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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왕기하 4장 18절~30절 - 평안입니다
    주일설교 요약 2023. 10. 11. 00:41

    2023년 9월 3일 주일설교

    평안입니다

    열왕기하 4:18~30

    김양재 담임목사

    인생이 훈련의 반복이에요. 저는 이렇게 피아노 치는 훈련이 숱한 반복의 훈련이었어요. 진짜 못할 노릇이에요. 똑같은 걸 또 치고 또 치고 또 치고 또 치고 1년 내내 똑같은 거 치고 입시 보고요. 그런데 이제 그걸 했기 때문에 큐티가 수 없는 반복에 훈련에 도움이 됐어요. 중고대 입시가 또 수없는 반복이었어요. 이 모든 반복되는 훈련은 결혼 생활의 반복되는 정말 똑같은 고난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이고 그리고 지금 숱한 반복으로 설교를 하며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냥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이 가장 좋은 훈련인데요. 이 중에서 최고의 반복의 훈련은 큐티 훈련이라고 생각이 돼요. 큐티는 우리들 교회는 Quite Time이 아니고 Question Time으로 이제 바꿔 불러요. Question Time 질문 훈련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이들이 인정을 하건 안 하건 어려서부터 날마다 이렇게 질문하는 훈련을 이렇게 받는 큐티 훈련은 정말 최고의 훈련이라고, 평생을 도움을 받을 훈련이라고 생각이 돼요. 저 한 사람의 일생 반복된 고난에서 이 질문 훈련으로 해석이 되니까 이렇게 많은 성도님들을 감당케 하십니다.

     
    수넴 여인도 아들을 낳기 위해서 거룩을 경험하게 하시고 두렵고 떨림으로 세심한 배려를 하며 말씀을 믿어서 기가 막힌 아들을 낳았어요. 그러면 영원히 평안입니까? 내 평생에 가는 길이 순하든지 험하든지 태양을 본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야 할 책임이 있는 거예요. 오늘 평안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이나 나왔어요. 이 모든 거 번역은 이렇게 저렇게 했지만 그냥 히브리어로 샬롬을 말해요. 그래서 오늘 그 기가 막힌 아들이 죽었는데 평안이라고 말하는 수넴 여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사람을 믿습니다. 18절부터 그 아이가 자라며 하루는 추수꾼들에게 나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렀더니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사원에게 말하여 그의 어머니에게로 데려가라 함에 곧 어머니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

     

    수넴여인 부부가 나이도 많은데 아들을 낳고 정말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가정의 모습으로 이제 들판에 나가서 아이가 놀았어요. 그러다가 아마 일사병이라도 걸렸는지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다가 죽게 생겼어요.늘 지혜로운 수넴 여인은 평소에 남편에게 신뢰를 얻었는지 남편이 아이 엄마에게 데려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데리고 왔는데 아이가 죽었어요. 엄마가 어떻게 하는지 오늘 보겠어요.

     
    21절에 그의 어머니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 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하건데 사환 한명과 나귀 한 마리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다 하니 남편이 이르되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니거늘 그대가 오늘 어찌하여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 하는지라 여인이 이르되 평안을 비나이다 하니라 개혁한 글에 평안이다 하죠 그죠?

     

    그녀는 먼저 전자동으로 성전으로 생각했던 하나님의 사람의 그 침상을 딱 생각했어요. 그리고 찾았어요. 그리고 그 침상 위에 죽은 아이를 두고 그다음에 남편에게 가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 오겠다고 합니다. 아들을 주실 때도 지혜롭고 아이가 죽었는데도 지혜롭습니다. 장차 받을 이 환란에 대한 연습을 잘해서 그런가 봅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라고 했는데 그런데 만약 이거를 남편한테 먼저 말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당장 엠버런스 불러 내가 그 대학병원에 빨리 전화해 놓을 테니까 빨리 가. 그렇게 지금까지 하나님 하나님 하더니 꼴 좋네. 미국 같으면 앤더슨 병원에 가. 이제 그랬겠죠 그러니 보세요 23절에 이 남편도 안식일도 아닌데 어찌하여 그 사람에게 가서 하잖아요.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계속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계속 극존칭을 쓰는데 남편은 그 얘기를 듣고도 아우 그 자한테 왜 보내 이러는 거지? 그 사람한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거 모릅니다. 큰 차이입니다. 늘 큐티하면서 하나님께 묻다 보면 이런 것이 분별이 돼요. 그래서 남편에게 평안을 빌어요. 이거는 히브리어로 샬롬이에요. 아이가 죽었는데 평안입니다 한 거예요. 이런 것이 훈련이 돼야 합니다. 문제가 계속되는 인생 가운데 어떤 경우에도 이거 샬롬은 별일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평안입니다. 이렇게 읊조릴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왜 주십니까? 항상 반복되는 훈련 가운데 성숙 지수가 높아가는 가운데 점점 많은 사람을 감당해 가라고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 성도는 이런 사건이 딱 오면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를 보여줘야 할 사명이 있는 거예요. 왜죠? 태양을 본 사람은 어떤 사건에서도 사명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고 문제가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닌 것이죠.

     

    이거를 남편에게 속여야겠다는 의도가 아니에요. 아무리 내 남편이라도 믿음의 불량에 따라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 거예요. 믿음이 약한 남편을 세심하게 배려하면서 평안히 해요. 샬롬을 외치는 것이죠. 샬롬은 내적 외적으로 닥치는 근본적인 어려움에서 하나님의 평안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남편은 엘리사의 게스트하우스를 다 지어줄 정도로 수넴 여인을 사랑했어요. 그리고 그 집이 내 집에 있어도 괜찮을 정도로 대단한 남편이에요. 그런데 지체가 되지 못해요. 그래서 아들이 죽은 얘기는 할 수가 없는 거예요.


    60년 만에 만난 첫사랑이 80이 넘었는데 만나셨어요. 그래서 농사 지으며 애틋하게 신혼생활을 하시는 영상을 봤어요. 그렇게 아프다가 둘이 만나니까 아픈 데가 하나도 없대요. 너무 맛있게 맨날 먹고 또 운동하고 하니까. 그런데 아침에 할머니는 성경을 보고 할아버지는 불경을 읽으시더라고요. 서로 너무 좋으면 구원이 멀리 멀리 갑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은 수넴 여인의 말을 누구보다도 잘 들어주는데 구원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여인이 탁월하지만 남편에게 맞추어야 게스트하우스라도 짓지 자기 믿음이 최고라고 상대방과 상관없이 자기 얘기만 하면 게스트하우스는 커녕 아들도 살리지 못하죠. 구원의 열매가 없지요. 세심한 배려는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남편은 믿음보다는 성품이 이제 크다고 보여지죠. 여러분도 하나님보다 솔직히라는 미명 하에 기도 받고 처방받아야 할 일을 그르치게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여인의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상대방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구원의 디테일이에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들도 눈에 보이는 열매가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아이를 교회에 보냈는데 큐티 페스티벌인 큐페에 가야 하는 건 알겠는데 갑자기 교회만 가고 공부를 안 하니까 믿음이 없는 이 남편이나 아내에게 저것이 공부는 안 하고 교회만 쳐다닌다고 말을 해야 되겠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바울 새붑인 똥파리 신을 섬겨서 그래요. 너무 아이가 공부를 안 하고 또 우리들 교회를 싫어한다고 하니까 이 부모가 긴장을 해가지고 공부 안 해도 좋으니까 제자 훈련 한 번만 받아라 그랬더니 진짜 공부를 하나도 안 하는 거예요. 안 하는데 더 안 해. 희죽희죽 웃으면서 나 제자 훈련받으래매 이러고 놀리는 거예요. 그럴 때 으이구 아이 앞에서 내가 이 제자 훈련 괜히 시켰지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구원의 디테일이 없으면 여기서 얘기할 거 저기서 얘기하고 저기서 얘기할 거 여기서 얘기해서 다 이렇게 이제 이렇게 망치는 거예요.

     

    부모가 교회를 사랑하는 정도에 따라서 아이들도 부모의 가치관을 보는 것이 있어요. 겉으로는 열심인 경건한 부모의 뒷모습을 다 보는 거죠. 공부 안 하고 공부 열심히 교회 열심히 다닌다고 분해서 못 봐줍니다. 이런 부모가 한둘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럴 때 사건을 주시는 것이 축복이에요. 한 사람이라도 중심을 잡으면 됩니다. 믿음 없는 남편에게 억지로 평안이니이다 그렇게 하지 말고 태양을 본 사람의 그 확신을 가지고 평안히 해요. 웃으면서 아이가 죽었는데 평안이에요 이거 보여줘야 돼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아웅다웅해도 이 세상 영광은요 아무리 커도 반딧불과 왕초 정도의 차이밖에 안 돼요. 겨자씨와 호박씨 정도의 차이예요. 태양과 비교가 안 되죠. 근데 우리는 태양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잖아요.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확신 있게 평안이에요. 인생에서 내 믿음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내가 믿는 대상이 중요한 거지. 하찮은 내 믿음 그게 뭐가 중요해요. 그 대상이 확실치 않아서 아들을 살리지도 못하고 낳지도 못하고 구원의 열매도 없는 것이죠.


    24절 이에 나귀의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고 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

    이렇게 남편에게 샬롬을 외쳤던 여인은 나가자마자 마음이 얼마나 급한지 나귀 타고 가면서 말 한마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촌음을 아끼며 사환 보고 빨리빨리 달려가. 막 그냥 다급하고 지금 갈멜산까지는 거리가 꽤 멀어요. 구원이 중요한 사람은 연기를 잘할 수밖에 없어요. 교만한 사람은 이런 거 깨닫지도 못하고 진실한 사람이 왜 연기를 해 솔직해야지 이러죠. 이게 못 알아들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아니 아이 아빠를 사랑하면 그 아빠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정말 웃겨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잘 믿는 사람이 이렇게 좀 배우가 되어야 하는데 이건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에요. 수넴여인은 계속 연기를 해요. 그래서 구원이 디테일이고 떨림으로 세심한 배려를 상대방에 따라 하는 거죠.


    25절에 드디어 갈멜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남편에게 아들이 죽은 것을 밝힐 수만 있었다면 당연히 아들을 데리고 왔죠. 근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를 수넴 여인이 아는 거예요. 엘리사에게 달려온 것은 하나님께 나간 거예요. 그때 하나님 믿는 사람이 희귀하잖아요. 보여지는 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보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세상은 이런 여인을 앞다르고 뒤다르다. 약장수 같아. 어떻게 죽은 아들 앞에서 평안입니다 할 수 있지? 저도 죽은 남편을 두고 아니 무슨 큐티를 해? 구원받아서 감사하다고? 근데 지지난주에 우리 남편을 영접시켰던 그 젊은이였던 목사님 부부가 오셨어요. 예배드리시러. 예 그랬는데 오셔서 저한테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때 확실히 영접했다고 우리 남편이 그랬는데 내가 영접했다고 너무 기뻐했대요. 그 자리에서. 그런데 젊은 여자가 남편이 지금 죽어가는데 막 기뻐했다. 이게 이해가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수넴 여인 이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별 소리를 다 들었기 때문에 수넴 여인이 이해가 됩니다.
    유교적인 우리나라에서 저의 행동은 너무 이상하고 기이하기까지 합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사건이 생겼을 때 누구를 제일 먼저 생각하나요? 그래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와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지금 어떤 말을 자주 합니까? 그래서 여러분 구원을 위해 연기를 해본 적이 있나요?
    진짜 이게 제가 말하는 게 어떻게 이해가 되겠어요 믿음의 분량대로 할 말 안 할 말을 분별하나요?

    근데 진짜 이런 나눔이 올라왔더라고요. 안 나오겠다는 목원에게 듣기 좋은 말로 연기를 할까 진실된 마음을 나눌까 고민이 된다. 여러분 이게 이원론 같잖아요. 그죠?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실행이 참 힘들다. 그래요. 날마다 공감하라고 하니까 내 속에서 공감이 안 되지만 연기를 해야 되잖아요. 근데 진실된 마음으로 이렇게 복종의 언어 쓰고 사랑의 언어 쓰시면서 자기 죄를 자기를 보셔야 해요. 이러면 당신이 뭔데 내 남편하고 살아봤어요 내 아내하고 살아봤어요 이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이게 진실된 언어인데 그 얘기가 지금 안 들어가면은.. 그렇죠. 그러니까 단계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해주셔야 돼요.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저라도 저기 못 살죠 정말 다 때려부시지 그러셨어요. 나 같으면 때려 부셨겠다. 지금까지 살았다는 것만도 박수 쳐주고 싶어요. 다 같이 박수 이러셔야지 아니 박수 치라는 게 아니고. 근데 이런 것이 연기처럼 보이지만은 이게 사랑하는 구원의 디테일이잖아요. 그게 연기예요? 이게 진실함이에요. 그러면서 약장수 같아 사기꾼 같아 그래도 내가 진심이면 그렇네요. 평안이에요. 이러면 되잖아요. 그냥 목자님은 왜 저렇게 연기를 하시지 그렇네요. 평안이에요. 그렇게 큰 소리만 치지 말고 무슨 말만 하면 작은 소리로 맞네요 맞네요. 이게 연기예요. 진실은 연기가 아닌 거예요. 수넴냅 여인처럼 남편에게 평안입니다 하는 거예요.
     

    평안입니다는 하나님의 사람을 믿어야 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털어놓습니다. 25절부터 드디어 갈메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사람밖에 몰라요.)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그를 보고 자기 사 게아시에게 이르되 저기 수넴 여인이 있도다.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니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이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네 번이나 나왔어요. 근데 여러 도시를 순회하던 엘리사가 왜 당시에는 갈멜산에 거했을까요? 우리도 잘 모르죠.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여인이 엘리사의 거처를 알고 있다는 거예요. 자신의 스케줄을 알려줄 만큼 긴밀한 관계인데 이거는 이제 하나님하고 그만큼 소통이 되는 믿음이다. 지금 이런 뜻이에요. 그 당시 갈멜사는 아다시피 엘리아가 바알 선지자들을 물리친 종교적인 성지였어요. 그러니까 그곳에 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지혜고 지혜는 타이밍인 것이 다 맞아떨어집니다.

     

    원문에는 보라 이 감탄사가 붙었어요. 저기 수넴 여인이 있다. 멀리서도 너무 수넴 여인하고 통하니까 수넴 여인을 딱 알아봤어요. 근데 초하루나 안식일도 아닌 때에 여인이 급하게 갈멜산을 오르는 모습을 발견하니까 걱정이 되죠. 그래서 게하시에게 보고 와서 물어보래요.여인이 평안하냐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세 번이나 반복해서 정말 평안을 원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여인이 게하시를 통해서 물어본 그 말에 평안하다고 또 답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자기도 모르게 이 집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지금 간파하고 있어요. 그 문제가 뭔지 모르지만은.. 이때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기 전에 엘리사를 통해 들려준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 너무 새록새록 들리는데 계속 샬롬을 해주니까 그 말이라도 너무 그냥 너 너무 지금 감사한 거예요. 나에게 샬롬을 계속 물어봐 주는구나 계속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지금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평안을 믿지만 수넴여인은 엘리사의 제자 게하시에게도 남편에게처럼 평안합니다. 그러고 또 연기를 합니다. 진실한 제자가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진실하지 못해요.


    엘리사의 제자 게하시는 당장 이제 다음 장에 야망으로 문둥병에 걸렸어요. 근데 이것을 수넴 여인이 미리 분간을 했습니다. 게아=하시가 진실하지 못한 걸 알아요. 사심이 있어요. 이렇게 분별해내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진단하고 처방하며 시간을 낭비할 것이기 때문에 엘리사가 우리 아들에게 와줘야 한다고 하나님의 사람이 와줘야 한다고 한 거예요.남편에게도 함구를 하고 게하시에게도 함구를 하고.. 내 죽어가는 일들이 일들을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함구를 해야 될 때가 있어요.  정말 이게 말이라는 게 생각의 창고인데 그렇게 말을 수도꼭지처럼 그냥 그렇게 그냥 해서 될 일을 안 되게 이러면 안 돼요. 그러니까 세심한 배려로 늘 할 말, 안 할 말을 분별해야 아들을 낳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27절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아는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함에 (봐요. 게하시가 물리치잖아요. 지금 이렇게 구원을 방해해요.)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만은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여인이 이르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이 여인은 계속 함구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니까 정확하게 대상을 찾았어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마음껏 말할 대상이 게하시도 아니에요. 지금 게하시가 수넴 여인을 물리쳤잖아요.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고자 하는데. 엘리사에게도 게하시가 아니고 수넴 여인이에요. 수넴 여인도 남편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였죠 다 털어놓을 지체가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평안입니다.

     

    그렇다고 남편하고 안 살아요?. 게아샤하고 같이 안 가요? 믿음의 불량이 각각 따로 있어요. 그들에게 할 말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할 말이 따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을 보자마자 여인이 그 발을 안았어요. 아마 통곡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엘리사도 그의 영혼이 괴로워한다고 하잖아요. 나오미처럼 그의 영혼이 쓰고 괴로운 나라가 되었어요. 쓰고 쓴 사건과 상처와 마음을 남편에게 쏟았더라면 가정이 깨졌을 거예요. 동네 이웃들에게 쏟았더라면 이야깃거리만 되었을 거예요. 게하시에게 쏟았더라면 다른 목적으로 이용만 당했을 것이에요. 이런 얘기를 어렸을 때부터 듣는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지혜롭겠습니까? 다 당하는, 당해서 망하는 거잖아요. 그죠? 속아서 당하는 건데. 하지만 여인는 지금 촛불들이 아닌 태양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오직 하나님 사람 앞에 와서야 그 쓴 마음을 털어놓는 거예요. 주님도 여인이 괴로운 이유를 엘리사에게 숨기셨어요. 여인이 직접 자기 입으로 털어 놓토록 세심하게 배려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더 잘 아시고 더 잘 설명해 주실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여인이 직접 털어놓게 하시는 거예요. 자기 말로 쏟아내는 것 자체가 치유라는 것을 주님도 인정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인이 엘리사에게 뭐라고 말해요 내가 언제 내주께 아들을 구했어요?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어요? 지금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말하지만 이건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너무 욕하고 싶으면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내가 저놈이 미워서 못 살겠고 남편 놈이 미워서 못 살겠고 막 기도하고 이러다가 남편이 딱 오면 평안입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연극을 하셔야 되는 거예요. 근데 맨날 둘이 니가 이래서 이러고 저러고 싸우고 그거 하나님 앞에 하시라고 하나님 내가 이 남편 때문에 살 수가 없어.이 남편 놈 때문에 살 수가 없어. 이 아내 니은 때문에 살 수가 없어. 그렇게 막 했다가 아내 남편이 올 때마다 이렇게 막 다 평안이니라.  이게 구원이 안타까운 사람은 이게 돼요.

     

    엘리사에게는 이렇게 말해도 받아줄 사람이라는 걸 아는 거죠. 야다의 하나님을 같이 경험했기 때문에 설득이 필요 없어 한마디만 하면 딱 아는 거예요. 익 하면 칙 하는 거예요. 익하면 칙하는 거 이게 최고의 인간관계예요.  사실 행복은요 편하고 대인관계가 잘 되면 그거보다 행복이 없어요. 행복은 대인관계가 잘 되는 거예요. 여러분 돈 갖고 행복해요? 말이 주거니 받거니 할 때 보세요. 믿음이 다르다면 니가 뭔데 감히 하나님의 사람 앞에 와서 울고불고 해 이러겠죠 그죠? 믿음이 다르면. 남편이나 게하시는 남편 못 알아듣고 게하시는 뒤끝이 있어요. 단어 하나에 오해를 해서 용납 공동체가 못 되고 오해 공동체가 되는 거예요. 그거는 뭐 부부 부모 자식 등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인 입장에서는 너무 옳은 말이잖아요. 아들을 달라고 그러지도 않았는데 왜! 아들을 안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농담도 예술이시네요 하면서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주시고 나서 다 키우기도 전에 갑자기 데려가셨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하나님이 다 그래서 여호람이 하나님 탓을 했잖아요. 물 없는 것도 하나님 탓을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때 뭐 결혼하래매 하지 말래매 아니 신결혼했는데 왜 실직을 해요? 왜 아이는 못 낳아요? 이러는 거예요.

     

    여인의 마음이 써요. 여기서 속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어요?16절에 지난 절에도 속이지 마옵소서. 그래서 내가 거기 농담도 예술이라고 그랬잖아요. 근데 그때 16절에 속이다는 카자브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일반적인 속임을 뜻하고요. 오늘 28절에 속이다는 샬라예요. 잘못된 희망을 품게 하다는 뜻이에요. 무슨 뜻입니까? 여인은 내 인생의 아들은 없다 다른 거 다 있어도 이제 인생에서 바랄 소망이 없다고 인정하며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서 생각도 못한 아들을 주셨어요. 그 아들이 인생에 소망을 줬다는 거예요. 근데 평안할 수 없는 인생이었는데 아들이 오니까 너무 평안할 줄로 착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발음도 샬라가 샬롬과 비슷하잖아요. 원어는 이 단어가 좀 달라요.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 가짜 평강을 주셨다는 아주 찢어지는 마음을 토로하는 외침이에요.

    이 마음을 털어놓는 이 털링 우리가 텔링을 털링이라고 그러잖아요. 털링 그죠? 털어야 돼. 털링을 엘리사 외에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누가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향해 말씀을 외치고 도처로 심방 다니고 환란당하고 빚지고 온통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엘리사니까 그렇게 쏟아놓는 그 쓴 마음을 들어줄 수 있는 거예요.


    엘리사에게도 수넴 여인이 지체고 수넴 여인에게도 엘리사가 지체가 되었어요. 정말 이거 여러분 잘못 듣고 모두 담임 목사한테만 오면은 설교 아주 잘못 들은 거예요. 그 당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희귀했어요. 우리들 공동체는 이렇게 쏟아내는 털링을 들어주는 공통체잖아요. 들어주는 거 잘하는 목장이 최고인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말을 목장에 와서 다 털어놓잖아요. 진짜 공동체라는 증거예요. 이 세상에 공동체가 많죠. 로타리 클럽도 있고 또 말씀이 없이 이렇게 나누면 또 스캔달이 되고 물론 우리 공동체에서 실수할 때도 있고 부족한 부분도 있겠죠. 이런 연약한 부분도 우리가 함께 나누면서 성장해야 할 부분이에요.

     

    누구든 처음에는 자기 말하기 바쁘죠 남의 말을 들을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계속 자기 말만 하는 거기 머물러 있으면 안 되죠. 목장에서 집사님 오늘은 거기까지 들을게요. 다음 분 이야기도 우리가 좀 들어보시면 어때요? 이런 내 말을 끊었어. 목장에서 말도 못하게 해. 이제 그렇게 얘기를 하시면은 그만큼 믿음이 자랐다는 사인이니까 이제 다른 지체 말을 들을 만한 수준이 되었다는 얘기니까 칭찬이에요. 쏟아놓은 만큼 다른 주체들의 말도 이제 좀 들으셔야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여인이 내가 언제 아들 달라고 했냐?  어떤 사람한테 이렇게 울분을 토로해야 되고 가장 사랑하는 남편에게도 평안이니다. 그러면 이게 거꾸로 적용이 되죠. 나에게는 모두가 와서 평안이다. 이것만 하네. 나한테는 내가 편하지 않은 사람이야. 이렇게 적용을 하시면 아주 좋은 학생이에요. 모두가 잘하는 사람은 정말 편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아무 데서나 죽겠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그건 대인관계를 망치잖아요. 편하지 않은 사람은 대인관계가 될 수가 없죠. 예수 믿으면서 이런 지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할 말 안 하고 안 할 말 하고 이래서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제발 뒷담화 하지 말고 말 옮기는 거 하지 말고 그거를 이제 공동체에서 배우는 거예요. 큐티를 하다 보니까 지혜가 샘솟습니다.

    성숙한 집안 분위기, 목장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수넴 여인 같은 사람 한 사람만 있으면 억만금을 주고도 못 사는 공동체가 되는 거예요. 나 수넴 여인 노수넴 여인 한번 물어보세요. 나 수넴 여인 노수넴 여인 예수님 믿는데 왜 이렇게 덕이 없냐 이런 얘기나 들으면 되겠어요?조용히 조용히 하다가 이렇게 소리 지를 때는 또 질러야 돼요. 그러나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언제 아들 달라고 했냐 그랬더니 엘리사가 이제 알았다고 게하시를 보낸 거잖아요.

     

    적용 질문이에요.

    나는 목장에서 내 마음을 다 털어놓습니까? 털어놓지 못한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지체의 나눔을 잘 들어줍니까? 목사님은 좋은데 목자들은 싫어요 하는 분들 있습니까?

     

     

    어떤 분이 목장에서 이제 부부 목장에서는 다 믿음의 분량대로 받아도 된다. 근데 어떤 분이 대출받지 말라 여자 목장 가니까 아유 대출받지 않는 게 맞다. 이렇게 이제 얘기를 했는데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는 거예요.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게 아주 그게 요상한 말이거든요. 자꾸 자꾸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까 전세 대금 받은 게 있다는 거를 잊어버리고 대출을 받으려고 했다는 걸 알게 됐다는 거예요. 결국은 그렇게 대출을 안 받았기 때문에 갑자기 대출받지 말라는 그분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 생기면서 이 모든 그냥 원망이 싹 없어졌다는 거예요. 근데 이제 그 목자님이 뭐라고 처방을 하냐 하면 공동체에서 묶어가면서 권면받고 처방할 때는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올 수 있는데 그래도 결정은 본인이 하는 것이고 그 결정을 위해서 매일매일 말씀 보고 기도하면서 가면은 나에게 주는 감동이 분명히 있어요. 근데 어느 방향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이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것이 있는지 시일이 걸리더라도 반대의 처방까지 모든 처방을 참고 인내하며 구체적으로 기도를 해야 돼요. 목자님 처방 와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 탓을 하면 안 돼요. 이 털링 텔링 공동체는 믿음이 좋은 분들의 공동체가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가 그리스도다 신앙고백으로 오신 공동체예요. 우리가 분량대로 들어야 돼요. 여기서 훈련이 되기 때문에 결론은 평안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사람들이 희귀하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희귀한 거예요.  수넴 여인 같은 사람이 없어요.  우리들 교회는 신앙고백이 다 있는 이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진짜 분량대로 오르락 내리락 하지만 결국은 다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잖아요 그죠? 하나님의 사람들이 맞기 때문에 축복을 하시는 줄 믿습니다.


    한 목자님이 아내와 이혼을 했고 자식과 이별을 했는데도 저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친구들, 회사의 실직도 저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저를 바꾸게 한 것은 생계였습니다. 그래요 남자들이 그래요. 그래서 목장에 나오기 전 묵상했던 내용을 돌아보면 말씀만 적었지 실상은 달랐고 근데 목장에 나오면서 큐티가 실생활과 연결된 거 알았어요. 그래서 이제 실생활에 적용하는 큐티를 하게 되다가 서로 적용을 하니 내 인생도 말씀대로 되어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평안의 비결이에요.

     

    그런데 어떤 목사님께서 2년을 지금 이혼 그것 때문에 우리들교회 모든 프로그램을 다 거치고 이제 2년이 됐대요. 그런데 이혼을 하겠다고 그러세요. 그래서 내가 물어보니까 거기는 먹을 게 있더라고요. 목사님인데도 먹을 게 있더라고. 근데 오늘 좌우를 바꾸게 한 건 생계였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사모님도 그렇고 진짜 우리들교회 와서 2년을 듣고 평신도들도 바뀌는데 이게 뭐 하는 거예요. 오늘 좀 들으시고 그러지 마. 평안히 노평안, 멀리멀리 평안이 평안입니다가 아니고 노 평안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오늘 정말 그 목사님 좀 꼭 들으시고 이거 정말 막으셔야 돼요.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털어놓아야 돼요.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을 떠나지 않습니다.

    29절 엘리사가 게아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 하는지라

    이제 게하시시에게 빨리 가라 허리를 묶어 가라 빨리 가라. 이렇게 유람하면서 가지 말라. 내 지팡이를 그러고 가서 얼굴에 놓으라고 하는데 가다가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도 하지 말라. 게하시는 인사합니다. 또 이제 또 아니 만나거든 인사하지도 말고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대답합니다.그리고 엘리사의 지팡이를 너무 자랑합니다. 내가 엘리사의 이게 후예다 막 이래가면서 그냥 자기를 뽐내거나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인 걸 알아요. 그래서 대답하지 말고 인사하지 말고 이게 다 알아도 이렇게 안 되는 게 있어요. 그래서 엘리사의 지팡이 이게 다 흉내만 내는 거예요. 사실 큐티 하나만 가지고 목회가 되는 게 아니고 진실해야 되잖아요. 그죠? 근데 이거를 내가 성공의 도구로 삼으면 안 되는 거지.나한테 그렇게 삼고 있는 엘리사의 지팡이가 뭔가 이거 하나만 있으면 다 된다. 이제 그걸 이제 다 알았어요.

     

    그러니까 30절에 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계신과 당신의 영원히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위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수넴 여인은 끝까지 엘리사여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게하시는 겉으로는 엘리사 제자로 경건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구원의 일은 결국 야망이 있기 때문에 왜곡해서 듣고 일이 안 되게 하는 사람이에요.엘리사와 수넴 여인은 하나님을 경험했는데 게하시는 그렇지 못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엘리사가 선지생도 중에 제일이라고 고른 사람이 게하시에요. 수넴 여인이 분별을 훨씬 더 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는 축복을 받으셔야 되는데 그만큼 엘리사 밑에도 이런 사람이 있는 거예요. 수넴 여인의 남편도 그런 거예요. 그렇다고 안 살아요? 그러니까 우리한테 지혜가 필요한 거예요. 여인이 부탁하는 모습이 그냥 엘리사가 엘리아를 쫓아갈 때 모습 같아요.엘리야가 엘리사 보고 가라 가라 하니까 결단코 내가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2장에 기억나시죠? 설교 제목까지 제가 했잖아요. 그러니까 엘리사가 이 여인이 떠나지 않겠다는 거는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겠다는 자기 마음하고 같구나 그거를 그걸 이제 헤아리게 된 거죠. 얼마나 간절한지를 알게 됐어요.

    그러니까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하는 거 즉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그것만이 진정한 평안임을 믿었기 때문이죠. 아들이 죽은 상황에서도 남편을 배려하고 사실을 감추고 게하시에게도 감추고 그리고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 정확한 근원에 소금을 뿌려야 되는데 이 여인을 이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걸 볼 때 수넴 여인은 수넴 여인의 문제의 핵심은 아들의 죽음이 아니에요. 평안이 없음이에요. 그래서 평안을 부르짖어요. 이 수넴여인은 아들이 생기니까 하나님 자리에 아들이 가 있는 거예요. 근데 그거는 생각 못했던 일이었어요. 평생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너무 하나님을 섬기다가 너무너무 좋은 아들이 생기니까 아들 평안에 취해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떠난 거예요. 그거를 이제 깨닫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멀리서 여인을 본 엘리사가 가족 모두의 평안을 급하게 물었어요. 엘리사가 살짝 수넴 여인의 가족이 걱정되었던 거예요.

     

    예전처럼 하나님의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어요. 아들이 너무 좋아서 아들 평안을 만나서 진짜 평안을 지금 놓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처럼 떠받들고 있던 아들이 한순간에 죽는 사건이 오자 우리의 큐티는 이때 발휘를 하는 것 여인이 Think를 딱 한 거죠. 내 삶의 결론이다 어떤 사건도 내 삶의 결론이다. 아내가 헛된 평안을 고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평안을 누리려고 했구나 그래서 샬라 잘못된 희망으로 속았단 말을 하는 거예요. 엘리사한테도 얘기를 하지만 내가 나한테도 속았어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재수생 모임 때 다들 대학교 들어가면 큐티 열심히 하고 교회 열심히 댕긴다고 그랬는데 대학교 들어가 보니까 알지 못했던 우상이 있는 거예요. 미팅 신도 있고 다이어트 신도 있고 학교 댕길 때는 고등학교 때 그걸 전혀 몰랐잖아.수넴 여인도 아들의 기쁨을 몰랐어요. 아들만 있으니까. 아브라함도 그랬잖아요. 이스마엘을 주니까 13년간이나 하나님하고 침묵을 했어요. 하나님 필요 없어. 교회는 나가는데 형식적으로 나가는 거예요. 돈이 꼭 축복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잘못된 희망으로 속았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속이지 마옵소서 내 자신에게 속았다. 우리 진짜 평화는 오직 하나님 곁에 있을 때, 하나님과 함께할 때 온다는 걸 기억했습니다. 엘리사에게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한 것은 당신이 가서 우리 아들 살려주세요라는 말도 되겠지만 사실은 이런 죄악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제는 내가 주님을 결단코 떠나 아니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엘리사가 그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 말을 알아들었어요. 이런 평안이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에 가사를 쓴 호레이쇼 스페포드는 성공한 변호사이고 법률회사 사장이고 부동산 사업가였는데요. 아주 교회를 잘 섬기는 장로이기도 했어요. 아내는 무디하고 아주 절친한 독실한 신앙인이에요. 그러니까 영육 간에 최고인 거예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세상에서도 잘 나가고 그러는 그가 첫째 아들을 잃었어요. 죽었어요. 1871년 시카고 대화재 때 그 부동산 그 모든 전 재산이 다 잃었어요. 이제 고난은 이제 시작이에요. 그래서 기가 막혀서 이제 돈도 없어지고 아들도 죽었는데 무디가 부흥회를 한다고 그래서 영국에 4명의 딸과 같이 좀 머리를 식히러 거기 가기로 했는데 이 남편은 못 갔어요. 그랬는데 그만 그 대서양을 건너 이제 가는 그때 그 여객선이 화물선과 충돌해가지고 226명이 목숨을 잃었고요. 거기서 스페포드의 네 딸이 다 세상을 떠났어요. 12, 7, 4, 2살이었는데요. 그 금쪽같은 딸을 모두 잃고 아내만 홀로 구조되어 가지고 남편에게 전보를 보냈어요. 혼자만 구조됨. Saved alone 이렇게 보냈어요. 기가 먹힌 소식을 전했죠. 이 소식을 들은 스펙 보드는 바로 배를 타고 영국으로 향했는데 사정을 알고 있던 선장이 그냥 딱 배가 침몰한 장소를 지나면서 이곳이 그곳이다고 알려줬는데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던 저에게 어찌 이런 큰 시련을 주시냐고 이 큰 슬픔에 빠져 있었는데 갑자기 열왕기하 4 26절 말씀이 생각난 거예요.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여인이 평안하다 평안이 네 글자가 계속 나왔잖아요. 근데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평안이 솟구쳐 올라온 거예요. 그것을 적은 것이 오늘 우리가 부르는 내 평생의 가는 길이 되었어요.


    우리가 찬송 1절 한번 해보십시다. 가사 띄워주세요.

     

    스페포드는요 아들과 재산과 내 딸을 연달아 잃었지만은 이 빼앗길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했어요. 그것은 세상의 조건과 상황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이었어요. 사고 후에 부부는 세 자녀를 더 낳았거든요. 근데 그중에 첫째 아들을 4살 때 또 잃었어요. 마침내 스페포드는 자기 인생의 성공 지향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서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미국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가지고 순례자의 삶을 살게 되었어요. 이 엄청난 고난을 통해서 진짜 평안은 이 세상에 어떤 존재에서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요. 오직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떠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할 때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난이 와도 사명을 찾는 거는 이렇게 힘든 거예요. 진짜 이 생계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는 이혼도 마음대로 하고 정말 다 뭐든지 뭐든지 사명을 찾아야 되는 거 태양을 봤는데 사명을 찾아야 되는 거예요.

     

    적용 질문이에요.

    잠시 아들이 주는 평안에서 진정한 평안을 주시고자 주신 사건은 무엇입니까? 잠시후에 이 아들은 무엇이고 갑자기 온 사건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까?

     

    말씀 맺습니다. 평안입니다는 하나님의 사람을 믿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에게 털어놔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을 결단코 떠나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여인은 자기는 하나님 너무 잘 믿는다고 생각했어요. 전혀 알지 못했던 아들의 기쁨이 오니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자리에 아들이 가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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