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요약

사도행전 25장 10절~22절 - 성령의 상소

vert_mont 2022. 8. 17. 01:50

성령의 상소

사도행전 2510~22

김양재 목사

 

          내일은 77주년 광복절입니다. 뼈저리게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세대로서 나라가 없으면 예배도 못 드린다는 것을 수없이 이야기했지만 다음 세대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안타깝습니다. 저의 부모님도 북한에서 디아스포라로 남한 땅에 오셔서 결국은 고향 땅에 못 돌아가시고 소천 하셨습니다. 미국에 디아스포라 동포들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할 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천국에 디아스포라로서 고향에서 만나자고 미국에 가서 이번에 성령의 상소를 했습니다. 성령의 호의로 워싱턴 크라이스트 커뮤니티 교회와 뉴저지 초대교회, 워싱턴 중앙 장로교회, 샬롯 중앙 장로교회, 랄리 한인 장로교회, 빛의 교회, 얼바인 베델교회 성도여러분들과 선교사대회 선교사님들, 목회자 세미나를 위해 모이신 목사님과 사역자 여러분의 사랑과 열정과 환대를 생각하며 안부를 전합니다. 또한 약속했다가 못간 펠로우십, 베다니, 디사이플교회 성도 여러분들께도 안부를 전합니다. 정말 성령의 호의 말씀대로 코로나로 인해 잠시 거절의 격리도 당하면서 말씀대로 되니 너무 신기하고 놀라울 뿐입니다. 우리들 역시 언젠가는 심판이 구원일지 영원한 사망일지 모르지만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이렇게 세 번까지 재판을 받을 수 있는데요. 거기에서 계속 상급심에 요청을 하는 항소, 상소, 항고, 재항고를 모두 통틀어서 상소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아주 축복입니다. 왜죠? 아직 심판이 확정되지 않았고, 돌이키라는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상소할 수 있는 기회가 그래도 있는 거예요. 이 땅에서 심판 받는 거요. 이 땅에서 수많은 심판을 통해 회개로 돌이켜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심판이 오기 전에 우리가 성령의 상소를 해야 합니다. 12절에서 26절까지 상소라는 말이 네 번 나오는데요. 그래서 오늘 성령의 상소에 대해서 함께 듣겠습니다.

 

          성령의 상소 첫째는, 인내의 때를 채워야 합니다. 10절부터 봅니다.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 대

          3차 전도여행 마지막에 바울은 아시아 각 교회에서 부조를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드리려고 도착을 했습니다. 열심히 선교하고 헌금도 얼마나 지혜롭게 가져왔는데 결론이 감옥입니다. 바울을 이렇게까지 죽이려고 하는지 몰랐어요. 바울이 지금 무슨 욕심으로 이 선교를 합니까? 주님 만나서 70여 곳 되는 곳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유대인들 지도자들은 이런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지금 집요하게 고발을 하고 있어요.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오히려 장로들의 조언에 순종해서 결례를 행했지요. 결례를 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소동이 나서 체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21장의 내용이에요. 지금 25장이거든요. 여전히 감금된 피고에요. 그동안 21장부터 25장까지 유대인들에게 잡히고,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고 로마군에게 결박되어 영내에 감금되고, 천부장에게 심문을 받고, 벨릭스에게, 이제 또 베스도 총독에게 조사를 받는 이 모든 고난을 바울은 처음부터 지난 2년 동안 오늘 가이사의 재판자리 앞에 섰다고 해요. 당연히 로마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최고의 심판관인 로마 황제에게 심판을 받을 자격이 있지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계속 하나님의 응답대로 가는데 그것이 가이사의 자리에 재판자리에 섰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재판 자리에 섰다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믿음이에요. 그러나 바울은 그동안 쓸 수 있었던 상소권을 왜 이 상황에서 당당하게 사용하는 것일까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유대인들에게 오해 받고, 벨릭스의 욕심에 이용당하고 이런 모든 상황들을 더욱더 인내하고 기다렸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유대 땅을 떠날 수 있는 로마 시민의 당연한 권리가 있지만 그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새로 부임한 성실한 베스도가 도와줄 줄 알았더니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노골적으로 유리하게 처리하려 해요.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자기편들은 다 밖에 있어요. 혼자서 이 사건을 감당하고 있어요. 바울이 드디어 로마 시민의 상소권을 사용합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그 날, 그 시간, 그 밤이 왔어요. 이 상소권이 얼마나 대단한지 바울이 이렇게 한마디 하자마자 총독 베스도는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왜죠? 로마 시민권자이니까요. 그렇지만 로마 시민권자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내의 때를 채운 거예요. 권한은 쓰는 것보다 안 쓰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권한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을 땐 더 높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 한번 쓰는 것을 얼마나 신중하게 생각했는지 그 권을 쓰기 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리고 인내했는지 우리는 이미 빌립보 감옥에서도 충분히 봤어요. 빌립보 감옥에서도 붙잡히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그 고난을 다 견뎌낼때까지 인내했습니다. 인내의 때를 다 채운 뒤에 비로소 자기가 로마 시민인 것을 밝혔죠. 그마저도 자기 안위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었죠. 빌립보 교회의 보호를 위해서 빌립보의 형제자매들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떠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썼습니다. 진작 쓸 수 있는 권리를 쓰지 않고 참다가 때가 차매 쓰니까 상소가 빛이 납니다. 여러분들의 상소가, 기도가 빛이 나는 상소와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내도 하지 아니하고 날마다 기도만 한다고 들어주신다는 것이 아니에요. 참으니까 기도응답이 되는 것이죠.

 

[적용질문]

구원을 위해 쓰는 권과 쓰지 않는 권은 무엇입니까?(아버지 권리, 엄마권리, 선생님 권리, 사장 권리 등 쓸 수도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할 수만 있다면 상소해서라도 당장 해결하고 싶은 억울한 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구원을 위해 얼마나 인내하고 있습니까? 상대방을 인내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 가지를 think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상소 두 번째는 부르짖어야 합니다. 12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이 상소하다는 헬라어는 에피칼레오인데요. 이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이름을 부르다 에요. 그런데 이 단어가 동일하게 쓰인 곳이 사도행전 2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 하였느니라’ 2216절에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상소하다는 간절히 부르짖는 것, 구원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부르짖는 것,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상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어줄 수 있는, 내어질 수 없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온 것은 부르짖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이 죄에서 구원할 만왕의 왕이신 내 아버지께 부르짖는 것이지요. 묶이기 않았다면 나를 감옥에서 내어 줘서 자유롭게 다녔더라면 결코 부르짖지 않지요. 큰 세력들이 나를 둘러싸고, 여전히 갇혀 있는 내어 줄 수 없는 환경이기에 우리는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의 목소리를 간절히 듣기 원하십니다. 작은 시련 속에서 늘 하나님을 부르짖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큰 시련이 닥쳐올 때도 절대로 부르짖지 못해 찾지 못합니다.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사람을 찾고, 방법을 찾고, 나를 내어줄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 아버지를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혼자 부르는 것이 안 되면 예배의 현장으로 나오셔요. 두 손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상급기관인 내 아버지를 불러야 합니다. 우리는 부를 힘도 없고, 상황이 기가 막혀서 멍하니 넋이 나간 환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미약한 음성이나마 주여 주여 불러야 합니다. 하루 종일 제가 주여 부르고 다니는 것 같아요. 뭐 하나해도 주여.. 주여.. 아버지.. 주여.. 절로 나와요. 이것이 성령의 상소입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서 성령의 상소가 아니고 이런 마음으로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를 했습니다. 자기 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상소니까 이타적인 것 아니에요? 이렇게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로마시민인 바울의 상소에 베스도도 바로 응답했잖아요. 그러면 천국시민권자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반드시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응답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응답은 우리의 생각과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를 수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바울이 2년 동안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풀려나고 예루살렘 교회의 환대를 받고 능력이 생기고 힘이 생겨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을 하지요. 어느 누가 이렇게 바울이 2년 동안 갇혀 있고 2년이 지나도 여전히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뜻을 접지 않고 이 힘과 권세에 둘러싸여서 바울을 죽이려는 이 상황을 누가 응답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하지만 이 상황이 바울에게는 가장 안전한 상황이고요. 바울을 용서하심이고 은혜임을 카리스임을 가장 최고의 응답임을 보게 되는 거죠. 왜입니까? 지금 2년 동안 그 어느 때에 석방이 되었으면 그 자리에서 죽는 거예요. 졸지도 자지도, 먹지도 않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어요. 나가면 죽는 거예요. 그러나 끝까지 성령의 상소로 하나님의 응답을 얻게 되면 로마로 가는 것이 목적이고 비전이잖아요. 거기까지 2240킬로미터를 그 누구도 같이 호송할 수 없어요. 로마 군대가 동원이 돼서 황제에게 가는 그 길까지 안전하게 그렇게 하시는 것이 복음 때문에 응답이 되어야 하는 거지 여러분의 안위와 안녕과 복락을 위해서 기도하니까 맨날 응답이 없다고 이래요. 내가 날마다 큐티하고 기도하고 기다리면 그것 자체가 응답인 줄 믿습니다. 내가 오늘 힘들다고 성경 다 내 팽겨치고 하나님은 없나봐 그것은 불순종하는 것이고 오늘도 눈을 뜨고 큐티를 하고 기다리면 그것 자체가 날마다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응답인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

문제가 생기면 나는 누구를 가장 먼저 찾습니까?

주님께서 나의 상소를 들으신다고 믿어지십니까?

최고의 응답을 주심을 믿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이 구속사에요. 모든지 기도하면 돈 나와라 뚝딱, 금나와라 뚝딱 이게 응답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도 집요하게 죽이려고 하잖아요. 옆에 그런 사람 많잖아요.

 

 

          성령의 상소 세 번째는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할 때 기회를 주십니다. 그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해야 하는 거예요. 13절 부터입니다.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배스도에게 있어서 바울은 벨릭스 전 총독이 남기고 간 잔류물 중 하나였고,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베스도는 바울이 상급법정에 이렇게 가이사에게 재판을 청했기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어요. 그런데 유대인과 바울 사이에 있었던 고소와 변론을 보니까 가이사에게 상소할 재료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바울이 죄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유대인들을 무시할 수 없잖아요. 아주 난제에요. 그때 아그립바 왕과 여동생 버니게가 짠 하고 나타난 거예요. 바로 아그립바 왕은 헤롯대왕의 손자고 야고보를 칼로 죽인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인 아그립바 2세인데요. 거기에 누이 동생 버니게는 문제 많은 당사자였어요. 그러나 그런 것 다 떠나서 아그립바 왕은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 신실한 유대교 신자에요. 유대교와 관련된 상당한 지식을 가졌어요. 그러다보니까 유대인의 종교문제에 전문가라는 평판이 나 있었습니다. 바울의 문제는 로마 실정법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의 종교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거기에 최고의 의논상대가 딱 찾아온 거예요. 그리고 로마의 총독보다 윗 직급 분봉왕이기 때문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베스도가 일처리에 있어서만큼은 아주 대단히 지혜롭고 노련했음을 발견하는데요. 내 옆에 의논 상대가 참 있다는 것은 복이에요. 그런데 의논도 욕심이 앞서면 친구하고도 의논을 안해요. 그래서 목장에서 이런 것을 물어보고 의논할 수 있는 상대가 일주일에 한번씩 만날 수 있고, 이런 상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최고의 공동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목자도 욕심이 생기면 이야기를 안해요. 안 나눠요. 꼭 망하고 나서 나눠요. 그러니까 작은 것도 나누면은 그 나눈다는 사실이 겸손하잖아요. 그것이 응답이에요. 내가 나누는 것 자체가 응답이에요. 거기에 겸손함이 들어가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매 주일 목장에서 나누는 것은, 우리들 교회 교인들이 환난 당하고 빚지고 원통하게 왔는데 결론적으로는 다 회복이 되는 것이에요. 영이 잘 됨 같이 범사에 강건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동족에게 고소당한 피고 바울에 대해서 베스도가 설명을 하는 거예요. 원고가 유대인이죠. 피고가 바울이에요. 16절 부터입니다. ‘내가 대답하되 (이것을 아그립바 왕에서 바울에 대해 설명하는 거예요)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틑 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유대인들이 바울을 달라고 자기네들이 처리하겠다고 했는데 그것이 로마법이 아니어서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 데려왔는데 )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 뿐이라요지는 자신은 로마 총독으로서 법대로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했다고 생색을 낸다. 그런데 바울의 악행의 혐의는 증명할 수 없었고, 그러고 보니까 바울이 계속 주장하는 것은 예수라 하는 이의 부활이더라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종교적 논쟁에 불과하더라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나 베스도나 아는 것에서는 별 차이가 없어요. 나 다 알아. 큐티 옛날부터 해봤지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때에 바울에게는 영혼의 떨림이 있고 감격이 있어요. 그런데 베스도는 드라이한 목소리로 예수의 부활을 전합디다 이렇게 이 둘 사이에는 베스도가 엘리트지만 아주 차이가 있는 거예요. 맞습니다. 여러분 다 알아요. 성경도 알아요. 예수도 알아요. 큐티도 알아요. 그런데 하나도 감격과 떨림이 없어요. 말할 때마다 감격과 떨림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바울이 유대교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그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떨림이 있고 그들은 떨림이 없어요. 이것 때문에 충돌이 계속 있어요. 바울이 틀린 말 하는 것이 아닌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 구원해 줄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의 줄로 기독교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충돌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면 바울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목청이 큰 사람이 아니죠.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사를 줄창 외쳐요. 우리는 정말 예수그리스도 위해 직속 계보인 유다.. 맨날 제가 주장하잖아요. 구속사를 외쳐요. 또 많은 사람이 살아나기도 합니다. 제가 부활과 십자가의 부활과 구속사를 외치는 그 자리에 여자 목사는 낄 자리가 없죠. 여자 목사라는 것 때문에 십자가와 부활 복음이 훼방 받을 때가 많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런 사도행전을 읽으면 바울이 정말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전하는 복음을 제가 아니라고 합니까? 바울에 관한 이런 보고가 벌써 몇 번째인가요? 바울 자신도 백성 앞에서, 공회에서 벨릭스에게 또 베스도에게 여러차례 변명, 설명을 했어요.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 내용도 이미 여러차례 반복적으로 나왔어요.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벨릭스 총독에게 보고한 편지도 있어요. 이런 시간을 다 인내하면서 통과 했어요. 때가 되어 상소권을 써서 드디어 끝나나했더니 또 반복되는 아그립바 앞에서 또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예요. 정말 지겨운 괴롭힘이에요. 1,2,3차 전도여행보다 변론하는 것이 더 길잖아요. 참 이단들도 판을 치고 이러다보니까 이 복음을 이렇게 논증한다는 것이 이것이 우리들의 성도들의 길인가 봐요. 그런데 아무리 지겨운 괴롭힘이더라도 내 힘을 빼고 열심을 멈추고 판단을 괄호치고,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통과하면 여호와께서 (이게 어디 나오는 이야기죠? 출애굽기 14장 가만히 있어 구원을 보라 하잖아요.) 그러면 변명이 필요할 때는 변명을 주시고, 상소가 필요할 때는 상소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기회조차 우리가 만들려고 해서 문제인 것 같아요. 지금 나를 덮고 있는 지긋지긋한 사람이나 상황이나 사건이나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지겹게 반복되는 고난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어디 있을까요? 어떻게 그런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늘 두리번 두리번 거리면서 새로운 사람, 새로운 환경을 꿈 꾸는 거예요.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이런 불평과 원망과 우리 주제가가 된 듯한 그런 지옥을 다 살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기회는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 기회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와요. 기회를 얻으려고 찾는 주체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누가 기회를 찾는가? 악인이 기회를 찾아요. 시편 37. 가룟 유다가 예수님 넘겨줄 기회를 찾아요. 마태복음 26장 또 제가 기회를 타서 즉 잡아서 탐심을 이루고 우리를 속이고 죽인다고 로마서 7장에 되어 있죠. 그런데 거룩할 성도가 기회를 찾는다거나 기회를 탄다거나 노린다는 말은 성경에 없어요. 성도는 그저 기회 있는 대로 착한 일을 한 뿐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주님 보내신 곳에 간다고 하죠. 그러므로 성도의 때나 기회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것 처럼요. 우리는 이타적으로 회개할 기회, 착한 일을 할 기회 이런 것을 찾는다고 하는 것이지 악인의 기회 찾는 것,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는 것, 그런데 예수 없는 사람들은 다 그 기회를 찾으려고 그렇게 아주 그냥 전심 전력을 다해서 기회를 잡아야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완전히 그런 기회와 이 기회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회를, 주님이 주시는 기회가 올 때 잡는 것이 우리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지겨운 괴롭힘에서 벗어날 기회를 내가 얻겠다는 헛된 욕심을 버리는 것이 가만히 서서 주가 행하시는 구원을 보는 비결입니다. 이 지겨운 괴롭힘은 벗어나기 위해 교회 오는 것이 아니에요. 만일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괴롭혔다 풀어줬다. 주님이 새디스트에요? 아니죠. 절대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지겨운 것은 아직 내 죄가 내 고난보다 크다는 구속사가 깨달아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보는 사람은 저의 구속사 성경이 박사할아버지라도 깨달아지지 않아요. 성경이 다 자기 이야기래.. 성경이 하나님의 이야기지 왜 자기 이야기야. 그것이 너무 싫어서 죽이려고 하잖아요. 바울을요. 그러니까 제가 어ᄄᅠᇂ게 지금까지 왔나 모르겠어요. 이해가 안되면 이런 일이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지겨운 괴롭힘이 구속사가 깨달아지면 내 인생의 결론이 인정이 되는 거죠. 결국 그 지겨운 괴롭힘 속에서 내가 주님 앞에서 얼마나 지겨운 죄인인가를 알아야 하는 거예요.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요. 그 지겨운 괴롭힘 속에서 내 자신을 알아야 하는 거예요. 제가 이것을 경험했잖아요. 우리 남편만 지겹다고 하다가 제가 그냥 제 죄의 지겨움을 보게 되었어요. 이게 입으로 설명이 안되는 거예요. 바울이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하면서도 자기 무죄에 대한 변명보다 더 강조해서 전한 것이 부활하시는 주님이잖아요. 바로 자신이 이렇게 지겨운 괴롭힘을 당해도 할말 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사과하는 마음으로 변명을 하면서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부활하신 주님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이 확실한 자기 인식과 하나님 인식이 있으면 지겨운 괴롭힘도 통과할 수 있어요. 우리 인생이 사실 지겨운 괴롭힘이잖아요. 외적이든 내적이든 각자 지겨운 문제를 지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고요.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를 몰라요. 하나님과 자기를 모르면 문제만 보여요. 그것이 애굽이 바로의 관점이잖아요. 그러니까 잘 살땐 그러다가 재앙이 오면 모든 것이 재앙이 되고, 사건만 오면 문제만 보이니까 이 열가지가 다 재앙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그 마지막 10가지 재앙 그것을 치지 않으면 절대로 자기를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니까요.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고 자기도 아니까 내 고난도 해석이 되고, 이 지겨운 괴룁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시키려고, 나를 거룩하게 빚어 정금같이 빛나게 하시려는 주님의 세팅을 아니까 이스라엘의 고센 땅은 재앙이 비켜가잖아요. 그럼 이스라엘이 잘났어요? 애굽이 잘났지 엘리트들은 다 애굽에 있는데요. 이 사람들은 너무 찌질하잖아요. 그런데 여기만 재앙이 빗겨가잖아요. 왜냐 하나님이 택했으니까요.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아니까. 우리도 기가 막힌 고난을 말씀대로 적용하며 통과하니. 우리의 모든 기도가 성령의 상소가 되어 놀라운 회복과 구원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런 간증을 굉장히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어요.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성령의 상소를 들어주시는 목적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이 편한 상태에 다 취해서 멀리 멀리 떠내려 가는 일도 수없이 봅니다. 고난이 오면 주님께 왔다가 해결되면 떠나는 거죠. 고난 피하는 것이 목적이 되니까 하나님 모르고 자기도 몰라요,. 기복이라는 것이 왜 무서운가 하면 하나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른느데 날마다 빌어요. 이렇게 해결되면,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생기는데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되요. 그래서 내가 젖과 꿀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을 알기가 너무 어려워요. 그동안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그렇게 빌다가 딱 그게 오니까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떠나간 것이죠. 흘러간거죠. 목적이 문제 해결에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이렇게 말씀으로 주님을 알고 나를 알아 하루하루 지겨운 괴롭힘을 통과할 때 때가 되면 주님이 필요한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남편이 갔는데 그때 인내의 때가 차서 그때부터 저를 주님이 쓰시잖아요. 사명으로 쓰시잖아요. 그래서 저쪽으로 안가고 하나님 쪽으로 갔는데 하나님을 모르고 이 사건이 왔으면 저도 딴 사람과 같이 흘러 떠내려 갓을 거예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서 주님께 상소한 모든 신음을 주님 낱낱이 기억하시고 결국 기회를 주세요. 저에게 기회를 주셨죠.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셨죠. 그래서 우리가 이 기회가 오기 전에 할 일이 상소에요. 성령의 상소에요.

 

[적용]

괴롭도록 지겨운 사람, 지겨운 상황, 지겨운 사건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벗어날 기회를 얻으려고 누구를 또는 무엇을 기웃거리고 있나요?

 

그러니까 괴롭도록 지겨운 사람, 그것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맨날 기웃거렸는데 결국 벗어나니까 기도하고 다 했던 것이 어디로 갔는지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니까 완전히 떠내려가는거죠.

 

 

          우리 장로님의 나눔을 읽어드릴게요. 굉장히 어려운 오픈을 해 주셨어요. 우울과 조울을 반복하는 아내와 사는 것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참을 인 자가 새겨있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힘들다가 우리들교회 오셔서 공동체의 도움을 받고 인내 할 것이 많으니까 드디어 장로님까지 되셨어요. 해석하고 가고 있지만 너무 힘들다 그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그래서 막내 딸이 대학만 가면 졸혼을 하리라 했는데 그만 들어갔어요. 불행히도.. 누구는 4수를 했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이제 막내 딸이 들어가고 보니까 따로 살아 보리라 하고 이분이 올해부터 따로 살고 계세요. 한마디로 별거를 하고 계세요. 장로님께 드리는 말씀이에요. 세계적인 석학인 스탠리 하워즈 교수도 똑같은 일을 겪었어요. 아내가 조울증에 끝나지 않을 고통 가운데 맨날 다른 교수와 성관계 갖겠다고 하고.. 끝나지 않는 고통가운데 아내를 돌보면서 살았어요. 그 장로님과 큰 차이를 보게 되었는데 이 교수가 너무 세계적인 석학이다 보니까. 이분이 신학교 교수임에도 그렇게 힘들 때 아내를 보낼 공동체가 없더라고요. 교회를 못 보낸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이제 혼자서 이 일을 하려고 하다보니 굉장한 정신과 의사 친구도 있는데도 의사의 도움은 한정적이잖아요. 늘 급할 때.. 결국은 20년인가 사셨어요. 이혼을 하셨어요. 그리고 이제 부인은 곧 소천을 했습니다. 공동체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참 큰거구나. 우리 공동체 목장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평범한 목장에 가서 같이 나누면서 이 병을 통과해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나에게 공동체가 없으면 대단한 분들은 같이 옆에 있는 친구로 가기가 어려워요. 우리들교회 목장이 정말 세계적인 대안이라는 것이 맞구나.. 장로님이 끝나지 않을 이 고통을 오픈 하셨어요. 그래서 교회 기도 제목이 되어서 기도 받는 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중요한 포인트가 있는데요. 왜 이렇게 이분이 별거를 하시고 이러는가 했더니 회사가 잘되시는 거 있죠. 회사가 잘되시고, 아이가 대학에 잘 들어가니까 하나님께서 그 환경가운데서 최고로 인도해 주신 거잖아요. 그렇게 힘든 부인하고 사셨으면 다 콩가루가 되어야 할 건데.. 아내의 수고만 있고 다 잘된 거예요. 그런데 괴롭도록 지겨운 상황에서 환경이 나아지니까 기회를 엿보고 계시잖아요. 너무 이해 됩니다. 그런데 본인이 다 답을 알아요. 본인이 교만하시다고. 그래도 오늘 제가 공개적으로 처방을 드린다고요. 성령의 상소로.. 그런데 너무 힘든 것 알아요. 그러나 우리는 그 힘든 환경 가운데 딸을 데리고 넘어간 권사님도 있고.. 아직 거기까지 못 가신 것 같아요. 성도 여러분들은 우리들교회 저력을 보여주시고, 이 가정이 모델이 돼서 수 많은 가정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래요. 오픈 했으니까 우리의 문제가 되었어요. 이분은 우리들교회 장로님. 따른 길로 갈 수 없어요.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게 되어 있어요. 다 성경대로 되는데 사랑하시니까 이참에 설교를 하시고 그것을 보고 약간의 처방을 해드리고요..

 

          성령의 상소 네 번째는 한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20절부터에요 내가 이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하느냐 한즉 바울은 황제의 판경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바울에 관한 베스도의 보고를 다 들은 아그립바 왕은 나도 그 이사람 바울의 말을 듣고 싶은데 이렇게 되었어요. 겉으로는 아그립바, 버니게 남매는 다 가졌어요. 로마황실의 호의도 받고 있어요. 이 로마 총독 베스도도 그 호의를 얻으려고 애를 써요. 그러나 그들의 삶을 보면은 아버지가 가장 최고의 정점에서 충이 먹어서 비참하게 죽었죠. 또 로마황제 아래 교육을 받아도 권력의 냉혹한 현실을 알고 자기가 분봉왕이지만 모든 것은 황제의 뜻대로 해야 하지 하나도 실권이 없어요. 그리고 또 버니게도 여러 남편을 거쳐서 지금 같이 있어요. 왕위로도, 재물로도, 관계로도 채울 수 없는 인생의 실존적인 허무함과 죄악과 음란에 굴레에 잡혀 있는 공허함에 있으니까 이들이 바울에게 말을 듣는 거예요. 어떤 말이요? 어떤 말 가장 듣고 싶었을까요? 예수라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아 있다는 주장. 그 예수의 부활을 나도 듣고 싶은데.. 그래서 인생의 허무함이 허무한 것인지도 모르고 목적 없이 살아가는 한 인생 아그립바 버니게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를 한 후에도 또 더 며칠을 구류된 채 기다려야 했던 거예요. 바울의 상소가 성령의 상소였기 때문에 그 목적이 억울함을 풀고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상소의 목적이 구원이기 때문에 성령의 말씀대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또 되었나봐 하니까 또 그 자리에 며칠을 묶여서 또 기다려야 했어요. 말씀이 필요한 그 한 사람. 아그립바와 버니에게에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말이죠. 나아가 상소대로 로마에 가는 것 또한, 로마에서 말씀을 전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이 목적인 것을.. 우리가 혐의를 벗도 억울함을 풀고 복수 하는 것이 기도 목적이 아니라 항상 전도와 전도를 통한 구원이 우리의 모든 기도와 상소의 목적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큐티의 꽃은 적용이고 , 결론은 영혼 구원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하는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언제 어디서 누구이거나 구원이 최고의 가치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용]

인생이 허무할 때가 있습니까?

허무함을 무엇으로 채우고 싶습니까?

내 인생 최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몇 번째 목적입니까? 말씀 전할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간증이에요. 본인은 믿음이 하나도 없대요. 그런데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1학기 종강 파티를 식당에서 했는데 종교에 대한 주제가 나와서 잠깐 전도를 해보려고 했는데 씨알도 안 먹히더라는 거예요. 갑자기 어느 분이 나를 보면서 너무 칭찬하면서 너무 순수하고 착한 드문 사람이라고 칭찬해줬대요. 그때 전자동으로 정말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고요. 내 안에는 음란이 있고 얼마 전 야동을 보았다고 그래서 교회에서 회개하고 고백했다는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했다는 거예요. 비록 거창한 복음은 전하지 못했지만 찌질하고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그렇습니다. 전도를 하는 것이 할렐루야. 예수를 믿으라 구원이 이르렀다 이렇게 가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예수 믿고 천국가야지. 이때가 밥 먹고 놀때냐 이러시면 안되요. 앞선 내용이 구속사적인 것이죠. 나는 칭찬할 것이 없어요. 이게 복음 전할 태도입니다. 그러면 전하지 못할 사람이 없어요. 저 또한 여러분들의 성령의 상소로 미주 목세와 집회를 하고 왔어요. 정말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도 1,2,3차 백신을 다 맞고, 직전에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터키 선교사 수련회에서 안 걸린 코로나를 미국가서 결렸어요. 처음에 걸린 코로나로 인해 기도와 말씀으로 상한 심령이 되어서 교회가 걱정이 되어 기도제목도 못 올리고 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니까 정말 회개 밖에 할 것이 없더라고요. 그때는 아프기도 하니까 이 수고를 그치고 정말 쉬라는 말씀을 듣고 싶었지만 그래도 혹여라도 저의 사역에 저의 욕심이 있다면 저를 용서하지 마시라고 기도했어요.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용서하지 마시라고 용서했어요. 기도했는데 결론 적으로 이번에 미국 선교 여행이 가장 많은 열매가 많은 목세가 되게 하셨어요. 제가 죽어져야 열매가 맺혀진 것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생각지 못한 분들이 곳곳에서 저를 보고 자기 한 사람 위해서 왓따고 합니다. 구속사의 말씀으로 이혼을 안하고 가정을 지켰다고 해요. 어디를 가나 큐티를 하는 성도들이 계셨어요 저는 목사님들이 큐티 목회를 해서 이런 분들 데리고 목회하면 좋을텐데.. 말씀이 들리는 그 한사람이 곳곳에 있었어요. 이번에 참석하신 한 목사님의 편지입니다. 공부도 많이 하시고, 장애아들을 데리고 부부가 계속 참석하셨어요. 목사님의 세미나를 5월 한국세미나부터 한번 듣고 이번에 일정을 다 따라가 보자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드려서 워싱턴과 랄리, 캘리포니아 베델 교회까지 비행기타고 갔다가 네 번을 다 마치고 난 후에 구슬을 꿰듯 꿰어지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때마다 깨닫는 은혜가 달랐습니다. 첫 번째, 14차 목욕탕 세미나에서 저의 죄를 보는 것이었고, 두 번째 워싱턴세미나에서는 내가 100% 죄인이라는 것이 어떻게 다가왔는가 하면 옳고 그름으로 사람을 대했기 때문에 구원의 열매가 없었음을 깨달았고, 세 번째 랄리 세미나에서는 복음이었고, 저는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는데 구원을 위해서 생명을 내놓는 목사님의 말씀이 들렸고, 저의 두 뺨에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향해 주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네 번째 베델교회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타면서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를 1/.3을 읽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끝까지 읽었습니다. 베델교회에서 깨닫게 된 것은 영혼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칼날위의 물방울처럼 말씀 묵상의 꽃은 적용이고, 적용의 열매는 영혼구원이라는 것이 각인되었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굉장히 길게 써 주신 것을 줄였어요. 구속사로 나가기 위해 가만가만을 달리 표현하여서 조심조심 말 조심, 조심조심 행동조심 하겠습니다. 평신도도 아니고 목사님이 똑같은 집회에서 들리는 포인트가 달랐다고 편지를 보내셨네요. 나 그거 다 알아 그러실래요? 다 알아 한번 받았거든.. 말씀을 맺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