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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욥기 5장 1절~27절 - 나라면 을 넘어 주라면 합시다
    주일설교 요약 2024. 3. 6. 03:52

    2024 2 11 

    욥기 5 1~27

    나라면…”을 넘어 주라면!” 합시다

    이성훈 목사

     


    여러분 설 명절에 살아난 이야기 많이 나누셨나요? 원치 않는 이야기 듣고서 또 마음이 상하신 분들도 많이 계실 텐데요. 우리의 전공이잖아요. 레파토리잖아요. 늘 그런 일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은 이렇게 살짝 귀엽게 통통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굉장히 비만이었어요. 몸이 굉장히 비만이어가지고 명절에 우리 가족들을 만나면 그 어르신 중에 꼭 한 분이 저한테 늘 똑같은 말로 인사를 하시는 거예요. 딱 보면 성훈아 잘 있었니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았겠냐만은 그 분은 절 보실 때마다 항상 이러세요. 오 뚱뚱~ 그냥 워낙 친한 어른이어 가지고 제가 그냥 웃고 지나갔지만 몸을 딱 돌려서 잠깐 생각해 보면 아 뭔가 기분이 나쁘단 말이죠. 놀림 받은 것 같고. 여러분 이런 일 명절에 있으셨죠? 저는 워낙 수준이 낮아서 이런 것 가지고도 기분이 나쁘지만 여러분들은 수준이 높으셔서 또 복음 전하다가 핍박받는 말씀 당하셔서 마음이 상하신 분들이 또 계실 것 같아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옛날 이야기에 여러분들 다 잘 아시는 흥부와 놀부가 있어요. 흥부는 착하지만은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 놀부는 못 됐지만은 부지런하고 유능한 사람. 여러분은 이 흥부와 놀부 중에서 누구를 지지하고 싶으세요? 누구 편에 서고 싶으세요? 이 시간 실시간으로 한번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나는 흥부편이다. 흥부, 착한 사람이 좋다. 별로 없네요. 그러면 나는 놀부 편이다. 손들어보세요. 오 놀부가 많아. 놀부가 많아. 여러분은 이제 인생을 살 만큼 사셔서 닳고 달아서 그런 거예요. 

     

    제가 저도 뚱뚱할 때는 뚱뚱한 착한 소년일 때는 순수한 소년일 때는 흥부가 너무 좋았어요. 왜냐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거든요. 흥부가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크면서 보니까 흥부랑은 제가 같이 살 수가 없더라고요. 착하기만 한데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 저 같이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제가 못 됐기 때문에. 오히려 저는 놀부같이 좀 못 됐지만은 부지런하고 유능하고 같이 열심히 으샤으샤 할 수 있는 사람과 같이 살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은 놀부 편을 들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뭐 흥분을 부든 어떤 소설이든 드라마든 뭔가를 이렇게 재미있게 보다 보면은요. 누구 편에 꼭 이렇게 서게 돼요. 누구 편을 들면서 상대를 또 비난하기도 하고 그러면 이제 이게 더 재밌어진다 말이죠. 

     

    요즘 우리 큐티 본문인 욥기에도요. 여러 인물이 등장해요. 욥도 나오고 또 욥의 아내도 나오고 욥의 자녀들도 나오고 그다음에 또 누가 나와요? 하나님도 나오시잖아요. 하나님도 나오시고 천사도 나오고 또 사탄도 나오죠. 그렇죠. 그리고 또 누가 나올까요? 욥의 세 친구가 나와요. 이름 기억하세요?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름도 참 어려워요. 그렇죠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렇게 세 친구가 나옵니다. 

     

    여러분 이제 욥기는 절반 이상이 욥과 세 친구의 치열한 대화 사실 이게 좋은 대화는 아니고 말싸움 하는 거죠. 욥이 한 편 먹고 욥의 세 친구가 한 편 먹고 두 편이서 지금 이렇게 이제 논쟁을 벌이는 것인데요. 다시 한 번 우리 것으로 한번 투표를 해보겠습니다. 나는 욥 편이다. 손들어보세요. 나는 욥 편이다. 욥을 지지한다 생각보다 얼마 없네요. 네 내리시고요. 나는 욥의 세 친구 편이다. 손 들어보세요. 욥의 세 친구 편도 있네요. 보니까 놀부를 지지하는 분들이 욥의 세 친구를 지지하고 흥부를 좋아하는 분들은 욥을 지지하시는군요. 이게 주인공 좋아하시는 분들이 역시 계세요. 그리고 악당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역시 계시고요. 이렇게 우리가 누구 편을 택하면 그 사람은 너무 맞는 것 같고 그 사람에 대해서는 칭찬만 해주고 싶고 극중에서 그 사람과 상대인 그 사람과 대적관계인 사람은 또 나의 대적인 것 같고 이렇게 하면서 우리가 이제 재미있게 얘기할 수 있어요. 욥은 틀렸고 욥의 세 친구는 맞고 또 욥의 세 친구들은 틀렸고 욥은 맞고 이제 이러면서 우리가 읽기가 쉽단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요.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 이런 말을 하는 역사책도 아니고 도덕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에요. 믿으십니까?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읽으려면 성경에 나오는 이 인물들이 그리고 인물뿐만 아니라 그 인물들이 벌이는 그 사건이 그것 자체로 그때 그 당시에 거기에 있었던 실존 인물 또는 실존 사건이라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건 당연한 거고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인물과 그 사건이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다. 무엇인가를 상징하고 있다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태극기 있잖아요. 태극기가 그냥 그냥 그림이에요. 근데 왜 그 태극기가 우리한테 특별할까요? 그냥 모양인데 문양인데. 그 태극기가 바로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태극기는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거예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 종탑 위에도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요. 십자가는 사실은 그거 로마 사람들이 사형형으로 쓰는 거 아니에요? 나무 막대기 두 개 붙여놓은 거잖아요. 근데 왜 우리는 그 십자가를 그렇게 좋아합니까? 막 목에도 걸고 다니고 귀에도 걸고 다니고 집에도 붙여놓고 왜 그렇게 우린 십자가를 좋아해요? 그 십자가가 뭔가를 가리키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상징하기 때문에 그래요. 무엇을 상징합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십자가가 우리한테 너무 귀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욥기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욥이든 욥의 세 친구든 또 우리가 요새 이제 주일마다 묵상하고 있는 설교를 듣고 있는 열왕기하에 나오는 엘리사든 수넴여인이든 게하시든 여호람왕이든 그 인물들이 그리고 그 사건들이 실존 인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무언가를 상징하는 하나님께서 상징으로 사용하시는 기호라는 것이죠.

     

    그러면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 사람들과 욥과 욥의 친구들 그리고 그들이 나누고 있는 이 이야기라는 사건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 같으세요? 다름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 모든 인류, 모든 사람의 공통된 본성을 상징하고요. 가리키고요. 그리고 그 중에 한 명인 나, 오늘 여기에 있는 나를 가리키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성경을 이렇게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주시는 그 이유가 그들이 중요해서 우리한테 지금 너희들 얘네들 잘 보고 배워라 이거 말씀하시려는 게 아니죠.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우리한테 있는 거예요. 이 말씀을 읽는 우리한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 그 사건들까지 다 동원하셔서 하나님이 기록하셔서 얘들아 여기에 나타난 이 인물들이 상징하는 너희들, 너희들의 모습을 보면서 너희는 내 말을 들어라.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한테 있기 때문에 그들을 사용하셔서 지금 우리한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인물들에 대해서 옳고 그름으로 막 이 생각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인물 왜 저렇게 말하느냐 이렇게 화내서도 안 되고요. 그거 그러면 묵상하는 게 아니에요. 또는 내가 무시하는 사람을 왜 저렇게 띄워주느냐 막 이렇게 또 할 일도 아니에요.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여기에 살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 때로는 욥처럼 고난당하는 나의 모습, 때로는 이 고난이 해석이 안 되어서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하는 나의 모습, 때로는 옆에 가족과 지체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도 전혀 공감하지 않고 옳은 소리만 막 던지고 있는 이 또 엘리바스와 같은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내 자신에 대해서 다양하게 다양한 각도에서 묵상하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큐티이자 우리가 해야 되는 묵상의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장에는 4장부터 이제 이어지는 엘리바스의 조언이 등장해요. 엘리바스 이름의 뜻은 목사님께서도 늘 사람 이름 나오면 이름의 뜻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잖아요. 이름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정금이시다. 또는 나의 하나님은 승리이시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바스의 이름에 정금이 들어있고 이제 이 승리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엘리바스라는 인물을 통해서 누군가를 지금 상징해서 보여주기를 원하시는데 그 캐릭터가 있는데 그 캐릭터의 특징이 뭐라는 거예요? 정금 같은 사람 또 승리하는 사람, 이기고 이기는 경험이 많은 사람 그리고 고난이라고는 당한 것 없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잘 누리고 사는 그러한 금수저 같은 사람이 이제 이 엘리바스인 것입니다.

     

    이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 이 세 친구 중에서 엘리바스가 이름도 이제 이렇게 정금이고 승리이기 때문에 대사도 이 셋 중에 제일 많습니다. 엘리바스가 말이 제일 많아요. 지난 주일 설교에서 장황하게 떠드는 설명충 말씀하신 거 기억하세요? 장황하게 설명하는 설명충이 바로 이 엘리바스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 설명충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저는 이 엘리바스 욥기를 이제 우리 묵상을 하는데 말이죠. 욥은 사실 제가 잘 와닿지를 않아요.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제가 당해본 게 또 이제 없잖아요. 너무 비천하기 때문에 욥의 아픔이 잘 와닿지가 않더라고요. 어느 정도의 아픔일까. 근데 이제 제가 너무 이해가 잘 되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그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엘리버스가 이렇게 막 훈수 두고 잔소리하는 게 이제 너무 막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화요일날 제가 새벽 설교를 하고 났더니 어느 목사님이 야 오늘은 설교하는데 이성훈이 엘리바스를 설교하는지 엘리바스가 이성훈을 설교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너무 저절로 저절로 이제 이해되는 게 있어요. 그래서 오늘이 설 명절이잖아요. 설 명절에 오늘 엘리바스와 똑같은 제가 엘리바스는 근데 참 장황하게 설명을 해요. 알기 어렵게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장황한 엘리바스의 설명을 그래도 좀 장황하지 않게 좀 줄여서 여러분들 눈높이에 맞춰서 제가 이 설명해 드리는 오늘 설명절을 한번 같이 가지려고 합니다. ~ 명절이 설명 절이 되는 오늘 이런 말씀 시간이 되길 바래요.


    엘리바스의 조언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오늘 제목에 있는 대로 나라면입니다. 주보에는 그렇게 나왔죠. 나라면. 나라면만 외치면 이 작은 일 설명하다가 끝나는 인생이 되는 거예요. 큰 일을 설명해야 되는데 그래서 사람 살려야 되는데 나라면만 외치면요. 큰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려면 우리가 나라면 이런 한계를 우리가 넘어서 주라면 이렇게 고백하는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요. 우리 말이 나라면 하는 이 훈수에서 끝나지 않고 주라면 하는 간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오늘 말씀을 같이 보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라면을 넘어서 주라면 하려면 첫째는 옳고 그름이 아닌 구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미리 말씀드리지만 오늘 엘리바스의 말은 너무 어렵고 엘리바스는 정금이고 막 이 승리자고 이제 그래서 어렵겠지만 오늘 대지는 제가 장황한 말씀을 쉽게 설명해 드린다고 그랬죠. 오늘 대지는 너무 쉬워요. 이미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가르침과 우리 묵상을 통해서 너무 잘 알고 있는 말씀이니까 전혀 긴장하실 게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넘어서 구원을 생각해야 돼요. 1절이에요. 1절을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너는 부르짖어 보라. 내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내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욥은 지금 너무 괴로워서 막 죽고 싶다고 외치고 있어요. 그렇죠? 그런데 지금 이 부르짖어 보라고 그러는데요. 사실 이 엘리바스의 말은 부르짖지 말라는 거예요. ? 네가 아무리 그렇게 죽겠다고 부르짖어봐야 네편들 사람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에 4장에서 엘리바스가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이렇게 말하거든요. 욥도 예외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면서 네가 지금 당한 고난 때문에 억울하다고 부르짖을 사람 아무도 없고 그 마음 헤아려줄 사람 아무도 없고 네 편 들어줄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너 지금 그렇게 힘들다고 부르짖지 말어 이런 뜻이에요.

     

    이어서 엘리바스는 2절에서 3절에서 미련한 자는 반드시 멸망한다 이런 무서운 말을 해요.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미련한 자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 없다는 것을 모른 채 고난 앞에서 분노하고 시기하다가 결국에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내용만 놓고 보면요. 지금 엘리바스 말은 너무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그런데 엘리바스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뭘까요?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 미련한 자가 누구다 너다 너가 미련한 자다. 그러니까 네가 미련한 가운데 그렇게 지금 멸망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억울하다고 하지 마라. 힘들다고 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엘리바스가 이렇게 아무리 옳은 말을 잘 설명해도 사실 욥의 입장에서 우리가 생각을 해보자면 절대 동의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지금 이 엘리바사 말을 듣긴 긴 이 훈수를 듣고서 자기가 또 힘들다고 또 계속 얘기를 하잖아요. 설득이 안 되는 거예요. 정금 같은 승리만 누렸던 이 엘리바스가 욥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엘리바스 같은 저도 다른 사람 마음 전혀 헤아릴줄 사실은 몰라요. 이게 되는 게 원한다고 되는 게 참 아니더라고요. 더군다나 정치니 역사니 뭐 이런 거 사실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죠? 시험 잘 봐야 되니까.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거 그냥 그대로 잘 배워서 시험 보면 끝이에요. 시험지 푸는 순간 까먹더라고요. 기억이 안 나요. 제가 제가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서 그래요. 그래서 우리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도요. 학교에서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때 배운 내용이라고 하는 거는 진짜 부정적인 내용이 다예요. 이승만 하면 우리가 생각나는 게 아직까지도 생각나는 게 있어요. 남북 통일을 반대했다. 김구 선생과 달리 남북 통일을 반대했다. 두 번째는 전쟁 찬성론자다. 세 번째는 부정 선거자다. 그러니까 이게 완전히 이승만 하면은 독재자요.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을 그냥 우리 어린 아이들 학생들 마음 가운데 그냥 넣어준 거예요. 저도 사실 관심이 없으니까 그냥 그게 그게 다였거든요. 근데 이제 제가 우리들교회에 와서 우리 공동체에서 양육을 받고 또 목사님께서 나라가 있어야 예배를 드린다. 나라 이렇게 가르치면서 가르쳐주시고 또 역사에 대해서 역사가 중요하다는 걸 이렇게 강조하시면서 또 저희에게 알려주시니까 제가 이렇게 좀 배워가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영화를 제가 같이 가서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는데요. 진짜 저는 근데 그 내용을 제가 사실은 시험 역사 시험 제가 뭐 90점 아래로 맞아본 기억이 사실 없는데 선생님들이 알려주는 거 뭐 제가 다 했고 모든 문제집 다 풀고 뭐 참고서 제가 다 보고 했는데 제가 진짜 그거 몰랐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나라를 세울 때 그런 역할을 했다는 거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고 그런 채로 이제 자라났어요. 근데 이제 그게 저만이겠어요. 제가 사실 교육의 혜택을 제일 많이 본 사람이 이런데 저만 못한 사람들이야 어떻겠어요? 그렇죠 다 모르는 거예요. 우리가 다 몰라요. 그러니까 이게 모르면 관심이 없는 데다가 모르면 할 수 있는 일은 왜곡된 것, 비난하고 욕하고 불평하고 탓하는 것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요. 사실 여러분께 진짜 이 자녀들 그거 꼭 진짜 보여주셔야 될 것 같아요. 이게 이걸 정치적으로 보시면 진짜 이게 구속사적으로 묵상이 안 되시는 거예요. 이 편드는 게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그렇죠? 옳고 그름을 또 바르게 잡아야 될 건 또 바르게 잡아야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진짜 그거는 한번 보시고 우리 역사를 아시고 더 중요한 거는 사실 우리가 이렇게 지금 이 시간에 모여서 명절도 보내고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이 나라를 만드신 것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사실 그 한 사람 통해서 만들어주셨다고 생각해요. 바로 저 몇 십 km만 올라가면 있는 북한 땅은 똑같은 말을 쓰고 똑같은 역사를 가진 이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유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을 정말 우리가 은혜 받아야 된다고 목사님 말씀하셨는데 그 말이 진짜 맞는 것 같아요. 우리가 그런 걸 생각하면서 우리가 큐티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생각하고 감동받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팩트 체크 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저처럼 이렇게 남에게 관심 없고 사회에 관심 없는 사람은 그저 내가 내가 옳다라는 생각에 이제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거예요.엘리바스도 마찬가지인 거죠. 뭐가 문제일까요? 내 말이 전부 정답이다. 내 말만이 정답이다라고 착각하는 게 이제 문제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말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 정답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교만처럼 큰 오류가 없습니다. 결국에 이게 태도의 문제인 거예요. 뭘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요. 그 알고 있는 것을 내가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정답을 알아도 태도가 교만하기 때문에 그 정답이 상대방에게 빛을 못 비추는 거예요. 설득을 못하는 거예요. 은혜를 못 주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당해본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당한 사람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여 그래서 사실 미련한 자는 욥이 아니라 누구겠어요? 엘리바스인 거예요. 사실 욥의 상황은 지금 굉장히 특별한 상황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욥은 아무 잘못한 게 없어요. 억울하게 지금 고난을 아무 까닭없이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 욥기에 까메오로 등장하셔서 보여주시잖아요. 하나님이 사탄에게 사탄의 그 질투와 계략에 속아 넘어가셔가지고 마치 그래서 이유 없이 욥에게 이 고난을 주신 것처럼 이렇게 지금 하나님께서 연기를 해주고 계시잖아요. 무엇을 강조하는 거예요? 욥이 아무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랑하실 만큼 의인인데 억울한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다. 이만큼 특별한 상황이다라는 것을 지금 보여주고 계신 것이죠. 그래서 아무리 내 고난이 힘들다. 내가 억울하다고 외치는 사람도 욥 앞에 서면 욥의 이야기를 묵상하는 순간 그 입이 다물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요. 고난의 특별함은 고난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세다고 내 고난 특별하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고난의 특별함은 그 고난이 구원을 위한 것이다. 구원을 위한 고난이기 때문에 그것이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역사상 가장 특별한 고난은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당하신 그 구속의 고난입니다. 그리고 사도와 선지자들이 구원의 사명 감당하다가 당하게 된 이 고난도요. 이 특별한 고난인 거예요. 이 특별한 고난을 지금 욥이 대표로 등장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힘들어서 목장에 오게 되었는데 목장에 가면 나보다 훨씬 더 센 고난을 당하신 분들이 어떻게 말씀으로 살아내시는지 그 간증을 듣잖아요. 살아난 이야기를 듣잖아요. 그러면 우리 어떻게 됩니까? 막 나오는 불평이 입이 다물어져서 나오지 않게 돼요. 그러면서 어떻게 돼요? 내가 힘들다고 하던 그 고난, 나를 사로잡고 있던 그 고난이 이제 객관화되는 거예요.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고난에 대해서 내가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서 예배와 목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고 그 말씀으로 내 고난이 해석되어서 결국에 내가 내 죄를 깨달아서 이제 회개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이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이 과정인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바스는 이런 특별함 전혀 헤아리지 못해요.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특별하기 때문이에요. 나만 특별하기 때문에 주변에는 특별한 게 하나도 없어요.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맨날 하는 말이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이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래라 저래라 내 말대로 해라. 이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엘리바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요. 빌닷과 소발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욥의 세 친구를 돌파리 의사에 비유합니다. 좋은 약은 가지고 있어요. 이 사람들이 옳은 말은 다 알아요. 그런데 그 질병이 얼마나 복잡한 질병인지, 이 환자가 지금 얼마나 힘든 상태인지 전혀 헤아리지 못합니다. 관심도 없어요. 알려고 하지도 않아요. 왜요? 내가 가진 약이 최고거든요. 물론 이 약을 듣고 난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 약이 독약이 되어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 친구의 대사는 성경에 기록된 이 세 친구의 대사는 의미없는 잘못된 말이니까 욥에게 적용되지 않는 말이니까 우리도 다 건너뛰고 묵상하지 않고 건너뛰어도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죠 여기 이거 누구 읽으라고 주셨다고요? 나 읽으라고 주셨다는 거예요. 욥의 세 친구가 중요해서 기록해 주신 게 아니고 욥이 중요해서 기록해 주신 게 아니라요. 나 읽으라고 하나님이 다 일일이 기록해 하셔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이 말씀 앞에서도 생각을 해야 되는 거예요. 욥에게 적용되지 않는 말이라고 나에게도 적용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 욥이요. 이 세 친구들의 말을 사실 들을 필요가 없잖아요. 그렇죠? 맞지 않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어떡하시겠어요? 자리 떠서 떠나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래도 돼요. 근데 이 어떻게 합니까? 끝까지 이 대화가 끝날 끝까지 욥이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어요. 그리고 그 말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듣습니다. 그러면서 아파하고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호소하고 소리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그 자리에서 그 말을 다 새겨 들으면서 같이 생각하고 쉽게 말하면 묵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에는 그 자리에 누가 찾아오세요? 그 자리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우리도 이 말씀을 잘 묵상하면서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여기에 저 같은 엘리바스님들 많이 계시죠? 집에서 엘리바스처럼 직장에서 엘리바스처럼 행세하시는 분들 계실 텐데요.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아는 것이 아시고 계신 것이 제일 특별하다는 그 생각이 오히려 미련한 것임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엘리바스처럼 상처를 준 사람이나 욥처럼 상처를 받은 사람이나 모두가 옳고 그름을 넘어서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서로 죽이는 결론이 아니라 모두를 살리는 구원의 결론을 얻는 줄 믿습니다.


    제 아내는요. 1년 중 겨울을 제일 무서워해요. 왜냐하면 계절성 우울증 증상이 이제 겨울이 되면 심해지더라고요. 그러니까 저도 수년 동안 같이 살다 보니까 겨울이 되면 제가 이제 긴장이 되는 게 있어요. 아내가 우울한 표정으로 저에게 다가와서 대화를 시작하려고 하면 일단은 이제 겉으로는 아주 잘 들어주는 척을 합니다. 공감을 해주는 표정과 말투를 하면서 이제 이렇게 이제 응대를 해주려고 하지만 제 머릿속은 이미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프로세스가 있어요. 이 사람이 오늘 일조량을 충분히 채웠나 이 사람이 오늘 비타민 d를 섭취를 했나 이 사람이 오늘 우울증 약은 잘 챙겨 먹었는지, 이 사람이 오늘 운동은 어느 정도 했는지, 이 사람이 오늘 큐티는 했는지, 이 사람이 규칙적인 생활은 잘하고 있는지. 말은 대놓고 하지 못하지만 제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직설적으로 얘기를 못하지만 지금 그런 상황은 니 몸속에 지금 세로토닌이라는 것이 이제 결핍이 되어 가지고 니가 지금 이렇게 무기력해지고 지금 우울한 감정이 느껴지고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거를 잘 공급해주면은 니가 잘 날 수 있어. 막 이렇게 또 이제 얼마 알지도 못하는 거 아는 척하면서 막 썰을 풀어대요. 설명충처럼 말이죠. 그러면 어느 순간 아내가 앞에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저도 이제 뻘쭘해져서 하는데 그런데 말이죠. 이상하게 그 주간에 아내가 여자 목장 그런 그런 일이 있을 때 이제 아내가 여자 목장 간 시간에 저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시간이거든요. 그때가 되면 제 귀가 그렇게 간지럽더라고요. 제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제가 뭐 잘 씻고 다니는데 말이죠. 그 이유를 아시는 분들은 저한테 좀 귀뜸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엘리바스가 상징하는 제 모습을 가만히 생각해 봤어요. 힘들다고 외치는 아내에게도 결국에 제 자랑만 제가 알고 있는 이 정답만 이렇게 하면 될 거야. 나라면 이렇게 할 거야. 장황하게 설명만 늘어놓는 설명충이 맞더라고요. 제가 똑똑한 것 같지만 미련한 자가 맞습니다. 이제는 이 자리를 뜨게 하는 듣는 사람 자리를 뜨게 하는 이러한 장황한 설명은 좀 멈추고요. 공감하고 이해하는 언어를 좀 써야 되겠다고 이제 생각을 합니다.


    적용 질문 드릴게요. 내가 유달리 잘 보는 상대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문제에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것만큼은 남보다 우월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라면을 넘어서 주라면 하려면 두 번째로 내가 100%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대지 쉽다고 그랬죠. 내가 100%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8절이에요.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엘리바스가 지금 나라면 이럽니다. 나라면 내가 너라면 이러는 거죠. 그래서 나라면 말이지 이런 거예요. 나라면 말이지 뭐 생각나세요? 나 때는 말이지. 여러분 이제 언제부턴가 우리가 라떼를 보면 저같이 이 꼰대들은요. 라떼를 보면서 내 죄를 한 번 생각하면서 멈춰서야 되잖아요. 내가 라떼는 말이지 그만해야 되겠다. 근데 이제 하나 메뉴가 하나 더 추가됐어요. 나라면 말이지 그래서 라면을 볼 때마다 여러분들이 이제 저 같은 설명충들은 내가 나라면 말이지 했던 이런 교만함을 좀 생각하시고 한 템포 잠깐 브레이크를 밟으시면 좋겠습니다. 

     

    나라면 무슨 뜻입니까? 나라면 나라면 너처럼 안 하고 이렇게 할 거야. 훈수 두는 거예요. 그런데 이 엘리바스의 훈수가 너무 옳은 말씀이에요.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아니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아멘 해야 될 말 아니에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당연합니다.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는 옳은 말이에요. 좋은 약 맞습니다. 

     

    그리고는 9절부터 16절까지 엘리바스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진짜로 쫙 설명을 하는데요. 9절과 13절만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심으로 전체적으로 너무나 문장이 명문이에요. 그리고 신학적으로도 올바른 진술입니다. 13절은요.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3 19절에서도 긍정적으로 인용할 만큼 복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근거로 사용할 만큼 이제 이 옳은 말인데요.

     

    고린도후서 3 19절에 보면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느니라 하였고 그랬습니다. 이거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인용했다는 거 하나만 봐도 엘리바스가 지금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해서 가르쳐주고 있는지 우리가 알 수 있어요. 엘리바스는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우리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간단 명료하게 정리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진짜 설명충이 맞아요. 

     

    하지만 문제가 무엇일까요? 나라면 이 한 단어에 모든 문제가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해와 지식과 믿음도 결국 내 안에 있는 나의 이해, 나의 지식 나의 믿음이라는 거예요. 내가 이런 믿음과 지식과 이해를 가졌기 때문에 너는 내 말을 들어야 된다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지금 엘리바스의 말이 맞는 것 같지만 내용은 맞지만 사실은 틀린 것입니다. 아무리 올바른 신론을 가졌어도 그 주인공이 누구예요? 엘리바스의 말에서 지금 주인공이 누구예요? 엘리바스 자신이거든요. 하나님을 설교하는 것 같고 하나님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 같지만 엘리바스의 말은 결국 엘리바스 자신의 지식과 이해와 믿음을 드러내는 자기 자랑입니다. 이것이 문제예요.

     

    성경이 내 자신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가장 중요한 지식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묵상할 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우리가 묵상할 때 내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되는 단 한 가지만 꼽아라.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 어떤 걸 꼽으실래요? 물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회복시키셨다. 하나님이 나를 잘 살게 하실 것이다. 다 귀한 말이고 복음이에요. 그러나 내 존재를 기준으로 놓고 보았을 때 내 삶을 놓고 보았을 때 좀 어려운 말로 하자면 내 실존을 놓고 보았을 때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되는 그 한 가지 진리 하나 꼽아라라고 한다면 내가100%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100%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그 사실도 사실은 아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셔서 천국 백성 삼아주셨다. 내가 100%로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사실 그 진리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100% 옳으시다는 이 고백도요. 내가 100%로 죄인이라는 지식이 있어야만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인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진짜 고난이 빡세거나 진짜로 센 죄를 짓고서 감옥에 가는 그러한 고난을 당하지 않고서는 내가 100%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제가 이래봬도 신학 박사잖아요. 그런데 참 내가 100% 죄인이다라는 것이요. 제가 이렇게 말 설명충으로서 설명을 할 정도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진짜 그게 느껴지는 게 없는 것 같아요. 그게 너무 진짜 슬픈 것 같습니다. 왜 우리는 이 100% 죄인이라는 게 이해가 잘 안 될까 우리 인식의 한계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여러분 100% 죄인이라고 하면 그건 양의 개념이잖아요. 그렇죠. 양의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100% 죄인이라고 하면 나는 양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죄를 진짜로 실제로 죄를 짓고서 죗값을 치르고 있는 저 사람을과 나를 비교하면 저 사람은 90점짜리 죄인이고 나는 기껏해야 10점짜리 죄인이라는 거 저절로 생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복음에서 성경이 아무리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다. 100% 죄인이다라고 가르쳐도 그것이 잘 동의가 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이 죄인이라는 것은요. 양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죄에 대해서요. 양으로 접근해서는 안 돼요. 누구 죄가 더 많냐 누구 죄가 더 적냐 나는 몇 점짜리 죄인이냐 이렇게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 죄에 대해서는요. 질적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됩니다. 질적으로 이해를 해야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이라고 판단하시는 것은 우리의 드러난 행위나 말이나 이 생각 가지고 그런 행위적인 것 드러난 현상을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벌점을 매기셔서 죄인이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요. 아담 이래 타락한 우리의 존재 자체, 우리의 생각의 그 구조 자체,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우리 DNA 자체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드러났든 드러나지 않았던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전적인 죄인이라는 거예요. 바꿔 말하면 우리는 그 누구도 아무리 올바른 삶을 살고 아무 죄도 없는 것 같고 저처럼 모범생처럼 살았고 엘리바스처럼 정금 같고 승리자인 삶을 산 그 누가 있다고 해도 심지어 욥이라고 해도 그 스스로의 존재의 힘으로는 자기 자신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낼 가능성이 0.0000001 센트도 없다. 제로다 0퍼센트다. 우리 스스로 일어날 힘이 하나도 없다. 따라서 100%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가 죄에 이렇게 오염되어 있다는 거예요. 

     

    제가 이미지는 이렇게 설명충이고 아는 척하고 자랑하고 훈수를 많이 두는 꼰대이거든요. 그런가요? . 지금 꼰대처럼 보이시나요? 이제 나이가 들어서 실제로 사실 그런 면도 사실 있어요. 그런데 제가 스스로 생각할 때 사실 저는 꼰대는 아니에요. 저는 남의 인생에 참견하는 거 아까 말씀드렸죠. 관심 별로 없다고 저만 특별하기 때문에 참견하는 거 좋아하지 않고 간섭하는 거 좋아하지 않고 훈수 두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랑 같이 사는 저희 가족이나 저랑 같이 일하는 우리 동료들한테 확인을 해봐야 되겠지만요. 물론 저도 훈수 두죠. 근데 오는 사람은 제가 막지 않아요. 오는 사람에겐 친절하게 제가 훈수를 두어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찾아가는 서비스까지 해드리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오지랖을 떨진 않아요. 아들 교육에 대해서 제가 특히 그랬습니다. 아들 교육에 대해서. 제가 부모님 잔소리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유일하게 들어본 잔소리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시나요?성훈아 공부 좀 그만해. 이게 제가 들어본 유일한 잔소리예요. 진짜 그거밖에 생각나는 게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저희 부모님도 저에게 잔소리를 안 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렇게 잔소리 듣지 않고 혼나본 적도 없는데 제가 멀쩡하게 그래도 컸잖아요. 겉으로는 겉으로 이거 참 이런 말씀드리기가 좀 굉장히 민망한데 겉으로는 엘리바스까지는 아니더라도 멀쩡하게 컸잖아요. 

     

    그러니까 내 아들을 키울 때 있어서도요. 이게 참 이게 무서운 것 같아요. 행위나 아까 이제 행위나 사고나 이런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문제라고 이DNA가 문제라고 말씀드린 게 바로 이런 거예요. 제가 의도하지 않아도요. 아들에 대해서 제가 뭐 아들이 뭐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제 기준으로 놓고 보면. 그래서 잔소리를 하고 싶다가도 잔소리가 안 나와요. 왜 들어본 게 없으니까 어색한 거예요. 그리고 나도 했는데 내 아들도 잔소리 안 들어도 잘해야겠지라는 막연한 그런 기복이 이제 있는 거죠. 나라면, 나라면 잔소리 안 듣고도 잘 했으니 할 텐데 내 아들도 잘할 것이다. 내 아버지였다면 나한테 이런 상황에서 잔소리 안 했겠지 제가 교양이 있어서 또는 자녀 교육에 대해서 뭔가 그 철학을 가지고서 하는 게 아니라요. 가족 우상과 가족 신화 그리고 내가 옳다 내 아버지가 옳다고 하는 이 뼛속 깊은 교만함에 젖어 있기 때문에 제 아들에 대해서 잔소리를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을 제가 엘리바스의 모습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특별히 이제 신앙에 대해서 더욱 그런 것 같아요. 공부는 뭐 말할 것도 없고요. 제가 진짜 잔소리 안 하거든요. 공부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는 그래도 우리가 해야 되잖아요. 그렇죠 신앙에 대해서는 예배 드리게 해야 되고 큐티하게 해야 되고 수련회에 참석하게 해야 되고 우리가 진짜 아이들 하기 싫어하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아무도 안 할 그거 우리가 잔소리를 해서라도 데리고 오고 설득하고 노력을 해서 해야 되는데 제가 그것마저도 알아서 하겠지 나라면 잘했으니까 걔도 그렇게 잘하겠지라고 그냥 내버려 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게 사실은 잔소리를 하든 하지 않든 그 마음의 근본이 바탕이 나라면이라는 이 교만이라면요. 이것 자체가 똑같은 문제인 거예요.

     

    한번 생각을 해봤어요. 엘리바스와 저를 제가 너무 엘리바스가 이해가 되니까 누가 더 엘리바스일까 엘리바스 원본을 넘어서는 내가 엘리바스의 원본을 넘어설 수 있을까 근데 진짜로 제가 넘어서더라고요. 왠지 아세요? 엘리바스는 이렇게 뼛속 깊은 나라면이라는 교만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걸 드러내잖아요. 말을 하잖아요. 욥에게 주책 맞게 말을 하잖아요. 쓴 소리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한테 다 만천하에 드러나서 아이고 저 미련한 놈 이렇게 비판을 듣잖아요. 그러니까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거죠. 그러나 저처럼 교양과 체면으로 똘똘 뭉쳐서 속으로는 온갖 생각하면서도 겉으로 절대 얘기하지 않는 사람은 드러나지 않아요. 문제가 이 제 존재에 담겨 있는 이 죄의 DNA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교정될 기회를 얻지 못해요. 그냥 죄 가운데서 그냥 그 DNA 가지고 살다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더 문제가 많은 거예요. 이제 아들이 고등학생 되는데요. 성령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 나라면의 이 악한 영 나라면 스피릿에 젖어 있는 저의 이 교만의 죄악을 회개하면서 이제부터는 필요한 잔소리와 훈육을 하는 적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적용 질문 드릴게요. 제 꾀에 넘어간 적이 있습니까? 내 꾀에 넘어간 적이 있습니까? 내가 답답해서 속이 터지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 사람에게 오늘 나는 무슨 말을 해주고 싶습니까? 또는 참아야 할 말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세 번째 나라면을 넘어서 주라면 하려면 세 번째로 하나님이 100% 옳으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17절에서 20절을 우리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 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없신 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6가지 환란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7가지 환란이라도 그 재앙이 너에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의 죽음에서 전쟁 때의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 즉 너무 우리가 읽기만 해도 막 위로가 되는 말씀이죠. 이 말씀대로 우리한테 이루어지기를 너무 소망합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게 복이에요. 지금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드러나서 징계받아야 교정될 기회를 얻는다고 그게 복 맞습니다. 징계를 없신 여기지 않고 잘 받으면서 회개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살려주세요.

     

    그런데 문제가 뭐예요? 이 당부를 지금 엘리바스가 자기 자신이 아닌 남에게 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사실 징계받는 것이 복이라는 말은요. 고난을 받는 사람이 고난 당하는 사람이 말씀으로 자기의 고난을 해석해서 자기 죄를 깨달아 고백할 그 고백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엘리바스의 입을 통해 나온 이 말씀을 우리가 읽으면서 내가 지금 당한 이 고난을 해석하고 내 죄를 깨달아서 회개한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복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더군다나 지금 현재 고난을 당하고 있는 나의 가족, 나의 지체에게 이렇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던져버린다면 그 말은 아무리 옳은 말이더라도 아름다운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위로는 커녕 마음의 문을 더 꼭꼭 닫게 만들 뿐이에요. 게다가 21절에서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21절에서 26절을 보시면 엘리바스는 미래에 대해서 지금 장담합니다. 아무 문제 없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이 회복시켜주시면 아무 문제 없이 화목하게 살 것이라고 또 평안함을 얻을 것이라고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장수할 거라고 이렇게 희망찬 미래에 대해서 듣기 좋게 장담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이렇게 잘 될 거야 다 잘될 거야. 니가 예수만 믿으면 니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다 잘될 거야 이런 말이 욥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욥은 이미 10명의 자녀 다 잃었잖아요. 그리고 이미 자신의 삶이 무덤에 들어간 것만도 못한 다 망가진 삶이에요. 아무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엘리바스가 듣기에는 지금 너무 좋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욥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약올림이 될 뿐입니다. 엘리바스가 그 똑똑한 머리로 병 주고 약 주고 하고 있을 뿐이에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여러분 엘리바스가 하나님이 100% 옳으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실론을 그렇게 장황하게 잘 설명을 했는데 하나님이100% 옳으시다는 그 고백을 지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큰 일인 구원조차도 내 생각 안에서 판단한다는 거예요. 내 머리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이 세상 내 삶 안에서만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단정 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과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잖아요. 하나님의 구원은 내가 원하는 때 내가 바라는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어느 시점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때가 이루어질 수도 있어요. 그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많이 있든 없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구원의 완성은요. 그것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진정한 최종적인 때는 우리가 이 인생을 다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맞아 주시는 그 천국에 들어가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구원의 완성을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 이후에나 생각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는 말은 그 구원을 엘리바스는 지금 그 똑똑한 머리로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된다면서 지금 단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밑동 짤린 나무 같은 우리 인생이잖아요. 이러한 밑동 잘린 나무 같은 우리의 인생 말씀에 따라서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져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면서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 주실 완성을 바라보면서 자라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대표해서 보여주고 있는 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죠 지금 당장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다. 그것이 구원이라는 바로 이 기복 신앙을 말하고 있어요. 엘리바스가 4장에서는 인과 응보의 가치관을 보여주더니 오늘 5장에서는 결국 기복 신앙의 가치관까지 보여줍니다. 27절이에요.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들어보라 그래요. 얼마나 이 확신이 느껴지시죠? 정금 같은 승리자 엘리바스가 이렇게 자신 있게 연구했다고 내세우는 것이 결국엔 뭐예요? 인과응보와 기복신앙이에요. 아무 지식 없어도 그냥 인간이라면 태어나서 저절로 하는 생각이 인과응보와 기복신앙인데 엘리바스가 지금 똑똑한 머리 가지고 평생 연구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또 결국엔 기복신앙과 인과응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떠난 하나님 떠난 우리 인간의 지혜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이 100% 옳으시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못할 때 고백하지 못할 때 생기는 우리의 한계예요. 우리는 나라면을 넘어서 주라면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정답이라는 이 자존적인 교만을 넘어서 주님만이 정답이시라는 정답이심을 이 고백하는 데까지 우리가 나아가야 해요.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너라면 이래야 해 잔소리하고 나라면 이럴 거야 이 훈수 두지 말고 이 상황에서 이 문제 앞에서 이 고난 앞에서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질문하고 또 말씀으로 하나님의 답을 구해야 되는 것이에요. 

     

    우리 큐티인으로 묵상하는 교회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요. 올해부터는 저희 작은아버지 목회하시는 교회도 이제 큐티인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와 같이 매일 새벽 큐티인 본문으로 작은 아버지께서 설교를 하고 계세요. 큐티인 본문 해설을 최대한 반영해서 설교 준비하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목사 가정에서 저처럼 자라셨잖아요. 저처럼 그리고 합동 교단에서 또 목사 안수 받고 또 20년을 아프리카 선교 오지 선교회를 다녀오셨어요. 그리고 이제 한국에 오셔가지고 이제 7년째 담임 목회를 하고 계시니 설교에 대해서 얼마나 자기의 철학과 그 신념이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의 시각이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이 우리 큐티인에 쓰여진 이 본문 해설에 맞춰서 설교하신다는 거예요.

     

    제가 그 말을 듣고서 아니 왜 그렇게 하세요? 굳이 왜 그렇게 하세요? 제가 물어봤더니 이렇게 말하시는 거예요. 성도들이 큐티를 더 잘하도록 돕기 위해서 유익이 되도록 그렇게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작은 아버지의 적용을 보면서 큐티인을 만들고 있는 제가 더 큰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저라면 제게 익숙한 것 내 생각, 내 기준, 내 철학 버리지 못했을 것 같아요.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목사가 꿈이었거든요. 그랬기 때문에 평생 저는 제가 사명을 어려서 받아서 평생 사명 따라 가는 줄 알았어요. 거기에 대한 이 엘리바스 같은 자부심도 정말 굉장했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이제 주일 설교 후에 목사님과 이제 대화를 나누다가 제가 왜 목사를 되려고 했을까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어요. 그러면서 이제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전 저희 아버지 외과 의사시거든요. 아버지처럼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아버지처럼 의사를 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왜 의사가 아니라 할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의사될 수도 있었는데 왜 할아버지처럼 목사를 택했을까 왜 목사 되고 싶어 했을까? 저는 그때까지 사명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두 분의 삶이 비교가 되었던 거예요. 아버지는 의사시지만 선교한다는 마인드로 평생을 사셨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보면 참 별거 없는 의사였어요. 참 힘든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제가 본 할아버지는 물론 할아버지도 고생하시면서 목회를 하셨지만 제가 태어나서 본 할아버지는 이미 성공한 모습이었어요. 이미 성공한 목회자였습니다.그러니 아버지는 수고하고 힘들게 사시는 인생 의사지만, 할아버지는 목사지만 성공을 누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으면서 그렇게 살고 있는 화려한 모습. 여러분 그러면 제가 사명을 따라서 목사를 선택한 곳인가요? 이제는 여러분도 다 아시겠죠? 제가 사명 따라서 목사를 택한 것이 아니라 제가 진짜 욕심 때문에 십자가 지기 싫고 칭찬과 인정과 이 세상 명예를 누리기 위해서 목사가 됐다는 것을 그제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진짜 별 볼 일이 없는 인생이고요. 고개를 사실 들 수가 없는 인생이고 이렇게 여러분들 앞에서 설명충이니 뭐 이렇게 사실 떠들 만한 사실 그런 군번이 되지가 않아요. 저는 그냥 뼛속 깊이 기복적이고 인과응보적인 DNA에 사로잡혀 있는 죄인에 불과한 것이고요. 목사의 사명 또한 이 DNA에 따라서 그냥 선택한 자연적으로 선택한 그것이라는 것을 제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격 없는 인생 맞아요.

     

     제가 제일 심하지만은 사실 이런 엘리바스가 우리 가운데 사실 있죠. 있습니다.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깨닫지 못해요. 내 자신에 대해 나의 문제는 너무 잘 봐요. 막 훈수를 막 더 줍니다. 근데 내 자신에 대해서는 보이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미련한 존재인 겁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저를 포함한 이런 엘리바스들에게 돌이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한심한 엘리바스들을 데리고 사시느라고 수고하시는 우리 욥 같은 우리 성도님들 엘리바스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고요. 이렇게 찌질하고 형편없고 수준 낮은 거 이제 잘 아셨잖아요. 그러니까 그분들을 더 잘 섬기시면서 구원을 위해서 이끌고 가시는 우리 욥과 같은 또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엘리바스인 저야말로 이런 나라면 한계를 넘어서 이제는 주라면 주라면의 이 믿음으로 나아가야 되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됩니다. 함께 이 사역에 큐티인 만드는 또 이 말씀 사역에 힘쓰는 우리 동료들과 함께 이 귀한 일의 귀한 사명에 더욱 충성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날마다 말씀 묵상하시면서 각자 삶의 자리에서 나라면을 넘어서 이 주라면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그런 복된 인생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오늘 내게 닥친 문제에 대해서 나라면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그 문제에 대해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은가요?

     

    우리가 다 나라면 이혼하고 싶고 나라면 이 문제에서 떠나고 싶고 도망가고 싶죠. 그때 이제 나라면 하면서 마음대로 하지 마시고요. 주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어떻게 하실까 주라면 무슨 말씀하실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큐티 책을 펴서 묵상하세요. 그러면 주님이 그 말씀으로 인도해 주시고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 맺겠습니다. 나라면을 넘어서 주라면 하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이 아닌 구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100%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100% 옳으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100%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이 100% 옳으심을 고백한다는 것은요. 사실 내가 하나님과 만나는 거예요. 이 예배가 바로 내가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입니다. 예배는 만남이에요. 예배 때도 그런데 우리가 나와서 나라면 머릿속으로 나라면 이런 생각하고서 은혜 못 받으면 이것처럼 참 불쌍한 인생 없잖아요. 예배에 나오면 나라면 내려놓고 주라면 주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예배를 통해서 주님 만나길 원합니다. 이러한 사모함을 우리가 가져야 되겠어요. 욥도 엘리바스도 빌닷도 소발도 다 누구나 다 사실 소망 없는 인생이에요.구원의 소망 0% 100% 죄인인 인생일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땅에서 중요한 것은요. 어느 때나 어느 상황에서나 하나님 만나는 인생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 거예요. 말씀을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만나서 하나님 예배하는 예배자 되기를 간절히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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