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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라디아서 3장 19절~29절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일설교 요약 2022. 7. 16. 20:23

    말씀: 갈라디아서 3장 19절~29절

    제목: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설교자: 김완규 목사(세종한빛교회)

     

              시골에서 올라와서 떨립니다. 1부 마치고 나서 아버님께 전화를 받았어요. ‘너 혀 꼬이고 떠는 것 오랜만에 본다. 쫄지 말고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불쌍히 여겨 주시는 마음으로 긍휼한 마음으로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올라오면서 주일 새벽 큐티새벽 말씀을 듣고 왔어요. 아내와 함께 그런 이야기 나눴습니다. 나보다 훨씬 나은데 내가 여기 왜 가는지 모르겠다고요. 그렇습니다. 정말 그런 마음으로 왔어요. 저를 부르신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설교라기보다도 이렇게 우리들교회가 세계적인 대안이 되어서 흘러가는데 어떻게들 사나 그것들 잠깐 이야기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런 마음으로 왔고요. 여러분이 흘러가는 생수의 역사 속에 부스러기라도 먹는 여인처럼 흩어진 것 잘 먹어가면서 주워먹어가면서 사는 목회자도 있고, 교회도 있다는 것 아시고, 여러분의 길 잘 걸어가 주시면 저희는 계속 잘 얻어먹으려고 합니다.

     

              큰 바위 얼굴처럼 한 소년이 저런 사람 언제 나오나 봤는데 어느 사이에 그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처럼 먼발치에서만 봤던 우리들교회에 서게 되었다는 자체가 제 인생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마음으로 서 있습니다. 좋게 말해서 큰 바위 얼굴이고 팩트를 이야기하자면 명품 우리들교회 베끼고 있는 짝퉁 목회를 잘하고 있습니다. 월요 울림 기도회를 보고 우리도 좀 이렇게 나눔이 있는 예배를 했으면 좋겠어라고 부목사님과 나눴는데 부목사님이 이름을 붙여서 온 거예요. 더 울림 기도회라고. 왜 이렇게 붙였어? 그랬더니 울면 저희는 더 울어야죠 그래서. 그러긴 그래라고 대답했어요. 표어들이 너무 기가 막히잖아요. 이것도 베껴야 하는데.. 효과적으로 어떻게 베낄까 고민하는데 그럼에도 살아냅시다이 표어를 어떻게 우리가 가져올 수 있을까 고민하고 연락을 드렸어요. 연락을 드렸는데 연락 오는 교회가 없었는지 담당자를 바꿔주시겠다고 했는데 5명 담당자와 통화를 한 것 같아요. 본인들도 황당하셨을 거라 생각이 들고요. ‘그럼에도 살아냅시다이 표어를 살아냅시다 그리고 살려냅시다로 이런 식으로 목회를 하고 있어요. 제 속에 선한 것이 없어서 나올 것도 없어요. 김양재 목사님 따라서 잘 베끼면 되지 않을까 이런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심방예배 장례예배 등도 그날 큐티 말씀 가지고 하고 있어요. 권사님이 돌아가셨는데, 하나님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날 큐티 본문이 유다와 다말 이야기였어요. 첫째가 죽고 오난은 사정하고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하고 이 본문 가지고 장례예배를.. 읽어 놓고서 내가 이것을 왜 읽었을까 이러고.. 차 타고 오면서 바꿀까 그러고 그냥 그대로 하자 별의별 생각 다하다가 결국엔 했는데요. 딱히 할 말이 없잖아요. 어머님을 보시고, 어머님이 옳습니다. 네가 나보다 옳도다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되실 거라고. 그 믿음의 길을 어머님이 가셨으니 여러분도 그 길을 가실거다, 그 복을 받으실 거라고 설교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 큐티 말씀을 가지고 심방을 가면 어떻게 목사님이 내 사정을 아시느냐고 해서, 속으로 역시 베끼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16년 전 여름에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수요예배 기억이 나고요. 윗 층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렸고, 에어컨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올라올 때 와이셔츠 세 장하고 메리야스까지 다 가지고 왔는데 에어컨이 여기 있네요. 세시간 정도 예배를 드린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말씀만 3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고요. 더 충격이었던 것은 한 분도 흐트러짐 없이 예배에 집중하시는 거였어요. 이게 뭘까. 이 힘은 뭘까. 그때부터 더 궁금하고 말씀의 파워가, 말씀으로 살아낸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저에게 그런 목마름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들교회는 장모님의 암 사건 떄문에 더 깊이 말씀 속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8년 전 개척을 앞두고 두 번째, 또 목세 1기를 참여하면서 더 깊이 우리들교회를 따라 가게 되었고, 1년 전에는 온 가족이 관계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아이를 품고 말은 휴가였지만 갈 곳이 없었어요. 어디가서 뭘 할 수 있을까. 내 아이의 고통을 가지고 이런 마음으로 내가 목사니까 예배는 드려야겠고, 어디를 갈 수 있을까 해서 왔던 곳은 판교에 가서 예배를 드렸어요. 저희에게 있어서 우리들교회는 환난 당하고 빚지고 원통해 하는 저와 제 가정이 피하는 아둘람 굴이고 살아갈 소망을 주고 나가야 될 길을 여는 공동체입니다.

              

              여러분들은 당연히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우리들교회의 소식들 우리들교회의 흐름들 속에서 제가 비빌 언덕을 찾고 가야 할 길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목회도 있구나. 이런 교회도 있구나. 이런 성도들도 있구나. 이런 가치관이 있구나. 목세 1기 참여하고 말씀하신 대로, 말씀대로 믿고 살고 누리는 교회로 표어를 정하고 달려가고 있어요. 말씀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 말씀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겠죠. 말씀 앞에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인생이다 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말씀 앞에 나를 비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까. 제가 순간순간 잊어버리면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죽어가는 것을 봅니다. 원통하고, 억울해하고, 분노하고 인정 못 받아서 섭섭해하고, 편 가르고 목사지만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고, 성도들 이용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고 계산하고. 말씀 앞에서 저를 보지 않으면 저는 정확하게 하나님을 막는, 하나님의 통로를 막는 불순물이 되어 있고 걸림돌이 되어 있더라고요.

     

              think 양육에 보면 양육을 이렇게 소개하고 큐티를 이렇게 소개하죠. 내 죄를 보는 큐티, 십자가의 길로 가는 큐티, 나의 약재료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큐티,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임을 아는 큐티, 내게 일어난 사건을 말씀으로 해석하는 큐티.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아는 큐티,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큐티,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님을 아는 큐티, 구속사의 시각으로 사람과 사건을 보는 큐티. 어떻게 이런 지혜들이 떠오를 수 있을까. 어떻게 말씀을 하나하나 보아가며 정의될 수 있을까. 저로서는 충격이고, 정말 그 크신 구속사의 가치관이 어떻게 하면 제 속에 들어와서 저와 또 저의 사역, 제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펼쳐갈 수 있을까. 목마르고 닮고 싶고 따르고 싶은 소망입니다. 사단은 계속 우리를 공격하죠. 선악과 따먹어서 눈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살아라. 죄 이런 것 생각 말고 원하는대로, 기분대로,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라고 사단이 부추기죠. 제가 양육하면서 주일말씀 나누면서 주일말씀이 바벨탑이었어요. 니므롯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고 성을 지을 만큼의 인구를 동원 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따라오고, 그들을 한 언어로 묶을 수 있는 네트워크가 되고, 지을 재료인 흙과 바를 역청이 충만하면 내가 바벨탑을 안 세울까. 자신 없더라고요. 지을 것 같더라고요. 잘나가고 멋있고 화려하고 그럼 바벨탑 지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로 저의 수준을, 저의 상태를 잘 아시니까 놔두면 하늘 끝에 올라가 있을 것이 뻔하니까 여러 가지를 저에게 허락해 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일단 운전매너 빼고는 모든 시험을 다 떨어져 봤고, 시험에 붙고 이러는 것을 보면 우러러보고 싶고 그렇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잘 안 돌아가더라고요. 뭔가 막혀 있는 것 같고, 열려 있는 것 같지 않고. 고등학교 시험도 그렇고 대학교 시험도 그렇고 대학원 시험도 그렇고. 늘 그랬어요. 늘 떨어졌어요. 저는 장로교 통합측 목사에요. 장로교통합은 장신대가 메인이 되서 흘러가는 교단이에요. 학부도 장신대를 떨어졌고, 신대원도 장신대를 떨어졌어요. 그래서 장신대 가서 시험을 보면 안된다는 굳은 믿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TH.M은 안갔어요. 떨어질 것을 믿고 안갔어요. 주님이 한번 더 보내셔서 목사고시를 떨어지게 만드셨어요. 장신대는 또 가서 떨어지렴 그래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에요.

              

    제가 개척을 한 이유는 한가지에요. 다섯 명이 모이셔서 개척을 하신다는데 저를 부르신 거에요. 기도도 깊이 안했어요. 나 담임목사 할 수 있다. 오직 그거 하나. 세종이 어디 있는지 몰랐어요. 알 필요도 없었어요. 그냥 담임목사 시켜준다니까. 그냥 좋아서 갔어요. 꿈이 있고, 비전이 있고, 주님의 부르심이 있었지만 그런 것에 관심이라기보다 담임목사 할 수 있다.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마음으로. 누가 저를 불러주겠어요. 누가 저 같은 사람에게 깔아줄 수 있겠어요. 그냥 그것 하나 때문에 가는 거죠. 그러니 사람에게 끌려가고 교회의 유능하고 멋있고, 똑똑하고, 추진력 있고 화려한 분들이 오세요. 정확하게 멋있고 유능하고 똑똑하고 화려한 분들에게 상처받아요. 그래서 사람을 아는 큐티라는 말 한마디에 그렇구나. 내가 하나님도 모르지만 사람도 모르는구나. 그리고 나도 모르는구나. 내가 목사가 되었는지 내가 왜 사역을 하는지 나도 모르는구나. 정말 말씀 앞에 나를 비추지 않으면 어디를 갈까. 내가 뭐하며 살까. 조금 더 편안하고 조금 더 인정받고, 누가 뭐 해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누가 인정 안 해주면 하염없이 땅으로 꺼지는.. 그렇게 살다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속으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고 그렇게 살다가 가겠구나. 그 묶임, 그 답답함, 그게 뻔한 제 인생 스토리였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본문을 통해서 같이 봤으면 좋겠어요.

     

    첫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하기 위해 자신의 죄를 보아야 합니다.

              환경에 장사가 없는 우리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시는 거죠. 죄 가운데 죽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발버둥을 치는데 안되는 것이 무엇인지 한계가 무엇인지. 그래서 될 것 같아? 하시면서 말씀 앞에 나를 정확하게 비추시면서 나를 보게 하시는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세요. 우리 19절 말씀 같이 읽어 볼게요.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을 위해 있습니까? 율법을 사람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특별한 자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중보자(중개자)의 손을 빌어 천사들을 시켜 만든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한가지라는 거에요.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거라는 거에요. 2122절도 읽어 볼게요.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율법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엇으니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율법이 하는 일이 있다는 거예요. 율법은 구약성경이죠. 율법 아래 우리는 다 죄인이라고 가두어주기 위해서 율법이 있다는 거죠. 살게 하는 기능은 아니래요. 죄 가운데 가두어서 죄 가운에서 죽어가는 인생인 것을 깨달으라고 주시는 것이 율법이라고 말씀해주세요. 예수님은 심지어는 오셔서 구원의 복을 선포하시기 직전에 이렇게 또 말씀하시잖아요. 율법에서 내가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향해서 더 율법을 강화 시키시죠. 간음하고 살인하고 도둑질 해야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한 그들에게 음욕을 품었느냐. 간음하였느니라 욕심을 품었느냐. 도둑질 하였느니라, 미워하였느냐 살인하였느니라. 사람을 무시하였느냐 연자멧돌을 메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정확하게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라고, 네 실체가 무엇인지 알라고 우리를 계속해서 인도해나가시죠. 그래서 율법을 또 이렇게 표현합니다. 24절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초등교사 인도자가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율법의 정죄를 당하는 순간이 어떤 순간인가? 내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이 되는 거죠. 그러면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거꾸로 내가 율법 앞에 내 모습을 봐야 하고 내 실체가 드러나야 하고, 내 것이 드러나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생인 것을 내 영혼 속에 고백할 때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 될 것이라고, 그래서 율법이 필요하다고 말씀해주시는 것이죠.

              

              정죄당하는 그 순간이 예수님 만나는 그 순간입니다. 저희 장모님은 집, 교회, , 교회만 아시던 분입니다. 딸을 사모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쳤다고 해요. 장모님의 인생은 암으로 마쳐지셨습니다. 그때 교회 분위기는 기도해서 목사 사위 또 딸은 사모가 되었는데 저 사람은 무슨 저주를 받아서 암에 걸렸냐. 50 중반의 나이에 암에 걸려 죽어가는 것이 그렇게 애쓰고 수고했던 삶과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육체도 아프고, 나의 마음도 힘들고, 영적으로는 무슨 저주를 받았느냐고 이야기하는 영혼육이 다 무너져가는 상황 속에 돌아가셨어요. 치료차 서울에 오시면서 우리들교회 예배를 오셔서 드리기 시작하셨어요. 그날 본문도 내용도 제 아내는 잘 기억도 못 하는데 김양재 목사님이 계속해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난다고 그래요. 암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암은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암은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장모님은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실체를 보시는 거에요.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하고 모든 것을 헌신했는데 천국 갈 믿음이 없는 자신을 봤어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요.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어떻게, 왜 했는지 뭘 했는지 모르겠다. 천국 소망도 없이 내가 가야 하는 그 길도 모르면서 자기 열심에 속고 남도 속고 우리 모 두다 속은 삶을 사는 거죠. 김양재 목사님 말씀 들으시면서 회개하기 시작하셨어요.

     

              2년 동안 투병을 하셨고,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제가 1년 전에 아내로부터 들었어요. 나 천국 갈 수 있을 것 같아. 제 아내가 수정인데. 수정아 너도 이 땅에서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잘 하다가 우리 천국에서 만나자. 인간의 노력을 하시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님을, 인간의 열심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지 않음을 인정하는 시간이 되었어요. 그러나 이렇게 무너져야 진짜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정말 생명이신 예수님을 이제서야 만나는 시간들을 저희가 보게 되었어요. 이런 목사님과의 인연이 있었기에, 목회자 세미나가 열린다고 하니 저는 1기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개척을 말씀하신 대로 개척을 앞둔 시간이었어요. 물가로 나오라 1기 때 우리 김양재 목사님의 언니 되시는 선교사님이 부르셨던 노래가 기억이 나요. 울다가 울다가 그렇게 또 감격스럽고 간증 콘서트 속에 들어가서 왜 콘서트를 간증을 할까 앉아서 2시간 3시간 동안 또 감격과 감동과 충격 속에 빠져들었어요. 저는 우리들교회는 김양재 목사님의 말씀에 힘이 있어서 간다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맞는데 그리고 나서 또 하나의 힘을 봤어요. 그것은 목장의 예배였어요. 마음을 열고 자신의 약함을 토해놓고, 그 말씀을 다시 말씀 삶 속에 받아들이고 그리고 들어주고 함께 하고 함께 우는 그 모습들. 아 이게 우리들교회 공동체의 힘이구나. 감격과 감사로 목회자 세미나 1기를 마쳤어요.

     

              구속사의 말씀을 계속 들어가면서 하나님은 저의 상태를 진단해 주셨어요. 너는 인정중독에 걸려 있는 사람이다. 그럴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인정 못 받았고, 살면서도 인정 못 받았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인정에 늘 목말라 하는.. 그러니 목회를 하면서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에 오직 거기 하나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인생. 그래서 부교역자 시절에 응급실에 두 번 실려 갈 만큼 최선을 다해 목회했던 기억이 나요. 물론 게으른 것도 많았지만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정중독에 빠진 저의 상태를 이렇게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 저희 담임 목사님을 쓰셨어요. 인정 안 해주시더라고요. 하면 할수록 너는 왜 그래. 죽는 줄 알았어요. 인정이 이 세상 남은 모든 것이라고 생각 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제가 있을 곳이 없더라고요. 무너지고 무너지는데 하나님이 제 안에 있는 두려움의 실체들을 꺼내주셨어요.

     

              첫 번째 두려움은 물질이었어요. 마음 가운데 내가 왜 이렇게 교회에 충성할까 생각해보니까 이 교회에서 벗어나면 나는 뭘 먹고 살지. 내 가족들은 어떻게 부양하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제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두 번째가 인정받지 못하는 억울함과 분노가 저를 끌고 가는 것을 봤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착각하며 산 것 같아요. 마음 가운데 진짜 두려운 것은 돈이고 명예였던 거죠. 외식의 모습은 가정에서도 드러났어요. 겉으로는 굉장히 유하고, 상대방을 품어줄 것 같은 사역자였지만 집에 돌아가면 그 분노들을 쏟아 놓는 거예요. 기억이 나요. 제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그 꼴도 못 봤어요. 제가 이렇게 손찌검을 했어요. 아이는 여름성경학교 때였나. 얼굴에 이 다섯 손가락 자국이 나서 교회에 갔어요. 큰 사모님이 절 보고 이렇게 저와 제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놀라시더라고요. 정말 미안해요. 제가 폭력을, 분노를 쏟아내서 미안해요. 제 아이가 그것 때문에 힘들어해요. 구속사의 말씀을 들어가면서 내가 한참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구나 이런 고민이 들 때 제 아내가 양육을 시작했고, 제 아내는 한 청년을 양육하면서 그 청년이 양육을 마치고 장로님의 가정에서 반주하면서 살아왔던 청년이 사모님 꼭 양육하셔야 해요, 정말 꼭 하셔야 해요. 제가 이 말에 용기를 얻어서 남편과의 관계가 어렵고 자녀 때문에 힘들고, 물질 때문에, 또 사역을 놓겠다고 하는 한 성도 한 성도님들을 붙잡고 이제 양육을 시작하셨어요. 제 아내가 양육했었던 한 집사님의 나눔이에요. 이분은 2번 결혼하셨고, 2번 이혼하신 경력으로 우리교회에 오셨어요. 이분의 나눔이에요.

     

              제 죄를 못 보고 남편 죄만 보면서 탓하고, 제 열심으로 제 성품으로 참아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을 우상 삼아서 생명 살리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풍성한 물질에 갇혀서 가정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내 것만 보고 남편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참았다고 하지만 그것을 앞세우는 명분이었을 뿐 남편을 나 편한대로 바꾸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나의 행복을 위해 신앙을 이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람이 난 남편이 죄인인 줄 알았는데 믿으면서도 악함을 품고 있는 제가 더 죄인임을 이제야 알게 됩니다. 이혼 재판을 하면서 그 사람에게 다 내어준 물질이 이해가 되지 않고 억울하고 또 억울했습니다. 재판은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재판했는데 재판석에서는 남편의 손을 들어줬고, 그러나 100% 옳으신 하나님이 인정이 되니 그것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물질은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 제게는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위해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니 감사하고 100% 옳으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은 없고 믿음 좋은 환경만 있다는 말씀이 인정됩니다. 제게 물질이 있었다면 저는 하나님 찾지 않고 물질을 의지했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광야학교에 있습니다. 남들이 볼 때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사는 여자가 월세방에서 살고, 공장에 다니며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태어나서 처음 마음의 평안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공장을 다니며 난생처음 몸 쓰는 일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큐티를 하고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딸 아이를 힘들게 하는 딸의 친구가 저의 어릴 적 모습 같아 회개가 됩니다. 내 딸도 아프지만 그 아이도 아프겠구나를 생각하니 제가 힘들게 했을 것 같은 친구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들 녀석이 라면 사 먹으려고 기숙사를 몰래 빠져나가려다가 걸려서 퇴소처리 당했습니다.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내 새끼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가 학창 시절에 권세에 순종하지 못해서 겉으로는 착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권세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잘못하고 깨닫지 못하니 우리 아이들이 수고가 많습니다. 예전 같으면 머리를 싸매고 걱정에 걱정을 했을 텐데 이제 걱정이 안 됩니다. 100% 옳으신 주님이 하신 일이니까요.

     

              저도 10주 성경공부를 하는데, 아내가 10주 양육을 하고, 그런데 아내가 10주 양육한 분들은 바뀌더라고요. 분명히 반응은 제가 더 좋은 것 같은데 그래서 저도 양육을 시작했습니다. 삶의 자리에 가서 문제들을 풀어가는 겁니다. 달려와서 기도해주세요 가 아니라 말씀으로 문제를 보고 오히려 회개하고 오히려 나아갈 방향을 찾고 한분 한분이 서는 것을 보면서 이 양육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다시 느끼고 있습니다.

     

     

    [적용질문]

    나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나의 악함이 드러나게 하시는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되십니까?

    행위로 의롭게 되려다가 남들의 비난과 자책으로 고통당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100% 죄인인 것이 인정되십니까?

    내가 무너지는 이때가 예수님을 만날 떄인 것이 인정이 되십니까?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하는 자는 약속을 이을 사명을 감당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약속있고 이런거 참 물론 마음은 있었겠지만, 제 마음은 늘 나 편한것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저를 간섭해주시기 시작합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저와 함께 양육을 했던 한 남자분의 혈기 많고 성공중독과 인정중독에 빠져있다고 하시는 집사님의 나눔입니다. 막내 동생이 사춘기를 심하게 하더니 정신이상이 왔습니다. 그것이 악화되어 정신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교회 다니는 저라도 기도하며 아픔을 감싸줘야 하는데 막내동생에게 어떻게 집안의 이런 자식이 태어났어 이러며 면박을 주고 폭행을 행사했습니다. 생명수 강을 막는 것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바리새인처럼 거룩하게 행동하는 저였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도 참아준 엄마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냈습니다. ‘엄마 너무 힘들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이혼 안 해줘서 고마워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속을 털어났습니다. 누구누구야 요즘 잠을 못 자 수면제를 먹는데 잠이 안와서 꼬박 날 샐 때가 많아. 외할머니가 치매로 돌아가셨잖아 내가 그럴까봐 두려워서 잠을 못 자. 저는 그 순간 50 평생 함께 하면서도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맛난 음식, 멋진 여행으로 보여주는 효도만 하려 했지 깊은 곳에서 울고 있는 한 영혼의 두려움을 외면하고 있었던 겁니다.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내 생각만 하고 살았구나. 엄마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한 적이 한번도 없구나. 부모님과 동생은 지옥을 살고 있는데 나만 편안함으로 살고 있었구나 이 양육을 받는 중간에 이분은 어머님께 영접기도하고 어머님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분의 또 다른 고백입니다. 그러나 다 됨이 없는 인생입니다. 어느 날 늦게 일어난 딸에게 벌로 계란 후라이를 시켰습니다. 먹고 있는데 짠 내가 확 나더라고요. 소금을 많이 친 것 같습니다. 싱크대에 토하면서 성질이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그날 큐티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제가 얼마나 싱거우면 하나님이 딸을 통해서 소금을 뿌리셨겠습니까? 딱 맞는 말씀을 주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얘야 메일 큐티하고 기도하니까 너 뭐 된 것 같지. 100% 죄인이야. 매일 매일 말씀 소금 안 치면 뉴스 중독에, 음란에 명예 중독에 빠질거야. 그러니 내 말씀 짜더라도 받아 먹어 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루라도 말씀을 비추지 않으면 버려질 인생입니다. 저를 붙드시고 매일 말씀이 큐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간증을 하시는데 저희 교회 시골에 계셨던 부모님과 정신지체 동생과 온 가정이 같이 나와서 기도하고 함께 찬양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말씀이 내면화, 육신화, 체질화되어서 살아낸다라는 것, 그런데 사실은 제가 얼마나 견고한지 잘 안됩니다. 인정중독, 성공중독에 빠진 삶, 그게 잘 안되니까 하나님께서 이번엔 이런 카드를 쓰시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우리들교회 말씀을 처음 알려주신 분은 저희 어머니이십니다. 제 삶의 스승이고 멘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도, 건축을 할 때도, 순간순간 어려워질때마다 저는 어머니께 기도하고 상의합니다. 하나님께 묻는 것보다 어머니께 묻는 것이 더 많습니다. 현재 어머니는 뇌출혈로 2년째 의식이 없이 누워계십니다. 제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영적인 마마보이 같은 저를 이제는 물어볼 곳이 없게 만드시고, 이제 하나님 앞에 물어봐. 이제 하나님 앞에 서봐. 말씀대로 산다면서 그런 말씀 앞에 엎드려봐. 그리고 네가 정말 말씀의 인도를 받아 라고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가 웃시야가 죽어야 소명을 받는 것처럼, 장모님의 제 아내의 웃시야였고, 어머님은 제 인생의 웃시야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인생이 되게 하시려고 성령께서는 저희가정을 이끄시고, 만지고 계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며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인 것을 너는 아느냐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가려고 내가 사역하고 있고,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잘먹고 잘 살고 적당히 존경받고 편안함으로 세워지는 것이 제 인생의 목표가 되어 버렸으니까 주님께서 저를 흔드시는 것 같습니다. 저의 장모님은 수정아 예수 잘 믿다가 천국에서 만나자 그러시는 것 같고, 그렇게 말씀을 남기고 가셨고, 침대에 누워계신 의식이 없는 저의 어머니를 보면 꼭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완규야 나 너희 교회가서 예배 드리고 싶다. 꼭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조용히 저를 돌아봅니다. 나보다 기도도 많이 하시고, 나보다 말씀 더 사모하시는 우리 어머니는 누워있고, 나는 왜 서 있지. 나는 왜 이렇게 살아 있지. 나는 왜 이렇게 서서 말씀 전하고 있지. 나보다 훨씬 나은 분인데. 그래서 나를 왜 살려 두셨나 생각해봅니다. 내가 사역을 하고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약속을 유업을 받아,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유업으로 받아 그 약속들을 증거 하라고, 구속사 약속들을 증거 하라고 나를 살려두셨나보다 100% 옳으신 주님이 제가 정신을 못 차리니까 그저 인정중독에 빠져서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니까. 그래서 저의 어머님이 누워계신 것 같습니다. 저의 한계는 여전합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생인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여전히 보잘것없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인정중독을 매일 매일 벗어날 수 있도록, 그런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전히 도망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사명에 눈뜨지 않으면 양육하면서 6과의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내가 목마르다 했을 때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하셨던 예수님, 마지막 십자가에서도 사명 때문에 목마름을 고백하셨던 예수님의 사명 그것 아니면 저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양육을 하면서 뭐가 이렇게 힘드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성도들이 말합니다. 금리가 올라가는 것이 힘듭니다. 5억 빚을 졌고, 5억을 빚져서 빌려줬고, 주식을 하다 잊어버려 그 빚을 내고 있는데 금리가 올라가니까 이자를 내야 될 돈들이 막 쌓여가니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일하면서도 정말 힘빠지겠다 무슨 저렇게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남들이 보면 참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도 얼마나 힘이 빠질까. 살 맛 없겠다. 그러면서 생각이 듭니다. 그럼 금리가 내려가면 살만한가. 잘 되도 교만해지고, 안되면 비굴해지고. 교만과 비굴 사이만 왔다 갔다 하다가 살아가는게 인생인데. 사명이 아니면 살아간다는 이유가 뭔지도 모르고, 왜 사는지에 대한 결정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구나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그렇게 열어주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쓰임 받고 계신 김양재 목사님 그리고 우리들교회 그 강물이 흘러서 금강 자락에 있는 저희 같은 교회가 받아 먹고 삽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의 삶의 간증과 나눔들로 살아가고 있는 교회들이 있다는 것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들교회 모습이 세계속의 대안이 되는 것처럼 그래서 여러분 여전한 방식으로 이 자리 지켜주시는 것이 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구나를 저도 확인하며 이 길을 가겠습니다.

     

    [적용질문]

    신분, 성별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약속이 이 땅에서 이어져가는 것이 그 약속을 누리는 것이 우리 사명이라고 합니다. 정신지체 동생,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자녀, 누워계셔서 의식이 없으신 어머니 모두 예수님 안에서 약속을 받기 위해 걸어가고 있는 예수님의 지체들인 것이인정이 되십니까?

    지금도 나는 사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인생임이 인정이 됩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율법앞에 정죄받고 내 인생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때라고 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약속을 이어가는 사명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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