에 주리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손녀 딸도 완전히 그냥 아이패드만 그냥 너무 좋아하고 쳐다보고 있어요. 근데 이제 엄마가 회사를 나가니까 그걸 그렇게 막지를 못하는 같아요. 저도 이제 똑같은 건데 기다리라고 그래야 되나요?

     

    이제 아들의 3 교회 선생님이 바뀌었는데 선생님이 동성애자였다가 돌아온 청년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들이 다른 부분은 너무 멋진데 죄파가 동성애자라는 오픈하니까 아들의 마음속에 비난의 혈기가 생겨가지고 말씀이 이상 들리지 않아가지고 다음 주부터 복수를 하려고 본인의 패는 정죄라고 했대요. 아들 앞에서 우리들교회 전도사님을 정죄하던 아빠의 모습에 잠시 회개가 되었고 부모로서 아들에게 뭐라고 해줄 말이 없었다는 거죠. 근데 오후에 아들이 지난번 선생님하고 통화를 하더니 너무 이제 마음이 이제 편해진 거예요. 그래서 아니 아버지는 너한테 부끄러워서 말이 하나도 없는데 선생님이 뭐라고 조언했냐 그랬더니 지금 선생님께 너무 감정 이입하지 말고 죄와 연약한 사람을 분리해서 보라고 중요한 3 때에 감정 소모를 하지 말고 죄는 철저히 미워해야 하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신 말이 애한테 와서 닿았다는 거예요. 아빠가 쥐구멍이라도 찾아들고 싶었는데 아들이 아빠 처방도 수집해서 모아두면 아주 좋을 같아요.  아들 수신 목록에 아버지가 처방해 리스트는 공부 잘해서 성공하라 말고는 없어서 회개가 되었는데 저는 이제 겉으로는 온유한 탈을 양의 모습이지만 마음은 늑대와 같이 살았다는 거예요.그러니까 땅에 온유는 없다 그랬죠. 십자가로 처리된 온유만 있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이렇게 말씀을 읽다 보면 항상 죄를 직면하면 주님이 옳으십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옳아요 이게 나오는 거죠.  회개하면 주님이 옳으십니다. 선생님이 옳으시다가 상대방이 옳다고 고백하는 것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런 주제는 아이들이 논술을 얼마나 유용한지 몰라요. 목장에서 이렇게 나눴던 것들 이게 동성애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논술을 쓰면은 우리가 스펙을 이기는 맞죠.  예수님을 만나야 가난과 애통과 온유가 따라와서 그다음에 항상 그는 나보다 옳도다가 되는게 의라구요.

     

     

    적용 질문이에요.

    수치를 무릅쓰고 다말같이 회개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러니까 목장에서 이렇게 회개하는 사람이 수치를 무릅쓰고 회개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유다처럼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러니까 그런 오픈을 보고 당신이 나보다 옳다 회개하잖아요. 아내가 먼저 고백하면 남편이 당신이 나보다 옳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다말과 유다가 이렇게 있어야 돼요. 서로 주거니 받거니가 돼야 합니다. 이것이 의예요.

    어제 제가 주례를 했어요. 그런데 정말 신랑, 신부가 자기 죄를 보는 나눔을 우렁차게 하는 거야. 그런데 양가 부모님이 우리들 교회를 다니시니까 부모님 나눔 울먹이시면서 모두 자기 죄를 보는 나눔을 하시니까 그야말로 당신이 옳으십니다  남편은 아내보고 당신이 옳다. 사랑하겠다.  복종하겠다. 아니 의에 주렸기 때문에 이런 가정들이 결혼을 하니까 청년부가 이혼을 하는 비결인 거예요. 이건 천국이다. 너무 감사한 거예요. 최고예요. 나는 이런 결혼식이 세상에 있을까. 이렇게 결혼을 하는데 어떻게 이혼을 하겠습니까? 어제는 모두가 믿는 그리고 이제 구속사가 들어온 분들의 나눔이니까 전율이 오더라고요 천국이 따로 없다.

     

    팔복산의 주림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되는데 그러면 번째는 팔복산의 배부름을 약속하시는 거예요. 헛된 데서 행복만 찾다가 목마르고 주리게 되지 마시고요 이제 헛된 노력 멈추시고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드시기를 원해요.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요. 우리 인생이 오늘 하루 남았더라도 지금 시간 하나님에 의에 주리 목마를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의 뜻을 깨달으시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실 영원히 배부르고 복된 인생이 믿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돼요. 의는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내하고 번을 참으며 당신이 옳아요 하며 하나님의 뜻인 의를 이루어야지 나만 온유에서 칭찬받으면 되겠습니까?

    오늘 장례가 있어서 우리들교회에 유명한 영상인 히스기야 눈물이라는 영상이 있어요. 목회자 세미나 보는 거에요. 거기 유치원 아이가 나와가지고 나는 교회 아빠 없을 때만 나와요 이렇게 우는 아이가 있어요. 기억나시죠 근데 아빠가 오늘 장례 때문에 오늘 오셨다구요.그래서 붙들고 손을 붙들고 손을 집고 해도 등록을 하시더만요. 지금 아이가 스무 살이 넘었고 고대까지 들어갔는데 그렇게 안되는 거예요. 엄마는 목잔데 그러니까 진짜 번을 참으면서 당신이 옳아요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족 사진을 찍는다고 장례니까 오셨잖아요. 그래서 등록은 해도 가족 사진을 찍게 오라고 그래서 얼마나 오래 기다려서 드디어 가족 사진을 그래도 찍고 보냈어요. 손을 잡고 이렇게 아프게 잡냐고…

     

    자기가 거룩을 원하는 것만큼 채워주십니다.  의에 주리는 것은 정말 우리를 배고프게 해서 성결케 만드시는데 우리가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의의 주리죠. 말씀에 주리죠. 그러니까 거꾸로 의에 굶주리게 하기 위해서 나를 가난하게 하는 환경과 사람을 나의 복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배부른 비결이에요. 그러니까 진정으로 배부른 자는 힘든 것을 복이라고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저는 예수님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 부자보다 말씀이 고프고 주린 제자를 기뻐할 수밖에 없어요. 히스기야가 그게 명작이에요. 가는 곳곳마다 은혜를 끼치고 있는데 아들은 고대를 갔어도 심령이 가난하니까 얘가 믿음이 있으니까 아빠를 그냥 불쌍히 쳐다보고 있어 그러니 아들은 무슨 복이에요. 그렇게 일류학교까지 가서 아빠가 그래 아빠를 불쌍히 보는 이게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 아닌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시는 거죠.

     

    요한복음 4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까 13절에 우물물을 먹다는 반복적이지만 똑같은 단어지만은 여기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먹다 옛날 성경에 똑같이 먹다에요. 먹다인데 이거 시제가 13 14절이 다른 거예요.  여기는 부정 과거형이래서 일회적인 시제인 거예요. 주님이 주는 물을 먹는 것은 일회적인 건데 그러니까 번에 갈증이 가시는 거죠.  51 49 그냥 신분이 달라졌어요. 그래도 물론 단번에 가신다는 것이 번만 먹으면 그만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이단은 그렇게 얘기를 하죠. 회개했으면 됐지 날마다 회개를 해요. 이러죠.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51 49, 52 48 이렇게 성숙을 위해 순간마다 주님이 주시는 물을 먹을 있어야 해요.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자기 자리 지키고 매일 말씀 묵상하고 읽고 적용하며 끊임없는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물을 마실 수가 있는 거예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의 물이에요. 정말 여러분들이 샘물을 마셔야 되는 거예요.

     

    제가 91년도에 처음으로 남서울교회 지하 교육관에서 큐티 모임을 인도하게 됐을 제가 삼십대 평신도 집사로서 감히 말씀을 전하게 됐으니까 얼마나 떨렸겠어요. 번도 아니고 큐티 모임을 제가 인도하게 됐는데 보통 개인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거는 그냥 시간이면 족해요. 근데 제가 첫날부터 시간을 했어요. 신학도 하지 않은 사람이 무슨 성경을 강해하겠습니까? 그래서 적용을 하면서 나눌 간증이 저한테는 에스겔이 있잖아요. 그래서 에스겔을 나누고 시간을 했어요. 근데 둘째 날도 3시간을 시어머니 얘기로 도배를 했어요. 그렇게 하고 나니까 이제 했어 간증을 없어. 너무 두려운 거예요. 간증 했는데 내가 성경 공부도 아니고 하지만 제가 이렇게 30년이 넘는 동안 그렇게 시간씩 모임을 하는데도 주님은 저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시간씩 진행을 하는데도 말이 있고 오신 분들이 지루하지도 않고 추우나 더우나 와주셔서 도리어 모든 성경 공부는 방학을 하는데 우리는 방학도 해가지고 그냥 방학에도 그렇게 많이 와주셨어요. 이것이 바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죠. 말씀을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물질도 마찬가지예요. 주님께서 은사를 부어주셨다면 없어도 베풀 것만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베풀다 보면 세상 돈이 돈이 되는 거예요. 수가 없겠지만 한번 체험을 해보세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일이 세상에서 바보 같고 핍박 받을 일이라고 해도 감사하다 보면 것만 있는 인생으로 이제 살아가게 주님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서 부어주실 믿습니다. 이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교회 얼굴이 영생하도록 솟아난 영생 화장품 바르고 미인 미남인 아시죠? 오면 그냥 분위기가 달라. 분위기가 진짜 살아있어요.

     

    땅에서 멸시받고 소외당하는 사마리아의 형벌이 이곳 수가성에서 사마리아 여인 때문에 마지막을 맺고 이제 비천한 여인을 통해 회복의 역사가 시작이 되요. 4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오늘날 세계에서 울려퍼지는 예배에 대한 유명한 말씀을 바로 세레 요한도 아니고 열두 제자도 아닌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밝히신 것이 번인데 번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밝히셨고요. 그리고 개인에게 밝히신 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메시아라고 밝히신 거예요. 얼마나 높여진 신분입니까?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에 대한 말씀을 주셨어요. 얘기하는 같지 않아요? 저는 이제 착각은 예술이니까 항상 나에게 주신 말씀이구나 비록 죄악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편을 다섯이나 여자였지만 여자는 메시아가 오실 줄을 아는 준비된 자였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였고 준비된 자였기 때문에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할수록 놀랍게 성장해가는 것을 수가 있어요. 유대인이라 그랬다 선생님이라 그랬다가 나중에는 이제 메시아인 주님이라고 알아보잖아요.여러분들도 의에 주리고 말씀에 줄인 사람은 주님에 대해서 코끼리 뒷다리 보다가 몸통 보다가 이제 전체를 보는 그런 분들이 여기 생기는 거예요. 처음부터 이제 몰라도 와서 붙어 있다 보면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런 모든 분들이 그득그득할 믿습니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당신이 옳습니다 하는 것이고 내가 아무리 해도 목장을 하고 교회를 나와도 당신이 옳습니다 하는 사람은요 돼요. 당신이 옳다고 하는 것은 가장 자식들에게 비판을 받지 않는 비결이고 가장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자녀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비결이에요. 집에서 남편 보고 옳다 아내 보고 옳다 시부모가 옳다. 친정 부모가 옳다. 당신이 옳다. 이게 자녀에게 주는 최고의 양육이고 비결이에요.

     

    저는 치매를 앓으시는 예전에 한번 했던 얘기예요. 치매를 앓으시는 시어머님을 7 동안 모시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사실 어머님보다는 남편과 손위 동서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막내여서 이제 어머니와 함께 살기를 바라서 저는 이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모시면서 정말 말로는 표현이 만큼 힘든 나날을 보냈어요. 특별히 3 아들 2 딸에게 아무것도 해줄 없었고 아이들의 성적이 떨어질 같아 불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밤새 잠을 설친 제가 잠깐 의자에 앉은 잠든 사이 고입을 앞둔 아들이 집에 왔는데 어머니의 대소변으로 온통 얼룩이 거실을 보게 되었어요. 광경을 목격한 우리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찡그리고 맥없이 앉아 있던 안방으로 들여보내놓고 할머니 엄마 듣고 있을 알고 내가 과자 왔는데 그랬어 하더니 목욕탕으로 어머님을 안고 들어가 어린 아이를 어르듯 깨끗이 씻겨 드리고 부른 사타구니에 분을 발라 옷을 갈아입히는 것이었습니다.  모습을 끝까지 바라만 보고 있던 저에게 엄마! 할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봐보세요. 그렇게 심란한 마음으로 함께 지내려니 엄마가 병이 들지요. 엄마가 남몰래 흘린 눈물을 제가 알아요.  제가 커서 보상할게요 라고 말했습니다.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어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하고 살았는지 손위 동서 원망하고 남편과 살기 싫어하고 아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할머니만 챙기는 싫었던 마음을 들켜버린 저는 아무 말도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말을 들은 순간부터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는 아들로 인해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여러분 이렇게 힘든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배부른 자에요 여러분 이제 감이 오니까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 저거 나하고 상관이 없어 맞아요. 이런 얘기 들으면 우리 한없이 우리의 한계를 보게 되는 거예요. 저희 어머니도 언니도 말할 없이 최고 학부 나온 사람들이 거짓처럼 구부리고 웅크린 인생을 살았어요. 근데 겉으로 보이는 열매가 없어 보였어요. 저에 비하면요. 멋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이상했지 오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난한 자와 함께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어요. 가지에 꽂혀서 사는 분들 같아요. 근데 저는 겉의 열매가 훨씬 많아 보이잖아요. 은사가 각각 다르다고 해도 저는 그냥 따라갈 없는 사랑과 위로가 정말 부족해요. 저는 입으로만 전하잖아요. 발이 가고 손이 가는 적용이 너무 부족해요. 근데 어려서부터 사실 우리 언니는 건강했고 저는 어려서부터 아팠어요. 지금. 저는 그러더라고요 이번에 필리핀에 갔더니 어떤 한의 선생님이 저는 그냥 선천적으로 약하게 태어났다는 거예요. 위가 아파서 그런 같기도 하고요. 하여튼 어머니와 언니는 가난함에 무서운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이제 깨달으니까 의에 주리니까 보기만 해도 회개는 언니보다는 많은 죄가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도 언니가 빈민들을 섬기니 언제나 그들을 도와주는 입장에서 이렇게 보다 보니까 수평으로 친구가 되기가 너무 힘들어서 거기서 뼈를 묻어야겠다고 간증을 했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거는 어떤 의로운 인생을 살아도 의의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나 우리 모든 식구가 의의는 세상에 없으니 명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배부른 것이지 그러니까 우리 누구를 보고 시기 질투도 말고 비교하지도 말고 나에게 부르신 자리에서 그냥 순종하고 가는 그것이 엄마와 언니한테 배운 거예요. 그러므로 의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이 옳도다가 맞는 거예요.  우리 너는 그러냐 이게 아니고 당신이 나보다 옳다 네가 나보다 옳다 하는 고백은 가장 배부름을 가져다주는 비결 중에 비결인 믿습니다. 여러분들 이걸 이번에 실천해 보시기를 바라요 오늘 설교도 어렵다고 그러면은 나는 돌아버려. 제가 절로 지나갈 건데 팔복에 모든 거를 지금 정리를 한번 해보고 있어요. 이거 어려워요. 어려워요. 근데 적용하기가 어렵죠.  이해가 돼도 .

     

    적용 질문이에요.

    여러분은 배가 고픕니까 부릅니까? 주님 분만으로 만족합니까? 당신이 옳다고 고백하고 배부름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당신이 옳다고 고백하고 나면은요 말할 없는 배부름을 경험하게 하세요. 그냥 이렇게 영원히 만족하는 거예요. 당신이 옳다고 하는 손해 보는 아니고근데 자기 죄를 보니까 고백이 나오겠죠. 자기를 직면하니까 그래도 연습삼아라도 해보세요. 그러면 그게 여러분들의 배부름이 믿습니다.

     

    성령의 배부름은 우리 모두 기복산의 배부름에 너무 주려 있다는 실상을 인식해야 돼요. 정말 거기서는요 끌고 내려오지 않으면은 기복산에서 내려올 자가 없어요.  이걸 이해를 해야 돼요 목장에서 당신 그래요 그러지 말고 그러면 맞아요. 당신이 옳아요 아유 그냥 집사님 맞죠. 그렇게 항상 인정을 해주셔야 돼요 오라 누가 말해도 옳아 옳아 우리는 사람 옳다고 해야 되니까 우린 너무 그냥 상한 심령으로 의에 주리고 이제 이렇게 목말라 있어요. 당신이 나보다 옳기 때문이에요.  그니까 믿음이라는 나의 죄가 보이는 거예요. 그거 옳고 그름으로 우리들 교회에는 진영 논리 지역 감정에서 벗어나야 당신이 옳은데 맨날 내가 옛날에 이렇게 당했다. 얘기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선두에 서가지고 이거를 이제 팔복산의 의를 이루셔야 돼요. 반드시 배부름을 약속하실 믿습니다.  이번 목장에서 당신이 나보다 옳다고 이렇게 고백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김양재 목사 주일 설교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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