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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4장 38절~44절 - 말씀대로 남았더라주일설교 요약 2023. 10. 11. 02:39
2023년 9월 17일 주일설교
열왕기하 4장 38절~44절
말씀대로 남았더라
김양재 담임목사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는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사건을 주시는데도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영적인 흉년은 육적인 흉년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1차, 2차, 3차 흉년 여러 흉년이 이어지는데요. 흉년 때문에 망하는 삶이 아닌 흉년 때문에 말씀이 들려 먹고 남았더라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첫째로, 흉년의 때에 말씀의 공동체에 머물러 앉아야 합니다. 38절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당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갈멜산을 주요 기점으로 삼고 다시 길갈에 말씀을 전하러 갔습니다. 흉년이 들었다고 해요. 이 흉년은 8장에 나오는 7년 흉년이라고 합니다. 기적의 사건들은 연대기순은 아니고 엘리사의 사역을 주제별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길갈은 여호수아 5장 9절에 보면 애굽의 수치를 너에게서 떠나가게 했다라는 유명한 길갈이 있잖아요. 네번 밖에 안 쓰인 북쪽 에브라힘 산지의 길갈도 있습니다. 흉년의 피해를 많이 받은 곳은 팔레스타인의 기후 조건을 고려해볼때 에브라힘 산지의 길갈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흉년이 들은 이유가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는 북이스라엘은 오무리부터 아합과 아하시아와 여호람까지 4대로 이어지는 오무리 왕조의 악행으로 하나님이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사건을 주시는데도 멈추지 않고 악을 계속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흉년이 육적인 흉년으로 당연히 이어지는 겁니다. 기근과 결핍이 오면 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늘 흉년과 기근으로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흉년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린 삶의 결론입니다. 그러니 엘리야때도 가뭄을 허락하셨는데 엘리사때도 가뭄에 이어 기근으로 이어지는 흉년이 또 온 것입니다. 우리는 흉년의 악순환을 북한에서 보고 있어요. 어떤 흉년을 주셔도 회개하지 않고 또 다른 흉년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미국 노스캘롤라이나 출신 선교사 제이콥 로버트 무스가 쓴 1900 조선에 살다는 2008년에 출간된 14년 밖에 안된 책인데 모르는 사실이 많이 있습니다. 1899년부터 1924년까지 20년 이상 양주와 춘천에서 교회 개척과 선교활동과 학교 개척으로 그 당시 기독교 신자가 만명 가까이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생활상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민며느리를 데려오려면 2달러가 필요한데 주막의 한끼 식사값이 2센트이기 때문에 부잣집도 말고 주막의 20끼 식사값만 주면 데리고 올 수 있고, 아주 가난하면 2-3살부터 먹고 살 것이 없어서 시댁으로 보내져서 시댁의 노예로 살게 되는 겁니다. 너무 고된 학대로 희망이 하나도 안보이니까 우물에 빠져 죽어도 그냥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산에 가져다 버리면 지체없이 다른 며느리가 다른 여자가 들어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가 우리 조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고 쓴 겁니다. 너무 가난하니까 밥 한끼로 노예로 보내고, 가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1950년정도까지 없었다고 합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영한사전 만드려고 할 때 보니까요. 그렇게 가난해도 남자들만 혼자 밥을 먹고 겸상 이런 것 없고, 거기 남은 것을 여자는 부엌에서 먹어야 하는 겁니다. 흉년, 기근, 가뭄이 반복되고 반복되도 왕부터 서민까지 누구도 기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고 반만년의 흉년과 가난을 해결해주었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불과 수십년전 일입니다. 제가 태어나서도 보릿고개, 쌀파동, 설탕파동, 가뭄이 오고 태풍이 오면 온 나라를 리비아처럼 사라오 태풍 겪었던 나라가 날마다 천재 재해가 없을때가 없어요. 똑같이 겪었던 나라가 지금 10위권의 우리나라와 똑같은 나라 아닙니까. 똑같이 재해가 오는데 지금 받아낼 실력이 없는거에요. 기독교가 들어와서 자아의식이 도취되니까 아무리 태풍이 오고 가뭄이 와도 우리가 딸과 며느리를 밥 한끼에 팔아먹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진정한 기억이 중요한지 아셨죠? 리비아 홍수도 이제 나라가 두편으로 갈라 싸워서 나라 분열이 초래한 예고된 인재였다는 것이죠. 최대 산유국이지만 자원이 많다고 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재해안전경보 등 하나도 작동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늘 상대방 탓만하고.
우리집 각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말씀이 들어가면 가난할 수가 없어요. 그 당시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 앞에 앉았다고 하잖아요. 너무 기특해 보이지 않습니까? 여기서 앉았다는 움직임을 멈추고 한자리에 머물다는 뜻이에요. 움직을 멈추는 것도 한자리에 머무는 것도 모두 목적이 있는 행위잖아요. 제자들은 흉년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분주하게 다니는 일을 멈추고 엘리사 앞으로 나왔어요. 가르침을 듣기 위해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선지생도 공동체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적용하는 훈련을 하는 학교잖아요. 흉년이라는 죽고사는 문제 앞에서 사실 이런 공동체가 무슨 힘이 있어 보이겠어요. 당장 쌀 한톨을 만들 수 있는 것이 필요한 상항인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흉년 앞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있기가 더 어려운 공동체에요. 하지만 43절에 보니까 그냥 흉년 때에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있는 제자들이 100명이나 있습니다. 지금 금송아지를 섬기는 벧엘과 단에 가면 밥 주죠. 녹봉도 다 주죠. 안 갔습니다. 저마다 사연이 있고 이유가 다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엘리사 앞에 머물러 앉았습니다. 말씀의 공동체 안에 거했습니다. 물론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을 찾아야죠. 그 해결책 중 하나가 가정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우신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는 말씀으로 가정을 세우셨어요. 마태복음 16장 18절에는 주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너는 베드로라 내가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이 말씀으로 교회를 세우셨어요. 가정과 교회는 때로는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말씀의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인 거에요. 따라서 가정과 교회는 문제가 생겼다고 떠나야 할 곳이 아닙니다. 문제가 생길 수록 더 굳게 머물러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부도 났다고 외도했다고 아프다고 그렇게 해서 떠나야 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극심한 흉년 같은 문제가 와도 이제 붙어만 있으면 수지 맞는 공동체인겁니다. 이스라엘 어디를 가든 흉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앞에 앉은 사람 만이 흉년 가운데 먹고도 남는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흉년에서 남은 것을 보고 죄를 깨닫고 돌이켜 구원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러 앉아야 합니다.
적용질문
어떤 흉년을 겪고 있습니까? 흉년을 핑계로 떠나려고 하는 곳은 가정, 교회, 회사 어디입니까? 내 역할의 자리에 딱 앉아 있습니까? 어정쩡하게 서 있습니까? 딴 곳을 바라보며 억지로 있습니까? 어느 자리에 앉아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말씀대로 남았더라 그러니까 흉년의 가운데 말씀의 공동체에 머물러 앉아야 하고 두번째는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38절~39절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 들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그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지금 엘리사는 흉년에 대해서 강의하지 않아요. 흉년을 극복하는 믿음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아요. 자기 사환에게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고 해요. 그럼에도 사환은 뭘 해야 하는지 몰라요. 고대 사본은 사환을 게하시라고 해요. 게하시의 무능력함이 또 나오네요. 결국 솥에 국을 끓이려면 국거리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말씀을 듣는 중에 국거리를 가지러 나간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는 거에요. 한 사람!. 그래서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갔다고 해요. 42절에도 바알살리사에 한 사람이 나옵니다. 나 한사람이 큐티하고 예수 믿고 적용하는 것이 모두를 살리는 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 한사람쯤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강집사님 아들이 보스턴 MIT 에서 큐티모임을 인도하는데 많이 힘들었나봐요. 사도바울이 아시아에서 거절을 당했다는 본문을 듣고 많이 은혜를 받고 공부를 잘하는 천재가 말씀도 좋아하니까 진짜 한사람 나왔네 이런 생각이 드는데 한 사람이 중요한 거에요.
그런데 흉년이 든 밭에 무슨 변변한 채소가 있었겠습니까? 들포도 덩굴을 만나 들호박을 땄다고 해요. 호박이 아니라 들호박. 겉모습은 호박인데 유사호박인거에요.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심한 복통을 일으키는데 그럼에도 그가 뭔지 모르고 옷자락에 채워 돌아와 국을 끓이고 이를 무리에게 먹게 했다고 해요. 흉년이 들었을때는 먹어도 되는지 안먹어도 되는지 분별이 안됩니다. 하와가 왜 선악과를 먹었겠어요. 너무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니 이렇게 유혹이란 이런거죠. 들호박처럼 교모하기 때문에 유사호박에 너나 할 것 없이 속아 넘어가는거에요. 어떤 집사님은 가계부를 너무 잘쓰고, 너무 성실하고, 자기 남편하고 결혼을 잘했다. 너무 믿음직한 사람인데 보이스 피싱을 당했다고… 그러니까 누가 언제 속을지 몰라요. 그래도 보이스피싱 당해서 한번 경험 한 것은 좋은 경험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액이 어느정도인지 모르지만요.
40절에 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그들이 외쳐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무리가 국을 먹다 보니까 솥에 죽음의 독이 있다고 외칩니다. 처음부터 생각해봅시다. 엘리사 말에 들에 나가서 들호박을 따가지고 왔는데 끓였는데 독이 있다는 거에요. 그것을 몰랐다는 거에요. 우리는 항상 THINK 해봐야 하잖아요. 평소에 먹을 것이라고 생각도 안 한 것을 배가 고프니까 가져온 거잖아요. 가지고 오긴 했는데 와서 보니까 독을 같이 가지고 온 거예요. 우리는 종류별로 흉년을 맞이할 수 있어요. 이런 것을 보고 내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생각해볼때 너무 취직이 힘드니까 평소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을 회사에 내가 가줬다 이거에요. 너무 결혼이 안되니까 평소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을 아내와 남편과 결혼을 해줬다 이거에요. 내 수준에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은 배우자, 회사, 학교를 낮추고 낮춰 택했는데 맙소사 거기 죽음의 독이 같이 온거에요. 이래야지 내 생활과 맞아 떨어지죠? 강 집사님 이런 것이 해석이 안되나봐요. 왜냐하면 독이 없잖아요. 아무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없어요. 날마다 복통과 흉통으로 살수 없는 아픔이 밀려와요. 실제적으로 폭력을 행하고 나가서 외도를 하니까 내가 저를 봐줘서 결혼했는데 외도를 한다고? 죽음의 독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거에요. 조선의 여인들 중에 너무 예쁘고 총명한 여인들이 얼마나 많아요.시댁으로 팔려가서 버려저셔 보쌈으로 사내들에게 잡혀가고 또 잡혀가고 이럴때 죽음의 독이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전래동화에 나오죠.
이렇게 내가 모르고 가져올 수도 있지만 교회다니면서 인도받으면서 큐티하면서 결혼했는데도 먹어보니까 죽음의 독이 있는 경우도 많아요. 신결혼이라고 했는데 독이 너무 많아 마음과 몸이 너무 아파 고통이 너무 커서 살수가 없어요. 객관적으로 보면 살수 없는 부부가 많아요. 그런데 같은 솥에 밥해먹고 사는 부부인데 그 결혼에, 회사에, 학교에 독이 같이 왔어요. 회사에서는 시기질투를 당하고, 결혼해서는 외도를 당하고,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고 건강에서도 질병을 만나고..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독이 같이 왔어요. 그러면 여러분 실패했어요? 우리가 말씀 없이 불신결혼해도 택자라면 거기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일단 교회 왔다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택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듣고 적용한 일 중에도 실패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작아서 실패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우리 해독공동체의 권면으로 같이 머리를 맞대고 인도 받았다면 주님은 반드시 책임지십니다. 배우자 탓하지 말고 나 한사람이 너무 중요한 거에요.
지난 주에 엘리사의 지팡이를 나눠보라고 했는데 어떤 목자님이 모태신앙, 직분을 다 넘어서서 피해자 지팡이를 휘두르고 있다는 목자님이 계셨어요. 이 피해의식 있는 사람이 제일 무섭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아신 다는 것이 괜찮은 것 같아요. 초원님은 그러므로 아내한테 아내도 알텐데 이런 지팡이를 내려 놓으라고 처방하셨어요. 모르겠죠? 그런게 있어요. 이렇게 적용하는 한 사람이 엘리사 공동체에 있으니까 공동체의 그들이 같이 외쳐주는 거에요. 하나님의 사람에게 내 결혼에 독이 있어요. 내 학교와 직장에 독이 있어요 하고 외치고, 기도하고, 나누고 목장에서 외쳐주는 거에요. 공동체에서 만나서 힘들어도 인도받고 결혼했다면 독이 와도 어쩌겠어요? 좋은 일 하려다 독이 생겼다면 그냥 독이 있어요 라고 외치기만 하면 돼요. 그냥 기도하면 돼요. 중보기도하고 목장에 가서 나누면 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도와주실 줄 믿어요. 왜죠? 엘리사 앞에서 말씀들었던 공동체 아니에요. 금송아지 안섬기고 말씀 섬기겠다고 와 있는 공동체 인데 하나님이 잊으시겠어요?
41절에 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이르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독이 없어지니라
엘리사가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가루를 가져오라고 해요. 여리고 더러운 물을 소금물로 정화했어요. 이 가루는 어떤 주석책을 봐도 무슨 가루인지 안나와요. 흉년인데 뭔가 특별하고 귀한 가루가 거기 있었겠어요? 사르밧 과부에게도 마지막 남은 밀가루가 있었던 것처럼 선지학교 식당에도 밀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을거에요. 흉년에도 조금 구할 수 있는 흔하고 싼 밀가루를 엘리사는 솥에 던졌어요.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흉년때에 이상한 열매가 들어가서 못 먹게 된 이런 국에다가 그 아까운 밀가루를 던지는 것은 밀가루까지 못 먹게 되는 거잖아요. 선지생도들이 너무 놀라서 그 아까운 밀가루를 던지다니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엘리사가 가루를 솥에 던진 행위는 다시한번 상식을 뛰어넘는 이상한 처방 같은데 상식을 지키는 처방의 대가 맞습니다. 그리고는 그 국을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해요. 그 국은 워낙 쓴맛, 독한 맛, 역한 맛, 상한 국 맛이었잖아요. 어떻게 다시 먹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선지생도들은 독이든 맛이 나는 국을 다시 먹어야 하는 거에요. 목장에서도 쓴맛나는 성도들 다시 먹어야 돼요. 다시 결혼하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다시 쓰고 독하고 역하고 상한 그 맛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밖에 나가면 여러분에게 나이스하게 꼬이는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어요. 집에 돌아오면 우그랑 쭈그랑 한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는데 대답도 안해고 말도 안해요. 옛날에 우리나라 남자 혼자 밥상 받고 쫙 물리면 그 남은 거를 먹는 것도 그냥 황송스러운거죠. 여자의 머리가 남자고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인데 반만년 내려오는 그것이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는,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서 문제인거에요. 우리는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도저히 난 그렇게 못살아. 그런데 목장에 갔단 것 만으로도, 양육을 받았다는 것 만으로도, 우리들교회 왔다는 것 하나로 엘리사의 말이 끝나자 마자 국이 해독되었어요. 그런 분들이 너무 많잖아요. 맛을 다 합친 죽음의 맛이 싹 사라졌어요. 죽을 것 같은데 그 힘든 고통에, 경험들이 사라진거에요. 암초를 말씀이 넘어가게 했으니까요. 이게 말씀의 맛이잖아요. 조금전에 먹었던 죽음의 맛 기억에 갇혀서 먹지 않았다면 이거 절대 이 맛을 몰랐을거에요. 그러나 이 쓴 맛 기억을 넘어 엘리사 선지자 말씀을 믿으며 국을 다시 먹었더니 국이 해독되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죽을 것 같은 결혼생활, 회사 생활을 다시 하고자 하니 해독이 된 맛이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특별한 것이 없는 밀가루가 국을 해독한 것이 아니라 그 가루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이 역사한 것이죠. 무엇이겠습니까? 이 가루가 복음의 가루죠. 그런데 날마다 큐티는 엄청난 복음의 가루가 되어서 우리를 해독합니다. 오직 복음만이 말씀만이 삶의 중독을 해결 할 수 있어요. 말이 안되는 술중독, 도박중독, 게임중독, 쇼핑중독 들호박처럼 독을 품은 온갖 중독들도 복음가루 하나면 딱 해결이 되는 거에요. 내 인생의 독이 사라지는 거에요. 독이 사라지면 얼굴에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독이 있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잘나도 예수 안 믿으면 얼굴만 봐도 무섭죠? 눈만 봐도 다른 데를 쳐다보고 싶어요. 독이 있어요.
청년부가 결혼하고 보니까 들호박이 너무 많아. 우리들교회에도. 그래서 속았다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혼을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거에요. 주님 도와주세요. 가루를 넣어 도와주세요.우리 목장이 아무것도 아닌 가루 같으나 거기서 다 살아나는 거에요. 이게 뭐든 약재료를 가지고 가루가 되서 뿌려지니까 살아나는 거에요. 내 얘기, 중독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이 살아나는 거에요. 그러면 나도 그 사람이 살아나는 거에요. 목장에서 오픈하면서 다 같이 살리는 거에요.
스탠포드대학교—박사에 따르면 용서란 나를 상처입힌 사람의 행위를 그저 참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놓아주고 현재를 치유하기 내가 내린 선택인거에요. 나 때문에 용서하는 거에요. 너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관계를 할 때에 어디까지 용서를 해야 되는가가 주제가인거에요. 이 사람은 전혀 안되겠다 끊고 보내야 할 때가 아닌가 끊임없이 THINK를 해야 하는 거에요. 모든 관계는 그래서 나 때문에 하는거에요.. 너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에요. 너 때문에 하면 생색이 나서 아니한 만 못한 관계를 하는 거죠. 너를 이해하기 위해서 내가 끝없이 생각할 때 너를 이해하는 나의 지경이 넓어지게 되죠. 그런데 내가 이해할 사람하고만 교제한다면 우리 관계의 폭이 너무 좁아지는 거죠. 목장에서 이런 훈련을 끊임없이할 때에 여러분의 지경이 감당못할 관계가 없이 아주 넓어지기 때문에 결국에 사회생활도 잘하고 결국 가난에서 탈피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거에요. 우리 보세요. 공영방송 보세요. 사람들이 밴댕이 속알딱지 같아요. 얼마나 이간질 하고 그래요. 그런데 그게 이제 너를 위한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목장에서 이런 훈련을 끝없이 할 때 이게 얼마나 돈주고도 못사는 훈련입니까? 우리 철학자 박은미씨가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나의 우물을 확장시킨다고 했어요. 내 우물이 요것 밖에 안되는데 내 좁은 우물로 이해되는 사람과만 관계하겠다고 하면 내 세상은 평생이 이것 밖에 안되는 거죠. 훼파가 넓어지지를 못해요.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목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과 계속 관계를 하게 될때 세상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좋은 친구들과 놀라고 좋은 학교 가고 이것이 여러분들의 앉으나 서나 목적이에요. 이해안되는 식구들과 살면서 이해하는 훈련을 하면 금 주고도 못사는 훈련인거에요. 결국 모든 관계는 나를 위한 거에요. 너를 위한 거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생색이 나서 여러분의 모든 헌신은 제로가 되는 거에요. 너를 위해서 내가 그렇게 했다. 부부생활에서도 너를 위해서 내가 얼마나 했는 줄 아느냐 이러는 순간 지금까지 한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다들 보니까 어제도 서울대학교 제자훈련을 갔는데 교수님이 사모님께서 큐티인 너무 열심히 하시고, 우리 사모님도 이 서울대학교 랄랄ㄹ~ 본인한테 너무 잘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큐티인 팬이 되셨어요. 똑똑한 여자들이 남편한테 잘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런데 생색이 안나니까 구원으로 인도하는 거에요. 힘든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엄청 잘 자란 것을 볼때가 많아요. 좋은 부모 밑에서 항상 좋은 것,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그랬으니까 결혼해했는데 남편이 소리 한번 지르고 폭력이라도 한번 하면 나는 이런 일을 당한적이 없어 우리 엄마 아빠가 나한테 이렇게 한 적이 없어. 이러면 밥맛이야 진짜. 잘 자란 것도 좋은데 잘 자라서 남들을 이해해야지 자기만 이렇게 공주처럼 대접해달라고. 우물이 넓어지지 않죠. 그러니까 결혼할 때 독을 다 가지고 와요. 그럴때 약과 독이라는 책이 있다는 거에요. 그런데 독도 약이 될 수 있고, 약도 독이 될 수 있어요. 우리가 수많은 약을 먹는데 독이 될수도, 독처럼 보였는데 약이 될 수도 있는거에요. 그러니까 이런 가운데서 우리가 목장에서 나의 힘든것을 뿌려준 것이 가루지 이것이 약재료 아니겠어요. 약재료가 바로 이것이에요. 그래서 말이 안되는 결혼 같은데 우리 청년들이 이혼 하지 않고 사는 것을 보면 전부다 케파가 넓어져서. 그런데 이제 회사, 남들이면 내가 그 사람위해서 think하겠어요. 식구니까 think 계속 하겠죠. 저 사람이 왜 저럴까. 그러니까 또 나를 생각해서 이것도 또 흘려 보내면서 나의 지경이, 나의 우물이 넓어지니까 너무 이상한 부모와 아이들 맞지 않는 아이들이 믿음으로 결혼을 하는데 이혼을 안하잖아요. 열매로 제가 이야기할 수 있어요. 어저께 제가 가서 아주 부르짖고 외쳤네요. 서울대학교 가면 뭐하냐고, 믿음 없으면 제일 영치가 서울대생이다. 이러면서요. 그래서 또 우리들교회에서 자란 큐티 열심히 하고, 유아부 봉사하고 청년부 목자하고 이러고 가서 지금 보스턴에 가서 바쁜데 목요일마다 큐티 모임을 한다고 하고 이런 청년이 어디겠어요. 아빠가 지금 속을 좀 썩여 줘 가지고 그렇게 된 거.. 그러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환경이 좋은 것만 제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시리를 바래요.
적용질문
말이 안되는 적용으로 결혼하고 회사가고 했는데 죽음의 독이 올라옵니까? 죽음 같은 고난에서 말씀 듣고 채소 캐러 나가는 한사람입니까? 말씀의 해독 가루로 없애야 할 내 안의 독은 무엇입니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말씀하신 대로 독이 없어진 구원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까? 모든 관계는 나를 위한 것임이 이해되십니까? 나를 위해서 그 힘든 아내, 남편을 붙여줬습니다. 회사를 붙여 줬습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참아야 하죠. 자꾸자꾸 넓어지는 거죠. 어떤 사람도 용납 못할 사람이 없는 거죠. 맨날 상처 타령 하면서 나는 용서 못해 그러면 하나도 넓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수준 높은 사람한테 힘든 사람들이 붙여지는 거에요.
세번째는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2절부터입니다.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하라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
바알살리사에 사는 한 사람이 흉년 중에 수확한 보리로 처음 만든 떡 이십 개와 채소를 가지고 옵니다. 바알살리사는 세가지의 주인이라는 뜻인데 농사가 아주 잘되는 지역이기도 했지만 이름에 바알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기복으로 끈끈이 뭉쳐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도 한사람이 있었어요. 어떤 사람입니까? 바알살리사는 셋째 우상 셋째 남편이라는 뜻이 있는데요. 이 사람이 흉년의 때에 처음 만든 떡을 가지고 온 거에요. 이렇게 잘 살게 되다 보면 전부다 가정적으로 힘들어지잖아요. 가난한 집은 분쟁이 없어요. 잘 사는 집에 분쟁이 많아요. 이 집도 가정적으로 힘들었을거에요. 미국이 인권을 뭐 강조하고 이러고 옛날에 못먹던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 뉴스에서 보니까 기차를 타고가는가 그러는데 성폭행을 당하고 있는데 40분 동안 핸드폰으로 촬영을 하고 아무도 신고를 안했대요. 핸드폰으로 찍고 있는 수많은 사진이 보였어요. 얼마나 악합니까? 무려 40분 동안이네. 그 사람들 모두 처벌해야 한다 이러는데 우리는 잘먹고 잘살아지면 남에게 관심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태생이 아주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셋째 남편 쯤 되서 가정적으로 힘이 들었을가 어쨌든 하나님을 찾아오는 한사람이 되었어요. 본래 율법에 의하면 모든 곡식의 첫 소산은 여호와께 바치게 되었는데 불의하고 악한 북이스라엘 가운데도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사람이 바알살리사에도 한사람이, 길갈에도 한사람이 있었는데 바알살리사에도 한 사람이 남아 있었던 거에요. 우리 중에도 한 사람이 드리는 경건한 예배가 전체를 살릴 수 있는 거예요. 오늘 뭐라고 하냐면, 보리떡 스무개와 채소 한 바구니를 무리에게 주어 먹게하라 무려 네번이나 나오는데요. 42절에 이 말을 들은 사환이 어찌 내가 백명에게 주겠나이까 빌립도 그랬잖아요. 아니 어떻게 20개 가지고 100명을 줄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엘리사는 주문을 외우듯이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무리에게 주어 먹게하라. 엘리사는 끊임없이 무리에게 줄 것이 있는가 생각하는데 믿음 없는 사환은 내가 어찌, 내가 어찌 이것만 부르짖어요.
과거 우리나라에서 고참병이 하급자에게 천원을 주고 콜라 한병, 과장, 빵을 사오고 500원을 남겨와라 그러면 집에 와서 돈을 뜯어 간거에요. 그러니까 그때는 통하던 시댄거에요. 엘리사의 사환으로서는 엘리사의 지시가 과거 우리나라 군대의 고참의 지시처럼 말이 안되는 것이다. 게하시는 옳고 그름의 화신인것 같아요. 늘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고.. 그래서 어찌매입니까란 반문에는 그의 생각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왜 엘리사에게 이런 사환을 붙이셨을가요? 우리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하여튼 십자가 지라고 하면 입이 나오고 힘들다고 불평합니다. 사환의 모습을 통해서 내 모습을 보라는 거에요. 사환 욕하지 말고 내 모습을 보라고요. 흉년에 먹고 남으려면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네번이나 나오잖아요. 엘리사가 이상한 처방을 내릴 수 있는 힘은 여호와의 말씀에 있죠. 하나님이 엘리사에게 말씀하셨어요.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100명 넘는 선지생도들이 먹고 남을 것이라고요. 우리 인생의 어떤 흉년도 하나님의 사람을 돌보려는 이름없는 한 사람의 애정과 사랑을 막지 못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길갈과 바알살리사의 한 사람이에요. 또 그가 들호박과 작은 떡 20개로 무리를 넘치게 먹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막지는 못해요. 흉년과 기근으로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이런 흉년을 통해서 더 큰 사랑과 능력을 더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라고 이 사건이 온 것이에요. 우리의 우물이 커지라고요. 우리가 계속 헌물을 드리라고요. 민수기에서요. 그런데 이 헌물이란 뜻 자체가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가까워야 한다고 그랬잖아요. 하나님과 가까워야지 가서 정말 주워 먹게할라 이런 마음이 들지. 그리고 하나님과 절대 가까워야 하고 그러면 저절로 화목제가 되어서 화목제의 예물이 제일 많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처음 만든 떡을 드릴 만큼 경건한 바알살릴사의 믿음으로 공동체가 복을 받고 말씀대로 먹고 남은거 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것, 십일조 헌금도 자발적으로 잘하지만 그것이 화목제가 되어서 목장 섬김도 자발적으로 섬기니까 여러분들에게 먹고 남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신 줄 믿습니다. 저는 목장 섬겨서 여러분이 가난하게 되었다는 소리를 못 들었어요. 말씀대로 순종을 하니까 오늘 먹고 남았더라. 무리에게 주어 먹게하라 네번이나 나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 인생이 된다는 거에요. 우리들교회 열매로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기적이에요. 자기 밖에 모르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흉년이라는 문제가 생겼을 때에 자기만 살려고 아둥바둥 하는 것 당연한 거에요.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이는데 하루라도 가정이나 공동체나 사회가 편할 날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불신자를 만나면 안되는 거에요. 기본적으로 자기 밖에 모르니까요. 우리가 맨날 정치인들 욕해도 그 자리에 가면 모두 똑같아요. 다 기본적으로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인데 평소에 잘 감추고 있던 원죄도 흉년이 딱 오면 진짜 모습을 다 드러내는 거에요. 하지만 이런 본성을 거슬러서 로마서 11장 24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흉년 같은 사건이 올 때 아무리 내가 먼저 살고 싶고 나만 살고 싶은 생각이 들어도 우리는 주신 말씀으로 다시한번 생각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된거에요. 공동체가 중요한 거에요. 나보다 공동체를 생각하게 되요. 내게 주신 것을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할 때 주님이 그 마음을 받으시고 흉년때에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는 후한 인생이 되기를 믿습니다. 공동체가 있어야 하고, 한 사람이 중요하고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이러면 여러분은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의 인생이 되실 줄 믿어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인거에요. 4장 맨 마지막에 키드바를 예흐화. 여호와가 맨 끝에 나왔어요.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 이것이 위치하고 있는 겁니다. 4장에 5가지의 기적이 여호와의 말씀 가운데 행해졌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다 이루어줬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날마다 큐티대로 기도하고, 상담하고 목장하고 이러다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 다 먹고 남게 해 주신줄 믿어요. 우리들교회가 빚을 안 지잖아요. 교회 전체적으로는 부해졌어요. 여러분들 각자는 건강해지기 시작했고, 여러분들 자체가 빚을 안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게 다 같이 먹고 남았더라 인생이 될 줄 믿어요. 안되는 것은 아직 말씀이 안들리기 때문이에요.
적용질문
여러분은 예배가 회복된 한 사람입니까? 내가 어찌 이것을 이라면 지체들과 나누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간이에요? 물질이에요? 많잖아요. 여러분의 집과 목장은 해독공동체입니까? 갈등 공동체 입니까?
공동체 고백은 우리 모두가 말씀하신대로 남았더라 아닌가 싶어요. 한 부목자님은 자기 인생은 교회는 연관이 없고 교회 다니기 전에는 회사 집 게임이었는데 가족과 대화를 하지 않고 남처럼 살았는데요. 우리 부부가 다 남처럼 살아요. 호르몬이 나올때 2-3년만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다 말하기 싫어해요. 먹을 것만 주고 잠자는 것만 좋아해요. 그런 줄 알아야 돼요. 그것을 잘해주니까 다좋다고 하는거에요. 남처럼 살았는데 부부목장 한번만 가달라는 부탁에 참석을 했고, 찬송가 부를때 기도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 이야기도 들리지 않았고 시간만 때우고 가야겠다하고 갔는데 목자님이 해주시는 말씀이 너무 따듯해서 그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다. 살면서 그렇게 따듯한 말을 처음 경험하고, 한 목장을 7년동안 다녔다. 당시에는 교회에 등록하지 않고 목장만 다니다 목자님의 권유로 등록, 기초양육, 양육, Think양육 다 다았다. 양육교사 교육도 받게 되었고 어느 순간 부목자가 되어 있다. 기가 막힌 따듯한 목자님이 있으니까 그런 거겠죠. 그럴 수 있지만 모든 목장의 목자님이 이렇게 따듯하진 않아요. 그러나 따듯하지 않은 목장이 우리를 더 많이 남게 해 주세요. 인간공부하잖아요. 손가락질 하지 말아요. 내가 참아내면 내가 넓어지는 거에요.
질병의 3차 흉년이 다가와서 기도부탁드릴려고 말씀을 드려요. 이분이 오신지가 1년 반 정도 밖에 안된 것 같은데 형님은 간암이고, 이 집사님은 폐암 4기고, 동생은 파킨슨이고 아들은 조현증이고 그러면 이분에게 말씀대로 남았다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깨닫게 회개하시는 마음인것 같아요. 엘리사의 포용성이 있는 마음을 가지고 싶고 그러나 기복이 심한 내 자신을 바라보고 있고, 기도하고 있어도 기도 후에는 여전히 예전 십상을 보이고, 가족들에게 혈기를 부리고, 아들의 건강에 대한 기도가 이루어지지않는 부분에 대한 실망을 보면서 내 자신에 대해 탄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느끼고 싶은데 아들의 건강에 대해 늘 기도하고 있지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 살아나는 것처럼 우리 아들의 건강도 다시 회복되는 응답을 바란다. 내가 예수도 아닌데. 도대체 내가 언제 주님의 응답을 볼 수 있느냐는 절망을 느끼는데 왜냐하면 부모님, 형님, 아들 병원에 다니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 이분이 폐암 4기인데 모두를 간호하고 있는거에요. 얼마나 압박감을 받게습니까? 정말 내리사랑이라고 아들 때문에 본인보다 더 애통하세요. 그런데 1년 반동안 양육코스를 다 수료하시고, 주변인들에게 많은 은혜를 끼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거에요. 목장도 꼬박 참석하시고 목보 리플에는 꼬박 리플 달아주시고요. 언제나 나누면서 기록하기가 힘든 것인데 성령님의 역사하시는 모임에 누군가 기도로, 누군가 헌신 수고해 주시니 그 은혜의 자리로 더 사모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목자님이 굉장히 훌륭하시니까 목원분이 은혜를 받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은 정말 기가 막힌 질병의 흉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늘 회개하면서, 그러나 예배는 빠지지 않고 나오면서 이럴때 먹고 남는 것이 있는 줄 믿습니다.
또 한 아이는 중학교 3학년 아이가 일주일 동안 절도 사기에 연루가 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이아이가 교회에 오게 되었고, 이혼 위기의 부모님이 합치게 되었고 아버지가 교회까지 출석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일주일 동안 그 사건때문에 구원의 사건이 되고 있는 거잖아요. 아이가 모범생으로 자라주는 것 좋겠지만 그리 아니할지라도 우물이 훨씬 넓어졌어요. 그러니까 바로 이것이 모든 것은 붙고 모든 것은 해결되고 이것만 응답이 아니라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지경이 넓어진것이 너무 많잖아요. 말씀대로 먹고 남았더라 이 인생은 어떤 사건에서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들 말씀대로 남았더라가 되십니다. 오늘 제 설교의 올라오신 분들은 모두 기도해주시길 바라고,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 모두 외쳐 주셔서 이 집사님들 살려주세요. 구원이 이루어지게 도와달라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말씀대로 말씀하신대로 먹고 남았더라는 흉년의 때에 말씀의 공동체에 머물러 앉아야 해요. 흉년이 왔다고 이혼을 하고 교회를 떠나면 안돼요. 여기 5번만 오면 이혼을 해 주겠다 몇분이 있어요. 그런데 그분은 오기만 하면 이혼해주겠다는 것은 구원이 있는 거잖아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초청인지 몰라요. 그러니까 죽어라고 지금 이혼하시면 안돼고 시간을 좀더 가지시고 조금 더 문제가 있겠지만, 용서라는 것은 과거를 흘려보내고, 내가 남편과 아내가 훈련을 받으면서 여러분의 우물이 넓어지길 원하셔야지 이혼이 답이 아니고 교회 떠나는 것이 답이 아닙니다.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결혼에 실패할 수 있죠. 이것이 모두가 잘못고를 수 있어요. 여러분이 기도하고 결정해다면 반드시 주님이 책임지실 줄 믿어요. 그리고 모든 관계는 나는 당신한테 잘했다 그런 이야기는 하나마나한 이야기에요. 모든 관계는 나를 위한 거에요. 나를 위해서 남편에게 자녀에게 잘 한거에요. 거기서 생색이 들어갈 자리가 어디있어요. 이 생색때문에 이혼하고 떠나고 이러잖아요. 나를 위한 거에요. 그렇게 나만을 위해주는 사람하고 관계 좋은 사람들하고만 관계하려고 그러면 평생 이만한 우물 가운데 요만한 패트병 밖에 안되는 거에요. 지경이 넓어지려면 절대 이혼하시면 안돼요. 시간을 조금 더 가지고 가서 들릴 수 있기를요.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하잖아요. 내가 어찌, 내가 어찌 그 남편을, 내가 어찌 그 아내를 감당하고, 내가 어찌 목장을 감당하고, 내가 어찌 하지 말고 해독공동체에서 살아나시길 바래요. 해독공동체에 가면 가루를 약재료를 뿌려줄 거니까요. 내것도 뿌리면 다른 사람들이 산다니까요. 나의 중독도 뿌려주면 다른 사람도 살아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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