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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왕기하 4장 31절~37절 - 눈을 뜨는 지라
    주일설교 요약 2023. 10. 11. 02:37

    2023910일 주일설교

    눈을 뜨는 지라

    열왕기하 431~37

    김양재 목사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지도를 얼마 전에 제가 이제 알려드렸는데 이렇게 여러 종교에서 궁극적으로 삼는 궁극적 목표로 삼는 600지수의 그 평화는 초월적인 삶이고 영속적인 행복한 상태로 천만 명 중 한 명 꼴이래요. 그럼 여러분 평안입니다가 굉장히 대단한 수준이더라고요. 우리 최고의 경지는 에너지 수준 700에서 천으로 측정되는 깨달음인데요. 이것은 이제 항상 신성과 결합돼 있어서 예수님, 부처 이렇게 수준이라고 해요.  우리는 최악의 마음 상태인 그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뭉쳐진 죄인이죠. 평안할 수 없어요.

     

    깨달음은 신성과 이렇게 연합되어, 결합되어 있다고 하니까 내 공로가 아니고 예수님을 믿으면 가능하다는 것이죠. 정말 우리가 죽었다가 살아나면 세상 위치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잖아요 그죠?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어떻게 눈을 뜰지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엘리사의 지팡이라고 눈을 뜨게 뜨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31절입니다. ‘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게하시는 엘리사 선생님이 시킨 대로 지팡이를 죽은 아이의 얼굴에 놓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이 반응도 없이 그대로 죽은 채로 누워 있어요.


    당황한 게하시는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엘리사 선생님을 만나서 아이가 깨지 않았어요라고 보고를 합니다. 깨어나다는 죽은 상태로부터 일으키다 즉 소생의 의미로 사용됐고요.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죽은 나사라의 상태를 잠들었도다라고 표현하시고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라고 말씀하셨어요. 죽음 가운데서 깨어나는 부활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합니다. 어쨌든 게하시의 사역으로는 아이에게 엘리사의 지팡이를 놓았지만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합니다. 깨어나지 못합니다. 엘리사도 믿고 보냈지만 게하시를 몰랐어요. 하나님이 아니니까요. 그 지팡이가 부적은 아닙니다. 유명한 설교를 그대로 하고 흉내를 내어도 진실하지 못하면 결정적으로 사람을 살리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요. 엘리사 밑에서는 쉬워 보였는데 게하시 혼자 보내니까 이 아이에게 말씀이 들리질 않네요.  애통함 없이 그야말로 약장수처럼 사기꾼처럼 연기를 한다고 살아나는 것은 아니지요. 이 연기는 수넴 여인의 연기와는 아주 다른 연기죠.

     

    그런데 어떤 목자님이 오늘 목사님 설교 지난주 거죠. 오늘 목사님 설교 또한 100% 수용이 되지는 않는 그런 내용이 일부 있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해도 된다라니 물음표 몇 개 아직 잘 수용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그랬더니 그 목장의 부목자님께서 저는 목자님과 함께한 세월이 5~6년 가까이 되는데 너무나 목자 역할에 완벽해서 빈틈이 없기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다음 주에 목자님 일정 관계로 우리 목원들만 식사할 예정인데 그 빈틈을 찾아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험담거리로 나눔을 할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목자님이 좀 망가지셔야 하는데요 너무 빈틈이 없으니까 목장 식구들이 목자님의 그 빈틈을 지금 찾겠다고 하시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이제 똑같은 연기지만 수넴 여인의 연기가 있고 또 이제 엘리사의 연기, 아니 게하시의 연기가 있는 거예요. 게하시는 엘리사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자기를 과대평가했어요.  게하시도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고 만남이 있어야 하는데요.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간 그때 제자들은 산 아래에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지금 담임 목사만 찾으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또 수넴 여인의 믿음이 더 좋아 보인다고 평신도만 찾으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이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항상 겸손하셔야 합니다. 곳곳에서 소리가 나지 않아야 돼요. 겸손해야 분별이 됩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연기인데 구원을 위한 연기가 있고 이익을 위한 연기가 있잖아요. 그죠?

     

    이거를 구속사가 안 깨달아지면 다 똑같이 솔직하래매요 이렇게 되는 거죠. 진실하래매요 이렇게 되는 거죠.

     

    32절에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 침상에 눕혔는지라

    성경에는 그냥 단어 하나가 쓸데없이 쓰인 게 없어요. 가보니까 수넴 여인은 게스트하우스를 성전으로 여기고 자기 침상에 아이를 눕혀 놓고 온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긴 것이 맞아요. 여인의 말은 항상 앞뒤가 같아요. 이 아이는 죽기 위해 태어난 아이 같았어요. 다른 사람이라면 이 사건 자체가 해석이 되기가 어려운 사건 아니겠습니까? 애초부터 여인은 아이를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누가 아이 달라고 했습니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근데 왜 줬다가 뺐는가 이 말이에요. 그러나 이 여인은 이미 아이가 죽은 이 문제가 자신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주신 문제라는 걸 알았잖아요.

     

    내가 아들의 가짜 평안에 속아서 진짜 평안인 하나님을 멀리했어요. 내가 이제 하나님의 사람을 떠나지 않겠어요 외쳤잖아요. 그런데 이제 이때도 엘리사는 아이가 죽은 것을 몰랐어요. 아들을 안으리라의 예언은 알려주셨지만 그 아들이 죽을 것이라 이건 알려주시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그동안 여인이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을 섬겼다면 아이가 죽은 뒤부터는 이 여인이 직접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게 된 시점이 되게 하셨다고 봅니다. 모든 적용 하나하나가 엘리사도 놀란 적용이기에 스냅 여인이 우뚝 선 것이라고 생각이 돼요. 아이가 죽은 일이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겠습니까? 또 저 또한 생각해 보면 주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섬겼는데 남편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졸지에 갔어요. 얼마나 조롱받을 일이었겠습니까? 사실 그 조롱 소리를 다 듣게 하셨다면 그런 저주가 어디 있었겠어요 항상 구속사가 해석이 안 되고 안 들리는 사람은 비난을 해요.

     

    제가 아무리 평안입니다를 외쳐도 그런 소리를 다 들었다면 저주가 따로 없었겠는데 알맞게 들리게 하셔서 제가 그만큼만 이렇게 들린 만큼만 이렇게 살아있게 하셨어요. 여인은 믿음이 좋은 여인이었어요. 이 여인은 믿음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통과하게 하시고 생명을 걸 만큼 이 여인에게는 간절함을 원하셨어요. 한 번씩 죽음을 경험하게 되면 성경이 잘 깨달아지는 역사가 있죠. 그 진리가 보이니까 암초가 아무리 깊어도 암초보다 더 깊은 깨달음으로 암초를 이제 넘어가게 하시는 거죠. 그 깊은 진리가 그 깊은 진리로 다가오게 하시는 거죠. 성경이 깊은 진리로 다가오니까 이런 거를 깨달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깨달을 수가 없어요. 주님의 공로로 깨닫는데 사건이 오고 갈 때 이렇게 이제 깨달을 수가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고난을 비교하는 사람은 목사님 고난도 고난인가 밥을 굶었는가 헐벗었는가 길거리로 내쫓김을 당했는가 이런 분들이 시기마다 있어요. 사람에게는 절대치의 고난이 있지 나로서는 죽음에 이르는 십자가의 고통이었기에 주님을 만났고 고난을 통해 사명을 찾았습니다. 이제 고난이 풀려지기만을 바라는 분들은 이 고난도 비교를 해요. 그럼 이제 지난번에도 어떤 게 더 큰 고난인가 했을 때 다 이제 과부의 가난이 더 큰 고난이다 이런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러면 수넴 여인의 고난이 어째 또 고난인가 한번 설명을 해볼게요.


    제가 힘들 때 저는 소위 장로님 권사님 집안에 기업가 집에 의사 남편이니까 저 같은 사람이 그냥 그 환경 그대로 있고 남들이 보기에 별로 고난이 없는데 그럴 때 오픈해서 쓴 책은 없더라고요 읽을 책이. 그때 안혜숙 씨처럼 감옥에 가고 가난하고 매맞고 엄청난 드라마틱한 간증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분들의 간증이 대세였어요. 저 같은 사람은 간증도 사역도 도저히 이게 불가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큐티하다가 남편이 간 후 간증책을 내자고 곳곳에서 그랬어요. 근데 제가 30대인데 앞으로 제가 어떻게 살지 모르는데 어떻게 책을 내겠어요. 저 자신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이제 50이 돼서 이렇게 또 신학을 하고 교회를 개척할 때까지는 책을 못 냈었죠. 늘 숨죽이고 나 같은 사람이 큐티 모임을 하는데 다 오시는 것이 이상해서 일절 테이프도 안 만들고 녹음도 못하게 했어요. 제가 힘들었다는 생각 안 드세요?


    저는 그냥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저는 이제 사는 게 힘든 거예요.조금 하다 보면 아무도 안 올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여기서 개척하고도 수요 모임은 또 영상도 안 올리고 또 녹음도 못하게 했어요. 늘 자신이 없어서요.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면 여기까지 어떻게 왔나 싶지만 분명 목회 성공의 목표는 아니에요.

     

    근데 이게 큐티를 했으면 좋겠는데 한쪽에서는 그런 마음도 있고 한쪽에서는 늘 두렵고 떨리고 자신이 없는 거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아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데 교회를 이익의 재료로, 내 자랑의 지팡이로 삼고 올 수는 더더욱 없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이제 20년 지나서 목회를 해보니까 영혼 구원보다 목회 성공이 목표인 사역자가 정말 많더라고요. 말로는 아니라고 하는데요 우리들 교회 목자들도 다 사명자들이잖아요. 그런데 아까도 질문했지만 목자들 초 모임에서 선지생도 아내의 가난과 수남 여인의 아들 없음이 누가 더 큰 고난인가 질문을 하니까 다들 과부의 가난이 더 큰 것 같다고 그러니까 안지나서나 돈이 하나님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럴 때 돈이 생기면 사명은 간 것 없고 세상으로 떠내려가는 경우가 많잖아요. 돈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쾌락과 정욕의 길에 빠지기가 정말 쉽죠. 그러니까 그 좋은 돈보다 귀한 하나님이 상급이 되는 인생을 보여야 하는 책임은 부자가 훨씬 힘든 거예요. 그래서 오죽하면 부자가 천국 가는 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수넴 여인은 어쨌든 갖춰진 환경에서 아들을 잃었어요.  이 죽음에 이르는 아들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루신 아픔을 체우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보다 더 큰 평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세상이 감당 못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엘리사가 알아봤어요. 엘리사는 어떻게 알아봤을까요? 자기도 잘 살아봤기 때문에 딱 알아봤어요.여러분 가운데도 저를 딱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20년을 다녀도 아직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잘났다고 얘기를 하는 게 아니고 저를 여기에 세우셨으면 저를 믿으시면 저는 그런 분들을 위해서 안타까워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잖아요. 근데 여러분들이 안 믿으면 기도가 다 튕겨져 나가겠죠 근데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걸 알고 이제 그의 죽은 아이를 잠에서 깨우기로 이제 결단을 하는 거예요.



    적용 질문이에요.

    여러분이 자랑하는 엘리사의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모태 신앙이에요 유명한 교회예요 직분입니까?

    여러분의 신앙 패턴은 한결 같습니까? 늘 오르락 내리락 합니까?



     

    눈을 뜨려면 그래서 제 엘리사의 지팡이가 그렇게 이제 뜨게 해주지 않아요 두 번째는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33절이에요.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엘리사는 방문을 닫아요. 이제부터 일어나는 모든 헌신이 보여지기를 원하지 않아요. 수넴 여인도 아기를 침상에 놓고 문을 닫았어요. 방 바깥에는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대신 엘리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전능의 엘로임 하나님이 아니고 언약의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기도는 독백이 아닌 대화라는 것입니다.

     
    항상 옳은 말을 먼저 듣고 내가 답을 올려야 되잖아요. 동행을 한다면 기도의 대상이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언약인 약속을 알고 그 뜻을 알고 그 다음 적용해서 순종하는 것이 순서이지. 그런데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알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사건을 주시고 사람을 키워가시고 메시지도 키워가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상담도 기도도 교재도 다 이제 하는 거죠. 엘리야나 엘리사나 평소에 늘 하나님과 대화하며 기도했겠죠 하나님의 사람은 곧 기도하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11개 상이나 하에서 이렇게 문자적으로 엘리아가 기도했다는 표현이 없어요. 하나님께 부르짖기도 하고 대화하는 장면도 있지만 기도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어요
    이렇게 엘리사가 기도했다는 말은 두 번 나오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이 33절이에요. 여기서 이제 기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팔랄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개인의 간구를 넘어 공동체와 그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모세 이제 사무엘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에스라 느헤미야 요 다니엘 요나 등 이 단어를 써서 기도를 했어요. 근데 또 팔랄은 성경에서 84회 사용이 되었는데 하나님께 간곡히 호소하다라는 이런 뜻도 있고 또 자신을 판단하다 통회하다 이렇게 보는 견해도 있어요. 근데 호소의 의미가 강하든 통회의 의미가 강하든 여러분 간곡한 기도에는 늘 통해가 따라오잖아요.

    간곡할수록 내 죄가 보이는 거예요. 그만큼 수넴 여인의 간절함이 전달이 되어지고 그 선물로 준 아이가 죽었으니까 엘리사 또한 문을 닫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기 원했던 것이죠. 엘리사는 왜 통일 자복을 했을까요? 그동안 엘리아의 겉옷으로 요단강을 이리저리 치면서 갈랐잖아요. 말 한마디로 마른 골짜기를 물로 채우고 과부 빚을 갚고도 남는 그 한 그 기름 한 그릇의 기적을 베풀었지만 게하시편에 보낸 지팡이는 아무 일도 일으키지 못했어요. 지금까지 선지자로서 되는 일만 있었는데 가장 고쳐주고 싶은 사랑하는 스냅 여인의 아들이 죽었는데 이거를 못 고치는 거예요. 뜻대로 되질 않아요 지금까지. 그러니까 기적을 일으키신 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이라 것을 절절히 깨닫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한 게 아닌 거예요. 전혀 자기의 지팡이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근데 정말 사랑하니까 여러분들도 정말 사랑하니까 자녀를 낮아지고 낮아져서 기도를 하게 되잖아. 그럼 회개가 저절로 나오고 간곡히 간곡히 중보 기도를 하게 되는 거예요.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아버지 선선 천하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이렇게 간절한 기도가 아니잖아요. 그냥 주여 하면 눈물이 나오잖아. 그냥 저절로 그냥 막 저절로 이렇게 그냥 회개의 눈물이 나오게 돼요. 우리 남편을 깨우려고 제가 우리 남편이 잠자고 있으니까 깨우려고 이제 문을 닫고 들어가서 기도를 하니까 제가 진짜 이렇게 생명을 내놓고 기도를 했잖아요.  통일 자복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자복하고 기도를 하니까 그다음에 남편이 화를 내도 회개가 되고 때려도 회개가 되고 너무 불쌍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인생이 참 짧은데 그래도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는 거잖아요. 제가 이제 큐티를 하는데 이 말씀 듣는 거죠. 에스겔 3 24절에 주의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고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내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은 만약에 남편이 때렸다면 내가 이혼을 해야 되는 거지 내가 왜 회개를 하냐고요 그러니까 이거는 이게 못 살 거잖아요. 근데 성령이 임해가지고 날 일으켜 세우셔서 하시는 말씀하시는 게 너는 내 집에 들어가 문을 닫아라 이러잖아요.

     


    잘 묶여 있으라는 거예요. 그 남편에게 그러니까 너는 참 믿음이 좋아서 은사도 많으니까 아프리카 선교를 가라 이랬으면 좋겠는데 아프리카 선교도 아니고 남의 집도 아니고 그냥 내 집에 들어가 문 닫고 있어. 그리고 너를 가둔 그 남편의 책망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실 때만 말하라고 하시니까 그야말로 큐티하면서 말씀으로만 대화를 해라. 니 생각은 다 내려놓고 하나님은 나와 은밀하게 깊게 만나길 원하셨기에 그래서 문 닫고 나가지 못하는 세월을 오랫동안 주셨어요. 그러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엔 그까짓 게 고난인가 이런 분들도 또 많더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다시 생각해도 지금 와서 생각해도 내가 뭐 그 정도 살았다고 나를 이렇게 쓰실 수 있나 생각하면 송구스럽기 그지없어요.  저보고 목사님 정도 고난은 개나 소나 다 받아요. 이런 사람들이 또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늘 자신이 없잖아요. 그렇죠? 이렇게 말도 못하고 남편이 있을 때도 말을 못하고 말만 하면 그딴 소리하지 말라고 이러니까 그래 맞아요.  그러나 이제 지금 와서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런데 그 개나 소나 같은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나 같은 것을 쓰냐 이 말이에요. 안 그래요? 거꾸로 생각하면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나 같은 걸 쓰냐 이거지 이런 생각도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겉으로 나타나는 우리는 오직 가난 겉으로 드러나는 고난 이걸로만 사람을 계속 분별하니까 수넴 여인의 고난이 얼마나 컸으면 저렇게 주님을 만났을까 이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적용 질문을 드릴게요.

    여러분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통회 자복이 나오나요? 다 끝났어. 이제 이혼이야 사표야 죽어야 돼 하는 일은 뭐예요? 이러는 거죠.  말씀대로 적용하고 기도하는 게 왜 중요한지 이해가 되나요? 그래서 요즘 언약의 여호와께 기도합니까? 전능의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언약의 하나님 십자가 잘 지고 구원을 이루라는 거고 전능의 하나님은 그냥 뭐든지달라 달라 신앙이잖아요. 질문 훈련 잘하며 큐티 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물어야 되는 거죠. 근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거가 진짜 하나님 상급이 아니면 제가 왔겠습니까제가 어떻게 남한테 욕을 먹겠어요 교양이 있는데 그런데도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돼서 맨날 녹음도 하지 마요. 적지도 마요. 이러면서도 또 사람이 오기는 봐라. 그러니까 진짜 진짜 나는 이제 자신도 없고 또 욕 먹으면 안 되니까 그렇게 조심하면서 왔는데 이렇게 지금 이제 모인 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think를 좀 해보셔야 돼요.



    눈을 뜨려면 세 번째는 고정관념을 뒤엎고 엎드려야 합니다.

    3435절에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여기 엎드리다는 동사가 세 번이 나오는데요. 첫 번째 엎드리다는 눕다고요 둘째 셋째는 구부리다예요. 구부리다. 눕다는 부정한 시체를 살리기 위해서 끌어안는 행동을 말하고요.  구부리다는 거기에 그 행동이 가진 영적인 의미를 이제 알려주는 건데요. 여기 특별히 구부리다는 이그하르라는 단어인데 성경에서 총 세 번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두 번 나오고 한번은 11기상 18 42절에서 나오는데요. 엘리아가 갈매산 꼭대기 위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놓고 해서 꿇어 엎드려 바로 이 이거 하루 이거 하루인데요. 몇 년간 이어진 가뭄이 극에 달했을 때 엘리아가 바 선지자들을 제압하여서 다 죽이고 그리고는 아합에게 큰 비가 내릴 것이다라고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비 오지 않게 3년간 비 오지 않게 기도하고 그다음에는 바울 선지자 다 죽이고 이제 아합을 위하여 비가 올 거다 아합을 위하여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근데 바울 선지자 850명을 죽이고도 결국 아합을 변화시키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그 감정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 건 그걸 딱 꺾어 하나님 손에 맡기고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내 생각은 없고 꿇어 엎드리는 거죠. 자기 생각을 언제나 접고 꿇어 엎드려야 되는 거예요. 엘리사가 아이의 시신 위에 엎드리는 것도 이처럼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고정관념과 판단과 감정을 꺾고 구체적으로 수고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에요. 세상에 부정하면서 완전히 구별된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제 어제 큐티 본문에서 보신 것처럼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셨잖아요.


    민수기 5 2절이죠 또 민숙이 19 11절에 더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1회 동안 부정하리니 그래서 자신을 부정함에 오염되지 않게 유지하기 위해서 시체를 만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통해 자복한 엘리사가 그다음에 이어서 한 행동은 그 아이의 시신을 만진 거예요. 그냥 손만 만진 게 아니라 자기 입을 아이의 입에 눈을 눈에 손을 손에 딱 갖다 붙였어요. 이런 거 하려니까 문 닫아야 돼요 아니면 이상하다 그럴 거 아니야. 나의 모든 수고와 이 모든 것들이 그렇게 알려지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도 어정쩡하게 이 부위들만 된 게 아니라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렸다고 했어요. 아이 위에 자기 몸을 눕혔다는 뜻입니다. 수넴 여인이 죽은 아이 몸을 엘리사의 침상 위에 눕힌 것처럼 이제 엘리사가 아이 시신 위에 자기 몸을 눕혔어요.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이에요. 한 영혼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려면 이처럼 간절한 기도뿐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자기 처소에서 자기 침상에 누일 뿐 아니라 차가운 시체, 보기도 힘든 시체를 나의 온기로 덮어주라고 하시는 거예요.  우리 목장에서 지금 얼마나 차가운 시체들이 있습니까 그죠? 이 생각하기도 무섭네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은 자나 마찬가지인 거. 그런데 무려 세 번이나 시체의 몸을 펴서 엎드렸다고 하잖아요. 따듯해지지 않으니까요. 

     

    그럼 엘리사에게 거리낌이 전혀 없었을까요? 이래도 되나라는 의문이 하나도 없었을까요? 이렇게 시체를 안았으면 7일이 아니라 14일을 부정한 채로 지나야 되는 건 아닐까 하며 귀찮게 여기는 마음이 하나도 없었겠어요? 우리와 성경이 똑같은데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 생각 다 했겠죠 여러분도 목장에서 내가 뭘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귀찮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당연히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회개가 되는 거죠. 날마다 말씀을 보면 하나님 귀찮았어요 하나님 제가 또 귀찮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아이의 차가운 몸을 끌어안았어요. 거리낌과 의문과 귀찮은 모두 감수하고 그냥 끌어안았어요. 적용해야 되니까. 내가 사랑이 샘솟지 않아도 우리는 이제 적용을 해야 되는 거예요. 말씀으로 하라. 그러니까 그날 에스겔처럼 너 문 닫고 들어가서 벙어리가 되라 하니까 내 마음은 원치 않지만은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그런데 이런 적용을 보면서도 여러분들이 이렇게 진정성 타령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내가 인정하는 진정서보다 진정성보다 훨씬 더 크고 귀한 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고 순종이에요. 적용은 순종이고 순종은 하나님이 진정성 있다고 인정하시는 것이에요. 내가 남편을 절절히 사랑해서 날마다 무릎 꿇고 사과하고 그러지 않을 수 있잖아요.  얼마든지. 근데 하나님이 하라고 그러니까 적용으로 사과를 하고 하는데 여러분들은 또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그러면 그거 적용이죠 그래서 진정성이 없어. 적용을 했기 때문에 진정성이 없대요. 그럼 여러분이 인간의 그 사랑보다 하나님 때문에 적용한 것이 더 낮은 레벨인가요? 그러니까 이것이 구속사가 안 깨달아지면 날마다 과거의 상처를 들먹이면서 행위구원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과거에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지금 와서 사과를 하면은 진정성이 없다 그래요. 그 과거의 남편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잖아요. 지금 하나님 사랑해서 사과를 하는데 진정성이 없대. 그럼 인간의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거예요. 물론 진정성이 없을 수도 있어요. 어쩌겠어요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아요. 그러니까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고 적용은 하나님 순종이잖아요. 그러면 입으로라도 사과하면 받아줘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때문에 목장에서 하라. 그러니까 순종했잖아요.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행위 구원으로 날마다 옳다 그르다 너 옛날에 나한테 이렇게 상처 줬어. 나는 그거 용서 못해. 이 구원받은 사람이 할 태도가 아닌 거야. 70번씩 7번씩 용서를 해야 되는데 날마다 진정성이 없대여러분들 진정성 타령 좀 그만하시길 바라고 그러니까 내 판단과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게 구원이에요.


    이 세상에서 영혼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한 영혼도 잃지 않고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한 사람 살리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꺾어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그러면 오늘 또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오늘 목사님 말씀 들었지? 내가 사과하면 받아줘야 되잖아. 그딴 얘기하라고 내가 얘기를 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은 진정성이 없다 그러면은 진정성이 있다고 그럴 때까지 사과를 하셔야 되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날로 먹으려고 그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때가 돼야 되는 거지. 그러니까 이게 훈련인 거지. 내가 같은 말 천 번 더 들어. 만 번 들으셔요. 그래서 십자가는 지혜고 타이밍인 거예요. 항상 들으면 자기 편에서만 생각을 하더라고. 좋다가 말하네요. 그래서 엘리사 몸의 온기가 아이의 차가운 몸으로 전해지는 거예요.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게 되었어. 금세 따뜻하게 되죠. 그 무서운 시체를 그냥 세 번이나 엎드려서 시체예요. 한 번씩 사과할 때마다 죽을 것 같죠 그죠? 될 때까지 하나님의 응답이 서서히 와서 이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거죠. 그러니까 너무 미운 그를 향한 수고가 아니라 나를 살리신 주님을 향한 수고이자 사랑이기 때문에 지치지도 않고 생색도 내지 않고 그렇게 사과할 수 있어요. 제가 지치고 생생 났다면 이걸 할 수 있었겠어요? 진짜 어림도 없습니다.  진짜 주님의 사랑을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제가 아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도 그때 생명을 꺾을 테니까 남편을 살려주세요. 고정관념을 꺾고 우리 남편이 이상한데 뭐라 그러지 않고 내가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갚아야 되잖아
    구원받게 해주세요.

     

    그러니까 35절부터 아이가 일곱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엘리사가 기아시를 불러 저 수냅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름에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니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저라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엘리사가 엎드리는 사랑으로 아이 위에 엎드리니, 지팡이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없던 아이가 7번 재채기를 하더니 눈을 번쩍 뜹니다. 죽었던 아이가 부활을 했어요. 엘리사는 살아난 아이를 수냅 여인으로 불러서 수냅 여인을 불러 돌려줍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이 좋지만은 엘리사하고 하나님과의 깊은 기도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문 딱 닫고 자기와의 문제인 거예요. 여인은 다시 한 번 엘리사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방을 나가는 거예요.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어요 여러분 4 8절에서 엘리사가 처음 그 집에 들어갔을 때가 거룩한 날이라면, 17절에 아들이 태어난 날은 너무나 기쁜 날이고, 오늘 35절에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날은 더 기쁜 날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 여정이 이렇게 거룩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봤다면은 우리가 이제 기쁜 날이 올 것이고, 그 다음에 죽었다 살아나면 더 기쁜 날이 온 이 모든 여러분들의 이 고난이 더 기쁜 날이 될 것을 신뢰합시다. 그러니까 이제 여인이 도움을 청해도 재채기를 7번 할 때까지 엘리사가 시체 위에 엎드려 있으려니, 엘리사도 몸과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눈을 뜨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기 전에 아들의 생명이 수냅 여인의 전부였겠죠 말 그대로 내 아들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예요. 근데 이제 죽었던 아들을 부활의 기적으로 다시 받으니까 내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임을 이제 만 천하에 공포하게 된 거예요. 내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되겠는데 여러분들이 다들 중독 아들 집착에 젖어서 내 아들 때문에 울지 하나님의 아들로 객관적으로 보지를 못하는 거예요. 내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봐야지 더 기쁜 날이 되는 줄 믿고 그게 사명의 나를 내가 알게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수넴 여인은 여전히 엎드려 저라고 아들을 안고 나가요. 엎드려가 그러니까 네 번이나 나오는 거예요. 눈을 뜨는 데는 이렇게 엘리사도 수행 여인도 계속 엎드리는 거예요. 엘리사가 더 많이 엎드려 세 번 엎드려서 또 스냅 여인 한 번 엎드렸어요.엘리사도 수넴 여인도 자신들에게는 공로가 하나도 없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평안입니다는 이런 엎드림의 사랑과 겸손이 절대 필요합니다. 지금 엎드려 섬기는 수고를 하고 있어서 너무 힘이 드십니까? 이렇게 힘들게 수고하는데 아무 열매도 없는 것 같아서 낙심이 되십니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힘도 없어서 죽고만 싶습니까? 엎드리고 또 엎드리는데 이제 지쳐서 이제는 훨훨 날아나는 떠날 거야하지만 엎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제 그 사람이 되는 거예요. 엎드리는 거는 사랑이에요. 억지로 하는 게 아니에요. 엎드리는 사랑은 반드시 부활로 결실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십니다. 가정마다 부활하는 역사가 이어질 줄 믿습니다. 주님 편에 선 단 한 사람이 되시기 바래요. 이 주님을 따라 엎드리는 사랑으로 섬기며 부활을 소망하고 인내할 때 우리 주님이 반드시 집집마다 부활의 열매를 주실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구원 때문에 입과 눈과 손을 맞추는 수고로 엎드려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섬깁니까 결과를 위해 섬깁니까? 이 수고가 헛되지 않고 부활로 결실할 줄 믿습니까?

    네 그러니까 눈을 뜨는 이 깨달음이 인간의 노력은 안 되고 이 인간의 노력과는 비교가 안 되게 얼마나 여러분을 살리고 있는지 그걸 예를 좀 들겠어요.

     

    제가 여호수아 설교 때 그러니까 한 19 18년 전이잖아요. 그때 이 예화를 들었었습니다. 날마다 살아나는 큐티에 이게 다 이제 나와 있어요. 미국의 뉴욕 주립대 의대 학장인 마이클 로이진 교수가 당신은 몇 살입니까라는 그의 저서에서 달력 나이보다 젊어지는 78가지 방법을 제시했어요. 실천했을 때 얼마나 젊어지는지도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예를 들어서 매일 비타민을 먹으면은요 1.2년이 젊어진다네요. 또 아침밥을 거르지 않으면 1.1년이 젊어지고 필요한 약을 의사의 처방대로 정확히 복용하면 0.9년 젊어진다. 반면에 처방전과 다르게 복용하면 1.6년 더 늙어진대요.  많이 웃으면 1.8년 젊어지고 평생 배우는 자세로 살면 2.5년 사고력을 요구하는 새로운 게임을 배우면 1.3년 손과 식품을 자주 깨끗이 씻으면 0.4년 하루 5회 과일을 먹으면 1.4년 젊어진대요. 맛있는 야채를 하루에 다섯 번 먹으면 2년에서 5년 튀기지 않은 생선을 주 3회 먹으면 최고 3년이 젊어진대요. 담배를 하루 한 갑 피우면 근데 8년이 늙는대요. 일정한 시간에 숙면을 취하면 3년이 젊어진답니다.  규칙적으로 운동하며 일주일에 3200칼로리 이상을 소비하면 3.4년이 젊어진대요. 체력 강화 운동은 1.7년이 젊어지고 대기 오염에 노출되면 2.8년이 더 늙는대요. 이제부터 잘 들으세요. 그런데 말이죠 스트레스를 받은 친구를 방문해서 위로하면 8년이 젊어진대요. 반면에 그런 친구를 피하고 댕기면 8년이 더 늙는대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 오는 십자가를 피하면 안 된다는 거죠.그리고 그 힘든 친구에게 날마다 전화 통화를 하면 또 8년이 젊어진다는 거예요. 감사하면서 긍정적인 태도로 살면 6년이 젊어진답니다. 가장 기가 막힌 거는 해결할 방법이 없는 이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방법이 없으면 30년 더 늙는대요. 큰일을 당하면 다 늙었어 30. 이거는 규칙적인 운동을 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아요. 학교나 직장, 대인관계에서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하면 어떤 음식도 운동도 백약이 무효라는 거죠.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30년 젊어지는 비결을 알려드렸죠 500. 고통의 정도를 지수로 따지면 사별의 아픔은 200%고 이혼의 상처는 70%래요. 그런데 이런 해결할 길 없는 고난 가운데서 영적으로 깨달아서 살아나니까 세상이 감당 못하는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니까 여러분들이 우리 목장에서 날마다 스트레스 받은 사람들 얘기 듣는 게 일이잖아요. 위로하면 8년 젊어지고 큰 스트레스 해결되면 30년 젊어진다고 하니까 앞으로 여러분들은 몇십 년을 다 살지 불로 생생하게 생겼 그런데 그야말로 제가 30대 졸지에 과부가 됐잖아요. 옛날에 쓰러졌겠죠 한 분 그다음에 지금까지도 한 분 한 분 힘든 이야기를 듣고 해석하고 위로하면서 다른 거는 다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제 피부는 날로 뽀얘진다는 거 아닙니까?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정말 건강 관리라고 제가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바쁜데 저 어디서 본 일도 여러분들이 없으실 텐데. 그러니까 초창기에 한 학생이 울린 큐티 나눔을 보니까 친구에게 맞았다는 거예요. 갑자기 와서 때리는데 맞받아치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지내겠다는 다짐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팔 가롯 유다의 발도 씻어주지 않으셨는가라는 마음으로 그저 맞았대요. 그래서 이제 학생부에 불려갔는데 친구가 그동안 제 말투에 기분이 나빴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그게 쌓였다가 폭발을 했다고 그랬대요. 그래서 내가 맞고만 있기를 잘했구나 내 말투를 고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 사건을 주셨구나 깨달았다고 했어요. 얘가 그 친구에게 바로 사과했대요. 이 사과를 이렇게 해야 되면 진정성이 없어 이러겠죠 또 친구가 그래서 사과했어요.
    그동안 말씀 들으면서 자신의 혈기를 다스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이 사건을 통해 조금이나마 혈기를 참게 돼서 감사하고 잘못된 말투도 바로잡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고백을 했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이 말이 진짜 맞는 게요 지금 제가 어떤 그 글을 봤는데 우리 불교계의 큰 스님 효봉 스님은 언제 돌아가셨냐 하면 79세 청담 스님은 70세 성철 스님 82세 법정 스님은 79세 그래서 가장 훌륭하신 분인데 90세를 넘기신 분이 없다는 거예요. 근데 훌륭하셨던 개신교 목사님들은 한경직 목사님이 99세 방지 목사님은 104세 김창희 목사님 96세 강원용 목사님 90세 그래서 고승들의 평균 수명은 77.5세고 훌륭하셨던 목사님들의 평균 수명은 97세래요. 그러니까 평균 수명이 20년이나 차이가 나는데 원인이 어디 있는가? 물 좋은 물이 좋아야 되고 공기가 좋아야 되는데 근데 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사는 스님들이 있는데 목사님들은 공기도 좋지 않은 도시에 살면서 매일 새벽 설교, 주일 설교 그냥 그리고 늘 교인들로부터 온갖 근심거리를 들으면서 사는데 20년이나 더 사셨다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공동체 안에서 목자부터 서로 죄를 고백하고 중보하고 말씀으로 여호와께 기도하니까 다들 엎드려서 눈을 뜨니까 이게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고 예수님의 신성임에서 우리를 깨달음의 영으로 인도하니까 이런 놀라운 일을 세상 학자가 연구해서 발표를 해 주셨어요. 목장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만은 인간의 상담으로 늘 다른 사람을 돈 주고 상담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러면 그게 내 노력을 하니까 도리도 스트레스가 될 수가 있는 거예요. 눈을 떠야 돼 영의 눈을 떠야 돼. 하나님의 힘으로 상담해주고 받아야 30년 젊어지는 줄 믿습니다. 이 놀라운 눈을 뜨는 줄 알아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우리들 교회가 열매가 된다고 저는 생각하고 저는 20년 전에 이 설교를 했는데 이게 진짜가 안 되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설교했는데 20년 지나고 나서 보니까 처음부터 열매가 되잖아요. 그죠? 여러분 목자님들 다 힘든 일들 많은데 다 기뻐서 놀라운 역사의 현장인 줄 믿습니다.



    말씀 맺어요. 눈을 뜨는지라 엘리사의 지팡이가 눈을 뜨게 하는 건 아니에요.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야 돼요. 통회 자복하면서 우리가 정말 절절절절 우리가 울어가면서 다 기도하잖아요. 그럴 때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고정관념을 뒤엎고 모든 것을 꺾고 엎드리게 되니까 우리 모든 목장식 이 살아나는 줄을 믿습니다. 우리가 손을 포개고 발을 포개고 예 그렇게 엎드리는 한 주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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