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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도행전 15장 5절~11절 - 성령의 의논
    주일설교 요약 2022. 5. 24. 12:08

    본 문 : 사도행전 155~11

    제 목 : 성령의 의논

    설교자 : 김양재 목사님

     

              화성 연쇄살인 사건 진법이 잡혀 억울하게 잡혀 옥살이 한 사람이 무죄가 되었죠. 그때는 그들에게 우리나라의 범인이 필요해서 범인으로 몰아넣은 경찰이 대제사장 바리새인 같다. 예수님도 다들 의돈했지만 빌라도 법정에서 일방적으로 죄 없이 사형 당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의논이 행해진다. 그리고 수준이 높을수록 이렇게 억울한 의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더라.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억울한 것 풀어달라는 옳고 그름보다는 천하보다 귀한 성령의 의논을 해야 한다.

     

              첫째로 성령의 의논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이다(5) 지난주에 본대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 회중 앞에서 선교보고 했다. 차별받았던 베니게와 사마리아 교인들은 크게 기뻐했지만 바래새인들은 크게 비난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서 이방인도 할례 받고 모세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며 들어볼 것도 없다고 했다. 안디옥 교회에 내려온 유대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지 없이 내려 왔다는 것에 대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를 받고자 올라왔는데 모교회 회의에서 할례법 뿐 아니라 모세법도 지켜야 한다고 하니 혹을 하나 더 붙이게 되는 강경기류가 나타났다. ‘일어나가 원어에는 첫 단어로 나와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 유대인도 바리새파 중에서 유대인 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로 다 믿는 사람들인데 선교사들이 보고하는 놀라운 사역과 바리새파인들의 그럴듯한 주장이 충돌.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기가막혔겠나. 그래서 6절에 사도와 장로가 의논하기 위해 모임. 의논에도 죽이는 의논과 살리는 의논이 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처럼 예수님과 바울을 죽이려고 의논 할수도 있고 예루살렘교회 사도들과 장로들처럼 성도를 살리는 의논도 있다. 교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의논이 성령의 의논이다.

     

              이 땅에서 하늘의 언어를 쓰려니 하늘가족식구인 구원의 공동체에서 의논을 하지 않으면 인내를 못해서 또 다른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늘 의논을 해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그들은 이 문제를 자신들의 교회를 대표하는 영적지도자인 사도와 장로들에게 맡긴다. 이것은 예루살렘교회도 좋은 것 같다. 그들에게 물었다. 자기들이 도저히 결정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7절을 보면 많은 변론을 했다고 한다. 앞서 2절에서 안디옥 교회에서도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을 했다고 하는데 예루살렘에서도 바울파와 바리새파의 변론이 일어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다른가. 할례주의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그들의 어리석음과 편협함, 복음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낸다. 그들의 주장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들을 비난하는 분위기는 없었고 말을 제지하는 것도 없었고 인격적인 모욕을 주는 것도 없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충분히 말할 수 있었다. 변론은 자기말로 이기려는 말싸움이 아니다.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찾기 위해 상대와 진지하게 치열하게 의논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말싸움과 달리 승리가 목적인 것이 아닌 진리가 목적이다. 승리를 목적으로 싸우면 사람을 살릴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의 의논은 진리가 목적이므로 그 진리가 사람을 살린다. 목적이 진리에 있으니 서로 잘 물을 뿐 아니라 잘 듣는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서로 잘 들으려 했으니 많은 변론이 있었다.

     

    [적용질문]

    여러분은 사람을 살리는 의논을 합니까? 죽이는 의논을 합니까? 잘 듣습니까? 지시하고 명령합니까?

    어떻게 살리는 의논이 될 수 있는가.

     

              둘째, 성령의 의논을 하려면 형제 의식이 있어야 한다. (7)많은 변론이 끝난 후에 베드로가 비로소 일어나자기 말을 한다. 6세기에 기록된 사본에는 베드로가 성령으로 일어나 말하되라고 했는데 성령으로 일어나서 한 말은 베드로는 먼저 형제들아 라고 부른다. 이렇게 싸우는 자들이 어떻게 형제겠는가. 베드로는 바울도 바리새인도 주님이 피 값으로 죽어주신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서로에게 나쁜 감정도 생길 수 있고 갈등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함께 예수그리스도의 형제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워낙 믿음이 훌륭해서 형제들아 하냐. 이럴 때 생각을 해봐야 한다. 어떻게 베드로가 형제들아라고 할 수 있는지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한 식탁에서 먹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 오자 그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그로인해 그 자리에 있던 바나바마저 외식적인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상황에 따라 이중적으로 행동한 것에 대하여 책망을 했다. 고넬료 사건을 겪은 베드로가 여전히 이중적인 태도를 갖았다. 외식사건이 총회 이전이던지 이후 던지 간에 만약 이후라면 베드로는 더 초라해진다. 베드로가 외식한 것은 바울에게로 촛불을 옮길만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바울보고 베드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 사건으로 그 얘기가 들어갔다. 이때 사건으로 책망을 잘 들은 베드로는 수제자이다. 그리고 베드로 최후의 장렬한 변론을 하며 이후로 베드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변론 후에 꺼낸 첫마디가 형제들아 내가 너희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 것이고 이게 바로 구속사이다. 나에게도 고정관념이 뼈 속 깊이 박혀 있고 고넬료가 이방인으로서 구원 받는 것을 봤는데도 이방인과 밥 먹는 것이 두려워 나도 떠났다라고 고백함.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과 지체의식을 갖기 싶지 않은가. 베드로는 이 장렬한 최후의 변론을 했었어도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이어진 베드로의 말은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즉 객관적으로 모두 알고 있는 그것으로 시작한다. 내가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가르치려는 태도가 아닌 호소하려는 태도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이 베드로를 선택해서 제일 먼저 이방인에게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일이고 고넬료 이야기이다. 그때도 할례자들 유대주의를 버리지 못한 성도들이 단체를 일어나서 어떻게 사도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밥을 먹을 수 있냐고 항의했었다. 베드로가 성령의 설득으로 자세히 설명해서 이해시켜야만 했다. 겨우 이방인에게 주어진 은혜를 인정할 수 있었다. 고넬료 집 한가정의 성도가 변화된 것만으로도 거부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인데 자기들보다 훨씬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 믿고 교회로 들어왔다고 하니까 얼마나 격렬하게 율법을 주장했을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이 사도와 장로들인데도 이렇게 여전히 율법과 할례를 앞세우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고넬료 사건 때 이미 받아들인 구원의 사건을 상기시킨 것 뿐이다. 의논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는 높은 마음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 없고 나도 당신과 같았다고 간증을 하면서 이제 그 사람이 당하는 일 나도 당했다 이야기할 때 주안에서 한 형제 의식을 갖을 때 의논이 시작이 된다. 구원이 전적으로 주님 몫이라면 주안에서 한 형제가 될 수 있고 어떤 범죄자도 형제가 될 수 있다. 고난이 축복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물과 기름처럼 따로 있는 것이다.

     

    [적용질문]

    조두신은 불신자고 정인이 부모는 신자이다.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모두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형제의식이 얼마나 있는가. 정인이 엄마가 목장에 온다면 어떻게 의논하시겠습니까.

     

              성령의 의논은 세 번째는 하나님이 답이시다. 내가 답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답이다. (8-9) 서로 다른 주장은 중인이나 증거로 결정된다. 따라서 베드로도 증인을 제시하는데 그 증인이 하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증언하셨다. 기정사실화된 확실한 일임으로 이야기했다. 이방인도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셨다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부터 올라와 보고한 것에 대해 우리가 왈가왈부하고 있지만 이미 하나님이 확실히 증언하셨다고 이야기함. 어떤 방법으로?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다고 하였다. 할례파든 바리새파든 율법주의자든 그들의 이론으로 절대 반박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성령의 증거로 하나님이 증언하신 일이다. 이렇게 증언하신 하나님은 어떤 일이십니까. 베드로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밝힌다. 이것이 이방인과 율법의 문제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마음을 아신다고 한다. 율법준수를 지키려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겉으로는 거룩해보인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인간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었다. 그들에게 율법의 멍에는 수치나 고난이 아니라 특권이자 자랑이었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자기 확신이 충만하다. 인생의 답을 자기가 갖고 있으니 하나님께 답을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이나 베드로는 인간이 스스로 절대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안다. 우리가 멜 수 없는 멍에로 보고 나는 할 수 없다는 인식이 분명하고 주제파악이 되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답을 구한다. 그러니 나는 할 수 있다가 얼마나 불신앙의 답이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할 수 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죄를 알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 죄를 죄 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는데 너희도 못 지키는 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할례는 마음에 하라는 것이다. ,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지 않으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했다고 예를 들어보면 사과도 용서도 하기 싫고 사랑도 하기 싫다면.. 그런데 뭐라고 하면 금식만 하면 할례만 하면 내 죄와 상관없이 구원 받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이단이다. 나의 종교적인 열심히 다른 사람을 삼키고 나부터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은 것이 다른 사람을 삼키는 것이다. 이런 종교일수록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몰려드는데 막상 가보면 사람에게 무거운 멍에를 매게 한다. 인간의 종교 심리는 부패해있다. 믿음이라고 착각한다. 멍에만 지우려는 거짓 종교에 속으면 안 되는데 우리는 병만 낫는다면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참 복음은 참 자유를 준다. 참 복음은 의와 평강과 희락을 준다. (11) 바로 이것이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누구나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받는 줄 믿는다. 진정으로 고백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가.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고백이다. 인생의 여러 고난을 통과하여 저절로 회개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답이 아닌 여전히 내가 답인 것이다. 하나님만이 답이어야 성령의 의논을 할 수 있는데 하나님만이 답이 되려면 베드로처럼 산전수전을 다 거쳐야 하니까. 하나님만이 답이시기 위해서 우리의 사건이 걸어오고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적용질문]

    가정에서 내 말이 답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이 인생이 답이심이 얼마나 인정되는가. 집에서 내 말이 답이다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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