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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23절~34절 - 성령의 알리심주일설교 요약 2025. 10. 23. 08:34
성령의 알리심
사도행전 17장 23절~34절
김양재 담임목사
에피쿠르스와 스토와 둘 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기 때문에 이 두 철학은 아덴을 온통 우상 천지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쾌락주의나 경건주의나 예수가 없으면 둘 다 육은 악하기 때문에 다 선한 게 없다는 걸 아셔야 돼요. 아무리 쾌락주의고 아무리 경건주의라 그래도 예수가 없으면 말짱 꽝인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늘 새 것을 알고자, 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제사를 드리지만 아덴 사람들이 끊임없이 추구하며 목말라 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앎이였어요. 물이 범람하는 홍수에 가장 필요한 것이 마실 물이라고 하죠. 그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했고 또한 안다고 생각하며 정답이라고 생각했기에 또한 두려워했습니다. 이 알지 못하는 두려움은 결국 종교심이 되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숭배하는 행동으로 이어졌고 이 세계의 지성이라고 불리운 사람들이 한 일은 결국 돌과 신상을 세워 숭배하는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바울이 전쟁터 같은 아리오바고에 끌려가 그러니 이 사람들 앞에 무슨 메시지를 선포했을까요?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라고 오늘 성령의 알리심을 선포합니다.
오늘은 성령의 알리심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첫째로 바른 앎을 알게 하십니다. 23절입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어떤 목자님은 지난주 나눔에서 목사님이 새로운 추구를 평가 절하하는 것 같이 들려서 인정이 잘 안 되는데 아마도 담임 목사님은 이런 새로운 학문의 매력을 못 느끼시는 때문일 듯하다고 나눔을 하셨어요. 그래서 이분은 인공지능에 굉장히 지금 몰입하고 계시다고.
주전 3세기 헬라의 과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왕으로부터 어려운 문제를 받습니다. 새로 제작한 왕관이 왕에게 제공한 그 순금으로 제작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불순물이 섞였는지를 확인하라는 거예요. 겉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고 무게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그렇다고 다 만들어진 왕관을 다시 녹일 수도 없고 그리고 너무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생각해도 방법이 보이지 않자 이제 머리를 식힐 목욕탕에 갔어요. 물이 가득 찬 육조에 몸을 담그자 물이 넘칩니다. 그때 머릿속으로 뭔가 번쩍 떠오른 아르키메데스가 찾았다 알았다 이제 라고 외치면서 벌고 벗은 몸으로 거리로 이제 뛰어나왔다고 해요. 밀도가 다른 물체의 부피를 물로 젤 수 있다는 원리를 발견한 것이죠. 이 발견의 기쁨이 부끄러움도 다 잊게 했어요. 이 원리로 아르키메데스는 왕이 낸 이 어려운 문제를 풀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늘 새로운 것을 알고자 했던 아덴 사람들이야말로 이런 발견의 기쁨을 아주 추구했을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 기쁨조차 죄로 부패했기에 엉뚱한 방향으로 이끈다는 거예요. 우리가 더 자극적인 죄악을 발견하는 데 더 빠르고 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증거입니다. 그래서 늘 대부분은 아덴 사람처럼 이기고 이기려고 알기를 소원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발견하고 기뻐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또 발견하고 그래서 결국은 내가 직장을 얼마나 다닐 수 있는지, 내 자녀는 대학교 입학할 수 있는지, 내가 장차 결혼을 할 수 있는지, 코로나 백신은 부작용이 없는지, 우리는 정말 너무너무 알고 싶어 합니다. 이 땅의 삶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 그리고 죽음 너머를 알고 싶어 하고 그 때와 그 시를 너무 알고 싶어 해요. 하지만 내일 일을 알지 못해서 두려워하고 또 알기 때문에 두려워해서 그래서 뭔가 믿을 만한 우상을 세워 놓습니다. 나의 노후를 보장해 줄 것 같은 돈 우리 아까 집사님이 100년 노후를 위해서 선물 옵션을 했대잖아요. 돈, 자식, 학벌, 외모 등 그런 우상들을 세워놓고 결국은 그 우상들의 통치를 받죠. 아덴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어요.
아덴 사람들을 보면 그러니까 바른 앎이 없으니까 결국 나무와 돌에 신상을 만들고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의지하여 숭배하고 절하는 행위를 하는 거예요. 이 똑똑한 아덴 사람들이 우리와 너무 똑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아레오바고 설교가 이제 이래서 선포됩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합니다. 이건 뭔가 지식을 가르치겠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너희를 옭아매는 그 앎이라는 것에서 벗어나는 앎, 깨달음을 알게 하리라 합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에서 평안을 주는 바른 삶을 알게 하리라 합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여러분의 앎은 두렵게 하는 앎입니까 편안하게 하는 바른 앎입니까?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죽어라고 위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뭐 부모들은 또 엄마들은 특별히 자녀죠 자녀의 내 일을 알지 못하고 죽어라고 위합니다. 우상이 됩니다. 천국에서는 식구로 안 만나고 구원받은 사람들끼리 만나는데도 눈 앞에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죽어라고 위하는 예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알리심 두 번째는 삼위의 하나님의 사역으로 알리십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아덴 사람들을 위해서 얼마나 생각하고 설교했는지 여러분 오늘 정말 여러분 아덴 사람들한테 이 설교가 들리기를 바래요. 24절부터 27절까지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우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치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 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4절에 만물을 지우신 천지의 주재이신 성부 하나님의 이 감춰진 경륜는 너무 커서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실 수가 없죠. 하나님은 감추어져 있기에 우리 욕심대로 부릴 수 있는 도깨비 방맹이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26절에 연대를 정하시고 경계를 한정하셔서 이 땅의 여인의 자궁 속에 점 하나로 낮아지심으로 이 땅 속으로 디자인하시면서 성자 하나님으로 리빌드 나타내셨어요. 25절에 성령 하나님이 생명으로 이제 호흡과 생명을 주시고 효과적으로 도우셔서 이제 삼위 하나님이 이렇게 도와주셔서 이제 알리시는데 그 감춰진 하나님이 결코 멀리 계시지 않지만 인생은 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게 하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너무 감추어져 있는데 바로 옆에 있는데 이게 고난이 없이는 이게 찾아지지 않는 거예요. 옆에 있는데도 몰라요. 여기 오래됐어도 이 말씀이 안 들리잖아요. 그러니까 기다림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그것도 더듬어 찾는다고 그래요. 내 옆에 하나님이 계신데 아덴 사람들에게 하는 얘기예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일단 모두 언급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이제 이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아덴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소개를 한 거예요. 왜냐하면 이들은 구약도 모르고 하나님도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아덴의 철학자들인 그들에게 스토와 학파의 사상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25절에서 바울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이렇게 인용을 했는데 이거는 세메카의 말이에요. 신이 인간들을 섬기려 하기 때문에 신은 섬기는 자를 원하지 않는다를 그대로 인용한 거예요. 또 26절도 세네카의 말과 이제 연대를 정하시고 뭐 이제 이렇게 거주의 경계 이런 거 세네카의 말과 거의 같다고 합니다. 바울은 무실론자인 에피크로스 학파보다 신의 존재를 인정했던 스토와 학파의 논리를 따라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예수님 때도 사두개파는 잘 살잖아요 귀족이에요. 그래서 거기는 부활이 없어요. 그런데 바리새파는 경건해요. 그래서 부활을 믿어요. 근데 부활을 믿으면 멋있어 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죽일 때는 둘이 한 패가 돼요. 그러니까 우리도 다 이렇게 진영 논리로 싸우지만은 예수를 믿는 걸 핍박하는 데는 다 한패가 또 이제 되는 거죠.
우리가 바울은 당대에 가장 유명한 세네카의 명문장들을 이용하면서 그냥 아주 제발 좀 들으라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제 문화적 자긍심에 충만했던 아테네 철학자들과 시민들이 사도바울의 설교를 듣고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기들보다 더 잘하는 지금 이제 세네카를 그냥 막 언급하니까 입이 다물어졌어요. 히브리어를 헬라어를 너무 잘한다는 사람 앞에서 막 히브리어를 더 잘하는 사람이 얘기하면 이 사람이 일단 입을 다물잖아요. 그건 나만 아는 건데 바울 사도는 그 사람의 눈높이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영혼 구원이 목적이 되면 그런 것이 저절로 되는 게 있어요. 각자 인생이 다르기에 그 인생의 언어를 우리가 공감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귀신 들린 여인에게도 공감하지만 아덴 사람하고도 공감하기 위해서 공부는 어렸을 때부터 좀 해둘 필요가 있기는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고기 잡는 어부에게는 어부의 언어로 또 목동이에게는 목동의 언어로 세리에게는 세리의 언어로 다 이렇게 제자를 부르셨잖아요. 또 농부의 언어로 그 유대인들에게 그 관습과 전통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들의 언어로 알리셨어요. 우리 인생도 이혼의 언어가 있고 사별의 언어 도박 상인, 농사 학자의 언어가 다 달라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한 분야의 전공 고난이 있고 큐티를 열심히 하다 보니까 영혼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니까 그 사람 그 사람에 맞춰서 이렇게 언어를 좀 쓸 수 있는 그런 이제 힘을 주신 것 같아요. 영혼 구원 때문에 안타까워 하니까요. 근데 어떤 분이 제 설교 리플을 달면서 목사님 사별을 한 가정의 고통은 어디 가서 얘기를 해야 되나요? 너무 괴로운데 어디 가서 위로 어딜 가도 위로 되는 곳이 없네요. 글쎄 제 설교 밑에다 그렇게 리플을 다셨어요. 제가 사별한 사람들의 언어로 다가가지 못했나 봐요. 아니면 이분은 전혀 설교가 안 들릴 수 있죠. 그리고 그 설교에서 문자적으로 제가 사별했다는 얘기를 안 하면은 이렇게 그게 나하고 다르다고 이렇게 생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자적으로 이렇게 정말 그냥 그러니까 안 들리는 종류가 참 많잖아요. 그죠? 이 고난이 와도 이제 안 들리시는 분이 있잖아요. 말씀이 없어서 안 들리고 그 다음에 이제 또 저를 신뢰하지 않아서 안 들리고 그런 그 글의 답글로 이런 답글이 달렸어요. 저도 남편 사별한 지 한 달 되었어요.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가는 목장을 통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힘들고 괴로움을 토해낼 수 있는 공동체에 속하시면 좋겠습니다. 따끈따끈한 사별의 언어로 공감을 해 주시니까 제가 너무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그런데 이 아덴 사람의 언어로 해도 못 알아들었죠. 하여튼 그 삶 속에 그들의 언어로 알리는 것이 성령의 알리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격분을 잘못 이해하여 함부로 말하고 낮아지기보다는 정죄하고 껴안기보다는 판단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오해하고 알린다고 하면서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들의 언어로 말할 때는 낮아짐이 필요하고 자기 부인이 필요한 거예요. 누군가를 공감해 주는 거는 낮아짐과 자기 부인이 필요해요. 그냥 말로 어 안 됐어 위로 받아. 이래서 위로 되는 게 아니에요.
천지를 창조하시고 삶 속에 생명을 불어넣으신 하나님께서는 이거를 추상적인 개념으로 역사하시는 게 아니에요. 오늘 가장 중요한 구절은 26절이에요. 구체적으로 오늘 지금 내 혈통 내 수명의 연대 그리고 내 거주의 경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발견할 수 있고 알리신다고 말씀하세요. 철학자들이 일생 찾고 찾고 또 찾았던 진리 그것은 오늘 내 삶 속에 임한 말씀으로 우리는 그분을 더듬어 찾을 수 있고 만나며 교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게 가장 중요한 구속사인데요. 자 성부 성자 성령 중에서 예수님의 사역 정말 중요하죠. 왜냐하면 감춰진 하나님의 경륜이 이 땅에 예수님이 낮아지심으로 이 땅의 경계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셨다면 이 구속사는 일어날 수가 없는 거잖아요. 성령님도 그러면 효과적으로 도와주실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의 경계 속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 예수님의 이 자기 비하 이거는 굉장한 것이죠.
그런데 죄인인 우리의 특징은 이 모든 경계를 허물고 싶어 해요. 시편 16편 6절에 내게 줄로 재어진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으며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하셨는데도 혈통을 허물고 연대를 허물고 경계를 허물어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벌어 오래 살고 싶어 하고 혈통을 벗어나고 싶어 해요. 부모의 자리 아내의 자리 다 벗어나고 싶어 해요. 하나님이 허락한 거주의 경계를 그냥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어요. 왜 못 벗어나느냐 돈이 없어서 갈 데가 없어서 그런데 조금만 힘이 생기면은 끊임없이 거주의 경계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혈통을 벗어나고자 해요. 바람 피고 돌아다니면서 경계를 허물어요. 내 가정과 경계를 버리고 도박하거나 경마하면서 전부 다 명분은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을 위해 그랬다는 거예요. 우리 그 주식 집사가 늘 내가 사랑하는 아무 아무개 를 위하여서 이렇게 주식을 하는 거라고 이렇게 얘기해요. 나아가서 창조질서인 남자와 여자의 경계도 허물고 싶어 하고 그래서 부부의 경계, 부모 자식간, 속상함은 다 가출해서 몇 년 동안 안 다 이거를 경계를 허물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죄싸움입니다.
아담도 창조주와 피조물인 이 경계 이것을 허물고 하나님이 되고자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우리가 자녀를 낳는 수고를 하고 땀 흘려 수고하는 수고를 겪게 하셔서 이 죄인의 경계를 알게 하셨어요.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으시고 끝없는 한계 상황과 전쟁으로 아리오바고 같은 이 지옥 같은 삶의 전쟁으로 내가 이 경계를 자극해서 아내의 경계, 남편의 경계, 자녀와 부모의 경계 나아가 창조 질서인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잘 지켜 그 경계에 맞는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이 그때 자신을 알리시고 더듬어서 찾아서 알게 하시고. 그 우리의 삶의 언어로 그 하나님을 알리시는 이 말씀이 기억이 나고 이 경계 속으로 거주의 경계 혈통의 경계 속으로 찾아오신 그분을 만나는 것이죠. 이것이 성령의 알리심입니다. 아덴 사람에게 이렇게 설교했어요. 바울은 지금 아레오바고하고 광장에 홀로 서 있습니다. 이 도시를 변화시켜 보겠다고 스스로 온 게 아니에요. 그냥 저도 우리 나라 서울을 변화시켜 보겠다고 한 적이 없어요. 쫓기고 쫓기고 이끌려 와 보니까 그것이 아래오바고가 됐어요. 전쟁의 언덕이 됐어요. 그런데 내가 그때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 수도 없고 이제 말씀이 있으니까 치지도 않고 내게 허락하신 이 자리에서 여전한 방식으로 애통한 마음으로 전하고 알리니까 이끌려 왔지만 결국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사명의 자리가 된 줄 믿습니다.
야곱도 12 아들 중에 평생 요셉 바라기를 했죠. 근데 결국 주님을 더욱 진하게 만난 유다를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어요. 왜냐하면 유다는 며느리와 동침하고 아들을 낳았어요. 그리고 눈에 보이는 베레스가 가문의 수치로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고 있어요. 언제 봐도 항상 부끄럽습니다. 이 혈통을 벗어나고 싶어요. 저절로 죽을 때까지 유다는 겸손합니다. 우리의 오픈이 우리를 겸손케 해서 우리가 여기가 죄인들이 많아서 우리는 늘 예배 때마다 눈물이 있어요.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세요. 요셉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고 후에 형들에게 팔려가서 흉년의 백성까지 구하고 보디발의 아내의 그런 유혹도 다 거절하고 그 누가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 유다라고 하겠습니까?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성령이 알리심으로 구속사를 알아야 되는데. 요셉이 맨 처음에는 고난이 있어서 너무 이렇게 가다가 그다음에 계속 너무 그냥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만 받고 유다는 아무리 믿었어도 맨날 손가락질만 받고 여러분들 우리가 오픈을 했다고 모두가 우러러 봅니까? 그냥 아는 사람이나 우어로 보지 우리들 교회나 다른 데 가면 여전히 손가락질 당하죠. 요셉은 총리 대신이 됐잖아요. 올림픽에서 금메달 하나만 따도 평생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우러러 보니까 하나님 자리에 요셉이 갔죠. 그래서 마지막에 경계를 넘었어요. 그 당시 하나님의 대리자인 영적 아버지 아버지죠 야곱 그를 영적 아버지 장자 차자를 거꾸로 축복을 했다고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서 아버지 틀렸다고 성을 냈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거역한 거죠. 마지막에 창세기 48장에 그 얘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영적 경계를 지키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정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유다 난 평생에 입을 다물고 살아요. 우리는 전부 다 이제 요셉이 주인공인 줄 알고 창세기 37장부터 48장까지 우리는 요셉 우리는 요셉이 너무 좋잖아요. 아무리 유다가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라고 해도 우리는 눈만 뜨면 요셉이 좋아 부르다가 죽을 이름 요셉, 요셉만 있다면 경계를 허물고 그 혈통을 다 벗어나고 싶어. 유다 집에서 탈출하고 싶어. 저 시아버지하고 며느리하고 동침한 이 집안 나는 싫어.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 이렇게 되는 거죠.
근데 우리는 그냥 예수를 알면 최고라 이거죠. 구속자가 이렇게 인간의 힘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이 유다를 부르짓는 교회가 진짜 얼마나 모든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교회겠어요. 그런데 오늘 아덴 사람들을 위해서 오늘 제가 설교해요. 제발 우리들교회 아덴 이 설교를 듣는 아덴 사람들이 오늘 이 설교를 좀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안 돌아오더라고 아덴 사람들이 이런 마음으로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있어요.
적용 질문이에요. 내가 넘고 싶은 경계는 무엇입니까? 내가 지켜야 할 혈통의 자리는 어디예요? 부모 형제 자녀의 자리 다 벗어나고 싶습니까? 배우자 남편 아내 자리 다 벗어나고 싶어요? 그곳이 아레오바고 같은 전쟁터입니까? 아니면 너무 편안한 환경이라서 지키고 싶습니까? 편안해서 지키고 싶으면 이제 흘러 떠내려갈 수가 있어요.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사명을 찾아야 되는 거예요. 사명 고난이 뭐 축복이겠어요? 유다는 예수님의 그러니까 이 고난 받은 한 사람이 주님을 암으로 인해서 그 고난이 왜 축복인가 하면 유다 한 사람으로 온 세계가 지금 복을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들교회도 고난 받은 한 사람의 오픈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지만 나 혼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많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명을 감당하도록 지었거든요. 사명을 모르면 늘 불안한 거예요.아버지께서 본처와 자녀 3명이 있었는데 어머니를 속이고 저와 누나를 낳고 나서 아버지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대요. 그 아버지도 참 오랫동안 속였네요. 그러니까 외가에서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도 있고 그래서 빨리 너 미국에서 새 출발하라. 그런데 어머니가 고생길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저와 누나를 위해서 가정을 선택하시고 사셨다는 결국 명절마다 본처와 어머니는 늘 만나고 아버지는 형제자매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지만은 다 참으시면서 가정을 지키셨대요. 나는 자라면서 아버지처럼 절대로 바람 피지 말아야지 평생 살았는데 아버지보다 더한 바람을 핀 죄인이 되었다는 거에요. 아내도 이혼할 이유가 충분한데 말씀이 들리고 목장에 붙어 있으면서 드디어 이혼을 철회하고 가정을 지켰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과거에 나를 버리지 않고 가정을 지킨 어머니와 현재 나를 버리지 않고 가정을 지킨 아내가 제일 멋있대요. 엄마와 아내는 엄마의 경계를 지금 지킨 거잖아요. 혈통의 자리도 지켰어요. 본처도 인정하면서 살았어요. 너무 멋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남편도 말씀이 들렸어요. 아내하고 저기 엄마만 훌륭한 게 아니고 그 전에는 목사님이 훌륭하다고 앞에 썼어요. 목사님도 멋있다. 목사님이 멋있으니까 아내도 멋있고 엄마도 멋있는 거야. 그 목사를 미워하는 사람은 결국 아내도 사랑할 수 없는 거예요. 저를 욕하면서 아내하고는 잘 지내는데 목사가 이상하다. 그거 믿으시면 안 돼요. 장차는 아내도 미워할 거예요. 그걸 아시고 목사님 미워하고 나는 좋아하니까 됐어 그거는 조두라고 해요.
그래서 성령의 알리심 세 번째는 우리는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것입니다.삼위 하나님이 알려주신 결론은 우리는 하나님의 소생 28절 29절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 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28절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익숙한 헬라 시인의 글을 지금 인용합니다. 세네카를 인용하고 지금 이제 에피매니데스의 작품으로 간주되는 그런 이제 비씨 600년 경에 활동한 크레다의 시인이죠 크레다 근데 이제 거기에 어떤 말이 들어 있냐 하면 왜냐하면 우리가 당신 안에서 삶의 움직이며 존재하기 있기 때문이오라는 시구를 지금 인용했다고 바울이 했잖아요. 근데 우리 그의 소생이라 이 말도 에피 메니데스보다 더 유명한 시인 아라토스의 시를 또 인용했어요. 바울이 그들의 그 내용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삶 속에서 그 경계 안에서 그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너무너무 열심히 지금 복음을 전했어요. 모든 세메카의 그냥 에피메니데스의 그냥 아라투스의 그 언어를 다 가져와서 우리가 듣기에는 성경 같은데 그래서 그거 철학을 이렇게 모르면 이 설교가 좀 어렵다고 생각이 되죠.성령께서 아덴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알리시는 내용은 네가 그렇게 경계를 지키고 혈통에 이런 한계를 잘 지키고 있으면 바로 네가 하나님의 소생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걸 알게 된다는 거예요. 경계를 잘 지키고 있으면은 와 내가 그를 힘입어 살아야 되는,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야 되는 하나님의 자녀 아들 딸이라는 거 이게 내 신분 의식이 딱 생긴다는 그러니까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너희가 알아야 되는 존재가 아니라 모르더라도 그를 힘입어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뭔가를 더 알고 더 또 알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말 그 하나님은 우리가 의존해야 하는 존재임을 이제 그들의 언어로 알려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얼마 전 TV 프로에서 날 때부터 고아로 자라난 한 청년이 나와서 이제 엄마를 찾고 싶다고 했는데 이제 세 번을 고아원에다가 버리시고 이제 세 번을 찾아왔는데 마지막은 어린 두 명의 동생과 함께 이제 놀면서 이렇게 과자를 한 아름 사주고는 그다음에 두 동생 데리고 사라지고 평생 못 봤다는 거야. 18살에 이제 도망 나와서 도망 나올 때까지 모든 가정이 자기처럼 사는 줄 알았대요. 다 엄마랑 떨어져서 자신처럼 사는 줄 알았다가 정상적인 가정을 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충격을 이제 받았는데 그렇게 버린 엄마를 왜 찾냐고 했더니 그냥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렇게 답을 했어요. 이 청년 혼자 스스로 살아야 됐어요. 잘 곳이 없으니까 노숙하고 먹을 것이 없으니까 훔쳐 먹고 소년원에 가고 자고 먹고 사고 뭐든지 스스로 알아야 하고 자기 지식을 키워야 하고 싸워야 해요. 그런데 워낙 소년 이런 존재가 아니잖아요. 엄마의 보호를 받고 아빠의 보호를 받고 무조건 이제 전적으로 거기에 의존하면서 자라야 될 그런 존재잖아요.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빠가 막 죄를 짓고 교도소로 가고 그 가정을 깨뜨리고 그러니까 이제 스스로 힘과 지식을 기르니 늘 두려움과 원망 슬픔 속에 살아가고 늘 의지할 대상 우상을 만들게 되는 거죠.
마찬가지로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깨뜨렸기 때문에 우리는 자전적으로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생이니 하나님을 힘입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니까 내가 뭐든지 하려고 하니까 맨날 노숙자가 되고 그냥 혼자서 먹다가 그거하고 똑같아요. 부글부글 끓고 혼자서 해야 되니까 스트레스 많고 너무 두렵고 그러면 안식이 없고 맨날 주먹을 불끈 지고 다 틀려먹었어. 이 고아 청년을 보면 그러지 않게 생겼어요. 다 원망하고 그냥 다 뿌셔버려 이 세계 이러고 사는 거예요. 그니까 우리가 예수 없는 사람이 지금 그런다고요 아덴 사람이 지식으로 지금 이렇게 캄프라치 하고 있지만 두려움과 원망 슬픔 속에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인생의 전쟁에서 그러므로 나의 한계를 경험할 우리는 내 존재를 깨닫는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거를 깨달아야 되는데 아덴 사람이 못 깨닫잖아요. 그러니까 복음 전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왜냐하면 자기 한계 상황을 지금 못 깨달으니까 자기가 발견한 거를 정말 벼룩이가 그냥 예 벼루기 간을 저 하늘에서 보면 다 똑같은데 자기가 조금 더 낫다고 이런 생각을 하니까 말씀이 안 들어가는 거예요.
네 번째는 우리가 진짜 성령의 알리심에 최고의 정점은 회개한 바울의 삶 자체가 성령의 알리심입니다. 회개만이 성령의 알리심이 된다는 거예요. 30절 31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바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 30절에 자신이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걸 모르니까 자기가 과거에 하나님 알지 못하던 시대에 자기가 어떤 죄인인지 뼈저리게 아는 사람이었잖아요 그런데도 여기서 간과했다고 그래요. 그것은 그냥 넘어갔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해 행했던 것들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값을 치루셨다는 거예요. 이것을 아는 사람은 회개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회개란 복음을 듣고 이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돌보신다는 그 소식을 들어서 내가 지금 앉아 있는 모압 땅에서 공동체와 함께 일어나 그 땅을 떠나는 거를 말해요. 아덴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땅을 떠나라고 하면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들었다면 지금 내가 바울 자체가 증거라는 거예요. 나도 핍박자요 포행자였다. 전에는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 그런데 이제 내가 이제 증거를 모든 사람들에게는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 내가 바로 그 증인이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지만 알고 나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 큰 진노가 임하니까 너희들 그렇게 안 믿다가는 지옥 가는 거야. 바울은 생명 내놓고 지금 여기에서 그동안에 매도 많이 맞고 감옥에도 갇혔는데 아덴이라고 안 그러겠어요. 근데 그거를 다 불사하고 지금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바울의 아덴 사람들을 향한 이 사랑과 이 전함이 여러분 느껴집니까? 정말 바울 속에 늘 자신이 얼마나 죄인의 큰 죄인의 괴수인지 자기가 살인자였는지 우리는 말씀이 임하면은 성령께서 자신의 모습을 알리셔요. 알게 하세요. 내 취약한 모습을 보게 되면은 우리는 진짜 십자가를 붙들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회개한 바울의 삶 자체가 성령의 이제 알리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증거며 우리도 회개의 간증이 명백한 증거가 되어 또 다른 사람에게 회개를 불러일으키며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사건이 너의 사건 바울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내 사건, 나를 위해 구주께서 죽으신 나를 자녀 삼기 위해서 죄인 중에 괴수인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신 사건임을 전하는 이것이 아리오바고 설교의 절정이고 유대인의 회당이나 이방인이나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죽은 자의 부활 이 바울 설교에 그대로 여기서 이걸 얘기했어요. 바로 죽으심과 부활은 바울도 우리도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것을 알리신 거죠.그러니까 이제 그들이 32절에 죽은 자의 부활을 들었어요. 그런데 반응은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너희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절에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났다고 그래요. 부활을 안 믿죠 그 바리새파는 믿었는데 여기 세상 사람들 는 지금 이제 둘 다 다 에피크로스나 스토아나 부활 안 믿어요. 안 믿는 이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니까 자신들이 지금 이제 안 믿는 이 시대에 진보고 보수고 안 믿는 사람들은 둘이는 따로 원수처럼 여기다가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데는 한 마음이 딱 되게 돼 있습니다. 그게 누구도 선한 사람이 없어요. 진짜 복음을 그래서 전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제 부활을 안 믿는데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니까 자기들이 글쎄 그렇게 돌에다가 신상을 조각해놓고 섬기면서도 그렇게 미신을 숭배하면서도 도리어 바울을 완전히 미신 같이 보인다. 그러면서 조롱을 지금 하죠. 사도 바울을 아주 조롱을 합니다. 얼마나 조롱이 특별했는지 누가는 신약 다른 곳에 쓰이지 않는 단어로 이 조롱을 표현했어요. 이것이 이 똑똑한 철학자에게서만 나온 조롱은 아니고요. 그 어그니 같은 단어가 쓰인 곳이 딱 한 군데 있는데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을 본 유대인들도 조롱하여 성도들을 새 술에 취했다고 했어요. 그니까 예수 믿는 너무 잘 믿는 유대인들도 성도를 조롱했고 지금 아덴 사람들도 바울을 조롱했잖아요. 그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순간부터 모두에게 조롱받을 각오를 해야 되는 거죠.
한편 그 또 다른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다시 듣겠다고 했잖아요. 근데 이거는 이제 믿기 거부한다는 데 대한 완곡한 표현일 뿐이에요. 왜냐하면 아덴 사람들은 정답이 생기는 순간 두려움에 빠지잖아요. 이 정답이라는 걸 알게 돼서 두려움이 임해서 세상의 지성인들이 복음을 맞다고 생각해도 미꾸라지처럼 거부하면서 빠져나가니까 예 그러니까 이제 바울이 더 듣겠다고 했는데 그다음 33절에 떠났다 그랬잖아요. 들을 마음이 없다는 거죠. 이제 그게 다 그렇게 나와 있어요. 이처럼 믿을 만한 증거를 하나님이 주시는데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믿음이 없으니까 말씀을 전하는 바울은 떠나게 됩니다. 근데 믿을 만한 증거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과 같아요. 그런데 증거를 주니까 알아서 믿으라는 뜻이 아니고요. 믿을 만한 증거를 주신 하나님께서 그 증거를 믿을 수 있는 믿음 또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것은 사실 믿어지는 것이죠. 믿어지니까 믿는 거지 이게 은혜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떤가요? 34절에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으니 그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슈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세상 정신과 한바탕 영적 전쟁을 치르고 아리오바고를 떠나는 바울을 몇 사람이 가까이 합니다. 그 바울이 증언한 믿을 만한 증거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까이 한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사람들이에요. 여기서 이 가까이 하다라는 헬라오 단어의 어그는 풀이라는 뜻이에요. 성령의 각론 설교에서 바울을 따르는 딱풀 성도를 말했죠 그때 그 따르다라는 단어처럼 이 가까이하다라는 단어는 풀로 붙인 듯 가까이 붙어서 따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에서만 아니라 아덴에서도 비록 소수지만 딱풀 성도가 생긴 거예요.
그런데 나는 보니까 어떤 부목자님이 어떻게 목사님은 그렇게 비속어로 딱풀이라는 단어를 쓰냐 이러면서 그렇게 저를 그냥 엄청 비난을 하시더라고요. 그 문방구에 딱풀도 있잖아요. 비속어 아니에요 아이들한테 풀 파는데 그 비속어 쓰겠어요 그런데 헬라오에 이 풀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런데 이분이 그게 해석이 안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여기 오늘 이거 이제 완전히 들으셨죠? 근데 그다음 주에는 또 헬리 나우앤을 나보고 욕한다고 그래가지고 이제 뭐 비속어 쓰고 그래가지고 막 떠날 생각도 하셨다고 그래가지고 부목자님인데 오늘 제가 양육을 합니다. 헬레나우엔을 제가 욕한 게 아니고요. 그 동성애 때문에 힘들어 해서 그런 글이 나왔어요. 그래서 너무 힘들었지만 그 사람을 동성애라고 욕을 한 게 아니고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없이도 구원받는다는 만인구원설를 그가 이제 성직자로서 그 예수 없이도 우리는 다 구원받을 수 있다. 보편 구원설 이거를 전했기 때문에 이건 우리가 격분을 해야 되는 일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가장 좋게 예수를 알이라.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해도 예 동성애를 해도 예수를 믿을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가 동정을 했다는 게 아니고 그것 때문에 이 진리를 이제 왜곡시켰다. 그런데 내가 왜 저 헬리 나우웬을 욕하냐 이게 여러분들 가운데는 욕하는 것밖에 모르는가 봐. 나는 그렇게 바빠서 욕할 시간이 없어.
자 그래서 그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은 없지만은 교만한 도시 아덴에도 소수의 성도가 생겼다는 거예요. 디오누시오 아리오바고 그러니까 이 수많은 설교를 철학자들의 강론을 들었지만은 이 아덴에서 이 두 사람의 남녀의 이름이 이 사람은 지도층이었어요. 디오누시오 근데 그 이제 다마리는요 이 사람은 뭐 귀부인이었는지 술집 여자였는지 이제 모르겠지만은 술집 여자였을 확률이 또 더 많다고도 해요. 그런데 2천 년 동안 아덴에서 이름이 기록된 두 사람이잖아요. 할렐루야 아 그러니까 제 정신 가지고 못 믿었을 거 같아요. 술집 여자 쪽에 무게를 실어요. 귀부인이었으면 이런 데 안 왔을 거 같아. 그러니까 이게 다 구속사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 설교가 너무 사도행전에서 정점인 설교다. 동의가 되기도 안 되기도 합니다. 그 이방인에게 전해진 한 독특한 설교인 것은 사실인데 너무 힘들었을 아덴에서 최선의 설교를 했다고 보여집니다. 오늘 저도 아덴 같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최선의 설교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믿고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아덴에는 열매가 하나도 없었어요. 우리도 그에 열매가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할일루에 이 마음이 좀 전달이 되십니까? 교회는 회개한 사람들의 삶이 가장 강력한 성령의 알리심의 메시지예요. 이번 목욕탕 큐티 목회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딱풀 같은 디오누시오 다마리 같은 지체들의 간증이 3일 내내 강력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온라인이지만은 랜선을 넘어 말씀을 통해 부어주시는 은혜가 흘러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교회가 날마다 말씀으로 성령이 알리심으로 이 귀한 사명을 이어가기를 소원합니다.
적용해 보세요. 알지 못했던 시대에 행했던 죄약은 무엇입니까? 나의 회개한 삶 자체가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성령의 알리심이 되고 있습니까?
어제 큐티 본문은 역대아 29장 히스기아 어머니 아비아 근데 스가라의 딸이죠 외할아버지 스가라의 신앙을 저기 뭐야 본 받아서 너무 악한 남편 그 아스 밑에서 히스기아를 신앙으로 키운 그 아내 얘기가 나왔는데 어저께 고등부 아이가 수원 가정법원에서 재판을 받는데 그 아이 앞에서 엄마가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고백하면서 회계를 했다는 거예요. 우리도 꽤 온 지 1년도 안 되신 엄마인데 날마다 말씀 붙잡고 회위에 눈물을 쏟아내시고 5년 동안 남편 얼굴 본 적도 없고 진흙탕 이혼 소송 중에 이분은 말씀이 들려서 이혼 소송을 처리하는 적용을 하셨대요. 이렇게 몇 년이 있어도 회계가 안 되지만 오자마자 회계가 되는 사람도 있어요.회개하며 적용하고 공동체에 딱풀이 되어 가시니까 이분의 회계가 가장 성령의 알리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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