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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1절~4절 - 팔복산에 갑시다주일설교 요약 2023. 2. 7. 22:12
마태복음 5장 1절~4절
팔복산에 갑시다
김양재 목사
성령의 우리들 행전을 쓰려면 다음 책을 이제 뭐로 할까를 생각하면서 조금 이제 연결 고리 하는 이 말씀을 좀 해야 되겠다. 요즘 마태복음 큐티를 하면서 주님께서 사역을 시작할 때 보니까 제일 먼저 입을 열어 가르치신 내용이 바로 팔복 마태복음 5장의 내용이었어요. 우리는 늘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그냥 그게 관용어예요. 그런데 그 속에는 맘몬신이 있고 돈신이 있어요. 그래서 너무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교회는 이제 팔복 받으세요가 문화가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설교가 행해진 산은 디베라 서쪽 막달라 남쪽에 위치한 완만한 구릉인 하틴산으로 추정이 는데요. 오늘날 이곳은 팔복산으로 불리워지며 산 정상에는 팔복교회가 세워져 있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도 모두 오늘 팔복산으로 가서 팔복교회주시는 말씀을 들어보시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제자가 돼야 합니다. 1절이에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4장 마지막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시는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자, 중풍병자 등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저는 사람이 가진 각색병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육신의 병도 셀 수 없이 많지만 마음의 병도 너무 많은 거예요. 과대망상, 피해 망상,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노름 중독, 쇼핑 중독, 채팅 중독, 진짜 무서운 의처증,의부증이 있어요. 또 게다가 병적인 게으름에 병적인 교양과 병적인 열심도 있습니다.안면 기형으로 태어나서 얼굴 전체가 시커멓고 수포로 덮인 그 가족을 모습이 끔찍하다고 온 집안 식구가 두들겨 패고 너 같은 것 때문에우리 집안이 저주 받았다고 하면서 음식을 못 먹게 치아를 뽑았는데 치과에 가서 뽑은 것도 아니고 집게로 생이를 다 뽑았다는 거예요.이렇게 되면 그 아이가 병자입니까? 그 식구들이 병자입니까? 그런데 이런 식구들도 자신들은 병 고침 받겠다고 예수님 따라다니는 무리 중에 있었을 거예요. 예수님은 이 수많은 무리를 보셨는데 헬라어 에이도는 여기서 ‘보다’라는 뜻을 넘어서서 더 정확하게 ‘알다’ ‘관찰하다’ ‘자각하다’는 이 뜻이 있어요. 병 낫기만 목표하는 수많은 무리들의 슬픔을 보셨지만 그들을 정확히 관찰하셨어요. 그러기에 예수님께는 그 무리들이 나온 게 아니라 제자들이 나온 거예요.
이곳은 사실 산이 없어요. 모두 구릉지대죠. 그런데 모세의 율법을 시내산에서 주셨기 때문에 신약에서 팔복의 복음을 똑같은 비중으로다룬다는 의미로 이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고 했어요.병행 구절인 누가복음에는 평지라고 하죠. 그런데 마테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다루니까 앉아서 가르치시고 누가는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다루니까 서서 가르치세요. 둘 다 맞아요.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누가 답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자들은 산책하는 것처럼 이렇게 어디 한번 가볼까 어슬렁어슬렁 나온 게 아니고요. 무리를떠나 산에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따라왔다는 뜻이에요. 누가복음 6장에 보면은 주님은 제자들 가운데 열두 사도를 세우신 뒤에그들에게 설교를 하셨어요. 산상수훈 5장부터 7장까지 내용을 하루에 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 가르치신 내용을 마테는 주제별로 모았고누가는 시간 순서를 중요시 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제자는 바로 열두 사도를 중심으로 한 제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서를 통해 우리는 제자들의 수준을 잘 알아요. 주님께 3년 양육을 받고도 이제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여행을 할 때도 그들은 자리 다툼을 했어요. 그러니 양육 초기에 그들의 수준이 어땠겠습니까? 그들은 타고난 성품도 재능도 다 형편없고 양육도 제대로 안 됐는데 그래도 부르신 은혜를 알았어요. 주님께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아직 제자답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자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이 믿음의 증거가 그 머물고 싶은 수많은 무리 곁을 떠나 한 분 주님을 쫓은 것이죠.
주님 따라 산에 올라갑니다. 내리막길이 아닌 오르막길이에요. 가기 쉽지 않아요.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누릴 수 있는 복 중 가장 큰 복이말씀이 들리는 복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말씀이 들리려면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있어야 되겠죠. 그런데 인기와 대접이 있는 무리 가운데있으면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없는 거예요. 그 무리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라고 거기 있으면 하다못해 먹을거리도 갖다 주고 선물도 갖다 주고 그러지 않겠어요. 병이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그곳에는 예수님이 없잖아요. 말씀이 없어요. 시끄러운 소리만 많아요. 그래서 말씀이신 예수님께 올라가면 말씀을 들을 수 있죠 내가 편하고 좋은 자리를 떠나 예수님께로 올라가는 것 이것이 제자로서 내 디뎌야 할 걸음입니다.
좋은 제자는 스승의 말을 잘 듣고 그 말대로 따르고 어디로 가든지 함께 가는 것이 최고의 제자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나온 제자들에게주님은 이제 어떻게 대하십니까? 굳이 없어도 될 말인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고 했어요. 이건 미완료 동사로 그만큼 주님은 제자들에게계속 팔복의 말씀을 강조하셨다라는 뜻이에요. 팔복이 제자 훈련의 핵심이에요. 팔복의 말씀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관통하는구속사의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혁명적인 복의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제자 훈련에 역점을 두신 것처럼 저도 이렇게 큐티 모임을 하다 보니까 제자 훈련을 언제 시키나 왜냐하면 일주일에한 번씩 와서 듣고 만 가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교회를 하게 되니까 제자 훈련이 가능해지게 되고 think와 목장 훈련을 통해서 제자들이키워져 나오고 여러분들도 미완료로 계속 또 제자를 재생산해내는 것을 이렇게 볼 수가 있어서 날마다 감격과 더불어 또 이제 제자 교회가 돼가는 것 같아서 두려움을 또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오기만 하면 있잖아요. 제자들이 나왔잖아요. 이것은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굉장히 가깝게 접근했다는 뜻인데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이 주어질 때 모세만 시내산에 올라갔고요 사람들은 산에 감히 접근조차도 못하고 십계명 받고 내려온 모세를 보기만 하면 죽으니까 모세가 수건 썼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 제자들은 아무런 격의 없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이 천국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에요. 문턱이 낮고 편하고 영육 간에 아주 친근한복음이라는 거예요. 팔복이 무서운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적용해 보세요.
적용질문
예배의 자리인 이 팔복산 현장 예배당에 올라와 예배하고 있습니까? 팔복산에 올라오기를 방해하는 더 편하고 좋은 무리의 자리는 어딥니까?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가 현장 예배를 드리는 게 당연했죠. 이거는 어떤 선택 사항이 아니었어요. 바로 어제 그제 코로나 이후의 첫 청년부 큐티 페스티발이 열렸는데요. 정말 가장 많은 구름떼 같은 청년들이 참석을 했어요. 어떤 청년은 전라도 광주에서 할머니 장례를 치르자마자 그냥 금요일 밤이라도 왔고 어떤 청년은 이번 큐페에 오기 위해서 직장 상사에게 무릎까지 꿇어야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 많은 아이들이 그 산에 올라와서 숨소리도 안 내며 다 말씀을 듣더라고요. 제자 맞습니다. 그곳이 천 명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한 천육백 명이 가서 앉으니까 다닥다닥 계속 다닥다닥 붙어 앉으라고 그러니까 우리 청년들이 가야 될 장소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정말 갈 수련회 장소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애들이 간증하는 거를 제가 간 시간만도들었을 때 아버지 성추행 또 아버지 외도 등에 간증을 하는데 그 아버지가 우리들 교회에 다 정착을 한 거예요. 그리고 이 간증하는 걸 다허락해 주셨어요. 이 청년 한 사람 청소년 하나에도 중심을 잡으니까 그 모두가 살아나더라고요. 살리더라고요. 제자 맞습니다. 그래서이번 큐페를 통해 새로운 청년들도 많이 있지만은 거기에서 우리 교회에 등록하게 된 새 가족 청년들이 사십여 명이나 이제 있게 되었어요. 음향을 돕는 외부 업체 팀의 불신자 자매도 영접시켰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저는 우리들교회 청년들이 한 사람당 천 명씩 전도회오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정말 심각하거든요. 이 MZ 세대가 우리 우리들교회 DNA가 이제 퍼지려면은 ‘오라 우리가’ 기억나죠 그렇게 전도를 하는 거예요. 그냥 채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요새 너무 무서운 MZ 세대에 이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이 그렇게 지금 모여들었다는 것이 너무 기가 막히고 이번 주에 이번 주에는 청소년부 수련회가 있습니다. 오늘부터 해외 아웃리치를 떠납니다. 3년 만에처음 현장 집회인데 다 열기가 너무 뜨겁고 예 그러니까 제가 간 금요일도 그렇게 제가 끝나고 나서 막 한 시까지 기도를 했는데 딱 다 올라와서 자기 죄 놓고 울고 기도하고 그러고도 밤에 잠을 안 자고 4시 5시까지 다 나눔을 했다는 거예요. 우리가 다 나눔에 걸신이 들려가지고 청년 아이들도 이런 모임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이제 하는 거예요. 정말 기도 많이 부탁드리고요. 이번에 청소년이 청소년이 변해야되잖아요. 청소년 집회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에 순종해서 이제 올해 수요 예배, 목장 예배, 주일 예배에 산에 올라갑시다. 어린애 업고 지하철 갈아타고 오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아는데 하나님은 아마 나중에 이런 집사님들한테 가장큰 상을 주시리라고 생각해요.저도 남편에게 복종의 언어를 썼지만 주일은 꼭 지켰어요. 그런데 저녁 예배를 한번 갔다 왔는데 못 들어가게 병원 그 셔터를 다 내려놨어요. 그리고 이제 한 번은 성경책을 다 다 찢어놓기도 했고요. 또 일 년에 한 번은 놀러 가는 곳을 따라가야 되는데 주일에는꼭 교회를 찾아갔어요. 한 번은 수혜가 났는데 주일날 비가 오니까 갈 데가 다 없어서 제가 간 그 해변가에 있는 교회를 친구들이 다 따라와 가지고 수혜 의원금을 다 내고 갔어요. 그때 우리 남편은 죄책감 때문인지 어디든지 갈 때마다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 그때 저 때문에 가서 교회 다헌금을 했으니까 아마 구원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교회를 아무나 갑니까 그렇죠? 하여튼 저는 주위를 철저히 지키기 위해서 주일날 어디 놀러 가자 그럴까 봐 제가 대예배 반주를 자청했어요. 이 모습을 보며 철옹성 같던 제 남편이 마지막 순간 예수를 영접한게 아닌가 싶은데요. 처음 주일을 어기고 함께 놀러 가면 가족이 화목하고 좋을 수도 있죠.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내 자녀 내 배우자가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 신앙을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구원과 성품은 하늘과 땅 차이거든요.
팔복산은 제자가 돼야 되고 두 번째는 가난한 자가 가는 곳이에요. 3절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오’ 3절부터 11절까지는 팔복에 대한 말씀인데요. 팔복은 8 가지 복이라기보다 8개의 덕목이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모든 문장이 똑같은 구조로 진행돼요. 원문대로 보자면 복 있는 사람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었죠. 시편1편 복 있는 사람은… 복이라는 개념은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스고 히브리어로는 우리가 잘하는 바라크 또 아쉬엘레 이런 복인데 일반적인 쓰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좋은 상태를 말해요. 인생의 일반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만족을 얻은 상태가 복인데요. 행복의 최상급이라고 할까요. 우리 한 자 복복자도 보일 시와 가득할 복이 붙어서 만들어졌죠. 그래서 다 복주머니를 만들어서 차고 다니거나 이제 그냥 걸어두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가득 차야 할 복인데 주님은 입을 열어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시자마자 복에 대한 개념에 대해아주 폭탄을 던지시는 거예요.
복이 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십니다. 원문으로 보면 복이 있는 사람 = 가난한 자-심령에서. 심령이 맨 끝인 거예요. 우리 말에서는 심령이 먼저 나와서 좀 마음의 준비를 하죠. 심령이라고 했으니까 진짜 돈이 없는 건 아니 아니겠구나 이러면서 빠져나갈 구멍이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강조점은 심령에 있지 않고 가난에 있어요.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심령이’를 빼고 가난한 자라고만 했습니다. 게다가 너희 가난한 자라고 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복과 가난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개념이에요. 복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라는 문장은 모순이고 오류죠.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인 거죠. 가득 차야 할 복주머니가 복복자가 어떻게 텅 빈 가난과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제자들의머리와 가슴에 이제 지진이 이제 난 거죠.
그래서 주님은 그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아닌 천국이,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이,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거예요. 바라는 것을 실상으로 놓는 복이라는 거예요. 이 가난의 복은 뒤에계속되는 모든 복들을 풀어주는 열쇠가 되는데요. 그러니까 이 팔복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51대 49로 임했잖아요. 그런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 하나님 나라,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거기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지, 구원이 임했지만 그러니까 이건 행위 구원이 아니에요. 이미 임했지만은 어떻게 그 하나님 나라를 누릴 것인가? 그런데 이미 하나님 나라 지금 누린 거예요. 이미 천국이 임했다고요. 임했는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 때문에 우리가 팔복의 말씀을 들어야 되는 거죠.
헬라어로 가난은 페네스라는 단어인데요. 이거는 이제 물질적인 가난이에요. 또 하나의 가난은 부토코스, 부토코이로 자기의 무능함을깨닫고 무릎 꿇어 구원하지 않을 수 없는 심령의 가난을 뜻합니다. 페네스가 상대적인 가난이라면 부토코인은 절대적 가난으로 그 어원이 웅크리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이 웅크린 모습에서 거지란 의미가 생겨났어요. 이거는 수동태적 의미의 형용사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을 모를 수가 있는 것은 알아도 인정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버티려고 하는 사람인 거예요. 이런 사람은가난하긴 하지만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요 도리어 교만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아 내가 가난해져야지 능동태가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서 바라볼 게 하나님밖에 없어요. 하나님만이 자기를 살려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아는 사람인거죠. 그러니까 전적 빈곤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성품이 겸손한 사람은 겸손하다고할 수가 없는 거예요. 성품이 겸손해서 절대로 하나님의 겸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리고 이 겸손 자체가 하나님을 왕으로 경외하며 그 통치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진정한 겸손한 자는 천국을 소유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겸손에 이르지 못하니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으로서이다라고 부르짓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에요. 오라 나는 공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백하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에요.
시편 69편은 구약의 팔복인데요. 다윗의 고난의 노래입니다. 그는 왕이에요. 노래도 잘해요. 정치도 잘해요. 친구도 만났어요. 모든 것이사랑스러운 자였지만 그의 청명함과 용감함으로 인해서 사울에 의해서 쫓김을 당하고 침을 흘리며 미친 척을 해야 되는 비참함도 겪고그리고 자기의 불륜으로 인해 아들에게 모함을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역모를 당하고 일생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인생을 살았어요. 다윗은 물질적으로 가난하지 않아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았어요. 그리고 그 인생은 이미 제자의 인생을 산 것이었어요.그에 비해 솔로몬은 역모와 배신을 당하는 아버지 다윗을 보면서 나는 믿는 사람하고 안 놀아야지 이거를 교훈으로 받았어요. 그래서 평생 이방인 두롯사람 후람과 같이 성전을 짓고, 후람과 성전을 하나님의 성전을 이방인과 짓고 왕궁들을 짓고 무역을 하면서 하늘을 찌르는 열심으로 일하다가 천 명의 여자를 왕궁에 채워놓고 거느리다가 드디어 여호와께로부터 마음이 돌아섰지요. 우리는 솔로몬에게서는가난하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소망을 끊어버린 자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가난하고 부자고는 물질의 문제이기도 하지만은 또 물질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일 수도 있는 거예요. 물질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그러니까 가난한 자체를 문자적으로 읽고 이걸 복이라고 하니까 이 유다 같은 사람은 열두 제자 중에 늘가난을 선으로 생각하고 왜 향유를 가난한 자를 돕지 않고 예수님 머리털에 바르느냐 굉장히 이런 사람은 합리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죠. 앞뒤가 딱 맞아요. 그런데 유다는 가난한 자는 세상 끝날까지 있고 예수님은 지금 돌아가시잖아요. 이건 한 번 밖에 없는 구원의 일인데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그 돈 가지고 가난한 사람 도와라 유다의 그 속에 사탄이 왕 노릇하고 있죠. 이걸 분별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가고 오는 세대 속에 유다 같은 사람들이 가난을 빌미로 행위 구원을 그렇게 외칩니다. 그러나 이 팔복의 이 가난이 솔로몬보다는다윗에게서 보인다는 거예요. 내 자신의 가난에 절망했다면 이런 내 상태를 깨달았다면 이제 예수님을 소유하기 위해서 손을 뻗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시면 우리도 가야 되는 거죠. 음성을 들어야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내가 51대 49로 구원 쪽으로 돌아섰어요. 그런데 내가 가야 될 점수가 100점이에요. 그런데날마다 이쪽으로 돌아선 게 분명한데, 이제 분수령적으로 돌아섰는데 뜻대로 못 사니까, 내가 주님을 너무 사랑하는데 심령이 가난해질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 마음에 못 드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너무 사랑하는데, 그러니까 이혼을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또 죄인지 알면서도 안 되는 나의 이 가난을 봐야 되는 거예요. 내 속에 가난을 보고 절망하고 엎드러져서 웅크리고 부르짖으면서 애통하고 탄식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100점에 영원히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날마다 애통하고 탄식해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눅이 들어요.너무 거룩하신 분 앞에서 늘 주눅이 들어요. 이 땅에서 부자만 봐도 우리는 주눅이 딱 드는데 하나님 앞에서 주눅이 안 든다는 것이 말이돼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뵈야지 예수 믿었는데 왜 맨날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그래요? 이러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렇게 팔복 설교가 우리 Think 일과예요. 이것을 개척 첫번부터 해도 여러분들은 너무너무 가난을 안 좋아해요. 그렇죠? 그래서 심령이 가난해지는 길, 나를 가난해질 수밖에 없게 하는 이 사람들을 위한 그런 기도 제목이 없어지는 게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에요. 내가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야말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거니까 이게 축복이에요. 그러니까 그래도 팔복대로 암이 전이 되었다고 차분하게 설교를 하신 권사님이 계시고, 또 신혼인데 이혼하겠다고 하니까 온 교인이 기도를 해가지고 당장말렸어요. 그래서 우리들 교회에요. 하나님이 이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쩔쩔 매시면서 설명해 주시는 것처럼 저도 쩔쩔 매면서 성도 여러분에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난하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환경으로 축복받으신 분 손 한번 들어보세요. 1부보다는 많이 드네요. 예수 믿어서 그렇죠?
그런데 우리들 교회 또 성도가 결혼이 너무 힘들다고 이 사연을 네이버에 올렸대요 그랬더니 모두 벌떼같이 일어나서 이혼을 하라고 했다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한테 묻는 거예요. 네이버에서 다 이혼하라 그래요 세상은 모두 이혼하라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오래되지는 않았다고 이제 그런데 청년부에 와가지고 그렇게 이제 오래 못 기다리니까 이렇게 불신 결혼을 했잖아.그것도 못 기다리고 한 거잖아요. 힘드니까 또 이혼 당장 이혼 생각이 나죠. 그래도 이 얘기를 저한테 또 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일이 생기면 목자 그냥 평초원들이 달려가서 그게 쩔쩔 매고 지금 설명하는 거예요. 하나님도 우리한테 쩔쩔 매고 설명하는데 우리가 힘들었을때 이 목자 평초원 심방을 진짜 받으시면은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냥 진짜 엄마 마음으로 가서 설득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깐 행복한 줄 알았다가 죽음과 함께 사라질 부자로 사시겠습니까? 잠깐 가난하지만 영생을 누릴 진짜 복 있는 사람으로 사시겠습니까? 부자인 상태로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택자들을 돌이키시기 위해 육이 무너지는 고난을 허락하시는 거예요.
적용질문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합니까? 그냥 가난합니까? 아니면 부자입니까?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합니까 ? 그래서 여러분이 가난해서 하나님이 쩔쩔 매시면서 설명하시는 음성이 들리십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딨는데요? 목자 마을지기 초원 평원님이 다 하나님으로 분하셔서 쩔쩔 매시면서 목장에서 설명하고 마을에 설명하고 조언해서 설명하고 이 설명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게요’ 하지 말고 맨날 ‘그게 아니고’ 이렇게 좀 하지 마시고 목자님이 얘기만 하면 ‘그게 아니고’ ‘목자님이 내 인생 살아봤어요’. 봤어요. 좀 이러지 마시고요.
팔복산으로 가려면 제자가 돼야 되고 가난해야 하고 셋째 애통한 자가 돼야 되는 거예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런데 아주 그 애통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냥 제가 늘 강단에서 눈물을 흘리는데 다들 이러는 거예요.그래도 과부가 돼서 저렇게 우시지? 속일 수가 없어요. 이러는 분들이 너무너무 많이 있어요. 오기만 하면 제가 슬퍼서 운대요. 그러니까 이게 어떤 슬픈 장면 상황 때문에 우는 게 아니고요 보세요. 다윗의 아들 압살놈이 죽었을 때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을 하고 슬피 울었을 때 그 신복부하 군대장관 요압은 그눈물을 이해하지 못해서 다윗에게 이렇게 말해요. 아니 왕을 반역한 자 압살롬은 그렇게 사랑해서 우시고 왕을 위해 충성한 자들은 이렇게 미워하실 수가 있어요? 그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보면 압살롬이 반역했잖아요. 아들이지만. 그래서 압살놈은 처단한 자기들을 이렇게미워하면 되겠냐고. 구원을 모르면 이게 이해가 안 되죠 그렇죠? 그게 맞잖아요. 그런데 그러니까 다윗이 너무 가난한 자가 돼서 이럴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이 다윗의 눈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최고의 참모로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해가 되세요? 여러분은 이 다윗의 눈물이 이해되세요? 대답이 안 나오잖아요. 아니 아무리 아들이라도 반역을 했으면 죽여야지 그렇게 생각을 하실 텐데 구원의 일이라는 것이 그냥 구원받은 사람은 이 얘기가 딱 이해가 돼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요압같이 그렇게 얘기를 해요. 내가 복이 있는지 없는지는 애통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으면요.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애통이 아니고 원통이에요.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사건이 오고 질병이 걸리는 건데 암이 오는데 그냥 원통해요. 내가 자식 때문에 남편 때에 아내 때문에 상사 때문에 암에 걸렸다. 그놈 때문에 걸렸다. 이 원통과 애통은 다른데 원통이 눈물을 흘리면 병 낫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있는 대로 지옥을 살면서 끔찍한 인생을 삽니다.
그러니까 허다한 무리가 병 낫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면 딱 흩어지잖아요. 그렇죠? 말씀이 안 들려요. 병 낫는 게 목적이기때문에 광풍에서 사람의 위로를 받으면 안 되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되겠는데 사람의 위로를 받으러 여기저기 쫓아댕기니까 하나님의 위로를 못 받으니까 너무 그 위로가 얄팍해서 끔찍한 인생을 사는 거예요. 애통은 인간적인 아픔 슬픔이 아니라 바로 나와 너의 구원을위해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으로 흘리는 눈물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창자가 끊어질까요?. 내 죄 때문에 울어야죠 그러니까 제가 말씀이 들리세요? 는 말은 말씀을 깨달으세요? 이 얘기고 이 얘기는 죄인이라는 걸 깨달으세요? 이 질문이에요. 그러니까 죄인이라는 말씀이 도무지 나하고 상관이 없으니까 제가 도덕 설교 안 하는 바에야 어찌 이게 들리겠습니까 그러니까 날마다 와서 졸고 비판하는 것밖에할 것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병 낫기만을 바라고 통곡하는 사람과 그 자기의 이기적인 고통에만 갇혀서 슬퍼하는 그런 자와 같이 있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그러면 그런 사람을 보면서 예수를 믿게 해야 되겠는데 내 옆에 식구들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니까 절대로 예수를 안 믿으니까 애통하게 되죠. 그런데 남이 되면 막 욕하고 끝날 텐데 몇십 년이 지나도 안 믿는 그 사람 때문에, 배우자 때문에, 자녀 때문에 우리는 이제 갈수록 갈수록 그 미워했던 그와 내가 똑같은 모습이라는 걸 직면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나도 안믿는 그 사람은 나에게 애통을 가르쳐주는 최고의 공로자가 되는데요. 난 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이기적이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이러다가 보니까 내가 이기적이니까 그 이기적인 게 내가 못 봐주겠는 거 점점 나를 직면하게 되는 거예요. 아무튼요 그 미워하는 게 나한테 똑같이 있다니까요. 그런데 자기는 몰라 그럼 상대방만 계속 정죄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이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이 벌레만도 못한 나의 죄성을 보게 되는 거죠. 사람이 깨어지기 위해서는 정말 자신의 끈질긴 죄성을 인정해야 되는 거예요.
야곱의 죄성이 얼마나 끈질긴 것인가를 봐야 되는데요. 왜 하나님이 약복나루에서 야곱을 공격하셨습니까? 그 목적은 야곱을 깨트리기위함이에요. 야곱의 죄성과 자아를 깨뜨리시기 위함이에요. 그런데 야곱은 이 상황이 오기 전까지 평생 나의 원수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형 에서와
나의 재물을 빼앗으려고 하는 외삼촌 라반이다. 이 생각에 사로잡혀서 원수를 갚기 위해서 열심히 고생해서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20년이 되도록 인내하며 돈 벌고 여자를 넷이나 얻고 자식까지 이제 열둘이나 데리고 금의환영하면서 약복강가에 딱 섰어요. 야곱은 잔꾀가 많잖아요. 그러니까 마지막까지도 그 형에서를 만나기 위해서 그 재물도 안 뺏기기 위해서 종들에게 할 말을 입에다 다 넣어주고 완벽한 준비를 다 마치고 가족을 보내고 약복강가에 홀로 남았어요.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것이 틀린 생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데요.야곱의 노력과 끈기는 누구도 못 따라가죠. 이십년의 훈련이 끝나도 야곱은 자기 죄가 안 보이고 애통할 일이 없었어요. 야곱과 하나님은날이 새려 할 때까지 씨름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문제를 제거해 주신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야곱의 원수인 에서를 쳐서 무너뜨린 게 아니에요. 도리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야곱의 원수가 되어서 야곱의 자아를 깨뜨려 버리셨어요. 진짜 내 원수는 에서가 아니고삼천 라반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죄성과 나의 타락된 본성 나의 깨지지 않은 자 교만이구나 이거를 깨닫게 된 거예요. 하나님은 야곱의환도뼈 정도는 쉽게 부러뜨릴 수 있었어요. 환도뼈 정도는 문제도 아니에요. 하지만 하나님이 내 원수요, 내 대적이구나. 진짜 내 원수는내 안에 있는 죄성 나의 타락된 본성 깨지지 않는교만이구나 이거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야곱과 날이 세려 할 때까지 씨름을 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를 많이 했다 라는 의미보다는 야곱의 죄성이 얼마나 끈질긴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러 가가지고 그냥 맨날 고쳐주세요. 낫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기도를 오래 할 때마다 내 죄성이 얼마나 끈질긴가 이거를보는 거를 기도 응답이라 그래야 되는데 대부분 아까 무리는요 그렇게 악한 식구들도 가서 기도한다니까요. 내 병을 낫게 해달라고, 식구는 이빨을 다 뽑아놓고 가서 막 열심히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날이 세려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는 간다라고 말씀하세요. 날이 새서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면 야곱은 이제 죽게 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캄캄한 데서 씨름을 했는데요. 떠나시면서 드디어야곱의 환도뼈를 치시니까 환도뼈가 위골이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야곱은 이때 이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붙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때에 맞지 않는 질문을 야곱에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니 이름이 뭐냐 그러시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죠. 히브리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본성을 나타낸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야곱이 드디어 대답합니다. 야곱입니다. 야곱이에요. 제 이름은 야곱이에요. 나는 사기꾼에 돈주하고 여자 좋아하고 거짓말쟁이 야곱이에요. 아니 형 에서의 발목을 잡은 자고 찬탈자고 모사꾼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을 한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고 고백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이기적인 이 세상에서 내 이기적인 죄성을 보라고 자기하고똑같은 이기적인 사람을 붙여주시는 거예요.
그 형 에서를 비교하고 시기질투하고 라반의 돈을 너무 또 부러워하고 그런데 그걸 가져갔으니까 내 돈 뺏어갔다고 영육 간에 욕심이 그득그득한데 그러니까 이제 너무 미워서 죽고 싶은데 보면 그게 딱 내가 그 본성이 있는 거예요. 누가 나를 정말 괴롭히는데 하나님 나라의51 대 49로 점점점점 많아지면 그 일이 다 이렇게 저기 이렇게 암초가 안 없어져도 성령의 물을 타고 거기를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그암초를 없애겠다고 내 원수 갚겠다고 평생 노력해도, 50년 60년이 지나도 내가 어저께 청년부 설교했는데 80세 난 할머니가 90세 난 할아버지하고 이혼 소송에서 3억 받았다잖아요. 그런데 평생을 지금 미워하고 산 거예요. 50년 60년을.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이 임하지않으면은 평생에 미워하다가 가는 집이 수두룩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기적인 저 사람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어 하는 사람이 바로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못 살아를 외치면 똑같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못 사는 거예요. 상대방의 악함은 나의 악함을 볼 수있는 최고의 기회인 거예요. 그러니까 욕을 그냥 입에 침을 튀기면서 하면 그게 꼭 자기야. 그러니까 목장에서도 이렇게 분별을 해보세요.
나의 자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 또 나를 애통하게 하는 사람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은 위로를 받는다고 그게 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자기 자신 때문에 절망해서 애통하는 사람은 위로를 받는다. 이거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단어 헬라어 파라 칼레오 성령의 안아주심 설교할 때 들었죠. 내가 애통하면 하나님이 안아주셔요 위로해 주세요. 내 죄로 인해 절망과 탄식의 깊이가 클수록 주님의 위로도커요. 애통이 크면 위로도 크고 애통이 얄팍하면 위로도 얄팍한 거예요. 그러니까 내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는 복이 최고의 복인 거예요.
청교도 신학자이고 목회자인 토마스 와스는 이 팔복을 설교하면서 복음적인 애통의 첫 번째로 복음적 애통은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는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상처가 난 사람과 같다고 의사에게 모든 상처를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되잖아요. 그렇죠 아프잖아요. 상처 보여줄 때. 예 그러니까 슬퍼하는 거죠. 영적 진리예요. 우리가 함께 나누고 내게드린 말씀 앞에 내 죄를 고백하고 말씀을 힘입어 공동체에 고백한다면 함께 애통하고 이 세상에 줄 수 없는 참된 위로를 파라 칼레오 하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줄 믿습니다. 어떤 정신과 선생님은 그냥 우리 성도가 가니까 그 교회하고는 안 맞는 것 같다고 우리 교회가 너무 죄를 얘기해가지고 당신하고는 안 맞는 것 같다고 교회를 뭐 어쩌고 저쩌고 하라고 그러니까 여러분 정신과 선생님한테 가서 상담하지 말고 약만 처방받아요. 처방은 목장에서 받아요. 아셨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인본주의를 넘어서는 신본주의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말 들으면은 맨날 그 정도면 이혼해요. 그 정도면 떠나요. 이런다니까요. 왜냐하면 정말 죄에게 하는 거 이 팔복이 내 죄를 보는 건데 이거를 다보지 말라 그러잖아요.
적용 질문이에요.
무엇 때문에 애통합니까? 소중한 것을 상실해서 애통해요? 내 자신 때문에 절망하여 애통합니까? 공동체 안에서 위로를 받기만 합니까? 위로를 전하는 통로가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 팔복을 끝도 없이 우리가 20년 들었는데 지금 또 처음 듣는 것 같지 않아요? 아 잘 들어서 적용 잘 하고 있어요? 이것도 저것도몰라서 지금 가만히 있죠. 인생은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너무 치열하게 싸워야 될 일이 많아 여기 오면서도 차에서 싸웠고 지금 가면서도 차에서도 싸울 예정이에요. 점심 먹으면서 싸울 거고 밤에 또 싸울 거예요. 그럴 때 우리가 그래도 여기서 예배를 드리면서 총알을 장전을 했잖아요. 그래서 잘 싸울 수가 있는 거예요. 총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 사소한 것으로 수건을 며칠 쓴다 안 쓴다 이걸로 이혼하려고 그랬대요. 이 수요일 부부가 수건을 왜 이렇게 오래 쓰냐 짧게 쓰고 이런 게 총알이 장전이 안 돼서 이런 거예요. 그래서 너무 애통할일이 많은 한 부부의 얘기를 얘기를 해드릴게요 2010년도에 왔는데 이 엄마는 박사고 경영학 교수래요. 9년이나 했대요 결혼을 늦게 했는데 결혼 정보 회사에 노블레스 클럽 위주로 가입을 해가지고 사자 들어간 사람을 포함해서 한 100명을 만났답니다. 그런데 평범한 4년제 대학을 나오고 중소기업에 다니는 영업 팀장인데 시댁이 좀 산다 그러니까 결혼하면 돈 걱정 없다. 재테크 잘하셔서 시어머님이 알부자다 그러니까 남편이 너무 날 좋아하고 나에게 맞춰주고 그래서 이제 그렇게 해서 이제 결혼을 했는데 정말 6개월이라도 더 만났으면안 했을 건데했다는 거예요. 이제 일단 결혼하고 나니까 연봉을 속였어요. 그래서 산다 안 산다 난리가 났는데 시어머니는 오히려 얘 남자들 다 그러고 결혼해 니가 몰랐구나 나는 내 딸이라도 그렇게 되었어도 그냥 살라고 해 예 아 그래서 이제 우리 목사님 말대로 속은 제가 나쁜 거잖아요. 그래서 정말그렇지만은 너무 많이 싸웠어요. 남편이 일반 4년제 대학 나왔다고 했으니까 그냥 그런 줄 알고 사회복지사 자격증 하나 땄으면 좋겠다고 해서 온라인으로 제가 공부를 시키고 협회 자격증을 넣었는데 자격증이 안 나오는 거예요. 알아보니까 고등학교밖에 안 나온 거예요.그러니까 거짓 학벌에 거짓 연봉에 거짓 재력 다 드러나서 별거하고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산다 안 산다 난리가 났지만은 우리들 교회로이제 온 거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건 이 아들이 아빠를 너무나 이제 좋아하는 거예요. 그리고 지나고 나서 보니까 이 아빠가 그런 건 다 거짓말시켰어도 너무 착한 거예요. 우리들 꽤 너무 지금 잘 붙어가고 있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런데 이분이 교회를 십 년 가까이 다니면서도 큐티 노트가 있는 거를 몰랐대요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남편을 무시했죠. 그런데 10분 정도되는 큐티 노트가 너무 좋아서 날마다 듣다 보니까 우리 남편 힘들었겠구나가 깨달아져가지고 남편한테 사과했다는 거 내가 너무 그냥격렬하게 무시했구나 힘들었겠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대요 그리고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나서 신기하게도 정말 미움이 사라졌는데 그래요 박사님의 아내가 남편이 고졸이라는 거 알고도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자기 죄를 보니까 가정을 지키는 거예요. 이게 팔복산에 가는비결이에요. 별 인생 없어요. 우리끼리 말이지만 세상에서 속이지 않으면 결혼이 됩니까 세상은 다 속이는 거예요. 그 정보회사 같은 데가지 마요. 우리 불신 결혼하지 말고 우리 더블 공동체도 생겼는데 별 인생이 없다니까요. 그래도 결혼하면은 이혼이라는 건 없는 거예요. 내가 오늘 일부 얘기하고 들어보니까 남편이 남편이 그냥 너무너무 착한 거예요. 이 부인 만족시키기 위해서 막 쓰리잡을 뛰고 그냥너무너무 열심히 해서 여러분 옳고 그름은 없어요. 예수 안에서 믿고 안 믿고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결혼을 해야지 이 말이 들릴 거아니겠어요. 그런데 하여튼 우리들교회 와서 이렇게 가정을 지켜가는 이것이 팔복산에 갑시다 하는 이 초청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말씀을 맺어요. 그래서 팔복산에 가려면 그건 무리가 아니고 병 낫기만을 원하는 무리가 아니고 제자가 돼야 되는 거야 수많은 사람이 말씀 들으라 그러니까 다 흩어져 버렸어요.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이 임합니다. 그러니까 이 가난에 개념이 달라져야 되고 복의 개념이 거듭나야 돼요 애통해야 내 자신 때에 다른 사람 때문에 애통하려면 내 자신 때문에 애통해야 다른 사람 때문에 애통하고 그래야 파라 칼레오하시는 성령의 안아주심에 위로를 받게 되는 줄을 믿습니다.[출처: 2023년 2월 5일 우리들교회 김양재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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