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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 12절~18절 - 성령의 돌보심주일설교 요약 2022. 5. 24. 12:17
본 문 : 사도행전 15장 12절~18절
제 목 : 성령의 돌보심
설교자 : 김양재 목사님
삼위일체 하나님도 우리 구원을 위해 서로 의논을 하셨겠죠? 무엇을 하셨을까 역할대로 돌보셨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돌봄 받는 사람이다. 돌보심의 뜻은 슬픔이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로하고 방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잘 돌봄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잘 돌보게 될 것이다.
1.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12절) 베드로의 장렬한 변론은 온 무리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온 무리가 잠잠해지자 바나바와 바울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었다. 두 번째 보고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왜 콕 집어서 말했을까. 믿음이 연약한 유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다. 표적과 기사가 있으니까 유대인들이 그 정도라도 믿는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니라고 했다. 유대인은 표적과 기사를 좋아했는데 남이야기가 아닌 우리 이야기이다. 그 어떤 표적보다도 진짜 표적은 십자가이다. 유대인들에게는 기복적 관점으로 보고를 했지만 진짜 영이 통하는 사도들에게는 눈높이에 맞춰 보고를 했다. 그런데 이 대단한 보고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바울은 구원을 위해 자랑을 하지 않고 절제하고 있다. 상황 속에서 역할이 바뀔 수 있고 그것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린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질서와 상황이 상관없으니 순종이 안 된다. 바울은 얼마든지 예수 믿어야 의롭게 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이것이 눈높이에 맞춘 것이다. 이것이 효과적인 돌보심 같다. 성령이 바울을 돌보셔야 바울도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을 거다. 눈높이의 적용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령의 돌보심으로 나를 돌보면, 가정을 돌보고, 사회를 돌보고 나라를 돌보는 것 같다. 각자의 눈높이에서 돌보심을 받고 돌보는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좋겠다.
[적용질문]
가정이나 회사에서 목장에서 눈치를 보느냐, 무시를 하냐, 눈높이를 맞추냐
눈높이를 맞춘다면 구원때문인가 열등감때문인가.
2. 성령의 돌보심 두번째로 하나님의 심방입니다. 야고보의 심방입니다. (13절) 내말을 들으라 한다. 더 자신이 있는 것 같다. 외식하는 유대주의자들을 베드로는 형제들아라고 불렀다. 야고보는 무슨 죄가 있어 애통하며 형제들아라고 했을까. 항상 우리의 구속사는 예수님 없는 한 개인은 무능하고 부패하다는 생각을 늘 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대충 알 수 있다. 왜냐 전적으로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이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고 한다. 이것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기막힌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고정관념을 가졌다. 갈라디아서 2장보면 야고보는 기둥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왜 안 믿었을까. 우선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사생아로 봤을 것이다. 그러면 돌로 쳐 죽여야 할 엄마하고 형을 보면서 살 때 말할 수 없는 수치심으로 형 때문에,... 예수님을 비난했을 것이다. 배움도 없는 형이 자기가 메시아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다. 그러니 형제들이 미친 형을 붙들러 다녔다. 예수님은 성령 받지 않고는 바라볼 수 없는 거다. 집집마다 말씀을 못 알아들으면 똑같다. 식구들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식구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경륜이었고, 성령님께서 효과적으로 돌보신 것이다. 형을 비난하면서도 초막절에는 왜 숨어서하냐고, 나타내서하지라며 기복적으로 바랬다. 즉, 가족들이 위선자, 기회주의자였을거다. 예수님도 살았을 때 형제들이 잘 믿었으면 좋았겠으나 하나님의 경륜은 몰랐을 것이다.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면서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다(히브리서 5장). 이런 예수님의 역할을 보면서 형제들이, 식구들이 미쳤다고 해도 슬퍼하지 말자. 베드로가 대단한 변론을 해도 최후판결은 베드로 가지고 안 되는 것이다. 주님이 야고보를 찾아가시니까 단번에 변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방이다. 이방선교를 위한 법적 판결을 위해 야고보에게 맡기셨다. 야고보에게 맡기고 나니 예수님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내고 모든 것을 봐왔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특권이고 이것이 효력을 발휘했다. 그때그때 맡겨지는 역할에 순종하면 이것이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방인의 심방입니다. 가장 확실한 관심의 표현은 직접 찾아가는 것이다. 목장에 출석하는 것이 가장 큰 의미이다. 이때에 목장에 하나님께서 심방하신다. 야고보는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방문한 것을 이방인의 집에 하나님께서 심방하신 것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표적으로 우리를 심방하신다.
[적용질문]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방이 따뜻하게 느껴집니까. 귀찮게 느껴집니까. 목자의 심방이 즐거우세요? 부담되세요? 마음에 안든다고 톡방에서 나간적은 없나요?
3.성령의 돌보심은 말씀과 일치해야 한다. (15절)최종은 말씀과 일치해야 한다. 돌보심의 결론은 말씀과 일치해야 한다. 이론적으로 성경을 인정해도 삶에서 말씀의 인정을 받지 않는다면 안 된다. (16절) 다윗의 후손 예수님만이 다시 세울 수 있는데 (17절) 선택된 유대의 남은 자와 모든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유대인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이 주를 찾기 위함이라고 말한다.(18절) 이것이 주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이방인들을 위해 헬라어 70인역을 이용한 야고보가 바로 눈높이를 맞춘 것이다. 우리가 표적과 기사를 보아도, 돌봄을 주고 받아도 중요한 것은 성경대로 되어야 한다. 성경대로 하지 않는 나의 열심은 이단이다.
[적용질문]
말씀과 일치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하는 모든 예배를 잘 드리는가, 모니터에 열려있는 화면이 몇 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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