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우리들교회/QTIn/2023 표어 이제는 안심하라 (행27:22)

Today
Yesterday
Total
  • 사도행전 28장 16절~22절 - 성령의 이야기
    주일설교 요약 2023. 1. 1. 04:34

    2022년 12월 18일

    성령의 이야기

    사도행전28 16~22

    김양재 담임목사

     

     

    어려서부터 옛날에~ 옛날에~ 하면서 옛날 얘기 들으면 너무 재미있잖아요. 교회 다니면서도 그 에서의 팥죽 이야기, 동방박사 이야기 이런 얘기가 지금까지 너무 기억에 남아 있어요. 뭐 대단한 얘기도 아닌데. 그런데 이번 주 수요일에 이 바울의 그 증인을 성극 정도가 아니고 큐티와 뮤지컬을 합한 큐지컬로 공연을 하는데요. 지금까지 룻기에 나온 이야기, 또 이제 사무엘의 그 압살롬의 기념비 이야기 그걸 한 편의 뮤지컬로 공연을 해가지고 룻기와 사무엘 이번에는 사도행전이 진짜 입체적으로 기억이 될 거에요. 우리는 아주 정말 미천한 기억도 굉장한 어렸을 때에 진짜 행복한 기억인데요. 창조적으로 정말 역사하는 우리들 교회라고 생각을 해요.우리들교회 은혜를 너무 받은 극단 대장부가 공연을 하는데 구속사를 몸에 체득한 배우들이에요. 비교가 안 돼요. 우리 벌써 큐지컬로 공연한 것들 다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불신 결혼하지 말라고 100번 얘기해도 불신 결혼은 안 돼요 진짜 진짜 안 돼요 이 노래 하나가 너무 기억나잖아요. 그렇죠. 그것도 아이들이 이제 여기에서 공연할 때 했던 건데 꼭 와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본문의 이야기가 두 번이 나오는 거에요.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하는데 바울은 그 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형제들에게 하고 이제 출발을 했습니다. 

     

    노스웨스턴 대학의 심리학 교수 덴 맥아담스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하는데요. 나의 정체성의 뿌리가 이야기를 통해서 좋은 일에서 나쁜 일로 바뀌는 것을 오염 시퀀스라고 하고요. 나쁜 일에서 좋은 일로 바뀌는 것을 구원 시퀀스라고 해요. 리뎀션 시퀀스요. 그런데 오염된 이야기에 뿌리를 둔 사람들은 개인적인 면에서 진짜 만족을 못한대요. 그런데 구원 시퀀스 즉 좋은 이야기가 바탕이 된 사람들은 굉장히 만족하고 산다는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의 이야기는 어디에다 뿌리를 두고 있습니까? 아픈 상처에요? 아니면 너무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그런 이제 기억입니까? 그러나 이제 중요한 거는 세상은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 다음에 대안이 없잖아요. 늘 결국은 둘 다 자신과 자기 중심성으로 나에게 뿌리를 두기 때문에 행복해도, 불행해도 결국 그 이야기 속에는 오염과 구원의 그 이야기 자체에서 늘 나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어, 나빴어 하면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걸로 얄팍한 추억의 뿌리를 가지고 좋았어 나빴어 이런다는 거 하지만 우리 정체성의 뿌리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이런 나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의 이야기에 내 뿌리를 둔다면 행복과 불행이 십자가로 이어지게 되고 최고의 이야기가 탄생된다는 거죠. 최고의 스토리가 나를 통해 탄생이 된다는 거에요. 그건 행복, 불행과 상관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이며 나의 간증이며 그 분의 간증인 것이에요. 오늘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러 로마까지 지금 이제 온 거에요.

     

     

    오늘은 성령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첫째로 나를 지키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16절이에요.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 일을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바울이 드디어 이제 로마에 갑니다. 길고 긴 시간이었죠.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또 바울의 행적을 다 잊어버렸어요. 에베소에서 성령의 경영으로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결심한 지 5년 만이고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서 영내에 감금된 밤에 주님이 네가 나의 일을 로마에서도 증언하리라 한 지 3년 만이에요.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있었습니까? 아니 많은 사건이 있었습니까? 빌립보에서, 고린도에서, 에베소에서 그런 얘기들을 이번에 담을 거에요. 또 그래서 잡혀가고 쫓겨가고 요즘 큐티 하는 고린도후서에서도 나와 있지만 아시아와 유럽, 아가야, 마게도니야 교인들이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까지 갔는데 거기서도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도 유대인들의 폭동에 매맞고 잡혀가고 천부장이 죄가 없다고 했음에도 총독이 두 번 바뀔 동안 옥에 갇히고 결국 로마로 재판을 받으러 가는 길에는 또 이 선장과 선주들이 말을 안 들어가가지고 유라굴로 광풍이 오고 배가 다 파손되고 겨우 널 조각 잡고 여기까지 왔어요. 이와 같이 로마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로마 인구가 100만 에 달했고 로마 제국이 전체 경제 생산에 10%를 창출했다고 하니까 정말 로마는 모든 것을 갖춰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자신했을 것 같은 땅끝 나라의 끝판왕이에요. 더 이상의 땅끝 나라는 그 당시에 이제 없는 거에요. 

    사도행전 1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이 사도행전 전체의 흐름을 이끌어가고 있는데요. 이제 오늘 크라이막스에 해당하게 되는 거에요.이 땅끝 로마에 바울이 입성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16절에 뭐로 시작을 합니까 우리가라고 또 시작을 해요. 그런데 사도행전 마지막 장 28 16절을 끝으로 이제 주어가 우리에서 바울로 바뀝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실제로 누가와 아리스토가가 동행을 했지만 로마로 들어간 이후부터 주어는 바울로 기록이 돼요. 바울은 로마 시민이고 천부장의 조서를 잘 써줘서인지 따로 있게 합니다. 특별 대우받았어요. 그러나 한 군인이 지키게 합니다. 내 옆에 형제들이 지키는 게 아니라 이제 지키는 군인이 있게 되는 거에요. 이 지키는 자가 있어서 바울은 자신의 스토리를 완성할 수 있게 된 거에요. 

    로마까지는 우리가 함께 왔어요. 그런데 이제 나의 사명은 혼자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놀러 오지 않았어요. 사명 감당하러 왔어요. 어떤 사명이요? 더 실제적으로 말하면 죽으러 왔어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제자 양육하다가 결국 골고다 그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 옆에 아무도 없었어요.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도 홀로 박히셨어요.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그 얼굴을 가리우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죽으러 가는 길은 혼자예요. 십자가는 나 혼자 져야 해요. 공동체를 통해 위로를 받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면 적용은 내가 해야 돼요 이제 최선을 다해 내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여러 가지 처방을 다 하지만은 결론 결정은 여러분들이 하셔야 되는 거에요.그렇게 위로를 받았는데, 내가 공동체에서 하라고 그래서 그랬잖아요. 이러는 사람은 십자가 지기 싫은 사람이에요. 우리는 요술 방망이가 아니에요. 점쟁이가 아니에요. 구속사의 최대의 결론을 내주는데 이게 아직 구속사가 안 들리는 사람은 공동체에서 이거 하라고 그랬어 저거 하라고 그랬어 내가 이렇게 됐어요. 아니에요. 아무리 우리가 있어도 결정은 내가 해야 합니다.

    나를 감시하는 한 군인이 마치 남편처럼 아내처럼 옆에 꼭 달라붙어서 지금 나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우린 이럴 때 뭐라 그래요? 바울 정도 됐으면 아니 내가 이제 좀 사역 좀 하도록 하나님 나에게 자유 좀 주세요. 그리고 집에 가서도 아니 바울 정도 됐는데, 아니 나를 못 믿냐? 네 못 믿습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절대 아니에요. 그러하기에 우리가 성령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내 삶에 써내려가기 위해서는 나를 지키는 자가 꼭 있어야 합니다. 지키는 자가 없으면 반드시 흘러 떠내려갑니다. 물질 때문에, 병 때문에, 기가 막힌 사건들 때문에 사방이 다 막힌 것 같고 나를 끝없이 감시하는 상황이라면은 하나님께서 그 삶을 통해 성령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실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감사와 행복에 뿌리를 둔 이야기가 아니라 상처로 얼룩진 이야기로 끝나는 이야기도 아니고 처절한 아픔과 눈물 가운데 결국 십자가를 통한 죽음과 그 죽음 뒤에 감히 바라지도 못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것입니다. 

     

    시댁과 남편의 그 한 명이 정말 만 명 같이 저를 감시했는데요. 그 한 명이 만 명 같아서 그 한 명만 없으면은 내 세상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 명이 지켜도 저절로 만 명이 그리고 전 세계가 지키고 있다고 생각이 돼요. 그만큼 제가 이제 두렵고 떨림으로 살고 있는데요. 제가 그렇게 해나가고 싶더니 남편이 가고 혼자 있으니까 나가고 싶은 생각이 싹 없어지더라고요. 시집살이, 처가 살이 하는 지체들은 그냥 나가고 싶어요. 그래서 그냥 우리는 시댁의 공기도 싫어. 숨이 막혀. 같이 있는 것도. 그러다가 분가를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딱 나가는 게 싫어져요. 분가하면 열심히 주의 일을 할 것 같더니 분가하고 나니까 멀리 멀리 이렇게 가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 정말 환경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속지 마세요. 저 여자와 저 남자와 살면 원이 없겠다. 속지 마세요. 내가 분가하면 원이 없겠다. 속지 마세요. 나의 행복과 불행은 말짱 헛것이지요. 주님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정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 열심히 감시 받고 있는 사람이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이런 사람들이 주님의 이야기를 써내려가죠그런데 그것도 잠시일 수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잠시라도 일순간이라도 주님과의 만남은 최고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네 구세주의 사랑 이야기 우리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많이 부른 이런 내용이 아이들에게 추억이 되는 거에요.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적용 질문 드릴게요 

    나를 지키는 사람이 한 사람이 만 명 같은가요 만 명이 한 사람 같은가요? 즉 나를 지키는 사람이 없어도 있는 것 같이 사나요? 지키는 사람만 없으면 마음대로 살 것 같은가요? (처가살이 시집살이의 애환을 좀 나눠보세요.)

     

    그런데 그 이야기들은 다 성령의 이야기로 승화시킬 때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환경에 있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제가 5년 만에 주님을 만났어도 이제 그 후로도 8년을 더 집에 두셨어요. 네가 주님 만났다고 하는데 계속 갇혀 있어도 성령의 이야기를 쓸 수 있나 훈련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이야기는 나를 지키는 자가 있을 때 쓸 수가 있고 두 번째는 소망으로 말미암아 쇠사슬의 매임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17절서부터 20절까지입니다.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제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하며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여러분 이제 사흘 후에 이제 주어가 바울로 굳어졌죠. 바울이 주어가 돼서 뭘 했나요. 로마로 입성을 했으니까 바라고 바라던 황제를 만나야 되잖아요. 하나님은 지금까지 로마 총독 분봉왕들을 다 만나게 하셨기 때문에 로마 황제를 만나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여전한 방식으로 자신을 끝없이 배척했던 유대인들을 지금 만나게 하셨죠. 이는 돌고 돌고 돌아 내가 상처 주고 상처받았던 그 사람들에게 들어가 이 성령의 이야기를 또 하라는 거에요. 바로 믿지 않는 내 동족 내 가족에게 들어가는 것이 여전히 로마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어디를 가도 동족과 가족은 잊을 수가 없어요. 이것이 성도의 갈 길입니다. 

    이제 바울이 언제나 전도하러 가서 유대인의 회당부터 들렸어요. 아시죠? 배척을 그렇게 받아도 일단은 거기 들어가고 나서 전도합니다. 우리가 쭉 봤을 때 잊지 않으셨죠.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열매가 많아도 내 가족은 잊을 수가 없는 거에요. 배척을 받아도 또 가서 얘기해야 돼. 그거 안 들어도 얘기해야 돼. 기도해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들 안 들어도 전도해야 돼요. 이렇게 로마까지 왔다면 바울이 그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써내려 간 얘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바로 그 이야기를 내 가족 내 동족 유대인들에게 지금 또 하고자 하는 거에요. 그 유대인들은 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잖아요. 거기서 예수를 믿었고 이 사람들은 안 믿었고, 이 사람들은 구원도 관심이 없지만은 가장 복음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에요. 사도행전 읽어서 아시죠? 내 고향, 내 동족 사람이 복음을 무섭게 방해를 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거죠. 이 사람들은 세상밖에 모르니까 로마를 너무 좋아해요. 먹고 살기 위해서 겨우 겨우 이제 이주해서 로마에서 터 잡고 사는데 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로마에서 추방당해서 고린도로 왔잖아요. 그러니까 기독교인들 때문에 네로가 기독교인들 다 죽였잖아요. 방화범으로 몰아가지고. 그러니까 이 기독교인들 때문에 쫓겨났다는 거죠. 안 좋은 거는 다 기독교인들 때문이야. 우리가 하나 예수 믿으면 안 좋으면 너 때문에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이러잖아요.그런데 그러다가도 유대인 회당 사람 중에 하나 둘 씩 그 놈은 그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거에요. 이탈하는 사람도 생긴 거에요. 그러니까 다른 데로 간 거에요. 구약에 대한 해석도 그 동안에는 수양 수염소 제사 번제로 다 몇 마리를 불태우고 이런 거 있잖아요. 그렇게 하다가 예수님이 오셔서 바울이 와서 영적으로 이제 우리가 제물이 돼야 된다 우리가 성전이다. 막 이런 얘기를 하니까 이 해석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에요. 여러분 이해가 되시죠? 그 문화가 그렇게 하루 아침에 안 바뀌어져요. 그리고 이미 충돌이 일어나서 지금 아시아 그 마게도니아 교회부터 유럽 여러 에베소 아시아 교회 유럽의 마게도니아 교회에서 바울만 가면은 소동이 일어나는 거야. 받아들이는 사람, 안 받아들이는 사람 인해서. 그러니까 이제 가는 곳마다 바울은 이 오해를 풀지 않으면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향해 가진 오해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가서 이 얘기를 전해야 되는 거에요. 20절에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이야기가 오늘 두 번 나온다. 그랬잖아요. 이야기하려고 청했대요.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어긴 일이었기에 죄가 없지만은 바로 너희와 같은 동족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오직 너희를 눈으로 보고 만나기 위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땅끝 나라 세상의 중심인 이 로마까지 왔다.그런데 로마인들이 나를 죄가 없다고 해서 석방하려고 했는데 바로 너희 유대인들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너희들이 나를 고발해서가 아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나려고 저 먼 곳 예루살렘에서 묶여서 지금 여기까지 왔다. 이 얘기를 한 거에요. 여러분 로마라는 어떤 지역 지명이 목적이 아니에요. 바울이 악하고 음란한 고린도라는 도시에 왔을 때 그냥 밤에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그러시죠? 사도행전 18장에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다. 그러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로마를 변화시켜야 하리라가 아니라 로마도 이성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은 거에요. 그런데 내가 너희를 보고 너희가 변화시켜야 될 사람이야. 사실 그래서 함께 이야기하려고 이 고생 고생해서 로마까지 왔다. 이렇게 얘기를 일단 하는 거에요. 여기서 이야기하다는 동사는 사도행전에서 딱 두 번 쓰였는데 프로스랄레오라고 사도행전 13 43절에 쓰였어요. 제가 설교한 거 기억나실지 모르겠는데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 회당에, 처음 설교를 하는 거죠. 시작할 때 이 동사가 쓰였는데 이 동사는 부정 과거 동사로 딱 한 번 한 번 말했는데 그냥 그다음 안식일에 온 시민이 거의 다 모였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 아주 그냥 바울을 형편없는 노인인 줄 알고 설교 강단을 줬잖아요. 그런데 다 모이니까 거기서 유대인들이 이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했다고 13장 보면 그 얘기가 나왔어요. 그러니까 예수 얘기를 하면 유대인들이 이렇게 시기가 가득한 거에요. 그런데 지금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28장에 마지막으로 유대인들 보고 하는 이 설교가 같은 동족 같은 대상에게 할 때 이 얘기가 또 쓰였어요.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구속사의 이야기를 지금 했다는 거에요.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중요한 것이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말입니다. 그 동안은 이런 얘기를 할 때 구원 예수 회개등으로 표현을 했는데 이 로마의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쇠사슬에 매었다고 표현을 했어요. 아주 지혜로운 표현인데요. 제자들도 사도행전 1장에서 보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까 물었어요. 그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고난에 두셨으니 너희 알바 아니오 그랬잖아요. 그런데 나도 너희와 똑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나도 이스라엘의 소망을 바라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에요. 여러분 전도할 때 이렇게 어휘 선택이 너무 중요해요 이 사람들한테는 예수 믿어라 그러면 경기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한테는 나사렛 이단 괴수 같은 그러니까 그런 얘기를 빼야 돼. 똑같아 나는 그딴 거 신경 하나도 안 써 신경 써야 돼요. 나는 뭐가 무서워서 피해 더러워서 다 이딴 소리 말고. 그렇게 맨날 말이 교만하시면 안 돼요.어휘 선택이 너무 중요합니다. 자기의 매임이 자기 민족을 대적한 일 때문도 아니고 범죄 때문도 아니고 오직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내가 매웠다는 거에요. 메이다로 번역한 단어는 감기다, 둘러싸이다라는 뜻인데 신약에서 이렇게 많이 쓰이진 않았는데요. 히브리서 5 2절에서 쓰였어요. 거기서 대제사장에 대해서 그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매어 있음이라, 휩싸여 있음이라 이게 메임이에요. 쇠사슬의 매임. 예수님도 고난을 받아서 순종을 배웠다 그랬는데 이렇게 쇠사슬에 메어 있으면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용납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여러분들이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여러분들은 미워하고 차별하잖아요. 내가 쇠사슬에 메어 있게 되면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내 힘으로는 못하지만은 용납할 수가 있다는 거에요. 그니까 바울이 쇠사슬에 메어 있는 것처럼 우리 주님이 지금 연약에 휩싸여 계셨다는 거에요. 이게 매임이에요. 그들의 상식으로는 역설이에요. 바울은 말해요. 내가 말하는 것은 쇠사슬에 메어있다가 풀려나는 정치적인 독립, 해방 그런 이스라엘의 소망이 아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소망이었다면 예수님이 결코 십자가 지러 오지 않으셨을 거다. 바울도 지금 제수의 신분으로 쇠사슬에 메어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거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소망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23 24장에 나온 말처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신문을 받노라 이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국 우리의 소망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러니까 이걸 다른 말로 한 거죠. 결국 죽은 자의 소망.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는다고. 그러니까 그들이 바라던 소망은 독립을 넘어서 구약의 성취 성경의 성취 이 땅이 아니라 그 예수로 말미암아 회복된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거죠. 그 이스라엘의 소망을 전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가장 부정적인 그 무식하고 미혹된 자 용납하려면은 가장 부정적인 쇠사슬의 메인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 믿고 복받으면 이렇게 된다가 아니라 이렇게 쇠사슬레 메여 있어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이상을 나에게 보이시니 말씀으로 해석이 되어서 전할 때 권능이 임하고 이때 내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 강력하게 성령의 이야기가 전달되는 줄 믿습니다. 이 쇠사슬에 매인 모습을 보면서 이래도 하늘이 열리고 이걸 보여줘야 되는 거죠. 생각해 보세요. 바울과같이 지키는 사람이 같이 한 손씩 수갑을 차서 쇠사슬해 얼마나 수치스러운 모습이에요. 그런데 돌이어 당당하게 유대인의 그 높은 사람들을 청해서 이 쇠사슬을 보여주면서 내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소망 때문에 이렇게 매웠다. 당당하게 말을 합니다. 매임이 부활의 증거가 되는 이 약재료로 쓰인다면 그 메임을 통해서 내 안의 죄악을 회개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한결같이 사명 감당하다가 그냥 뭐 돌팔매를 맞아도 그냥 독사가 물어도 배가 파선되도 그렇게 때려 죽임을 당해도 그렇게 낙심하지 않고 나누어 줄 것만 있는 인생을 어떻게 살 수 있겠어요. 제가 늘 말했죠. 왜 그렇게 살 수 있죠 왜 그렇게 살 수 있어요. 몰라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죄를 보게 됐는데 바울은 스데반 집사 죽인 일을 평생 기억한다고 했어요. 어떤 고난이 와도 내 죄보다 고난이 약해요. 죽을 때까지 그러니까 이거는 얼마나 비밀인지 몰라요 그냥 늘 눈물을 흘리는 거에요. 자기 죄를 보고 주님을 만난 사람은 그러니까 어찌하여 이런 얘기가 나올 수가 없는 거에요. 내가 주님을 박해한 죄인이라는 거 어떤 억울함도 이제 있을 수가 없는 거에요. 쇠사슬의 매임이나 어떤 상처라도 거기서 자기 죄를 봐야 그 메 내 상처를 봐라 그 메임에서 성령의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거에요. 자기 죄를 보는 사람은 상처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가 있는 거에요. 이때 내가 전하는 성령의 이야기에 권능이 생겨나고 그 권능으로 내가 성령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쇠사슬에 메여서 이스라엘의 소망을 전하는 것이 진정한 예수님의 이야기이고 이것이 나의 간증이라는 것이에요. 어떤 경우에도 내 신세 한탄이 아니라 이 환경 속에서 임한 내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전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 말씀이 이스라엘의 소망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 가장 중요한 것은 땅 끝나라 세계 최고의 도시 로마에 왔지만 로마를 변화시킬 사람은 예수 믿는 유대인 바로 너희들이어야 한다고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이라고 그들에게 말해준 거에요. 그렇지만 그들은 성령이 임하지 않으니까 못 알아듣는 거죠. 그래도 얘기를 해야 된다는 거에요. 이천년 후에 우리가 듣잖아요. 우리는 상대방이 꼭 들어야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전도를 꼭 들어야 하는 게 아니에요. 봐요 유대인들에게 전해서도 하나도 안 들었어요. 그래도 우리는 전하고 죽으니까 전 세계에 퍼졌어요. 나는 그냥 전하가 전하다가 죽는 사람이에요. 그게 성령의 이야기입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나는 나의 메임에서 이타적인 이스라엘의 소망 즉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말하나요. 그저 이기적인 신세 안 탓만 하고 있나요. 이럴 수는 없어 그러니까 

    이런 설교를 듣고 매주 불평 불만이 나오는 거는 여러분들이 아직도 신세 한탄을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신세 한탄을 아무리 할지언정 목장에만 계세요. 하다 보면은 이게 이제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메임에 대해 부끄러워 숨기려고 하나요.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약재료로 나누고 있나요.

     

     

    그러니까 이제 땅끝 나라 로마에 와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는데 한마디로 이 유대인들이 바울을 싫어하는 거는 이들에게는 너무 세상이 좋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로마의 그 헬레니즘 문화와 로마의 이 세상이 너무 좋은 거에요. 그러니까 바울을 그렇게 핍박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너무 그 로마의 유대인들이 갈 길이 멀어요. 그러니까 우리 쇠사슬의 메임이 아니라 그들은 그냥 돈에 매여 있고 학벌에 메여 있고 그리고 로마의 강성함을 도리어 너무 부러워하는 나머지 다 시기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냥 초점이 다 로마에 맞춰요. 로마처럼 잘 살고 잘 먹고 이루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지난번에 학벌이면 다냐 뭐 이런 나눔 해보라고 그러니까 엄청 많이들 했대요 그래서 지금 학벌에 메어있는 나눔을 좀 들려드리겠어요.

     

     

    저는 학벌 좋은 사람 차별합니다. 절대 전도하기 싫어요. 아니 자기네들이 알아서 찾으면 됐지 이 좋은 걸 내가 왜 알려줘야 해 하는 마음이 있어요. 또 한 분은 우리 초원님은 너무 사회적으로 잘 되고 집안 좋고 공부 잘하고 신앙까지 좋으니까 빚 짖고 들어갈 틈이 없네요. 그래서 학교 친구 중에서도 집안에 돈 많은 친구가 예수 안 믿으면 돈만 많으면 뭐 하냐 믿지 않는 걸, 또 잘 믿는 친구한테는 잘 믿으면 뭐 하냐 옛날에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다 아는데 그런 식으로 늘 차별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라도 흠이 있으면 너무 위로가 되고 완벽하면 시기하고 아직도 되었다함이 없습니다. 또 한 분은 전 시기 질투가 많아서 부자고 학벌 좋고 정말 애들도 잘 키우고 그러면 저는 그런 사람 전도하고 싶지 않아 왜냐하면 애통하는 마음이 전혀 안 들어요. 제 안에 그들에 대해서 아니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면 됐지 뭘 천국까지 가려고 그래 이런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있어요. 저는 미워요. 됐어 예수님은 나만 알 거야. 너희들한테 가르쳐 줄 수가 없어 이런 마음이 저한테 있답니다. 또 한 분은 가장 친한 친구가 있는데 세상적으로 잘 나가고 있어서 예수님까지 믿으면 뭔가 뺏기는 마음이 생겨서 같이 교회 가자고 하는 말을 절대로 안 한대요. 뭐 어떤 사람은 아니 그 저기 학벌 좋은 사람은 망해도 무시가 안 된대요 뭐 이런 나눔도 있고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지금 로마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복음이 들리겠어요 만서도 성령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새사슬의 메임이 얼마나 능력인 줄 아시겠죠. 그런데 우리들 교회 리더십들은 학벌이 없는 분들이 참 많이 차지하고 있는 거를 보시면서도 그래요 그래도 이렇게 솔직하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 자기 죄를 인식하는 성령의 우리들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밉다고 목장에서 나누면 죄가 안 돼요 목장에서 미워 싫어 난 전도하기 싫어 애기 같잖아요. 하나님이 오냐 오냐 엉덩이 톡톡 두드려가면서 여러분들을 키워주실 줄 믿습니다. 성령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이제 나를 지키는 자가 있어야지 되고 그리고 이제 쇠사슬의 메임 이스라엘 소망을 가지고 메임을 이야기해야 된다고 그랬어요.

     

     

    그럼 세 번째는 형제 중 듣고자 하는 자들이 반드시 있다는 거에요. 듣고자 하는 자들이 있어요. 21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유대의 지도자들은 아니 분명히 예루살렘에서 벨릭스 베스도 아그리바 왕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왜 모르겠어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인데 그런데 이렇게 소란하고 요란한 바울과 연관되는 게 싫어 바울을 안다고도 하기 싫어요. 좀 유명하니까 확인차 한번 와봤어요. 바울이 누구간데 그렇지만은 바울이 쇠사슬의 메임을 직접 보여주면서 낮은 마음과 자세로 자세히 설명을 하니까 유대인 지도자들이 바울이 걱정하는 걸 조금 이해를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유대로부터 들은 소식이 없어 너에 관한 나쁜 소문도 들은 적이 없어 이것만도 수확이에요. 왜냐하면 재판을 앞두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것 때문에 무죄를 입증하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이 사람들은 하여튼 무관심해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야. 그렇지만은 바울의 그 태도 때문에 22절에 이에 우리가 너희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그러나 바울이 거기서 자기 억울함과 결백함을 주장했다면은 바울과 유대인 지도자 사이에는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을 거에요. 만약 거기서 끝났다면 바울이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목적을 다 이제 잃어버렸겠죠. 하지만 바울의 메임을 직접 보고 있고 그 메임의 까닭이 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자기 나라 좋게 해주겠다고 하니까 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말을 듣자 로마에 살던 유대인 지도자들은 바울이 도대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어요. 자기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지금 안 가는 것 같은데 무시하고 넘어갈 만하지도 않아. 바울이 잘난 척하거나 비굴하거나 그러면 그냥 딱 안 들었을 텐데 감을 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니까 이제 인본적인 생각으로는 저기 이해할 수가 없는데 비호감이 호감으로 좀 바뀌었어요.

    바울처럼 쇠사슬의 메임으로 그들 앞에 나타난 사람은 처음이었던 거에요. 쇠사슬에 메인 여러 죄수 철학자 전도자 등 많이 만나봤을 거에요. 하지만 바울처럼 성령의 담대한 마음이 충만해가지고 매임을 받아서 자기들 앞에 서서 그렇게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처음 본 거에요. 자기 무죄를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예 그들이 그냥 마음이 움직였어요. 그동안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이단 사상이었던 나사렛 예수 파에 대해서 마음이 열렸어요. 그들은 기독교가 어디서든 반대를 하는 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거를 보면 어디서든 거부되는 이야기이면 풍문으로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정확한 성령의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는 듣지 못한 거죠. 하지만 이제 이걸 바울이 전해주지 않았다면 이 사람들도 결국 사람들이 반대하는 종교구나 여기서 듣고 끝났을 거에요. 거꾸로 말하면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기독교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종교 부정적인 종교가 아니다. 그거 알려주기 위해서 지금 온 거라고요 오늘 등장하는, 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다 반대하는 줄 안대요 그 사람 한 사람, 한 가족, 그 사람을 위해서 이 고난을 겪으며 로마로 온 거에요.

     

    제가 이 집회를 가면은 그 사람들은 정말 정말 제가 가면은 몰랐다 그래요. 처음 들었다고 그래요 풍문으로만 들었는데 큐티가 이상하다 그러더니 아니네요. 이래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칠십 평생의 이야기를 한 시간에 지금 듣는 거잖아요. 거기서 변화되는 한 사람이 꼭 있더라고요 내가 놀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이야기 하지 않아도 어디서 듣겠지 누군가가 말해주겠지. 그러나 그렇게 어디서 듣거나 풍문으로 들으면 다들 어디서든 반대한다,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는 거에요. 많이 들었죠. 그런 얘기를 큐티 하면 뭐 하냐 오픈하면 뭐 하냐 그거는 이상한 거야. 이 나라가 정치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고 온 나라가 하나님 믿고 우리나라가 잘 살아야 한다고 이렇게 말하면 다 긍정적으로 들어요. 이스라엘의 소망이니까. 나눔할 때도 잘 되고 성공하고 아름답고 착한 나눔만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요. 

    하지만 성경은 뭡니까 악하고 음란한 스토리가 성경의 이야기에요. 성경의 구절은 하늘의 이야기죠.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그거 누가 몰라요 스토리는 아내를 두 번 팔아먹은 아브라함 이야기 거짓말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고 사기꾼의 거짓말쟁이 야곱 이야기, 며느리와 동치만 시아버지 유다 이야기 기생 라합 ,처녀가 잉태한 마리아 이야기, 이방 여인 과부 루디아기 이게 다 실제적인 리얼 스토리잖아요. 이런 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우리들 교회를 무시하면 성령의 이야기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에요. 

     

    우린 이번 주도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기가 막힌 사건들을 많이 접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좀 잘 돼야 되는데 왜 이렇게 눈물과 탄식이 나오는 사건들이 많은지 우리는 그런 사건이 있으면 바울의 말이 너무 잘 들려요. 바울이 이런 나 때문에 지금 쇠사슬에 메어 있는 거에요. 그리고 그 말이 잘 들리기 위해서 내가 쇠사슬에 메어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쇠사슬에 메어서 전하지 않으면 결코 내 옆 식구들이 못 듣는 거에요. 내 옆에 사람들이 못 듣는 거에요. 힘으로 능력으로 전하는 게 아니에요. 매어 있는 상황에서 내 아픔 속으로 그들의 아픔 속으로 들어가서 전해야 하는 거죠. 이때 내 이야기 속에 말씀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는 그 이야기 겉으로만 보면. 하지만 내가 무너져 내리고 메어 있는 가운데 내 안에 죄가 보이며 그 죄를 어떻게 예수로 말미암아 이제 부활로 변화되는지를 그래서 내 이야기 속에 예수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이야기인 줄 믿습니다. 결국 로마는 나 혼자 들어가야 하고 바로 마지막 종착역이 내 가족 내 동족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반대하는 이야기도 풍문으로만 들었는데 관심이 없으니까 다 풍문으로만 들어요. 참고로 몇십 년을 살았던 아파트에 같이 교회를 다니는 식구들이 있었는데 내 큐티 모임이 있는지를 몰라 20년이 지나도 같이 교회를 다니는데도 우리들교 이야기도 풍문으로만 들었지만 와 보기 전에는 천분의 일도 몰랐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성령의 이야기는 들려줘야 합니다. 듣든지 안 듣든지 들려줘야 하는 거에요. 전도를 그냥 교회 숫자 채우라고 하는 게 절대로 아니에요. 성령의 이야기를 들려줘야지 그 사람이 변하고 그 집안이 변한 줄 믿습니다.

     

     

    이번 주도 탄식과 눈물이 나오는 사건이 곳곳에 있었어요.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나의 예수님의 간증이고 이야기인 줄 믿습니다. 우리 민백기 목자님 아내 안미정 집사 얘기에요. 이 청년부 출신들이에요. 결혼 1년 전에 자매는 민백기 집사하고 결혼하기 1년 전에 결혼하려고 했어요. 어떤 청년하고 그런데 결혼 조건으로 신량의 양육을 받고 목사님에게 주례를 받고 부부 목장 나가는 것이었는데 그거를 계속 종용을 했는데 끝까지 다 거절을 했어요. 이 자매가 우리들 교회에서 살아났기 때문에 웬만큼 믿음이 없으면 그냥 따라갈 텐데 워낙 살아났기 때문에 곰곰히 생각하다가 파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슬픔을 달래려고 아웃리치를 갖다가 열 명의 청년을 양육했다고 하는 우리들교회를 너무 사랑하는 민백기 형제라고 결혼을 했는데 지금 아이가 일곱살이니까 7년이 넘었잖아요. 젊은 엄마죠 이제 지난주 교통사고가 난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 그때 결혼을 잘못했군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의 소망이 아닌 거죠. 과연 믿음의 안 집사였어요. 생사가 갈리는 사고 당일날 기도 제목을 이렇게 올렸어요. 홈페이지에 아침 출근길에 보행 신고를 받고 걸어가던 남편이 신호 위반으로 맹렬하게 달려오던 1.5톤 트럭에 치여 뇌출혈 척추골절 갈비뼈가 골절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뇌의 손상 부분은 의식 심장박동 혈압을 움직이는 곳인데 내 수술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금지 구역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밖에 하실 게 없는 시간입니다. 의식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제 자세히 적어줬습니다. 그리고 5개의 기도 제목 그날 큐티 말씀으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드리며 균등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구원의 사건이 되도록 두 번째 의식이 속히 회복되고 자가 호흡을 할 수 있고 치료 과정을 지켜주시기를 세 번째 제가 슬픔과 연민에 빠져 있지 않고 말씀 붙들고 제 자리를 잘 지키며 살아낼 수 있도록 네 번째 로마로 향해가는 여정에 성령의 담대한 마음을 주시기를 다섯 번째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낼 수 있도록 276명의 복음 특공대에 기도 부탁을 드립니다.  남편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켜주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져 오늘 하루 하나님께 너무 죄송하고 남편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시간이었어요. 끊임없는 공동체 지체들의 눈물과 금식의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인지 하나님 일상을 잘 살려내게 하시는 것을 통해 경험한 하루였습니다. 또 이 중에도 그다음 날 기쁜 소식은 전도 대상자로 늘 하는 기도하던 이모가 니 남편 살려주면 교회 가겠다고 서운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의식 없이 누워 있는 남편을 통해 지금도 신실하게 구원의 일을 행하시고 계심을 보게 하셨어요. 믿지 않는 친구들까지도 너무 간절하게 기도해 주고 미국 일본 캐나다 프랑스 세계 곳곳에서 기도해주고 있는 소식도 듣게 하셨어요. 자매의 기도 제목이 그냥 순식간에 그냥 4천여 개가 크릭이 됐어요. 그렇죠 남편의 사고가 망하고 저주받은 사건이 아니라 무너진 나를 세우시고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드릴 수 있는 구원의 사건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까 첫날은 기도 제목 올리고 다음 날 수요 예배 왔어요. 예배를 왔어요. 정말 놀라운 성령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바로 이거에요. 쇠사슬에 메었어도 이스라엘의 소망을 지금 전하고 있잖아요. 이 젊은 엄마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 남편을 파혼했던 게 정말 믿음이라는 걸 이해하시겠죠. 바울과 같이 타서 배가 깨어졌어요. 저랑 같이 타서 깨어졌네요. 다 구조되었다고 했잖아요. 그렇죠 민백기 목자를 기적적으로 회복시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면 성탄절이에요. 이번 주 이렇게 바울의 이야기가 우리들교회에서 공연되는 거에요. 이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리고 다들 우리 배우들도 그냥 그날그날 그냥 은혜를 받아가지고 말씀들이 다 기억에 있는 거에요. 내가 아직 잘 못 전하겠으면 내 동족 유대인들에게 잘 전할 수 있도록 다 전도해서 같이 오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질문 드려요. 내 사상은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인가요? 부활을 바라는 천국의 가치관인가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인가요 풍문으로 들은 것인가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있나요? 너무 많은가요? 아주 무관심인가요?

     

     

    말씀을 맺어 성령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나를 지키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소망으로 말미암아 쇠사슬의 매임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럴 때 형제 중 듣고자 하는 자들이 반드시 있어요.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