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열왕기하 5장 9절~15절 - 깨끗하게 되었더라
    주일설교 요약 2023. 10. 19. 00:21

    2023 10 15

    깨끗하게 되었더라

    열왕기하 5 9~15

    김양재 목사



    지난주 고쳐주소서를 외치면서 저희들의 아픔을 올려드렸습니다. 치유가 일어났죠? 아닙니까? 작년 2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제 중동에서도 이슬람 테러집단인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이웃에 있는 대만도 언제 중국이 침략할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있다고 해요. 우리 남북 관계도 정전 70년이 지나도록 시한폭탄 같습니다. 가정에서도 거리에서도 직장에서도 늘 갈등과 다툼이 이어지는 인생이지만 이렇게 세계 도처에서 무기를 사용하는 전쟁이 일어나고 끔찍한 전쟁 범죄가 일어나니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사람을 마구 죽여대는지, 100%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주님께서 고쳐주시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온 교회가 회개하며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이 간절한 기도를 담아 오늘 말씀을 함께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 깨끗하게 되었더라의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 첫째로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제 나만을 고치기 위해 어린 소녀가 안주인에게로, 안주인이 나아만에게로, 나아만이 아람 왕에게로, 아람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로, 그리고 엘리사로 이어지는 우연 같은 만남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것은 준비된 우연이었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장중 아래 있어요. 내 인생 모두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여기에 내 생각이 들어갈 틈은 없는 거예요. 그러나 이 땅에서 무엇인가 이룬 사람들은 악한 내 생각이 하나님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믿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죠. 자신이 하나님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은 나아만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셔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모든 사건들이 양육인 거예요.

     
    9절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나아만이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문 앞에 섰다고 해요. 여호람 왕에게 갈 때는 은 십 달란트와 금 6천 개와 의복 10벌을 가지고 갔다고 했잖아요 도움을 청하는 겸손한 모습으로 갔다는 거예요. 하지만 엘리사를 찾아가는 나아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점령군 사령관의 모습으로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선지자의 집문 앞에 섰습니다. 이것을 볼 때 세계적인 지도자인 나아만은 벌써 사람을 차별하고 하나님 자리에서 하나님을 자기 병이나 고쳐주는 분으로 오해하는 내 생각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같이 된대요 하는 그 내 생각이 바로 이거예요. 내가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 나아만은 자기처럼 중요한 인물이 오면 엘리사가 맨발로 뛰어나와 환영해 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그런데 말을 탄 채로 이리 오너라 하면서 대문 앞에서 버티고 있어요.

     
    여기에 대해 10절에 엘리사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이런 나아만을 특별 대우하지 않았어요. 교회가 사람을 특별 대우하기 시작하면 이제 어둠의 그림자가 오기 시작하는 거죠. 여전한 방식으로 사자, 곧 비서를 보내요. 게하시겠죠. 한마디로 나아만의 내 생각에는 문전박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지금 푸대접을 합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번 씻으라고 해요.  그러면 그의 살이 휘어져서 깨끗하리라고 예언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또 나아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11절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다 같이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다 같이 분노하여 떠나니

    떠났다고 해요. 나아만은 분노했어요. 엘리사의 집 문 앞에서 몸을 돌이켰어요. 떠납니다. 나아만의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내 생각으로 모든 것에 분노를 가져옵니다. 어디에 분노했을까요? 다 분노했는데 한 세 가지만 찾아볼게요. 

     

    첫째로 선지자 자신이 직접 자기 앞에 나타나지 않아서 이제 분노했어요. 아람의 총사령관인 나아만이 누구 집 문 앞에서 기다려 본 적이 있겠어요? 어쩌다 기다리는 일이 있더라도 곧 집주인이 직접 나와 아이고 장군님 이런 누추한 집에 어쩐 일로 납시셨습니까? 영접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스라엘 왕도 자기가 왔을 때 탄식했지만 어쨌든 쩔쩔 맸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왕도 아닌 선지자가 큰 저택도 아닌 산 속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이 직접 나와서 인사하기는 커녕 종을 보내 처방만 내리니 나아만 장군의 자존심이 확 상했습니다. 이것이 선한 것이 없는 내 생각이에요.

     

    화가 난 두 번째 이유는 그 선지자의 처방도 너무 성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병을 고치기 위해 아람에서 안 해본 주술과 시술과 요법이 없었겠죠. 그러니 가장 최고의 주술을 받아봤는데 이스라엘의 선지자도 적어도 자기 하나님 여호와께 이렇게 치료를 구하는 화려한 의식도 벌이고, 손을 상처 위에서 막 흔드는 것 같은 신비한 술법도 쓰면서 수리수리 마수리 막 이러면서 이제 온 정성을 다해 자기를 치료해 주리라 기대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 선지자라는 인간이 자기 종 한 명을 틱 보내더니 강물에 가서 씻으면 나올 것이라고 말 한마디 툭 던지고 마니까 이제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화난 이후 세 번째는 처방의 내용이 너무 찌질했기 때문이에요. 나아만이 요단강을 너무 잘 알고 있어요. 북쪽 갈릴리 호수부터 남쪽 사해에 이르기까지 흐르기 때문에 한 360킬로미터 정도로 꽤 길어요. 그런데 지형상 그물은 흙이 많이 섞여서 색이 누래요. 더러워 보일 뿐 아니라 신비하거나 영엄할 것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아요. 그런데 반면 나아만의 고향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흐르는 아바나와 바르발은 서쪽 산지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라서 너무나 매우 맑고 깨끗합니다. 전체 길이는 요단강보다 짧아도 훨씬 생명력이 있어 보이는 강이에요. 그러니 나아만 입장에서는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요단강에 들어가는 게 전부라면 굳이 내가 적국 깊숙한 곳까지 올 필요가 없는 거죠. 자기 집 옆에 있는 아바나와 바라발이 요단과 비교할 수 없이 깨끗하고 좋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요단에 들어가면 나을 것이라는 처방은 나아만에게는  너무 이해할 수 없는 찌질한 치료법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자리에서 하는 이 내 생각은 이제 분노만 일으키는 거죠. 그래서 떠나는 거예요. 말들과 병거들이 상징하는 나아만 장군의 자존심,  자부심이 있잖아요. 나아만은 내 생각으로 꽉 차 있는 거만할 수밖에 없는 군대 장관 이에요. 이런 거만한 나아만에게 엘리사의 태도나 그가 전한 말씀은 속을 확 상하게 하는 공격일 뿐이에요. 도저히 봐줄 수도 없고 들어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거만하면 들어야 할 말씀이 들리지가 않아요.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줄 말씀이잖아요. 이 말을 전하는 사람이 어떻고 그런데 태도가 어떻고 내용이 어떻고 이런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 생각이에요. 강하다는 거예요. 내가 맞는데, 내 방식이 맞는데, 내가 그래서 전쟁에서 이겼다 네가 설교나 하지 아는 것이 뭐가 있어 목사는 교회에서 저기 뭐야 다 성도들이 이르지 이 사회에 나오면 알어? 왜 내 생각에 못 맞추는 거야 다메섹 강이 훨씬 낫잖아 지금 이러는 거예요. 확신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만함이에요.

     
    나아만이 나병이라는 고난이 있으니까 자기 집 여종이 전한 말을 들었어요. 왕에게 부탁했어요. 직접 이스라엘 왕에게 왔어요. 또 그가 알려주는 대로 엘리사의 집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그가 낮아질 수 있는 내 생각의 한계였어요. 그래 내 병을 고칠 수 있는데 이까짓 거 못 참겠냐 한 번만 더 참는다. 이를 악물면서 이러면서 엘리사 집까지 왔어요. 그런데 엘리사가 자기 일을 맞는 태도를 보고 그가 내린 처방을 듣자 그만 참았던 화가 압력솥이 터지듯 한 번에 폭발하고 말았어요. 여러분 바로 이게 성품의 한계인 거예요. 아무리 내가 잘하고 잘하고 잘하려고 해도 누르고 눌러도 눌리지 않는 내 생각에 그 거만함이 있는 거예요. 금 그릇이 아무리 낮아지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거예요. 튕겨져 나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오늘 우리 집사님 간증할 때 S그룹에서 20년 동안 승진을 했는데 아내도 틱, 아들도 틱 또 다운증후군 그다음에 다 암이고 불교 신자고 모두가 장인 장모 어머니 다 아프고 20년 동안에 저분은 참지 못하는 일이 없어. 모든 것을 저런 남편이 없고 저런 아버지가 없는 거예요. 저런 또 회사원도 없고 그런데 그래서 지금 엘더하고 목자 하시잖아요. 그런데 처음으로 이번에 승진이 누락이 됐어요. 그랬더니 두 달 동안 띵겨 먹고 뭐 하고 뭐 하고 그랬다고 그러니까 저분한테 그러니까 성품에 누르고 눌렀던 그게 이제 터진 거죠. 사람이 예외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나아만을 보면서 성품에 속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건이 너무 잘 온 거예요. 집사님한테. 그러니까 거만함은 잘난 사람들만 갖는 태도가 아니죠. 내가 남보다 낫다, low 말고 up 낫다고 여기는 마음이 우리 다 종류별로 있어요. 나아만의 거만함은 나만 잘났어라는 생각이잖아요. 


    그런데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뭐라고 하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죠. 2 3절 빌립보교회 개척 멤버가 누구예요? 자주 장사 루디아, 귀신 들렸던 여종, 감옥을 지키는 간수 아니었습니까? 빌립보는 로마의 인정을 받는 대단한 도시였지만 거기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교회를 세운 사람들은 전혀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오히려 다 정말 하찮은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빌립보 사회의 무시와 조롱을 받으며 복음을 지켜 교회를 세웠는데요. 결국 이 사람들끼리 어떻게 했다는 거예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지 못해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 아니에요?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인간은 누구든 본성적으로 내가 남보다 낫다고 하는 거만함을 다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내 생각은 어디서나 있다는 거예요. 그 악한 내 생각은 어디서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이제 여러분들 가운데는 나는 내가 이렇게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런 분이 목장에서도 있고 난 당신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 굉장히 겸손하게 계시죠? 그렇죠. 물론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생각 자체가 우리가 얼마나 교묘하게 자신을 남보다 높이려고 하는 존재인지를 증명해 주는 말이에요. 나는 거만하지 않은데 이것이 자신을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최고의 금자탑이라 이거예요. 난 당신보다 거만하지 않은데 그 사람이 최고로 고등교만이. 내 생각에 거만함을 인정해야 돼요. 

     

    거만함은 부인하면 부인할수록 커집니다. 이 거만함은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해요. 말씀을 듣지 못하면 결코 깨끗하게 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복이 가장 첫째가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하나님 자리에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나아만이 괜찮은 사람이죠. 충성심 있고 권세 있고 아내 말 들을 줄 알고 계집 종의 말도 듣는 그야말로 최고의 남편감이고 그냥 상관감이고 그런데 바로 이 나아만의 내 생각에 자기 성품인 거죠. 그런데 자기 성품으로 이렇게 할 수가 있어요. 속죠 예수 안 믿어도 그 여호람보다는 나만이 훨씬 낫지 않아요 여호람이라고 이스라엘 왕이라고 있어요. 여호람보다 이 나아만이 훨씬 낫지 않겠어요? 못된 장로보다 안 믿는 암흑의 사장이 훨씬 나아.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함부로 한다고요.

     
    이스라엘 초대 총리 뱅그리오는 청년 리더 시몬 페레스를 눈여겨보고 이제 도와달라고 했고 그리고 20년 가까이 잡아두면서 의지를 했어요. 그런 벵그리오에게 사람들이 물었어요. 왜 그렇게 시몬을 믿어요?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는데 첫째가 그 청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리고 그 청년은 다른 사람의 흉을 보지 않아요. 또 청년은 내 방에 올 때마다 대부분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찾아와요. 한 사람이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바로 이 시몬 페레스 같은 사람을 말할 것 같아요. 80만 명으로 1948년 시작된 이 나라에 어떻게 이런 지도자를 이렇게 주셨어요 여러분들 정말 이-팔 전쟁은 역사를 알아야 되는데 AD 70년에 디도 장군에 의해서 완전히 유대인이 아주 그냥 다 싸그리 망했잖아요. 그때 흩어진 디아스포라가 2천 년 동안 나라를 못 찾으니까 그래서 모여서 80만 명 유대인이 다 없어지고 80만 명 얼마나 예루살렘에 오고 싶었겠어요. 얼마나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싶었겠어요 그런데 모두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전부 다 거기가 성지래요. 모두 거기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했던 돌 위에 뭐가 모스코가 세워지고 랄랄랄라. 다 이제 사회주의로 이스라엘도 시작이 됐는데 이걸 자본주의로 바꾼 사람이 페레스예요. 그래서 자본주의로 바꿔서 지금 전 세계에서 제일 잘 살잖아요. 일생을 테러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팔레스타인하고 이스라엘의 오슬로 평화협정을 맺어서 1992년도에 노벨상까지 받았죠.  그 한 사람의 아이디어 때문에 이스라엘이 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예요. 그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아이디어를 냈는지 알아보시면 지금 입이 짧아서 설명을 이렇게 못합니다. 그 분의 생각은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역사하셨을 테니까 하나님의 생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제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어쨌든 내 생각을 버리고 남을 낫게 여길 때 거짓말을 하지 않게 돼요. 흉보지 않게 돼요. 내가 최고라는 고집을 버리니까 늘 백성을 위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렇게 이제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가 최고이면 무슨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모두가 내 생각을 부르짖습니다. 피해의식으로 혹은 권세로 혹은 집착으로 혹은 옳고 그름으로 다들 내 생각을 부르짖기에 집이고 교회고 나라고 이렇게 죽자고 싸우는 거예요. 정말 이스라엘은 대단해요. 이 천만밖에 안 되는 이 나라가 미국의 가장 부자들이 유대인이고 러시아의 가장 부자들이 유대인이에요. 그래서 지금 어쩌지를 못해 양쪽 나라에서도 그러나 아직도 나라적으로 선민의식이 하늘에 닿아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어 이스라엘이 안 믿어서 지금 고난이 끝나질 않아요.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세계의 판도가 달라질 것인데 하여튼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는 이렇게 해석을 하고 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바드 학생들이 하마스를 지지한다고 성명을 발표했어요. 하버드의 이사인 세계 최고의 부자는 유대인이야. 그래서 이사를 사표 냈어요. 그러니까 지금 다 내 생각이 가득 차가지고 다 각자 자기가 옳은 대로 생각을 하는 거예요. 큐티하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찾고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은 내 생각을 버리는 훈련이에요. 다들 문제가 안 풀리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하면서 다 같이 큐티하며 질문하기 때문에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가 알게 되고 자꾸 찾게 되는 거잖아요.


    적용 질문이에요. 

    내 생각으로 분노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의 자존심. 자부심, 특별대우예요? 더 나아가서 말씀 듣고 분노해서 예배나 목장의 자리를 박차고 떠났던 적은 있습니까? ‘나는 적어도 거만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나의 고등거만이 있을까요? 가족을 향해 내게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면서 거만하게 기대하는 내 생각은 뭐예요? 

    가족이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해줘야 되는데요? 날마다 당신 나한테 이 정도는 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당신을 위해서 얼마나 내가 희생했어 맨날 이게 다 주제가죠

     


    깨끗하게 되었더라의 기적을 보기 위해서는 두 번째 벌떼처러 나아와 해석해 주는 지체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벌떼 공동체의 처방을 들어야 해요. 

    13 그의 종들이 나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다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하이리까 하니

     

    지금 이제 말들과 병거들을 몰고 온 나아만의 행렬은 이제 분노해서 씩씩거리며 왔던 길로 돌아서 가고 있습니다. 나아만은 지금 너무 열받았어요.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힘과 시간을 들이면서 온 길인데 병을 고치지 못하고 지금 헛걸음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어요. 집에 돌아가자마자 그 어린 소년이고, 여종 계집종이고 뭐고 이제 내가 없애버려야 되겠다 이러고 벼르고 갔죠. 수행하던 종들도 너무 노하신 장군님 눈치 보느라고 아무 말도 못하고 가고 있는데 그냥 당장은 아무 말도 못했지만 돌아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는 아니다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지만 장군의 부하 중 제일 높은 사람 한 사람이 이걸 말씀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이건 혼자서는 이 얘기를 감당 못할 상황이에요. 

     

    그래서 종들 여럿이 여기 복수잖아요 그죠? 종들 여럿이 함께 벌떼처럼 장군에게 나아옵니다. 여기서 나오다는 말 라가시는 그냥 가까이 가자는 뜻이 아니라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공손한 태도로 나아가는 걸 말해요. 기분이 많이 안 좋은 이 장군님을 잘 설득하려고 기분이 더 상하시지 않기를 바라면서 꼭 들으셔야 하는 말씀을 올리려고 그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생각을 많이 하고 나아가는 태도예요. 나아만의 종들은 그 장군 앞에 와서 아주 그냥 다들 그냥 납작 엎드렸을 거예요. 그러면서 장군을 장군이라 그러지도 않고 주인이라 그러지도 않고 내 아버지요 이러고 불렀ㅇ요. 주인을 향해 가장 최고의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거예요. 우리가 목장 식구들한테 이렇게 대우하셔야 돼요.

     

    그러니까 지금 이 종들이 잔뜩 굳은 나아만의 마음을 녹이는 아이스 브레이킹 마음 열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이게 늘 나에게 주시는 얘기다라고 들으셔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제 나아만을 설득합니다. 선지자가 어려운 일 하라고 말했다면 그대로 하셨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제가 생각해 봤어. 에베레트 산을 올라가라 이러면 그건 할 수 있잖아요. 또 시내산에 올라가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 거기서 빌어보세요 시내산에 올라가는 게 아주 힘들다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예루살렘이 워낙 그 태양의 정점이래.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를 정하기 전에는 거기가 이제 태양신을 섬겼다는 곳이에요. 빌어보세요. 그런데 그거 어려운 일 하라 그랬으면은 이제 내 아버지요 장군님이 하셨을 텐데 자 선지자가 하라고 말한 것이 너무 쉬워서 우스워요. 그죠? 말이 안 되네요. 흙탕물 같은 요단강에 내려가서 씻으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기가 막혀라. 우리 장군님을 뭐로 보는 거야. 그래도요 여기까지 오셨어. 그냥 속는셈 치고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니까 모두 옆에서 저도 한 표요 저도 한 표예요. 다들 우르르 저도 저도 벌떼처럼 일어나가지고 칼 날위를 걸어가는 칼날 위에 물방울처럼 조심하면서 그러나 공손하게 그러나 벌떼처럼 설득을 했어요. 

     

    구원을 위한 이런 태도가 너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나아만에게 엘리사가 처방하는 방식과 내용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인 거예요. 마음이 높아서 그 말씀이 들리지 않고 튕겨져 나갑니다. 나아만이 내 생각으로 귀가 막혀서 듣지 못하는 말씀을 그의 종들은 들었어요. 종들은 이스라엘 선지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주인의 병이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되는 거예요. 확실히 장군보다는 이 종들이 말씀을 들을 가능성이 높은 거예요. 왜냐하면 이 비천한 환경에 있는 종들은 믿음보다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고 낮은 환경에 있잖아요. 마음이 상하고 낮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순종해요. 종들도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에요. 평소 당한 게 많기에 분노하는 주인도 너무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요단강에 들어가기도 너무 쉬워요. 그래서 벌떼같이 나와서 나와서 외치는 거예요. 그 말씀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요. 화를 내실 일이 아니라고 순종해야 할 이유가 100까지도 더 된다고요. 이거 하면 절대로 손해 나는 일이 아니에요. 눈 딱 감고 말씀대로 한번 해보세요. 이 어려운 선지자의 말씀을 한목소리로 해석해서 외칩니다. 

     

    이게 우리들교회 목장이 하는 일 아니에요? 이렇게 벌떼처럼 나와서 해석해 주는 지체가 있을 때 이제 말씀대로 들어가 물에 들어가 몸을 씻는 순종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깨끗해지게 되죠. 거룩해지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이혼하고 싶고 자살하고 싶은 생각 안 드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하나님 없는 인생은 아무리 겉으로 거만해 보여도 속으로는 살 수가 없이 힘들고, 겉으로 아무리 강해 보여도 속은 다 연약합니다. 이 곤고함을 홀로 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벌떼처럼 나와서 말씀을 해석해 주는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이혼하고 싶은 마음도 그대로 있고 자살하고 싶은 마음도 그대로 있지만은 결론적으로는 이혼도 막아지고 자살도 막아지는 것을 우리들 공동체를 통해서 열매로 보여주고 있어요. 우리는 다 연약하지만 우리를 한 공동체로 불러주신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벌떼 공동체가 가장 강한 공동체인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말을 잘 듣는 편입니까?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일단 아니’ ‘그게 아니고 이거부터 하는 편이에요. 벌떼처럼 나와 외치는 주체들의 말을 들었더니 어느덧 깨끗함을 얻은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공동체가 맹신주의라고 생각이 됩니까? (다섯 번만 와보라고 이혼해 주겠다고 다섯 번 왔는데 결론은 이단은 아닌 것 같은데 공동체 맹신주의가 있다고 그래서 반드시 들은 말 기억에 기억이 나게 되실 줄 믿습니다. 꼭 돌아오게 되실 줄 믿어요. 여러분도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체들과 함께 나아가 공감해 주고 해석해줘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런데 오늘 나아만의 이 병을 치료해준 벌떼 공동체는 종들의 공동체잖아요. 그래서 이런 목장 나눔을 하나 읽어드리려고 그래요. 벌떼 처방. 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시면 안 되고 이제 3년을 내리 목장에 참석을 하셨지만 회개하지 않고 처방에도 순종하지 않는 집사님 부부를 권면하는 나눔이에요. 이것도 때에 맞춰서 큰 사고가 났어요. 어디 이렇게 어떤 세상 모임에 갔다가 상으로 받은 와인병을 화풀이하면서 깨려고 하는 아내를 말리면서 몸싸움을 하다가 이 병의 아내가 머리를 다쳤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제 엄청 큰 그냥 어쩌고 저쩌고 이제 얘기가 나왔죠. 그래도 이 두 또 부부가 목장에 참석을 했다는 게 어딥니까? 이제 목자님이 집사님은 대체 왜 처방을 했는데 속이고 세상적 모임에 나가십니까? 죽는 걸 알면서 나가는 집사님은 공동체의 권면이 두렵지 않으세요? 장모님께 보내는 카톡은 부인 집사님과 상의하셔서 합의된 내용을 이제 이렇게 분별하여 보내시기를 바래요. 공동체에 나오는 이유와 사명이 무엇인지 그렇게 말씀드려도 모른다 하시면 안 돼요. 예배를 회복하여 회개하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두 분을 3년째 흘려보내지 않고 뵙지만 변함이 없으세요. 공동체에서 들으라 하셨는데 자꾸 각자 산당을 지으십니다. 그랬더니 이제 이 목장 식구들이 한 명이 전 하루만 쉬고 싶어도 오늘 쉬면 내일 걱정해야 하기에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여기서 제일 잘 먹고 잘 사는 좋은 환경에 두 분이 왜 그리 싸우는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죽을 것 같아서 나는 가게도 하나 더 해보려 하지만 목장에서 하지 말라고 권면하시니까 나는 일주일을 목장에 와서 듣는 적용 하나로 버팁니다. 왜 싸우시면서 목장은 나오세요? 예배는 잘못 드리시면서 왜 기도는 해달라고 하세요? 그렇게 안 듣고 안 되면 안 나오시고 하지 말고 이혼하시고 떠나셨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 들어요. 두 분은 그냥 잘 살기만 하면 되는데 왜 그리들 싸우세요? 목장에서 답을 다 알려주는데도 매주 일부러 그러시는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으십니까? 그러니까 또 다른 목장 식구께서 목장이 행복해서 즐기려고 나오시는 집사님은 한 분도 없어요. 여기 이 자리에 와서 듣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절박함이 있어서 지금 여기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내신 공동체가 말씀으로 권면하고 기도하는데 왜 듣지 않고 구원이 뭔지, 회개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시는지요? 목사님이 정신과 가라는 얘기는 믿음이 없어 들을 힘이 없으니 일단 병명을 인정하고 병명을 알고 인정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첫걸음이 나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시작입니다. 그래서 치료를 받으시라 하는 것이에요.  목자님 처방대로 약 드세요. 3년을 미루셨으면 이제 들으실 때 되셨습니다. 내일 당장 약 드십시오. 우리는 공동체 누구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제발 인정하고 약 드세요. 우리 안에서 변하시는 두 분을 보고 싶습니다. 두 분의 회개를 위한 목장이 되게 해주세요.  이걸 짧게 요약을 해서 나 하여튼 그대로 읽었어요. 그랬더니 드디어 그 남편 집사님께서 네 알겠습니다. 듣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시더라고요. 박수 내가 이거 안 썼으면 안 읽었을 건데 그 목자님이 우리들교회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변화되지 않으면 말씀이 안 들리니까 아마 떠날 거예요. 그런데 우리들교회 계신 분들은 다 변해요. 사건이 변하는 건 없어요. 내가 말씀 듣고 변해야 합니다. 모두들 말씀 안에서 변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어 가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저는 이 종들의 처방이 오늘 나아만을 살렸잖아요. 그런데 오늘 이 목장 식구 종들의 처방이 이런 목장 식구들만 있으면 소도 잡고 말도 잡을 것 같아요. 안 그래요? 정말 최고의 우리들교회 목장 그랬더니 또 이제 행복 강의로 유명한 하버드의 탈벤 샤흐르 교수님을 포럼에서 비대면으로 만났고 질의응답을 할 기회가 있었대요. 또 이분이 대단한 분이 우리들교회 부목자로 계시더만요. 그런데 행복의 핵심 요소는 돈에 좌우되지 않고 육체적 건강을 바탕으로 강한 유대관계가 이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런 관계는 육체적 건강까지 좋아지게 한다고 해요. 그런데 유명한 이렇게 유명한 강의를 들어보면 목사님 설교에 이미 다 나와 있는 내용이에요. 성경 말씀에 근거했기 때문에 더 논리적이고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이런 벌떼 목장이 최고의 명품인 것은 나아만에게 복음을 소개했던 어린 소녀들이 우리들교회는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이 벌대 목장이 명품 목장이고 해독 공동체인 줄 믿습니다.



    깨끗하게 되었더라. 세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14 15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돌아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 아나이다.’

     

    신앙고백도 하고 이제 나아만은 못 이기는 척하고 아람으로 가던 발걸음을 유턴에서 요단강 쪽으로 내려갑니다. 종들의 말을 들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순종합니다. 내 생각으로 할 때는 분노했는데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하니 내려가게 됩니다. 공동체가 너무 중요해요. 그래서 적용하도록 도와서 내려가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뭐든지 인정하는 게 너무 중요해요.

     

    그런데 실제로 실천하기는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7번 내려가서 몸을 씻는 게 처음 몇 번은 몸을 씻을 수도 있죠. 믿져야 본전인데 그런데 한두 번 했을 때는 한두 번 했을 때 자기 몸에 어떤 변화라도 일어나게 된다면은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순종할 것인데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그 말에 대한 진실성에 의심을 품고 다 하던 일을 이렇게 중단하게 되는 거죠. 좋은 강에 들어가서 고쳐준다면 그게 주술과 다름없죠. 말씀대로 순종하니까 치유가 일어난 것이죠. 그동안 수많은 제안과 편지와 대화가 오고 갔지만 실제 치료는 너무 간단하게 끝마쳐지는 거예요. 열왕기서 기자는 나아만이 어떻게 치료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도 그래야 돼요. 요단강 속에 물속에 자신을 완전히 잠글 정도로 내려갈 뿐 아니라 7번 반복했어요. 아울러 성경에서 물에 잠기는 것은 주로 죽음을 상징하지요. 죽어지는 이 순종, 십자가의 겸손을 의미하고 회개를 의미하고 그것이 이제 깨끗해지는 길인데요. 물속에 몸을 전부 집어넣는다는 조금 이제 원문 해석을 좀 할 테니까 골치 아파도 좀 들으세요. 


    물속에 몸을 전부 집어넣는다는 건 타발 동사인데요. 그런데 엘리사가 10절에 명령할 때는 라하트 동사를 썼어요. 그런데 이 타발은 라하츠보다 더 철저하게 몸을 씻었다는 거예요. 엘리사가 말한 것보다 더 훨씬 진실되게 씻었다는 거예요. 이 몸을 잠그다라는 의미의 타발은 성경에 16번밖에 사용되지 않는 단어인데 주로 제사의식이나 정결 의식을 행할 때 피나 물에 담그는 이제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예요. 7은 이제 완전수죠. 그러니까 레위기 14장에 이런 7이란 숫자가 나타나는데 오늘 14절 마지막에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오잖아요. 거기서 이제 물에 잠그니 회복되어 깨끗하다. 이 동사가 계속 계속적인 와우에 이 깨끗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타하르의 미완료형이 결합된 형태가 14절인데요. 

     

    해석을 하면 나병에 걸린 나아만의 그 흉측한 피부가 마치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깨끗하게 된 일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서서히 진행된 것이 아니라 요단강에 7번 몸을 잠근 직후에 바로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거에요. 우리가 여리고 생각하면 알죠 열세 바퀴 지날 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무너지는 거는 단번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타르 동사는 병의 치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나는데요. 레위기 14장 보면은 타르는 단지 이제 깨끗하다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이게 제사의식이나 정결 의식에서 사용되는 단어라고 했잖아요.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만큼 나아만은 진심으로 회개했다는 거예요. 7번을 이렇게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그러니까 단순히 나아만을 육적으로 치료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차별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거예요. 엘리사의 말에 순종한 결과 그 살이 어린아이처럼 되었다는 것은 나아만도  2절에 어린 소녀가 가졌던 믿음을 같이 갖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같은 회복을 체험한 후에 엘리사에게 되돌아오죠. 15절에. 돌아옴을 의미하는 이 슈브동산은 거의 영적인 회심을 수반하는 특징을 가졌어요. 그러니까 나아만은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두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 것이죠. 궁극적으로 나아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치료를 받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깨끗한 자는 살아난 자이고 살아난 자는 겸손한 자이고 겸손한 자는 남을 낫게 여기는 이것이 깨끗한 자입니다. 내가 고침받아서 남을 낫게 여겨야 되는 거예요. 살려야 되는 거예요.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나아만이 병만 고침 받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병 고침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되는 거예요.

     

    적용 질문이에요. 

    여러분은 병 낫기가 목적입니까?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이 목적입니까? 우리가 밑동 잘린 나무 같으면 이 후자가 너무나 목적이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먼 데를 내다봐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팔 전쟁도 끝나려면은 그 무슬림들이 잘 살아야 돼요. 그래서 경제 정책을 제공해야 돼요. 전쟁만 할 게 아니라 서구 열강은 이걸 이스라엘하고 의논해야 돼요. 7번 물에 잠기는 죽음에 이르는 순종은 세상에서도요 주인이나 주인의식을 가지면 하게 되지 않습니까? 어려워지면요 사장은 아무것도 물불 안 가리고 나가서 회사를 위해서 생명을 내놓지. 그러니까 이렇게 이제 그런 주인 그런데 우리가 예수 믿는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정권대사로서 주인 의식을 가지고 죽어지고 썩어지고 밀알이 되는 이 순종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광해군 때문에 반정을 일으킨 인조왕하고 광해군을 비교를 하면 광해군은 그 모든 실정을 뛰어넘는 실적이 있었다고 하죠. 그런데 그 때문에 개혁을 일으킨 인조 때는 이괄의 난 정매호란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이제 거덜이 났어요. 진짜 아이러니컬 합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지경에서 이제 계속 전쟁이 나니까 인조가 도망을 가니까 백성들이 도망가지 말라고 배를 숨겼대요.

     

    저는 이제 어렸을 때부터 이제 국어 시험 역사 시험 이렇게 보면은 이렇게 이제 왕들 외우는 거 있잖아요. 그래서 그때부터 너무 외웠어요. 태정태세문단세 이렇게 예성년중임명성광인효원숙경녀정순원고수 이러면서 왕들에 대해서 전공을 했는데 진짜 이 세상에 가장 3D 업종의 클라이막스는 왕인 것 같아 조선의 왕 혼자서 되고 별의별 것 다 혼자 하다가 다 일찍 죽잖아요. 누가 왕을 부럽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먹을 것 입을 것도 없는 지경에서 지금 이제 드디어 인조가 조선왕조에서 전무후무한 대국민 사과를 했어요. 뭐라고 썼냐 하면 외로운 성에서 포위당한 채 봄을 맞았답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은 천성인데 나는 지금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모두 북쪽 청나라로 떠나보냈다는 거예요. 인질로 잡아갔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말이죠 이 보통 굴욕을 당한 게 아니에요. 그런데 부하들이 신하들이 잘나가지고 청나라 황제가 왔는데 아무도 배려를 하지 않아. 감히 우리가 어떻게 저 오랑키한테 인사를 할 수가 있냐고. 이러니까 이제 신하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 거예요. 그런데 인조가 9번을 갖다가 절을 해가지고 조선을 침략하지 않기로 그걸 받아냈잖아요. 그죠? 이제 정말 이걸 좀 아셔야 돼요. 돌아보건데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화를 끼쳤다. 군사들은 전쟁의 원혼이 되게 했고 죄 없는 백성들은 모두 포로가 되게 하여 아비는 자식을 보호하지 못하고 지아비는 지어미를 보호하지 못하게 하여 가슴을 치고 하늘에 호소하게 하였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 이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머금고 오장에 애 있는 듯하여 뜬눈으로 밤을 세운다. 

     

    이렇게 스스로를 낮추고 나의 죄를 운운하면서 백성들에게 머리를 숙인 왕은요 없었어요. 왕으로서 이렇게 사과를 한다는 것은 그 당시 왕으로서는 죽음을 달라 죽음을 달라. 저 오랑케한테 그래서 진짜 유교가 사과 하나 하는 걸 그렇게 못하는 거 우리만 잘나면 남이 알아주나요? 바로 그전에 있었던 선조 때 임진왜란 때도 선조가 도망가면서 사과하지 않았어. 그런데 인조가 얼마나 낮아졌으면 이런 사과를 했을까요? 우리 교회에서 쓰는 사과의 언어를 썼네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목장에서 사과하고 집에서 사과를 하면 자손 대대로 이렇게 남겨질 줄 믿습니다. 사과를 그렇게 못해요 다들 미안하다 고맙다 사과 이거 못합니다.

     

    이런 인조도 그분이 또 믿음으로 했겠어요 권력 앞에서는 예외가 없어서 청나라에 보냈던 아들 소현세자가 돌아와서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나라를 이제 좀 바꿔보려고 했더니 아들을 견제해가지고 독살했다는 그런 설이 있죠. 여러분 이렇게 권력 앞에서는 누구도 믿음의 대상이 아니에요. 사람을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고 늘 내 욕심을 생각하고 나 자신에게 속지 말라는 거예요. 끊임없이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으로 분별해야지 깨끗해지는 비결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이렇게 지금 온 나라가 힘든데 정말 이런 위정자가 한 분 나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 맺어요. 깨끗하게 되었더라는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거만한 내 생각,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내 생각, 나보다 잘난 사람이 없어요. 그 내 생각을 버려야 돼요. 그러려면 그건 여러분들이 못 버려요. 들리든 안 들리던 벌떼 공동체의 처방을 들어야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힘든 일이 있는데 이 목장처럼 여러분들에게 안내를 잘해줄 광해고 뭐고 그런 목장이 있었으면 정치 그렇게 안 했을 거예요.  말할 사람이 없어. 다 간신들밖에 없으니까. 다 특별 대접만 해주고 있으니까 되겠어요? 그런데 목장에서는 이렇게 바른 소리를 해주잖아요.이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벌떼 공동체의 처방을 듣는 거예요. 그리고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나만이 군대 장군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거 이게 깨끗하게 되는 비결인 줄 믿습니다. 

     


    출처: 2023년 10월 15일 우리들교회 주일설교 녹취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