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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베소서 6장 10절~17절 - 하나님의 전신갑주
    주일설교 요약 2025. 9. 6. 09:43

    2025년 8월 31일

    하나님의 전신갑주

    에베소서 6장 10절~17절

    이성훈 목사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심리학자들이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학생들을 두 그릅으로 나눠 한 그룹에는 의사 가운을 입히고 다른 그룹에게는 평상복을 입혔다. 그리고서 집중력 테스트를 했다. 그랬더니 의사가운을 입은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집중력과 주의력이 현저하게 높았는데 실수를 하고 오답을 한 비율이 50%나 적었다고 한다. 수치적으로 굉장한 거잖아요. 착용자인식이라고 하는데 착용하는 옷이 우리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현상이 있다는 연구가 잇다고 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옷을 입으라는 말씀을 종종 합니다. 에베소서만 봐도 4장에 새사람을 입으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로마 감옥, 어떤 집에 감금된 상태로 에베소러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감금되었기 때문에 24시간 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로마 군인이고, 교대를 해서 사람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은 로마 군인의 갑옷, 전신갑주는 이 바울이 보기 싫어도 24시간 봐야 했을 겁니다. 만약에 바울이 갇혀 있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고 속상했다면 로마 군인의 갑옷을 볼 때마다 짜증이 났을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주안에서 갇힌자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로마의 갑옷을 보면서도 깊이 묵상을 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입어야 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첫 번째는 끝까지 서게 합니다. 여러분 끝으로 하니까 다 끝난 것 같고 결론 같아요. 그런데 안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중, 끝으로.. 끝나는 줄 알았지만 마지막으로 하시면서 말씀을 이어감) 바울이 말하는 끝으로를 헬라어로 보면 진짜 끝이다. 결론이다란 의미도 있지만 더욱 강한 의미는 끝까지이다. 지금까지 사도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서 우리 성도들이 받은 복이 무엇인지 충분히 설명했다. 그 구원의 선물에 합당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훌륭한 가르침을 다 주었다. 들을 것 다 들었으니까 이제부터 너희들의 인생이 마치는 그 끝날까지 끝까지 어떻게 해라. 주 안에서 강건해져라는 사도바울의 응원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잘 보시면 강건해져라 수동태이다. 힘 내라가 아니라 힘을 받아라고 수동태로 명령을 하고 있다. 왜요? 복음을 아무리 듣고 훌륭한 가르침을 우리가 잘 들어도 우리의 몸과 마음은 우리 머리처럼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오히려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좋은 말씀을 들으면 더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보여서 더 낙심이 되고, 절망이 되고, 위축이 된다 말이죠. 세상에 힘을 내야 한다는 것 몰라서 힘 안내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내가 내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힘내서 열심히 해야 하는 것 다 알지만 그냥 우리는 힘이 안 날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더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주 안에서, 주님의 힘의 능력으로, 바울이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보이시죠. 힘만 써도 되고 능력만 써도 되는데 주님의 힘의 능력으로 오직 힘의 원천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힘에 의해서 우리가 강건해져야 된다. 그러니까 사실, 바울은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의 힘으로 강건하게 해 달라고 같이 기도하면서 지금 우리 한번 힘내보자, 잘해보자 응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중요한 당부를 하는데요.(11절~13절) 우리는 힘이 없어서 나 아무것도 못하겠어 그렇게 자주 말을 합니다. 힘이 안나, 하고 싶은데 힘이 안나 그렇게 말하는데 힘이 안나기 때문에 어떻게 하라고요? 바울은 힘이 안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고 말한다. 힘이 안나기 때문에 주저앉지 말고 힘이 안난다고 누워있지 말고, 힘이 안나기 때문에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뜻과 상관없는 아주 슬픈 현실이 하나 있죠. 성도의 인생은 전쟁이라는 거죠. 우리 인생은 전쟁터와 같다. 그것도 눈에 보이는 혈과 육을 상대하는 전쟁이 전부이면 사실은 좀 쉬울텐데 그러한 전쟁이 없다는 것이 아니죠. 그러나 혈과 육, 사람과의 전쟁 사건과의 전쟁이 끝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현상에 불과하고 진짜 무서운 전쟁은 영적인 전쟁이 있다는 겁니다. 세상의 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전쟁이 있는 것이고, 마귀의 간계로 넘어트리려는 영적전쟁이 우리가 진짜 치러야하는 전쟁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이 땅에 있는 동안 에클레시아 밀리탄스라고 합니다. 싸우는 교회라는 겁니다. 전쟁하는 교회입니다. 영적 전쟁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세상의 죄를 향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악과 갈등하지 않고 싸우지 않는 교회는 영적으로 죽은 교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와 갈등하면서 싸우면서 고민하면서 힘들어하는 그런 전쟁을 치르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영생이 없는 것이고 우리가 성령을 떠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마귀의 간계는 너무도 치밀하고 교묘하다는 것이 문제이죠. 누구나 알아보는 특별한 악이 있습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죄악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서워요. 심각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너무도 평범해져서 악인지도 모르는 악들이 더 심각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의도적인 악보다 더 심각하고 무서운 것은 의도하지 않고서 무지중에 행한 악, 악인줄도 모르고 행한 악이 사실 더 심각한 악이다. 그래서 습관화 된 악, 관습화 된 악, 제도화 된 악도 있고, 법제화된 악도 생기기 시작합니다. 세상은 정의를 외칩니다만 실제로는 불의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우스게소리면서 생각하게 하는 오래된 말이잖아요. 바늘 도둑은 벌을 받지만 나라 도둑은 왕이 됩니다. 게다가 마귀는 지금도 쉬지않고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가만히 엿보다가 작은 틈만 생겨도 그 틈을 파고드는 것이다. 우리의 상처를 콕 찍어서 우리를 쓰러트리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오늘은 좀 좋은 하루를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은 정말 주님만 의지하면서 거룩하게 감사하면서 살겠습니다 이런 생각 안하면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몇분이나 계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고, 큐티책을 펴서 말씀을 보면서 하루를 맡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큐티를 하고 결단을 하고 적용을 했지만 점심이 지나서 오후가 되면 어때요? 우리도 모르게 짜증과 화와 불만과 원망이 가득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상대하는 사탄은 우리가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겁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치러야 할 영적 전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고, 잊어버리면 안되는 특징이 있는데 이 영적전쟁은 이미 승리한 전쟁이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의 모든 권세를 물리치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를 얻었어요. 다 이겨놓은 싸움을 우리가 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치르고 있는 힘든 상대와 싸우기 때문에 너무도 힘들고 지치지만 우리가 싸우는 이 싸움은 뭔가를 이겨서 빼앗는 공성전은 아닌 겁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을 하라고 하니까 두렵지 않아요? 겁나지 않습니까? 어떤 전장으로 우리를 지금 내 모실지, 어떤 수고를 감당해야 할지 너무도 긴장이 되는데 우리가 정작 나아가서 싸워야 할 전쟁은 공선전이 아니라 수성전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다 이기셔서 이미 점령하고 계신 구원의 성을 우리는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 자리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 전신갑주 입혀 놓으시고 치르라고 하신.. 돌격 해서 화살이 빗발치는 그 전장으로 내 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 나를 세워두신 이 자리에서 오늘도 주저하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지만 그 자리는 가만서서 잘 지키게 하시는 것, 그 자리에 서게 하시는 것, 그것도 끝까지 서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영적인 전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늘 생각하면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부담을 느낄 때도 있고,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하나 생각도 들지만 깊이 생각을 해 보세요. 말씀을 생각하고 우리 자신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큐티를 하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 수준을 잘 아신다. 우리가 감당할 만큼의 과제만을 남기신다. 우리의 눈높이를 너무 잘 아시기 떄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 수준에 맞는 것을 맡기시면서 함께 인도해 가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리, 서 있는 자리, 각자 자리 잘 지키고 주저앉고 싶을 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일어나시고, 누워있고 싶을 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다시 일어나셔서 그 자리 잘 지키시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적용질문

    내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할 부분은 어디입니까? 요즘 나를 유혹하고 공격하는 마귀의 간계는 무엇입니까. 내가 끝까지 서서 버텨야 할 지리는 어디입니까.  

     

    두번째, 내가 맞춰야 합니다. (14절~15절) 군복입은 군인을 우리는 거리에서 보면 바로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얼굴만으로 군인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고, 머리 스타일만 보고 맞추기는 어렵다. 예외가 있더라고요. 제가 중학교 1학년때 일이었다. 할아버지 차를 타고 동두천을 지날 때인데, 당시는 일대에 헌병 검문소가 많이 있었거든요. 보통은 무사통과입니다. 그런데 헌병이 우리차를 세우더니 제가 타고 있는 쪽으로 오더니 창문을 내리라고 해서 창문을 내렸더니 헌병 아저씨가 제게 휴가증 좀 보여주세요 하는 겁니다. 저는 휴가증이 뭔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긴장하고 있었는데 옆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껄껄 웃으시더니 얘 중학교 1학년이에요. 내 손자에요 그러셨다. 군복보다 더 군인처럼 보이게 하는 13살 소년의 얼굴이 바로 저의 얼굴입니다. 당시에는 머리를 짧게 잘랐거든요. 얼굴이 20대 청년으로 보였나봐요. 

     

    로마 사람들은 얼굴이나 갑옷 없이도 로마 군인을 거리에서 알아볼 수 있었는데요. 로마 군인들이 항상 차고 있던 허리띠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 군인의 허리띠는 나 군인이다라는 표시였습니다. 그것을 보면 소속 부대도 알 수 있고 역할도 알 수 있고 이 마치 군번 줄 처럼 벨트가 그런 역할을 했다. 그래서 로마 군인에게 벨트를 빼앗긴다는 것은 군인에게 너무도 모욕적인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군인은 어디를 가든 이 벨트를 차고 다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벨트를 찼다가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풀어놓았습니다.그래서 모든 전신갑주 중에서 제일 먼저 착용했다가 제일 먼저 푸는 것이 로마 병사의 벨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진리를 허리띠에 비유했을까요. 그것은 성도의 삶에서 모든 일이 진리로 시작해서 진리로 끝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 우리가 늘 하는 것,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우리의 감정들 이런 것들을 우리 마음대로 하면 거기서 죄밖에 더 나오겠습니까? 늘 거짓이 나오고 속임수가 나오고 사기가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생각, 말, 행동 선한 것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러니 그것을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꼭꼭 묶어야 하는 겁니다.우리의 생각을 단속하고 우리의 말을 묶고 우리의 행동을 결박해서, 말씀으로 결박해서 묶어 두어야만 우리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들이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는 것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첫 단추인겁니다. 

     

    그 다음에 전신갑주의 본체는 눈에 들어오는 것은 로마 군인들이 입는 호심경이다. 말이 좀 어려운데 옛날 영화 보시면, 로마 군인들이 갑옷, 몸통, 쇠의 조각을 잘 이어부쳐서 번쩍한 철 조각을 입고 있잖아요. 그것이 호심경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 의로우심을 호심경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인본적인 옳고 그름의 노예에요. 태어날때부터, 나이가 들어서도,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양육을 받고 말씀을 들으면 들은 말씀이 있기 때문에 흉내는 내지만 변하지 않는 남아 있는 우리의 죄성은 나는 옳다. 기회가 되면 이 생각이 그냥 나옵니다. 내가 옳다. 내가 이런 취급 당할 사람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이것이 다 나의 의인 것이죠. 내가 옳다. 내가 맞다. 인본적인 옳고 그름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 모습인겁니다. 그러면서 서로 내가 옳다 내가 옳다 외치면서 서로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싸우고 다투고, 그러다 더 큰 상처를 남기고 더 큰 악을 저지르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막을 길은 인간의 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의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하고 많은 수양을 하고, 이런다고 우리의 본성적인 악이 내가 옳다라는 악이 그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에 대해서는 2000년전에 철학자들이 하는 말이나. 요새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말하는 정의나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우리 인생을 내가 옳다라는 함정에서 건지지 못합니다. 이것을 막을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져 주신 겁니다. 무슨 뜻이에요? 우리의 죄를 당신의 죄인것처럼 져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의로 죄악에 물든 우리를 의롭다 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로 바꾸면, 그리스도의 의는 당신이 나보다 옳습니다 고백하는 겁니다. 주님이 저보다 옳으십니다. 저는 주님 앞에 섰을 때 100% 죄인이고, 주님이 저를 인도해가시는 지금이 이해가 안되고 저는 알 수 없지만 감춰있는 하나님의 뜻이지만 그래도 주님이 옳다는 것을 제가 고백합니다. 인정합니다. 믿습니다. 주님이 저보다 옳으십니다.따라서 주님께서 제 옆에 두신 이 꼴보기 싫은 남편, 무시가 되는 아내, 정말 나의 뱃속에서 나왔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자녀들, 존경할 수 없는 나의 부모들, 내 주변에 두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나보다 옳습니다. 내 의를 완전하게 내려놓는 것이 의의 호심경,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영적인 무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로마군 샌들이 있습니다. 가죽끈을 묶은 것처럼 보여서 우리가 지금 볼 때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기능성 신발이었다. 발과 발목을 보호해줄 뿐 아니라 밑 창에 쇠구슬 같은 것이 달려서 어느지형을 가던지 쉽게 걸을 수 있고 빠르게 진군을 할 수 있는 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였다. 위급할 때는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런 샌들에 해당하는 것이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이다.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었다. 원수 되었던 것에서 평안을 맛보게 되었다. 평안을 얻었고 누리게 되었다. 구원을 통해서 평안을 누리게 되었으니까 우리 마음에 새로운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내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겠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겠구나, 옛사람처럼 살아선 안되겠구나 그런 마음이 (여러분 우리가 다 그렇게 못산다 할지라도 예수 믿고 세례받는 수간에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아요.)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 평안을 좀 누려야 하는데, 복음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나아가 나만 평안할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내 가족, 이웃에게 평안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같이 평안을 누려야 하는데. 우리가 다 실행은 하지 못해도 새로운 마음 자체는 우리에게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준비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 새로운 의지, 주님을 향한 새로운 마음입니다. 

     

    이것이 평안의 복음이 새로이 준비한 것인데 자 그러면 왜 이것을 신에 비유했을까요. 왜 이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햇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가고 싶은 곳 가는 것 너무 좋아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유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면서 억울해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해요. 그러나 예수 믿은 후의 인생, 새로운 마음이 생긴 다음에는 내가 가고 싶은곳,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내시는 그곳에,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이 일을 내가 하겠다. 그 신이잖아요.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에 가는 것, 나는 너무 가기 싫지만 주님이 가서 섬기라고 하시니까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그 마음을 가지고서 그 사람에게 나아가라는 것이죠. 남편을 섬기고, 아내를 섬기고, 자녀들을 섬기고 부모들을, 이웃을 섬기면서 평안의 복음이 전파되도록 섬기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이번 여름 TT 가셔서 느끼셨던, 누리셨던 평안인줄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보통일이 아니다. 우리는 입맛 하나 바꾸는 것도 어렵다.새벽예배 때 된장 국에 멸치 안넣은 아내를 원망했다는 말씀을 듣고 제가 너무 한심하더라고요. 사무실에서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해주는 것만으로 고마운 줄알으라고 했는데 이것이 우리 모습니다. 입맛 하나 바꾸는 것, 입맛 하나 내려놓는 것 쉽지 않다. 평생 쌓여진 나의 고집하나 꺾는 것이 정말 어렵다. 절대로 우리 힘으로는 살 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나를 맞추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요. 로마군인의 전신갑주가 있고,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있다. 비유관계가 있기 때문에 비슷한 점이 있는 겁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병사들을 보면서 묵상을 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로마 군인의 갑옷은 갑옷이 군인의 몸에 사이즈를 맞춰야 해요. 자기 몸에 맞는 사이즈를 입어야 갑옷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우리가 전신갑주의 사이즈에 맞춰야 합니다. 내가 그 갑옷을 입기에는 너무 살이 쪘으면 우리가 살을 빼야하고, 너무 말랐으면 우리가 살을 찌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우리의 삶을 맞춰가야 합니다. 그래서 전신갑주에 내 삶을 맞추고 내 몸을 맞추고 내 생각과 말을 맞추는 훈련을 우리가 매일 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그것이 바로 큐티이고 말씀앞에서 내 고집을 깨닫고, 그 고집에 대해 회개하고 그 고집을 꺾는 순종의 적용을 하나 하는 것이 지금 너무 비대해진 나의 몸을 줄이고 다이어드하고, 너무 마른 나의 몸에 살을 찌워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맞춰가는 우리의 훈련인겁니다. 매일 아침마다 큐티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우리의 몸을 맞추어서 우리를 넘어트리려는 사탄의 모든 공격을 막아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질문

    가정에서 내 고집을 꺾고 주님의 진리에 맞춰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학교나 직장에서 주님의 의에 맞춰야 할 선택은 무엇입니까?

    '주님만 따르겠다'고 결단했지만 아직 시작하지 못한 발걸음은 무엇입니까?

     

    한 성도님의 나눔인데, 힘들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욕이었대요. 그런데 아들이 유년부에 가서 예배 후 나눔을 하면서 자기가 엄마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개새끼라고 예배 시간에 나눈 거에요. 그 이야기를 엄마가 듣고서 너무 수치스럽고 챙피해서 어쩔 줄 몰랐다고 목장에서 나누신 겁니다. 그랬더니 목자님이 목장에서 앞으로는 거기서 ㄱ을 ㄴ으로 바꾸세요. 내 새끼로 바꾸라는 거죠. 저도 예전에는 고난은 믿는자에게 고난이 무슨 말이냐. 고난은 나에게 좀 안생겼으면 좋겠다. 고난은 안생겼으면 좋겠다. 욕 좀 안먹게 해 주시고요. 제 인생에는 모든 게 평탄한 시온의 대로가 되어서 제가 하는 모든 것들이 승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안 생기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했는데 우리들교회 와서 양육을 받고 인생을 돌아보고 쥐어짜가면서 이렇게 하다보니까 안생기게 하는 기도는 말이 안되는 기도구나. 그래서 어느순간부터 하나님 고난을 잘 당하게 해 주시고, 욕도 잘 먹게, 비난도 잘 먹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마음에 안들어서 개새끼라고 부르는 자식을 내 새끼라고 부르고 고난 안당하기를 바라는데서 잘 당하고 욕도 잘 먹는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사탄의 공격을 막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번째, 내가 가져야 합니다. (16~17절) 전쟁터에 나간 군인은 허리띠, 신발, 호심경은 절대로 벗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방패, 검, 투구 이것은 계속 쓰고 있기는 쓸 필요도 없었고 쓰고 있을 수도 없었을 것 같아요.손에 들고 있기도, 머리에 쓰고 있기도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믿음을 사도바울이 믿음의 방패라고 하는데 믿음은 그야말로 방패처럼 성도의 모든 것을 지켜줍니다. 사탄이 날마다 우리에게 쏘아대는 불화살, 각양각색 종류가 너무도 많잖아요. 다 헤아릴 수도 없어요. 의심, 불안, 분노, 두려움, 미움, 우울, 낙심, 절망, 쾌락, 중독, 폭력, 집착 등 종이에 다 쓰기에는 시간이 모자를 정도로 온갖 공격을 우리에게 퍼붓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감정을 통해서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인 영향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러한 온 갖 불화살들을 날리는 겁니다. 한발만 맞아도 우리는 휘청거립니다. 말 한마디 들어서 일주일을 앓아 눕잖아요. 말 한마디에 무너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불화살을 소멸해서 맞는 순간에는 따끔할 수 있고 뜨거울 수 있지만 불이 활활 타올라 우리를 삼켜버리도록 잘 막아야 하는데 그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내가 지금 이런 공격을 당하고 있고, 내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여서 불타는 듯한 상황에 있지만 그러나 내가 택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지키고 계시구나. 하나님이 나를 지금도 돌보시고 하나님이 나를 지금도 인도해 가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사탄의 수많은 불화살을 소멸하고 타지않게 지킬 수 있는 겁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햇잖아요.믿음이 이기는 겁니다. 이 믿음을 우리가 방패처럼 늘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군인들은 방패를 놓을 수 있지만 우리는 방패 믿음을 놓지 말고 계속 가지고 잇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구원을 투구라고 하는데 의미심장한 것 같아요. 우리 머릿속 생각을 지키는 것이 다름 아닌 구원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 구원, 구원을 이야기합니까? 왜 설교시간마다, 큐티할때마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이 중심이 되어야한다.인생의 목적이 구원이고 거룩이어야 한다. 왜 그렇게 외칩니까? 그것은 우리 생각에 중심이 구원이 되지 않으면 바로 그 순간에 우리 머리속에 가득한 악하고 음란한 생각들이 우리의 삶을 헛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생각할 때 세상의 헛된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 겁니다. 구원을 생각하고, 구원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고 모든 일을 구속사적으로 분별해서 해석할 때 우리의 삶이 사탄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합니다. 전신갑주 중의 유일한 공격무기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하나님의말씀은 어떠한 검보다도 예리한 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검에 비유합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사탄에게 반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탄의 시험을 뭐로이기셨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죠. 그런데 바울은 믿음의 방패와 이 말씀의 검과 구원의 투구를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가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내것이 아닌 것을 빼앗아서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 것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이 믿음과 구원과 말씀, 이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잖아요. 이것을 우리가 잘 받아서 간직하고 있는 겁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을 가진다 가지라는 말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방패와 말씀의 검과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완성하는 마지막 단추인겁니다. 

     

    그런데 가지라는 명령은 언젠가 가져라, 지금 당장 아니더라도 가져야 하는거야. 가져야 마땅해 그런데 너희들 가져야돼 그런데 때는 너희들이 알아서해라는 말이 아니다. 지당한 어떤 원리나 원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에는 명령형에도 시제가 있어서 그 시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데 이 명령은 지금 당장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미룰 일이 아니라 언젠가 해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무엇을? 믿음의 방패를, 말씀의 검을, 구원의 투구를 지금 당장 이 말씀을 듣는 이 시간, 즉시 그것을 손에 들어라 그러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가 전쟁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해요. 잊어버리거나 알면서도 일부러 잊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내 삶은 전쟁통이에요. 불화살들이 다 날라와서 지금 모든 삶이 다 타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직면하기 싫으니까 외면하는 것이죠. 나는 아무 문제 없다 그러는 거예요. 남들은 다 아는데, 목장식구들은 다 알아서 지금 너무 안타까워하고 애통해 하는데 나는 내 문제를 보려고 하지 않아요. 실제는 이 전쟁통인 것이죠. 그래서 그렇게 문제가 일어나는데도 애써 외면하니까 성경이 있어도 펴지 않고 큐티책 사놓고도 큐티하지 않는겁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하죠 뭐 이러는 겁니다. 지금 당장 믿어야 합니다 나중에 믿을게요. 지금 당장 하셔야 합니다. 지금 제가 형편이 안되니까 나중에 형편되면 할게요. 지금 당장 섬겨 주세요. 주차봉사 좀 다음주부터 해주세요. 지금 너무 일이 많아서 나중에 할게요. 나중에 상황이 되면 할게요. 때가되면 하지 이것이 우리가 많이 부르는 주제가 중에 대표아니에요? 사탄이 우리에게 노리는 것, 우리를 공격하려고 노리는 기회 중에 제일 가장 좋은 기회가 바로 우리가 나중에라는 말을 할 때라는 겁니다. 제 말이 아니라 c.s 루이스의 말입니다.  우리가 나중에라는 생각을 할 때가 사탄이 노리고 있는 순간이라는 겁니다. 무슨 순간이냐. 우리를 지옥으로가장 안전하게 인도해갈 그러한 순간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방패는 들어야 방패고, 검도 들어야 검입니다 투구도 머리에 써야 투구이다. 땅에 내려놓고 있으면 그냥 고철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을 들을 때 오늘 에베소서 4장 10절 17절 말씀 들었을 때 오늘 즉시, 이 시간 즉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잠시 손에서 놓으신 분이 계십니까? 너무 무거워서, 다른 일이 급해서, 믿음의 방패 내려놓고, 말씀 검 내려놓고, 구원의 투구 잠간 벗어두신 분 계세요? 지금 즉시 다시 손에 잡으시기 바랍니다. 머리에 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수성전이 하나님이 이루신, 주님이 이루신, 승리를 지키는 수성전이 주님께서 마련하신 그 영광스러운 마지막 승리의 나를 맛보게 하는 그 귀한 과정이 되기를 바라고 우리 모두 다 최후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적용질문

    요즘 어떤 불화살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까? 다시 들어올려야 할 믿음의 방패는 무엇입니까? 내 삶에서 구원이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까? 말씀의 검을 손에 가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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