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사도행전 27장 1절~8절 - 성령의 항해
    주일설교 요약 2022. 10. 30. 09:52

    성령의 항해

    사도행전 271~8

    김양재 목사

     

    지난주 이 시대의 지성이신 강영안 철학 교수님 설교에 이제 많은 은혜를 받았죠. 부활이 nothing이라는 이 교수님의 말과는 달리 전도자가 말하는 허무함이 nothing이 아니라 부활이라고 말씀을 해주셨어요. 가을에는 뭐죠 전어가 아니라 전도서입니다. 그래서 다들 전도서 큐티가 쉬워졌죠. 허무와 기쁨의 양날개 가운데서 몸통이 여호와를 경외함이라고 했어요. 결론부터 오늘 나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그 시대의 최고의 지성 세네카를 이용해서 인용해서 설교를 했었는데요. 그 세네카가 이렇게 말했어요. 인생은 험난한 항해다. 그럼 우리는 항해를 하든지 표류 하든지 둘 중에 하나겠죠. 근데 험난한 항해를 했는데 그냥 나는 살았다. 생존한 것으로 끝난다면 그 험난한 인생이 아깝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항해를 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선장은 누구입니까 내가 인생에 선장이 되어 항해를 합니까 아니면 환란이 주제가 되고 성경이 교과서가 되고 또 이제 성령이 스승이 되어서 성령의 항해를 하고 있나요. 바울이 긴 재판 시간을 끝내고 드디어 항해를 떠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이 떠나는 성령의 항해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첫 번째로 성령의 항해는 작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정되는 것입니다. 1절에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됨에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이 작정됨에는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예요. 로마로 향하는 이 배는 바울이 결정하고 작정한 배가 아니죠.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다메섹을 갈 때는 바울 자신이 결정하고 계획하고 갔어요. 그러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만난 후로는 내가 계획하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한 것에 이제 끌려간다는 뜻이에요.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은 어느 자리까지 내려와 있죠. 그는 지금 이 배에 선장이 아니라 죄수로 타고 있어요.

     

    그렇게 내가 얼마나 뼛속까지 죄인인지 아는 사람만이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고 내 인생이라는 배의 선장이 아니라 이렇게 죄인으로 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해외 단기 선교 주보 광고가 나왔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첫 해외 선교예요.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른 점이 있는데 뭘까요? 바로 영문 큐티인을 들고 간다는 거예요. 영어권인 필리핀 네팔 탄자니아 영국 등을 방문하여 영문 큐티인으로 간증도 하고 함께 큐티도 하고 또 그래서 그 영문 큐티인을 선교 현장에 보급한다는 것이 크게 달라진 점이에요. 그런데 이 영문 큐티인도 뭔가 거창한 세계 선교를 위해서 작정하고 계획해서 나온 게 아니에요. 오늘 이 본문이 제가 작년 8월에 미국에 출발할 때 바로 그날 큐티 본문이었어요. ‘이달리야로로 가기로 작정됨에그때 최고의 나라가 이달리야였잖아요. 로마였잖아요. 그리고 주일 설교는 성령의 경영인데 바로 그 단어가 작정이라는 단어였어요. 그리고 미국에서 처음으로 방문한 베델교회 집회 슬로건이 바로 아이엠 푸티어였어요. 성령께서 풋하셔서 떠미셔서 우리가 여기 서 있다. 이런 뜻이죠. 그렇게 계획에도 없던 미국에서. 그저 이 배에 타고 있는 죄수로 제가 얼마나 죄인이었는지 간증 설교를 하는, 정말 그 자리에서 우리 미국의 베델교회 김한요 담임 목사님께서 이제 이 큐티인을 온 교회가 바로 쓰겠다고 작정을 하셨고 그리고 베델교회의 도움으로 영어 큐티인이 나오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번에 이 칼빈 대학교 교수님이신 강영안 교수님도 영어 큐티인을 보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번역이 너무 훌륭하게 잘 돼 있더라고 교수님이 검증을 하셨네요. 돌아보면 강에서 바다로 흐르게 하시는 것은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작정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죠. 여러분들의 간증이 이제 영어로 번역되어 곳곳에 흐르는데 자칭 우리 스스로 죄수들의 간증이 얼마나 많은 가정을 살리는지 모릅니다. 이 배에는 지금 스스로 죄인이 있고 죄를 모르는 죄인이 있잖아요. 여러분들 다 스스로 죄인 맞죠? 저 역시 제가 인생을 작정했을 때는 온 힘을 다하고 노력해가지고 또 인류 대학을 갔고 또 그렇게 해서 또 장로님 댁 또 부잣집 며느리가 되었는데 저의 노력의 결과가 무엇인지 여러분들 다들 아시잖아요. 제가 갇혀 있고 매 맞고 걸레질 하면서 드디어 저희 죄를 보고 주님을 만나 엎드려지니까 그 간증으로 주님이 저를 아이엠 푸티어 하기 시작하니 남편이 구원을 받게 되고 계획에 하나도 없던 강남 한복판에 교회를 세우시고 또 판교에 교회를 세우시고 피아노만 치던 제가 이렇게 목회를 하게 될 줄은 거기다가 이슬비로 시작한 큐티인이 이렇게 영문판까지 나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저 우리는 늘 배에 탄 죄수로 그저 수동태로 이렇게 죄인 됨을 간증하고 죄수로 이 배에 묶여가니까 사명으로 로마로 그분이 작정하셔서 이끌어 가시는 것이죠. 이것이 성령의 항해입니다. 근데 중요한 점이 있어요. 그저 수동태로 끌려가기만 하면 되나요. 내가 할 일도 있다는 거예요. 성령의 항해의 핵심은 끌려가지만 누가 앞장 서나 말씀에 앞장선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2311절에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이 말씀이 바울을 로마로 이끌었어요. 그런데 이미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때 로마서를 기록해서 이미 말씀을 로마에 먼저 보냈습니다. 로마로 가기 전에 이미 로마서가 로마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바울도 이런 죄수의 신분으로 재판받으며 로마로 갈 줄은 몰랐겠죠.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리라 그러니까 하루하루 주신 말씀 앞에서 내 죄를 고백하고 전하며 늘 증언한 것 같이 또 공동체에 물으며 가는 바로 이것이 결국은 로마에 가서도 증언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제가 이제 가가지고 미국에서 전하는 게 바로 그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집에서 날마다 한 사람 한 사람 증언했더니 어느 날 이렇게 미국에서 딱 증언을 하게 되는 것, 그러니까 날마다 목장에서 증언하는 사람은 어디 가서도 하게 되고 다 강에서 바다로 나가게 될 줄 믿어요. 로마로 가야 하리라가 지금 바울의 주제입니다. 바울이 지금 이미 보내놓은 로마서가 있듯이 바울의 이런 심정으로 쓴 로마서가 어떤 내용인지 여러분 너무 이 로마서 내용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지금 이렇게 재판받고 이게 난리 치면서 로마 가야 되는데 이미 로마인이 읽어야 될 로마서를 보내놨다는 거예요. 가을에 읽는 전도서가 끝나면 겨울이 오기 전에 읽는 로마서를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로마서는 제 큐티 강해집이에요. 어떤 목사님께서 로마서가 정말 이렇게 딱딱하고 너무 좀 어려운데 진짜 복음을 너무 쉽게 이해하도록 쓰셨다는 피드백을 제가 들었습니다. 그렇죠 겨울이 오기 전에 읽어보세요. 그러니까 항상 작정되어지는 인생 그러니까 이제 한 부목자님이 항상 누가 전하면 거기까지 그렇게 입장이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신 거예요. 그랬더니 누가 말하기만 하면 미쳤구나 했는데 이제 자기 보고 미쳤다. 이 얘기를 한다는 거예요. 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그 아이의 뇌종양 사건을 당해서 세상에 아무것도 못하는 게 의사라는 걸 깨달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참되고 온전한 말 하기는 하는데 간증할 때 늘 제가 의사로서 교만했는데 의사로서 어찌할 수 없는 자녀의 병을 주셔서 예수님을 만났다 얘기를 하신다는 거예요. 또 환자들한테 간증할 때는 나도 수면제 먹고 우울증 약 먹는다고 큐티 책을 줄 때 꼭 또 그 얘기를 한 대요. 저도 힘들 때 도움 받고 우울증 아닌 줄 알았는데 약 먹고 도움 받았다. 이 소리도 하신대요 진료실에서 환자에게 그런 얘기하는 걸 보면 나의 약함을 그렇게 숨기는 것 같지는 않다고 했어요. 그러면 환자들이 놀라기는 하더라고요. 제가 잘해서 하는 게 아니라 처음에 교회 왔을 때 제대로 밟혀가지고 교육이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밟히는 게 축복이에요. 한 번 밟혔다고 이렇게 교회를 떠나고 이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주일날 예배 어떻게 밟혔냐 주일날 예배 안 드리고 학회 가면 차 사고가 나고 조금만 흐트러지려고 하면 몸을 치시고 앓아눕고 그래서 엄하게 인도하셔서 저절로 무서운 게 있습니다. 작정만 하다가 작정되는 인생을 사시는 것 같습니다.

     

    [적용질문]

    1. 여러분은 인생을 끌고 가나요? 끌려 가나요?

    2. 말씀이 앞장 서나요? 내 의지가 끌고 가나요? 로마서를 읽으셨나요?

    성령의 항해에는 두 번째로 함께 배에 탄 우리가 있습니다. 1, 2절이에요.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윤리우한 사람에게 맡기니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우리 인생의 항해에 우리가 죄수의 신분으로 가지만 홀로 가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로마로 가는 길에 함께하는 우리가 있어요. 누가가 우리라고 쓴 표현이 세 번 나오는데요. 마게도냐 환상을 볼 때 1610절에 나왔어요. 2118절에 모든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가 또 나왔어요. 그리고 오늘 27장 이렇게 12절에 오늘 로마로 출발을 할 때 또 이제 우리가 나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은 내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중요한 일들이 시작될 때 보니까 항상 내 옆에 우리가 우리가 있네요. 지금 바울 곁에 누가 있죠. 바울의 건강과 힘이 되어주는 의사 누가 이 사람은 여러분 누가 복음을 누가 썼죠. 사도행전을 누가 썼죠. 누가 썼죠. 누가가 썼죠. 그래서 누가 행전을 누가가 썼다고 이렇게 외우시면 됩니다. 정말 그 누가는 의사요 문필가요 탁월한 역사 학자라고 생각이 돼요. 그리고 이제 누가와 오늘 2절에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가 있는데요. 아리스다고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보면 그 이름의 뜻이 최고의 통치자인데요. 아마도 유력한 집안 출신 같아요. 근데 이런 아리스다고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성경에 다섯 번이 나오는데요. 처음으로 사도행전 1929절에 아리스다고가 바울 대신 붙들려 갔어요. 그때 바울이 피했죠. 막 다 잡으러 오니까 그래서 아마 죽기 직전까지 매를 맞지 않았을까 싶어요. 204절에 예루살렘에 갈 때 가장 중요한 일인 헌금을 맡은 원정대에도 함께 했어요. 또 오늘 272절에 바울이 죄수로 잡혀갈 때 이 죄수의 신분으로 바울과 함께 있었어요. 골로새서 410절에도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기도 했습니다. 빌레몬서 1장에 보면 나의 동역자 나와 함께 갇힌 자라고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바로 이런 우리가 바울 옆에 딱 있어요. 그런데 우리의 친구도 있더라고요. 3절에 보니까 이튿날 시도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기를 허락하더니 이 바울의 친구들은 당연히 성도들이겠죠. 근데 그들을 이렇게 친구들이라고 쓴 게 참 특별하네요. 문자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 애인이란 뜻인 만큼 아주 그냥 끈끈한 우정을 담고 있어요. 그래서 사도행전 1931절에 그 바울이 에베소 소동을 당할 때 아리스다고는 이제 계속 대신 잡혀갔잖아요. 그런데 아시아 관리 중 바울의 친구 된 사람들이 그를 걱정해서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가 있으면 친구가 있어요. 2423절에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감금되었을 때 벨릭스 총독이 바울의 친구들이 바울을 돌보는 걸 금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기억 나시죠? 또 요한 삼서 115절에 보면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마지막 인사를 이렇게 했죠. 여러 친구가 내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그러니까 지체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하는 관계를 강조할 때 이렇게 친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바울을 대접한 이 시돈의 성도들이 바울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가 되었는지 보여주는데요. 어이 저 시돈은요 그 악명 높은 아합의 부인 이세벨의 고향이잖아요. 몇 백 년이 지나서 이렇게 바울의 친구 성도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놀랍지 않아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부모가 이상하다고 그래서 자녀가 안 되는 그런 거 없다는 거예요. 다 될 수 있다는 거죠. 근데 이 친구들이 대접이라는 단어가 아주 여기 딱 성경에 한 번 쓰였는데요. 그거 아주 집중해서 돌보는 걸 말해요.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를 로마로 가는 바울을 지극 정성으로 모든 정성을 다해서 대접하고 응원하고 힘을 불어넣었어요. 그러니까 막 좋은 잠자리에 귀한 보양식에 그냥 목욕할 물에 깨끗한 옷에 항해 중에 먹을 식량도 정성껏 준비해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대접을 바울에게 대접을 한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거를 발견했는데요. 이 사람들의 이름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근데 바울의 친구로 기록이 되었어요. 누군지 소개되지 않았지만은 그 특별한 섬김을 특별한 단어로 한 번 밖에 나오지 않는 이 단어로 성경에 기록해 주신 줄 믿습니다. 바울이 받은 위로와 격려가 정말 컸기 때문에 이들이 이름도 빛도 없이 섬겼지만은 이 생색 없는 대접 때문에 바울이 로마까지 갈 힘을 얻었어요. 이렇게 대접해 주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로마까지 성령의 항해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또 연약하잖아요. 그렇죠? 다 또 그렇게 힘들어요. 이순신이 너무 대단한 사람이지만은 그 일기를 보면은 그냥 그 난중일기 이순신 일기가 유명하잖아요. 그럼 거기다 그렇게 원균을 욕해놨대요 사람들은 다 이렇게 힘들어요. 그렇게 날마다 원균 그놈이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사람 믿음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런 것이 이순신을 굉장히 또 이순신 장군답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으로는 너무 힘들고 외롭고 어려운 사명의 길을 가는 게 성도의 삶이에요. 이순신도 너무나 그냥 감옥에 갇혀서 고문을 받았잖아요. 나라를 위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알아듣지를 못해요. 힘든 배우자와 이혼을 하는 게 가정을 지키는 것보다 사실 훨씬 쉽죠. 낳아서 키울 형편이 안 되는 것 같으면 낙태를 하는 게 생명을 지켜 낳는 것보다 이익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역자는 돈도 그렇게 없는데 왜 엄마가 그렇게 아이를 많이 낳았냐 그랬더니 낙태할 돈이 없어서 그렇게 나왔다고 그러시더라고 얼마나 다행이에요. 돈이 없었던 게. 그런데 세상은 이혼과 낙태를 지금 부추겨요. 우리가 수요일에 본 영화 언플랜드는 실화잖아요. 요즘 우리나라가 인권을 주장하면서 정말 이혼과 낙태를 얼마나 권합니까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이혼과 낙태를 권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참 외롭고 힘든 길이지만 행복이 아닌 거룩을 목적으로 성령의 항해를 하면 내가 잘 될 때도 못 될 때도 고난을 당할 때도 심지어 내가 죄수의 신분이 되었을 때도 나와 함께 말씀을 보는 우리와 이렇게 특별한 대접으로 응원해 줄 친구가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교회에 오니까 결혼도 잘 되고 아이도 많이 낳고 그러잖아요. 어저께는 우리 사역자가 마흔두 살인데 두 살이나 연상인 44살 자매하고 결혼을 했지 뭡니까 그런데 요새 다 그렇게 결혼하지 않을 자유, 아이를 낳지 않을 자유, 낙태할 자유 이런 걸 자유라 그러는 게 아니거든요. 근데 예수가 없으면 설명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런 친구들이 어디있겠어요. 정말 그 또 한 집사님은 시설에서 자랐는데 너무 멋져요. 그런데 이 친정이 없다는 걸로 정말 시댁에서 무시하고 이런다고 그러는데 여러분 우리들 교회 나와서 목장에 왔는데 이런 친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 친척들도 요새 다 원수처럼 안 만나는 거 아시죠. 정말 좋은 친정이 바로 교회와 목장 식구들이 이런 우리와 친구들이 되어 주는 줄 믿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한 우리에는 나에게 세상에서 호의를 베푸는 이 높은 직책에 백부장 율리오도 포함됩니다. 오늘 율리오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배를 탈 수가 있어요. 이제 쭉 오는데 보면 세상 친구도 그렇게 이렇게 다 절교하고 살 수는 없는 거예요. 주의 일을 위해서 율리오도 우리 아이에게 그렇게 이제 허락해 주시는 줄 믿어요. 니고데모처럼 밤에 오긴 했어도 아리마데 사람 요셉처럼 세상에서 도움을 주는 친절한 율리오가 또 우리에게 있어요. 그리고 이제 이 우리에 포함되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누구죠? 그러니까 큐티를 좀 열심히 하시기를 바래요. 일 절에 지금 다 언급한 사람 왜 언급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잖아요. 네 바로 죄수들이죠. 이들은 역사가에 따르면 로마인은 아니고 로마인을 사자 밥이 되게 할 수는 없다는 거죠. 각 곳의 식민지에서 차출한 사형수로 바로 죽음이 눈앞에 있는 자들이었다는 거예요. 곧 있으면 로마 사람들에게 유흥거리가 되고 사자밥이 되어 죽을 이 죄수들은 살아갈 수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바울도 다른 이들도 바울도 다른 죄수 다른 죄수라 그랬잖아요. 다른 죄수인데 바울은 죄목이 없는 죄수고 이 사람들은 죄목이 있는 죄수고 여기는 바울은 스스로 죄수 된 사람이고, 이들은 억울한 죄수죠. 그렇죠 끝까지 그냥 주님을 못 만난 사람들은 그냥 억울해요. 모든 게 죽을 때까지 억울해요. 그래서 이 원수를 갚아야 돼요 스스로 죄수하고 억울한 죄수가 같이 만났습니다. 사실 그 사람들은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사실 내 인생에 이 배에 함께 오른 우리 중에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이 죄수들인 거예요. 인생에 아무 소망이 없는 이 항해 끝에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결국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웃음거리로 사자 밥이 되어야 하는 그들에게 우리가 우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내 옆에 같이 배에 태우신 것이에요. 이들 역시 예수를 만나 우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에게 누가도 아리스다고도, 친구들도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율리오도 함께 해주신 이유는 그 죄수들을 섬기라고, 섬기라고 이렇게 우리를 허락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좋은 우리 친구들은 몇 명 안 되고 죄수들이 많아요. 죄수들이 내 옆에 이미 바울은 로마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나와 함께 배에 올라탄 내 옆에 죄수들에게는 복음이 닿지를 않아요 너무 가까운 죄수들에게 복음이 닿지를 않아요. 그러나 그곳에 복음을 전하는 이것이 바로 로마로 항해하는 성령의 항해인 줄 믿습니다. 내 옆에 죄수들을 다 제쳐놓고 어디 딴 로마로 가겠다고 하시면 안 되는 거죠. 요즘과 요즘 바울과 이 다른 죄인 억울한 죄인들이 너무 많아요.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 손 붙잡고 돌아오시기만 하세요.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자격과 공로가 필요가 없어요. 내가 죄인입니다. 돌아오시기만 하면 주님께서 손을 붙잡아주실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

    우리, 친구, 백부장, 죄수 중에 나에게 있는 것은 무엇이고 없는 것은 무엇인지 찾아보세요.

    그거를 잘 한번 나눠보세요. 우리와 친구와 백부장은 이 죄수들을 위해 있는 거예요. 나는 우리끼리 너무 그냥 행복해서 믿는 사람들 끼리끼리 놀고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며 어찌 아름다운가 하면서 아로니 금송아지 이렇게 만들어 놓고 형제들과 섬겼어요. 모세가 내려와서 돌판 깨뜨렸죠. 그러니까 목장이 힘든 사람들 들어오면은 그렇게 여러분들이 난 저 사람만 없으면 좋겠어 이런 얘기하시면은 성령의 항해가 안 되는 거죠.

     

    성령의 항해 세 번째는 역풍으로 참 목적지를 찾을 수가 있는 거예요. 이제 4절부터 6절입니다.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시에 이르러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이제 지도를 좀 보여줍니다. 시돈에서 출발을 지금 하잖아요. 옆에 보면 길리기아도 있고 그 다음에 밤빌리아도 있어요. 고향이고 여기 1차 전도 여행지고 그리고 이제 너무 맞바람이 세서 저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이제 아시아 저 위로 가서 에베소 위에 아드라뭇데노가 있거든요. 저기 에베소 위에 거기까지가 지금 목적지인데 사실은 지금 이제 가이사랴에서 서쪽으로 가서 로마로 가는 것은 서진을 해야 되거든요. 지중해를 통해서 완전히 직행을 해야 되는데 지금 아시아 위로 이렇게 그냥 꼬불꼬불 해안선을 타고 지금 아드라뭇데노 배를 탄 거예요. 저기 아드라뭇데노 보이나요. 에베소 위에. 지금 거기까지 가는 배를 탄 거예요. 근데 이제 역풍이 불어서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미항까지 갔다가 오늘의 이제 이렇게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항해를 하며 타고 있는 배는 그 2절에 그 이름이 나오는데 아드라뭇데노 배예요. 아드라뭇데노는 베 이름이 아니라 아까 에베소 위쪽에 있는 항구도시 이름이에요.지금 이 배는 가이사랴에서 출발해서 목적지가 아드라뭇데노라는 도시까지 가는 배인데 아시아 각 해안 지역 항구 항구마다 들리는 그냥 비 내리는 호남선 완행 열차에 몸을 실은 거예요. 그냥 곳곳에 이렇게 이제 무궁화호라고 하나 할까요. 지나가는 지역들이 나오는데 먼저 이렇게 시돈을 보면서 이 시도에 내가 전도를 했구나. 이세벨의 고향 그리고 이제 구브로 해안을 지금 지나가는데 그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이고요. 밤빌리아는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첫 발을 디딘 그 버가 비시디아 안디오 이제 루스드라 더비 이런 데 있었잖아요. 그렇죠 그 지역이에요. 또 구브로도 마찬가지고요 구브로는 잊을 수 없는 이 바나바 때문에 때마다 바라봅니다. 구브로를 바라보면서 설교 기억나시죠. 또 지금 구브로를 의지하여 이것이 아마 마지막 여행이 되는 것을 알았을까요? 근데 이제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말씀 따라 가면은 그게 이제 뭐 마지막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추억의 장소들이에요. 그러니까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이니까 바울이 길리기아를 지나가는 예수님 믿기 전의 삶과 주님 만난 이후의 삶 그의 첫 전도 여행도 다 회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제 아드라뭇데노 종점에 이제 그 위에까지 가서 다다르면은 또 반대로 지역 항구들을 다시 들리면서 운행을 하는 거예요. 거기 갔다가 또 이렇게 내려오게 되는 거예요. 그 배를 타면 그래서 오르락내리락 반복한다는 것인데 그런데 이 아드라뭇데노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요. 죽음의 공회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추억 속에 젖어서 내 기억 속에 갇혀 반복되는 이것들이 죽음의 공회라는 거예요. 전도자의 말처럼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요 헛되니 바람을 잡는 것 같은 이제 반복이라고 계속되는데 나는 그냥 거기 좋은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고 막 아픔도 있고 이러는데 우린 추억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어떤 목자님이 칠 년간 짝사랑했던 여인을 아이 러브 스쿨에서 만났대요. 그랬더니 그때는 내가 짝사랑을 했는데 지금은 그 여자가 나를 좋아하게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막상 사귀었는데 사귀고 나니까 별게 아니더라는 거예요. 왜냐면 제 꿈을 이루었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허무하더라고요 이래요. 꿈을 이루면 다 허무한가 봐요 그러니까 바람 잡는 것 같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뭐 첫사랑 어쩌고저쩌고 할 때 가봐 그냥 그렇게 두세요. 조금 이따 허무해서 돌아올 거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보지 않았을 때는 굉장한 뭐가 있는 것 같지만은... 그래서 이 성령의 완행 열차에서 내려야 되는 거예요. 아니 성령의 항해를 하려면은 내 과거의 기억과 작별을 해야 되는데 과거에는 상처 아픔 영광 뭐 슬픔 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바울이 말을 못하는 것이 영광도 있었지만 자기가 얼마나 사람들을 잔멸하고 정말 죽이는 데 가담하라고 그랬어요. 그럼 그 친구들 친척들이 바울만 보면 야 이 살인자야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자기가 예수 믿었지만은 그런 것만 생각하면 아픔이 있는 거예요.

    또 같이 예수를 같은 성도가 같이 믿었는데도 너는 맨날 몇월 며칠 누구 죽였잖아. 너 욕했잖아. 너 돌 던졌죠. 이거를 예수가 없으면 늘 그 과거에 상처와 미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거야. 내려와야 되는데 지금 이제 어제도 우리 초원님 평원님이 설교를 했지만 날마다 몇월 며칠 몇 시에 학교 안 왔잖아 안 데리러 왔잖아 이거 맨날 이제 부르짖고 반복하죠. 아이들이 그렇죠. 그래서 그냥 공감하시는 분들이 많은지 엄청 리플 많이 달았더라고요. 다 같이 맞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제가 바울을 생각해 보니까 그냥 곳곳에서 바울 보고 니가 우리 누구 죽였잖아 이랬을 것 같아요. 이 사람 죄인이야 그야 내 말을 못해 바울이 겸손한 게 아니고 환경이 겸손한 거예요. 죄 없는 사람들은 그걸 이해를 못할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제 스스로 죄수이기 때문에 누가 뭐라 그럴 때마다 이제 그 모든 것에서 내려야 돼 그 완행 열차에서 내려야 돼요. 입에 계속 머물러 있다 하는 그 죽음의 공회가 종착점인 거예요. 아드라뭇데노 죽음의 공회로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또 내릴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그랬잖아요. 작정되어지니까. 오늘 4절에 떠나다가 맞바람이 부니 이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했다고 그러잖아요. 맞바람은 서로 바람 피는 게 아니고 역풍 저 바람밖에 모르죠. 여러분은 역풍이 부니까 이제 가다가 구브로 해안을 의지해서 올라가다가 구브로 해안을 의지해서 무라라는 항구에 머물게 되고 그리고 6절에 알렉산드리아행 배를 갈아탄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내 인생에 맞바람 지금 역풍이 불어야 내가 타고 있는 이 완행 열차에서 내릴 수 있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근데 배에서 내린다는 것은 그것을 그냥 덮어놓고 잊어버린다는 것이 아니죠. 내가 거쳐 왔던 모든 세월들이 나를 로마로 보내기 위한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한, 그리고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간들이었구나 하며 이 모든 시간들이 구속사로 해석되어져야만 내릴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 배에서 내려 내 삶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때 내 삶이 객관적으로 보이게 되고 그때 내 과거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얽히고 설킨 감정들과 작별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바울이 생각할 때 그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둘이 서로 바울을 안 믿잖아요. 이쪽에서는 잔멸했고 저쪽에서는 배신자잖아요. 그러니까 어디를 가도 지금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렇게 잡아죽이고자 하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믿음이 없으니까 네가 우리 배반했잖아 네가 우리 죽였잖아 이러니까 바울이 겸손한 게 아니고 정말 그냥 정말 죄수에요. 그만큼 자기 죄에 대해서 난 예수 믿었는데 하나님이 다 덮어주셨잖아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덮어주셨어도 당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난리를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남편이 바람 폈는데 부인이 난리 친다 죽을 때까지 감당해야지 한 번 했으면 용서해줘야 되잖아 그딴 얘기는 자기가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쪽에서 용서를 해줘야지 이거 잘못했는데 이제 내 죄를 깨닫게 되면은 죽을 때까지 내 죄를 지고 간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데 아니 예수 믿으면 되지 왜 과거를 맨날 들먹거리냐고. 근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는 전공이 과거를 들먹거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이혼하고 못 산다 이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과거 들먹거리는 게 전공이기 때문에 또 시작됐구나 그러면 내 죄를 또 봐야 되는구나. 그렇게 그게 작별인 거예요. 지금 온 교회가 양육 중이에요. 내 삶을 말씀 앞에 내어놓아서 죽음의 공회로 달려가고 있는 챗바퀴처럼 도는 과거의 아픔에서 이제 내려서 새로운 배에 올라타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내가 타고 있는 이 과거의 배에서 내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역풍을 허락하신다는 거예요. 무라에서. 그러니까 거기에서 또 내가 못하니까 율리오를 허락해서 알렉산드리아행 배를 만나서 다시 오르게 하잖아요. 내가 작정되어서 가는 게 없어 그냥 내 죄만 보고 배에 타고 있으면 돼요. 그렇죠.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지금 이제 에베소 위까지 가는 게 아드라뭇데노 종점인데 거기까지 안 가고 지금 이제 구브로 해안을 다시 의지하려고 이쪽으로 턴했으니까 그렇게 별로 이렇게 시간의 손해가 없이 정확한 지점에서 받고 타게 하셨다는 거예요. 끝까지 북쪽으로 안 가고 이 배는 알렉산드리아 배는 중간에 여기저기 서는 게 아니라 지중해를 가로질러서 로마로 지금 서진하는 직행하는 배인 거예요. 이 목적지가 아드라뭇데노가 아니고 로마라는 거예요.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해서 로마로 가는데 무려 276명이나 태우고 수많은 곡식을 실을 수 있는 대형 선박인 거예요. 그러니까 목적지가 이제 완전히 사명 로마로 가는 배에 올라탔다면은 이제 정말 하나님께서 고생 끝 행복 시작해야 되는데 여전히 바람이 거세고 배가 더디 가는 거예요. 78절입니다. ‘배가 더디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그래서 그레데를 돌으면은 거기 살모네가 있고 지금 이제 니도 그쪽 니도 맞은 편에 이르러서 그다음에 이제 미항까지 나오는 거예요. 구브로 섬 거기 안에 그걸 이제 다시 좀 찾아보세요. 배를 옮겨 탔는데 여전히 지금 이제 힘든 거예요. 풍세가 허락하질 않아요. 그러니까 죽음의 공회에서 내려서 사명의 배를 탔는데 내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 거룩으로 목적지가 달라졌는데 여전히 결혼이 안 되고 취업도 안 되고 먹고 살 것도 안 되고 여전히 아프고 그냥 힘이 들어요. 여전히 아픈 사람은 아프고 더디 가는 것 같고 돌아보면 제 자리고 돌아보면 제 자리고 그래요. 배가 더디 갔다는 말은요 풍랑이 너무 거세어서 지그재그로 갔다는 뜻이에요. 지그재그로 갔다는 뜻이에요. 근데 지그재그로 갔지만 조금씩, 조금씩 로마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목적지가 사실 로마와 다른 북쪽 방향이었잖아요. 그 위에 근데 지금 이 서쪽 목적지가 이제 바르게 설정이 되니까 아무리 거세고 힘들어도 지금 한 발자국씩 가고 있는 거예요. 성도 인생이 이래요. 늘 제자리인 것 같지만은 우리가 제대로 목적지가 바른 지금 이제 우리들 호에 타고 있으면은 나선형 계단처럼 내가 볼 때는 늘 제자리 같은데 남이 보면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거예요.

    오늘 제목 항해는 헬라어 아나곤데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그러니까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되니까 얼마나 간신히 갈 수 있는, 그러니까 성화되는 길 거룩한 길이 간신히 가는 거지 여러분 토끼하고 거북이하고 거북이가 간신히 가 근데 누가 이겼어요. 거북이 거북이를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근데 감사한 것은 내가 바람을 일으킬 필요도 노을 절 필요도 없고 그냥 가만히 타고 있으면은 그냥 목적지에 가는 거예요. 그 배에 알렉산드리아 배에 타는 게 중요한 거예요. 아드라뭇데노에서 내려서 그 배에서 내려서 이 타야 되는 거예요. 7절에도 간신히, 8절에도 간신히. 간신히. 정말 너무 예수 믿는 게 간신히. 간신히. 그래서 아니 예수 이렇게 믿는 게 힘들어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거예요. 이 결혼이 왜 이렇게 힘들어 아이 낳고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 근데 주목해서 봐야 될 말이 뭡니까 간신히가 아니라 간신히 이르렀다잖아요. 이르렀다를 봐야죠 거북이가 이긴다니까요. 토끼는 빨리 가다가 자잖아요. 글쎄 말이에요. 우리들 교회 목사님 중에 새벽 기도를 자다가 안 나오신 분이 처음으로 19년 만에 한 번 생겼어요. 그러니까 토끼가 자다가 잊어버렸어. 주여 그러니까 그 길이 힘들고 좁고 눈물 마를 날이 없을지라도 우리의 목적지만 바르게 잡는다면 이제 간신히 이를지라도 말씀을 붙들고 간다면 마침내 마침표를 찍게 되는 줄을 믿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회복불능의 상태에서 이제 거슬러 가야 되기 때문에 더디지만은 세상이 보기에는 아름답지 않죠. 오늘 우리 집사님 간증 장애 아이를 데리고 그렇지만은 그 아름답지 않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그 미항에 우리는 결국 이르게 될 줄 믿어요. 오늘 미항에 도착했잖아요. 그냥 타고만 있었더니 왜 미항이라고 거기 적었겠어요. 아름다울 미자 사람들은 그게 너무 저기 뭐야 조롱해서 미항이라고 썼다고 그래요 그런 게 어딨어요. 우리의 항해는 너무 남들이 보기에 아름답지 않아도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미항이라고 해주실 줄을 믿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떤 우리 청년이 상사가 너는 우리들교회에 와야 결혼하겠어 그랬더니 그 한마디에 왔대요 딱 와서 청년에 등록을 했는데 다들 양육을 어디까지 받으셨냐고 물어보니까 연애하려면 양육을 받아야 되겠네. 그래서 양육을 받았더니 신기하게 7~8주 만에 데이트 신청이 들어왔대요. 그렇지만 제가 딱 거절 했대요 면허증을 따려면 제대로 따야지 그래가지고 그 양육 다 받았더니 그 자매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래서 만나서 결혼하고 그다음에 이제 자기가 목장을 해서 집이 있어야 되는데 2순위라서 청약할 수가 없는데 목장에 물어보니까 경험삼아 한번 넣어보라 그랬더니 또 딱 당첨이 됐어요. 우리들호에 타기만 했더니 결혼도 하고 복음자리도 마련하고 그냥 되는 일만 있는 부목자님의 나눔을 새벽 기도에서 들었습니다. 이야말로 작정된 끌려가는 인생 아닌가 싶어요.

     

    [적용질문]
    우리들 교회로 데려다 준 역풍은 무엇입니까? 간신히 간신히 가고 있는 것은 지금 무엇이에요.? 아름다운 목적지 미양에 이를 줄을 믿습니까?

     

    정말 참 슬픈 얘기예요. 지금 어제 평원님 얘기도 참 슬프고요 하지만 슬프지만 우리는 아름다울 미자 미항에 도착할 줄 믿습니다. 우리들교회 오면은 한결같이 다 가정을 합치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진짜 이 말씀이 놀라운 거예요. 그래서 이분도 지금 아내하고 7~8년 별거 중인데 이분은 세종에 아내는 서울에 사시는데 연락이 왔다는 거예요. 물이 샌다고 아래층에서 이제 올라왔는데 남자가 들어오니까 문을 무서워서 열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남자가 막 화를 냈다. 그래가지고 이제 연락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기대를 한 거예요. 아내가 이제 도움을 요청했으니까 봐주기로 했다는 거예요. 근데 마침 그때가 아내의 생일이 되가지고 또 목자님한테 물어보니까 다 또 여전한 방식으로 하라 그래가지고 이제 가가지고 온수배관 수도를 잠그러 오라 그래서 아내 집으로 갔는데 아내는 저를 피해 집을 비워놓고 비번만 알려줬다는 거예요. 아내를 진짜 만나러 갔는데. 준비 준비해 간 선물을 놓고 나왔는데 다음 날 이제 생일에 집에 가기가 싫었지만 오후에 이게 아니지 하며 케이크가 꽃을 사서 집으로 찾아갔는데 또 문을 열어 문을 두드리니까 열어주었는데 집으로 들어오라고는 안 하고 현관에 서서 그냥 물 한 잔 얻어먹는 감사를 경험하게 되면서 그리고 이제 집 수리 시에 같이 이렇게 가서 봐줬지만 누수 부위를 못 찾고 배관 전체를 교체해야 된다고 해가지고 이제 빠른 시일 내에 이틀 만에 또 집에 가서 공사하는 걸 다 봐주기로 했다는 거예요. 지친 몸을 이끌고 이제 세종으로 겨우 내려왔는데 막 잠 들려고 하는 12시에 도대체 공사 감독을 어떻게 했기에 온 집안이 먼지투성이가 됐냐고 30분을 욕을 이제 하고 너무 분이 나서 방에서 그냥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는 거예요. 다음 날 새벽 가만가만 묵상하며 사과 문자를 보냈답니다. 그리고 진짜 보수 일자인 그날 새벽 기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까 여덟시 반인데 역시 아내는 집에 없고 저는 이제 업자들과 함께 아침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오후 4시가 되어 끝났는데 다 마치고 혼자서 꼬박 2시간을 청소하고 사진을 찍어서 아내에게 보내고 근처에서 혼자서 저녁을 사 먹고 다시 세종으로 내려왔대요. 어떻게 이렇게 밥도 안 먹이고 일을 시켜 그래 그날은 전화가 안 와서 고마웠는데 다음날 목장하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와서 온갖 먼지에 벽지가 다 찢어졌다. 수도꼭지도 엉뚱하게 달았다. 지금 목장 중이다. 목장 끝나고 수도꼭지 업자에게 연락은 했냐? 왜 대답이 없냐.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게 허락해 주신 십자가인데 잘 받아내고 받아내겠습니다. 생색 내지 않고 지금의 때를 잘 통과하겠습니다. 참으로 역풍 때문에 우리들 호에 우리들 입성하셔서 너무 감사한데요. 이제 너무 가는 길이 간신히, 간신히 지금 가는 것 같지만 결국 도착할 줄 믿습니다. 우리들교회 오기만 하면은 남자하고 여자하고 가정을 합쳐야 되겠구나. 근데 오지 않으면 말이 안 통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기까지 여러분들이 정말 그 죄수의 입장이 돼서 내 옆에 죄수를 잘 살피고 있으면 합쳐지게 할 줄 믿어요. 까다로운 남자들도 여기 오면 합치려고 그래요 근데 다 까다로울 만해서 까다로운데 여자들이 그냥 이렇게 나이 싼 이런 말만 좋아하니까 거기에 이제 혹해가지고 남편을 이제 다들 이제 안 합친다 그러고 그러니까 진짜가 뭔지를 몰라 참 목적지를 다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오기만 하면 하여튼 78년이 됐어도 다 가정을 합치려는 마음을 가지니까 왜 전도를 안 하겠어요. 전도를 해야 되는 거지 이게 성령의 항해 아니겠습니까? 말씀 맺어요. 성령의 항해는 그러니까 작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정되는 것이에요. 함께 배에 탄 우리가 있다고 그랬어요. 우리가 있고 친구가 있고 백부장 율리오가 있고 276명의 흉악한 죄수들이 있어요. 근데 그 죄수들이 우리의 목적이 돼야 되겠는데 우리는 우리하고 친구하고 율리오 밖에 모르잖아요. 그 죄수들 섬기라고 같이 배에 타게 했는데 그러니까 너무나 목적을 모르니까 역풍으로 그 참 목적지 사명을 알게 하려고 여러분들에게 역풍을 허락하는 줄 믿습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