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5장 1절~15절 - 고친 이가 예수라주일설교 요약 2024. 3. 6. 03:41
요한복음 5장 1절~15절
고친 이가 예수라
정정환 목사
게하시 정입니다. 갑자기 어제 설교 연락받고 준비하게 됐는데요. 날씨도 추운데 또 추운 얼굴을 한 부목사가 올라와서 유감이지만 불쌍히 여겨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어제 밤에 설교 준비를 다 마치고요. 기도를 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나 같은 걸 이렇게 설교를 맡기실까 좀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 목사님께서 요즘 열왕기하 말씀 계속 전해 주시잖아요. 근데 이제 엘리사 선지자도 나오지만 또 그 곁에 이렇게 찌질한 게하시가 계속 등장하잖아요. 진짜 불쌍하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그냥 게하시가 나와가지고 그냥 자기 죄 고백하고 들어가라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런 시간을 주시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여러분 불쌍히 여겨주시고 또 게하시의 죄 고백 함께 나눌 테니까 함께 이 시간 주님의 은혜 받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몇 년 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한류 드라마가 있었죠. 아마 보신 분들도 이렇게 계실 텐데요. 오징어 게임이라고 잘 아시죠? 게임에서 이기고 최종으로 남은 사람이 상금을 모두 다 갖는 그런 드라마였습니다. 456억 원을 위해서 456명이 서로 경쟁을 합니다. 그러면서 죽고 죽이는 그런 서바이벌 게임을 막 치르죠. 이 돈과 출세를 위한 헛된 소망에 사로잡힌 이 참가자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죽이는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이런 시간을 점점 지나면서 인간성의 실종을 느끼고 많이 괴로워하죠. 마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많은 세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드라마를 보고 공감을 했습니다. 자비를 말하지만 정작 자비는 없는 무자비한 곳, 행복을 추구하지만 정작 행복은 없고 행복은 실종되어버린 적자생존 승자독식의 공간, 그럼에도 행복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어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바로 이 모습이 오늘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 우리가 함께 살펴볼 베데스다 연못의 풍경이기도 합니다. 이 연못에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던 38년 된 이 한 병자가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오셔서 고쳐주시는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이 시간 나를 고쳐주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함께 나누겠습니다.
나를 고치시는 예수님은 첫째 나의 누운 것을 보시고 먼저 찾아오십니다.1절에서 3절입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쓰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 유대인의 명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이 예루살렘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베데스다라는 이름은 자비의 집이라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이 연못 주위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앉아 있고 누워 있습니다. 천사가 가끔 이 연못에 내려와서 이렇게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때 이 연못으로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라는 그런 소문이 돌았습니다.
아마도 이 연못은 가을철 같은 그런 곳이었겠죠. 그러다 보니까 물이 막 움직이기 시작하면 서로 거기를 제일 먼저 들어가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아니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나으면 나머지 대부분의 병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허탈했겠습니까? 자비의 집이라고 하는데 자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고 오직 선착순의 논리만 지배하는 무자비한 전쟁터였습니다. 이 연못가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미신과 유행에 근거한 잘못된 믿음으로 기약 없는 세월만 그렇게 할 일 없이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오랜 질병으로 인생의 소망을 상실한 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5절입니다. 거기 서른여덟해 된 병자가 있더라.38개월도 아니고 이 38년을 병으로 누워 있는데 무슨 여기에 소망이라는 게 있겠습니까? 절망과 외로움과 아픔과 공허함 속에서 그냥 하루하루 누워 있었던 것이겠죠.
제 아버지는 중풍을 16년 동안 앓아오셨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 나온 혈기 마른 사람에 해당이 됩니다. 이 긴 시간 동안 병을 앓아오신 이 아버지의 모습을 옆에서 제가 이 자식으로 지켜보는데 참 마음이 많이 아프더라고요. 어떻게 해드릴 수도 없고 이처럼 오랜 시간 병을 앓아온 이 사람은 무력하고 희망조차 상실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이 38년의 병자도 아마도 혈기 마른 사람이었을 거예요. 바로 그때 예수님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이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오십니다.6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이 38년 된 병자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병이 오래된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질문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아니 이 당연한 질문을 왜 하고 계십니까? 이 질문을 또 받은 병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니 이 뻔한 질문을 왜 하고 계실까 하지만 예수님은 이 병자로 하여금 회복되고 픈 마음이 일어나도록 그걸 의도하신 겁니다.
아무런 소망도 가망도 없는 이 병자가 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지금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신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이 질문은 내가 너의 구원자다. 첫 시작인 겁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 있는 이 38년 된 병자처럼 오늘 우리도 이런 시간을 보낼 때가 있죠. 오랜 시간 동안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질병으로 누워있는 나, 관계에서 깊은 상처를 받아서 쓰러져 있는 나 이 세상에서 하는 일마다 번번히 실패하면서 모든 의욕을 상실해 버린다. 죄와 중독에 찌들릴 대로 찌들려서 이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널브러져 있는 나 38년 된 병자를 보고 계셨고 알고 계신 예수님은 오늘 지금 이런 나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그의 병이 오래된 줄 알고 계신 주님은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의 상태인지도 알고 계세요. 이 병자의 절망과 깊은 외로움을 체율해 주신 주님은 오늘 내 마음을 채율해 주십니다. 나의 외로움과 나의 절망과 고독과 슬픔과 연민, 수치심, 죄책감, 고통, 열등감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은 나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 물으세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 왜 이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날마다 베데스다 연못만 바라보고 있고 그 연못의 물이 동하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나의 시선과 관심을 이제 예수님께로 돌이키라는 것이죠.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드러내게 하심으로써 이제 나 스스로를 직면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암이 생겼다면 그 부위를 절개하고 거기를 드러내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죠. 주님께서 내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바로 치유의 시작, 구원의 시작인 것입니다. 너를 고쳐줄 사람은 바로 나란다. 너의 구원자는 바로 나이다. 그걸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나에게 일어난 사건은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나에게 주님께서 먼저 말 걸어오시고 나에게 질문하시는 사건이죠.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반응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생각 띵크를 하죠.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 묵상이고 큐티입니다. 날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답을 하면서 우리는 그동안 붙들고 온 내 인생의 이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 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대학 시절 저는 제 적성과 맞지 않는 학업으로 참 많이 힘이 들었습니다. 수업시간에 강의를 들으면 교수님께서 하시는 이 강의는 다른 나라 방언을 듣는 것만 같았고 아무리 책을 봐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하루 종일 그래서 오기가 나서 도서관에만 붙어 있다 보니까 그래도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노력해도 안 되는구나 이 절망감만 엄습했습니다. 이 공부를 해도 시험을 쳐도 누군가가 나보다 더 먼저 이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는 것만 같고 그러다 보니까 좌절감만 더 깊어지더라고요.
시험을 치면 뭐 아는 게 없으니까 답안지에 쓸 말도 없고 애국가를 쓸 수도 없고 애국가를 쓰려고 하니까 교수님을 기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이 알파벳과 숫자만 잔뜩 쓰고 답지를 제출하고 나왔습니다. 이런 제 상황도 모르는 한 제 친구는 제가 늘 이렇게 도서관에만 붙어 있는 걸 보고 시험 때 제 뒷자리를 앉아서 계속 답지를 보여달라고 쿡쿡 찌르는 거예요. 돌겠더라고요. 그 당시에 이제 시험을 치르면 가장 먼저 이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오는 그 친구에 대해서 우리가 금메달 딴다라고 이렇게 부르곤 했었거든요. 매번 제가 금메달을 따고 보니까 더 이상 이 금메달 따는 것도 지겹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아예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좀 전에 우리 한 형제님이 형제님이 간증을 해 주셨는데 서울대를 졸업하시고 MIT를 졸업하시고 이제 뉴욕에 들어갔다고 하셨는데, 저는 이런 지체들을 보면 이렇게 다른 나라 별에 있는 분들만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가는 곳이라고는 뉴욕 제과 아니면 MIT 어학원 파리바게트 뭐 이 정도였거든요. 그러니 뭐 얼마나 제 열등감이 깊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이제 뭐 공부는 너무 하기 싫고 잠을 자면 그냥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너무 싫더라고요. 혼자서 강둑길을 계속 걷다가 오락실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앉아 있다가 밤에는 또 혼자 술을 마시면서 잠들기도 했습니다. 극심한 이 무력감에 빠지다 보니까요. 사람조차 만나지 않다 보니까 이 내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 같은 또 실어증에 걸린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이 나 같은 게 세상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열등감과 자기 연민과 공허함 속에 페인처럼 마치 루저처럼 이 베데스타 연못에 누워서 지냈습니다. 정말 내 인생에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 같더라고요.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으면 마치 어두운 긴 터널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도저히 이렇게는 내가 살 수가 없어서 군대라도 가자 싶어서 군대를 갔습니다. 근데 군대도 도피처가 되지 않더라고요. 강원도 제가 갔던 이 산속에 달랑 이 70여 명의 부대원만 있던 터라서 굉장히 폐쇄적인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고참들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다 보니까 밤이면 이 불이 꺼진 내 몸 안에서 폭행과 폭언과 성추행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주먹으로 맞기도 하고 쇠파이프로 맞기도 하고 구나발의 머리가 밟히기도 하다 보니까 어느 날에는 아 내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차라리 개라고 생각하자 이런 마음도 들더라고요. 이 시간이 흘러서 제대할 때가 이렇게 다가오면서요. 이제 여기를 내가 이제 떠난다는 기대감도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시 이 사회로 나가서 과거의 그 생활로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가슴이 답답하고 두려워졌습니다. 내 인생에 대한 아무런 소망도 기대도 들지 않던 어느 날 우연하게 이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 수련회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적용 질문 드립니다.내가 지금 누워 있는 자리, 주저 앉아 있는 자리, 널브러진 자리는 어디입니까? 나는 어떤 베데스다에서 나의 갈망과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랍니까? 돈, 건강, 학벌, 행복, 스펙, 성공, 외모, 사람 등 어떤 베데스다입니까?
나를 고치시는 예수님은 둘째 말씀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내가 닿고자 하느냐 이 예수님의 질문에 병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7절입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병자의 대답에는 병든 몸을 가진 이 현 상황에 대한 절망이 오롯이 묻어납니다.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번번이 밀려난 이 피해의식도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이 38년이란 기간 동안 병을 앓아왔기 때문에 자기 연민과 또 세상에 대한 비관과 그리고 번번이 자기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한 사람에 대한 원망도 가지고 있어요. 육신의 질병도 깊었지만 마음의 병, 영적인 병도 깊고 중요했습니다.이런 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예수님은 내가 너를 고쳐주겠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이 병자가 연못으로 들어가도록 돕지 않으셨습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이 명령은 예수님의 부활에도 쓰인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병자가 일어난다는 것은요. 그에게 부활의 사건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회복입니다. 그 말씀은 생명입니다. 그 말씀은 구원입니다. 그래서 병자가 할 일은 이 말씀 그대로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죠.
이 병자처럼 내가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피해 의식으로 몸부림칠 때, 낙심 속에 있을 때, 깊은 죄악 중에 있을 때, 헛된 소망에 미련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나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얘야 내가 다 보고 있었어. 내가 다 알고 있어. 이제 일어나라. 너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말씀으로 나를 고치십니다. 그 말씀의 능력으로 나를 구원해 주시는 거죠.예수님은 이 말씀이 끝나면서 이 38년 된 병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됐습니까? 9절입니다. 그 사람이 곧 나와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치유 방법은요. 이 병자로 하여금 자이의 집이라고 하는 이 베데스다 연못으로 스스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 자체가 자비이기에 자비의 말씀으로 고쳐주신 거예요. 베데스다 연만물이 생명수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 생명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으로 병자를 고치시고 살리신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말씀이 새 생명을 낳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우리가 받아들일 때 내 안에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죠.
우리가 날마다 읽고 듣고 묵상하는 이 말씀이 나를 치유하고 나를 구원합니다. 왜입니까? 이 말씀이 권고한 내 삶의 육신으로 찾아온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할 일은 나에게 찾아오신 이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고 따르고 순종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분의 긍휼과 그분의 사랑과 인내와 자비에 나의 모든 존재를 다 맡기고 의탁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이죠. 예수님이 이 병자를 고쳐주신 방법은요. 그에게 어떤 힘을 주셔서 스스로 이 베데스다 연못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이게 은혜이죠. 이게 자비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이 자비의 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비의 집입니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저것만 내가 좀 가지면 내가 좀 더 행복해질 것 같은데, 저 곳에만 들어가면 내 인생이 좀 더 펴고 좋아질 것 같은데, 저 사람만 만나면 내가 좀 더 만족하고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여러분 그걸 자비의 집 베데스다라고 아직도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 곁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 자비의 집입니다. 나를 오랫동안 주목하고 계셨고,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나의 절망과 아픔과 외로움과 상처와 욕망,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바로 그 주님이 자비의 집인 거죠.
제가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까 말씀드린 그 그 수련의 그 집회에 참석했던 그 집회가 다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혼자 이 양지발은 한 곳에 이렇게 쭈그려 앉아 있었는데요. 내 속에 묻어 있던 이 두려움과 자기 연민 피해의식, 이 원망이 다시 또 솟구쳐 올라오더라고요. 그때 제 앞에 찬양집 한 권이 놓여져 있었는데 그 찬양 가사에 제 시선이 딱 머물렀습니다.그리고 이 찬양을 마음으로 되내기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혼자서 이 찬양을 무한 반복으로 부르는데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나 혼자 일어설 수 없는 저에게 일어나고 싶지만, 도무지 혼자 일어날 힘도 능력도 의지도 없는 저에게 주님이 이렇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정환아 다 보고 있었어. 내가 다 알고 있어. 이제 일어나라. 내가 너를 도울 거야. 내가 너를 고칠 거야. 일어나 걸으렴 일어나라. 그날 주님은 그렇게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 찬양집에 담긴 그 말씀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그 말씀으로 저의 상한 마음과 감정을 만지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가 공부했던 모든 목적과 제 인생의 목적, 그 모든 것은 오로지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였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제 깊은 이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욕심이 있었던 거죠.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다시 부대로 복귀했을 때 저에겐 두 가지 확신이 생겼습니다. 첫째는 황량하고 삭막한 내 인생의 베데스다이도 바로 거기에도 예수님이 나를 보시고 알고 계셨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내가 바로 그분을 만나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만난 감격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것이 없었습니다. 나의 회복과 나의 구원을 주님이 더 원하셨고 나보다 더 먼저 바라고 계셨어요. 그리고 부대로 다시 돌아온 그 주일에 11명의 후임병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를 향했습니다. 교회 마당에 다 도착해서요. 그 벤치에 후임병들을 잠시 앉게 했습니다. 그땐 제가 고참이었거든요. 그리고 이 후임병들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있냐? 이렇게 질문했더니 그 11명 중에 단 한 사람이 손을 들더라고요. 나머지 10명은 그냥 저를 멀뚱멀뚱 쳐다보거나 아니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만난 예수님을 전하게 됐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이 너와 나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가 되신다고요.이 복음을 다 전한 뒤에 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나머지 10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함께 영접 기도를 드리고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38년 된 이 병자와 다를 바 없었던 저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은혜를 그 지체들에게도 베풀어 주신 것이죠. 그리고 제대 후에 주님은 전혀 제가 예상치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이 방식으로 저의 적성에 가장 잘 맞는 곳으로 인도를 해 주셨습니다. 그 군대 가기 전에는 책을 보면 너무 힘들고 어렵고 시험이 들어서 눈물이 났는데요. 새롭게 이 학업을 시작한 곳에서는 책을 보는데 너무 재미있고 감사해서 눈물이 다 나더라고요. 정말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를 찾아오신 주님은 저를 일어나게 하시고 제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해주셨습니다.
적용 질문입니다.내 속에 있는 절망과 원망, 상처, 자기 여민 피해 의식은 무엇입니까? 나는 베데스다에 누워 무엇을 보고 듣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소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입니까?
나를 고치시는 예수님은 셋째 행복이 아닌 거룩을 목적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게 된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이제 유대인들이 듣게 되었죠. 그러면 그 유대인들이 이제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10절입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니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은 이 무언가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을 포함해서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39가지 종류의 일을 이렇게 분류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병자는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옮겼기 때문에 율법을 범한 셈이었죠. 예수님도 이 안식일에 이 병자를 고쳐주셨기 때문에 율법을 범하신 걸로 간주가 되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생명보다 전통이 더 중요했습니다. 지독한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가졌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 상대방이 아프면 나도 그 아픔을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 사랑이겠죠. 아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엄마가 밥을 차려주는 것이 사랑이에요. 근데 아들이 배고프다고 하는데 엄마가 너는 허구한 날 배가 고프냐 니 뱃속에 내 거지가 들었냐 그렇게 야단을 친다면 그게 사랑이겠습니까? 딸이 아프다고 하면 딸의 손을 잡고 병원을 가는 것이 사랑이죠. 딸이 아프다고 하는데 너는 맨날 그렇게 아프다고 징징거리냐 그렇다면 이건 사랑이 아니겠죠. 딸은 이 엄마는 딸의 아픔을 채우라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오늘 본문에 나온 유대인들은 병자의 아픔에는 일도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는데 무슨 체율이라는 게 있겠습니까?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데, 율법에 대해서 가장 잘 안다고 하는 자들이 정작 이 율법의 정신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병자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 예수님이 이 안식일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이 자체에만 꽂혀져 있습니다. 아니 여러분 이 병자가 38년 된 병에서 회복되었다면 같이 기뻐하고 축하해 줘야 되잖아요.그런데 12절에서 이들이 뭐라고 하는지 한번 함께 보겠습니다.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병자에게 너를 고쳐준 사람이 누구냐고 이렇게 따지고 있어요.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건 이건 죄라고 잣대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너무 숨이 막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왜 지금 이 이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긴 그 자체에만 관심이 꽂혀져 있습니다. 알맹이에는 관심이 없고 껍데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전통에만 관심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옳고 그름으로 판단질만 하는 것이죠.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잡는 겁니다. 이렇게 본질을 외면하면 일평생 비본질에 천삭해서 인생을 낭비하는것이죠. 여러분 이 유대인들은 진정한 안식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종교적인 열심은 있지만 그 열심으로 안식일의 참 주인 되신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이려고 듭니다. 영적인 나병에 걸려서 자기 문제의 이런 심각성조차 인식하지 못하다 보니 이들이야말로 정말 중증 환자들이죠. 38년 된 이 병자보다 더 심각한 병자인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틀, 제가 가지고 있는 잣대로 언제나 사람들을 재단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편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집에서도 공동체에서도 다른 사람이 저의 눈치를 보게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38년 된 병자처럼 주님을 만나서 구원은 받았지만, 이 오늘 본문에 유대인들처럼 영적인 질병이 있으니 바로 그것은 자기 이해와 자기 기만 위선과 탐욕입니다. 저는 제 마음 편하고 편한 게 우선이다 보니까 이런 환경과 이런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온몸으로 그 불편함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회피를 하곤 했습니다.
이 회피와 무관심 때문에 영적인 나병에 걸려서 사역을 하다가 치리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제 아내는 저에게 간혹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정정환이다. 이 내용은 사실 원고에는 안 썼었는데요. 오늘 아침에 밥을 먹다가 제 아내가 이 말은 꼭 하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제가 제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 아내가 만삭이었거든요. 그때 제가 교회에서 사역을 마치고 밤 한 12시 자정쯤에 제가 귀가를 했습니다. 다 씻고 자리를 이제 자려고 누웠는데 아내가 그러는 거예요. 진통이 시작된다. 아무래도 애가 낳을 것 같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눈을 감고 잠을 한번 청해 봐. 우리 내일 날이 밝으면 같이 병원에 가서 시원하게 애 낳고 집에 오자 제가 정신이 나갔죠.
그때 누워서 제 얼굴을 쳐다보는 제 아내의 그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그래서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 바로 병원에 갔습니다. 바로 애가 나오더라고요. 하마터면 집에서 제가 애 받고 탯줄 끊을 뻔했습니다. 이렇게 목사가 제일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님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목사 자기 자신이라니까 이게 얼마나 수준 미달 함량 미달입니까?지난 주일에 역사 공부를 하던 딸이 저에게 대뜸 이렇게 질문하더라고요. 아빠 아빠는 신라가 좋으세요? 백제가 좋으세요? 제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오더라고요. 나는 말이야 내가 더 좋아 웃자고 한 농담이긴 했지만 그 말 속에는 얼마나 뿌리 깊은 자기 애가 있겠습니까? 그게 은연 중에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죠. 그러니 제 기준 제틀 제 프레임이 너무 강한 것이죠. 그 기준과 잣대로 유대인들처럼 끊임없이 판단하고 나 편하자고 나만의 경계를 치는 그런 내적인 완고함이 저에게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또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아닌 척 있는 척 위선을 뗍니다. 바로 이게 자기 기만이죠. 내가 유대인이면서도 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냈던 거예요. 정말 육적인 사람 인본적인 사람의 전형이죠. 그러니 옆에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오죽하면 저도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고 다니더라고요. 저에게는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은사가 있다고요. 간혹 이런 저를 보면 하나님도 나를 쓰시기에 얼마나 불편하실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정말 나 같은 교회 목사로 사역할 자격이 있나?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게하시처럼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는 건가? 또 그런 생각이 들면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런 저에게 예수님은 오늘 본문 14절에서 이 말씀을 해 주십니다. 보라 네가 낳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이 병자를 다시 만나서 해주신 말씀이죠. 이 병자는 병 고침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 이 설교에 등장한 이 4명의 나병 환자들처럼 아무런 수고도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갑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회개의 삶을 살지 않고 있었던 거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또다시 그를 찾아오신 거예요. 게하시를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은 오늘 이 본문에 38년 된 병자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상실한 이 병자에게 너 구원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남은 구원을 이루어 가라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은혜로 얻게 된 이 새 생명에 감사하면서 이제는 변화된 삶, 행복이 아니라 거룩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는 삶을 살아가라 명하시는 거죠. 너는 세 사람을 덧입었으니 그 신분에 합당한 인생으로 살라고 명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38년 된 병에서 고침받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병 때문에 만난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이 구원을 감사하고 그 구원을 받은 자로 오늘을 회개하면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살리신 이 복음의 아름답고 복된 소식을 증거하고 전하는 증인으로 나아가는 것이죠.
제가 그저께 이 본문으로 새벽 설교를 했는데요. 그날 오후에 한 집사님의 요청으로 이 부모님의 영접 신방을 위해서 요양원을 방문했습니다. 여든이 넘으신 아버님은 신경섬유화로 온몸의 근육이 다 빠져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 계셨습니다. 젊은 시절에 알코올 홀릭에 분노조절 장애 폭력적이도 하셔서 이 자녀분들과는 관계가 좋지 않으셨습니다.본인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고 불편한 건 참지 않으시고 이 화를 내기도 하셔서 저에게 이 영접 신방을 요청하신 따님 집사님께서 혹여나 신방을 하다가 이 아버지가 저에게 화를 내지 않으실까 그렇게 염려를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이 치매를 앓으셨던 어머님은 성당에 다니기는 하셨지만 한 번도 교회를 오신 적은 없으셨습니다.
제가 사전에 이 이야기를 미리 듣다 보니까 제가 만날 이 두 분이 마치 이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 계신 병자와도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양원에 들어가 이 병상에 누워 계신 이 집사님의 아버님과 또 휠체어에 계신 어머님을 그날 오후에 이제 가서 만났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 나온 이 38년 된 이 병자의 심정이 마치 이분들의 심정일 것 같아서 제가 먼저 이렇게 여쭈었어요. 아버님 어머님 이렇게 계시니까 너무 외롭고 너무 고단하고 힘들지 않으세요? 두 분 모두 고개를 끄덕이시더라고요. 심지어 아버님은 외로워 많이 힘들어 그렇게 답을 하셨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나의 이 외로움과 아픔과 힘듦을 제일 잘 아는 분이 계시니 바로 그분은 하나님이세요.
그 하나님이 아버님과 어머님을 창조하셨고 이 모든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계세요. 그렇게 제가 운을 뗐습니다. 그러자 그분들이 제 이야기를 계속 들으시더라고요. 바로 그분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해 주셨어요. 이제 그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아버님도 어머님도 저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실 거예요.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라고 제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시겠냐고 여쭈었는데 두 분 모두 고개를 끄덕이시더라고요. 그렇게 두 분은 그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모시는 영접 기도를 저와 함께 드리셨습니다. 기도를 다 마치고 났는데 갑자기 아버님이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시는 거예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처음에는 막 눈을 크게 뜨시길래 갑자기 화를 내시나 싶어서 긴장했는데 오히려 이 말씀을 본인의 입으로 하시니까 너무 놀랍고 감격이 되더라고요. 영접 기도 후에 이 베데스다 본문의 말씀도 함께 그분들에게 전해드렸습니다. 어머님께서 이렇게 대답을 하시더라고요. 내가 이 휠체어에서 일어나게 되면 딸과 함께 우리들 교회에 갈게요. 정말 예수님은 이날 말씀대로 베데스타 연못에 누워 있는 두 분을 만나주셨습니다. 사실 이날 요양원을 가면서 혹여나 어르신이 제 이야기를 듣다가 이렇게 참지 못하고 화를 내시면 그냥 잘 당하고 오자 그런 마음으로 갔었거든요.
그런데 그건 기후였습니다. 제가 병실을 떠날 때까지 두 분이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더라고요. 그분들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그 구원의 일에 눈물이 났습니다. 사역을 하다 기쁠 때는요.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그 순간을 볼 때인 것 같습니다. 바로 이 기쁨이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거구나 종의 기쁨은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계속 끊이지 않게 되더라고요.
예수님이 나에게 이 기쁨 주시려고 38년 된 병자 같은 나를 다른 이의 아픔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이 유대인 같은 나를 불러주셨구나 기아시 같은 나를 구원해 주시고 값없이 받은 이 구원의 복된 아름다운 소식을 이렇게 전하게 하시는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기쁨은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크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저 또한 이 기쁨을 알게 되니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사함이 넘치더라고요. 사실 돌아보면 이 유대인들처럼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고 사역을 통해서 높임을 받으려고 했던 저였습니다.이렇게 게하시처럼 탐심으로 사역하다가 영적인 나병에 걸리고 수내 여인 같은 성도님들의 아픔도 체유를 하지 못하고 엘리사 같은 담임 목사님의 마음을 근심케 하는 사역자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과거에 치리를 받았을 때 그때 주일 말씀이 요한계시록이었는데요. 그때 담임 목사님께서 해주셨던 주일 설교에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이 땅에서 육적인 수치를 드러냄으로 영적인 수치를 가려주시는 축복이 있다. 그 말씀이 정말 개아시 같은 나를 위한 주님의 답할 소리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리고 어제 끝난 이 뮤지컬의 주인공이 게하씨였다는 사실이 너무 저에겐 충격이자 위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죄 많고 찌질한 이 개아시 같은 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회개하는 인생으로 견인해 주시기 위해서 품어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와 공동체의 사랑에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이 공사 중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왜 우리가 운전을 하다 보면 이렇게 공사 중이라는 이 표지판이 보일 때가 있잖아요. 되었다함이 없는 인생이기 때문에 오늘도 저는 여전히 공사 중입니다. 다 지었다 싶은데 비가 오면 또 줄줄 새고 바람이 불면 또 여지없이 흔들립니다. 잘 지어졌다 싶은데 태양이 또 장렬하게 나면 허물어지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아직도 공사 중입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은 오늘 말씀해 주십니다. 네가 공사 중이더라도 내가 너의 구원자잖아. 나를 의지하고 이제는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마렴.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은 주님의 이 말씀은 저에게 큰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엄중한 명령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 삶을 끝까지 지켜주시겠다는 주님의 신실한 약속으로도 들리기도 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본문에 등장한 38년 된 병자도 유대인들도 모두 다 아픈 사람들입니다. 공사 중인 사람들이죠.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양쪽 모두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가망이 없는 인생들이에요. 한쪽은 한없는 절망과 고통과 원망 속에서 세상과 자기를 비관하다가 끝날 인생이고, 또 다른 한쪽은 끝없는 교만과 정재 속에서 세상과 사람들을 비난하다가 망할 인생입니다. 그리고 바로 저 자신도 이 둘처럼 그렇게 살다가 끝날 인생이었겠죠.
하지만 이런 저에게 우리 주님은 오늘 또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해 주십니다. 네가 구원받았으니 이제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인생, 하나님의 자녀 된 인생을 살아가려면 혹시나 지금도 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잘못된 믿음과 거짓된 희망에 사로잡혀 앉아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 베데스다에서 내 안에 있는 이 깊은 갈망이 채워지고 세상 소망과 욕심이 좀 채워지고 그토록 고대하던 행복이 이루어질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이름 있는 직장에 취업하면 성공할 것 같고, 더 많은 투자를 받아서 사업을 하면 대박이 날 거라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 눈에 보기 좋은 그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과 함께 살면 안식을 누릴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그 베다스다를 떠나지 못한 채 그 연못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면서 오징어 게임에 참가자들처럼 헛된 세상 신화의 나를 던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진짜 베데스다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의 과거 지금까지 모든 삶을 주목하고 계셨고, 나의 결핍과 부족과 아픔과 고독과 슬픔,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베데스다입니다. 그 주님께서 나의 생명이자 나의 전부가 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한 겁니다. 바라기는 오늘도 내 곁에 찾아오신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절망의 자리, 헛된 소망의 자리, 아픔과 무기력의 자리,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중독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에게 허락하신 이 길을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내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또다시 범하지 않아야 할 죄, 피어야 할 죄는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목적은 행복입니까? 거룩입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나를 고치시는 예수님은 나의 누운 것을 먼저 보시고 찾아와주십니다. 말씀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행복이 아니라 거룩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 온전한 고침과 구원을 얻고 참된 안식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우리들교회 정정환 목사 주일설교'주일설교 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왕기하 8장 1절~6절 - 큰 일을 설명하라 (1) 2024.03.06 열왕기하 7장 12절~20절 - 말씀과 같이 되었고 (5) 2024.03.06 열왕기하 7장 3절~11절 - 이제 가서 알리자 (1) 2024.03.06 열왕기하 6장 32절~7장 2절 - 말씀을 들을지어다 (0) 2024.03.06 열왕기하 6장 24절~31절 - 나를 에워싼 군대 (2) 2024.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