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8장 25절~29절 - 아합의 집 길
아합의 집 길
열왕기하 8:25-29
김양재 목사
철학자 중에 철학자 플라톤이 인생은 나그네의 길 같다고 했죠. 그런데 이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의 길 인생에서 우리가 방황은 너무 오래오래 길게 길게 하기가 쉽죠.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장 6절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이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제 길이 함부로 살았다는 게 아니에요. 저마다 잘 살아보겠다고 신중하게 열심히 그저 잘 설계하고 인생길을 따라가지만 결국 사람은 악하잖아요. 그래서 결국 각기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제 길로 가서 결론이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지난주 요람왕의 악을 살펴봤는데요. 이 시기에 남북의 두 왕과 그 아들 두 왕이 이름도 똑같이 이제 여호라함과 아하시야인 것이 이제 가장 악한 시대라는 상징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그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의 이야기예요. 이제 실제 주인공은 남유다의 여호람과 아하시야 왕인데요. 그런데 그들을 다윗의 집이 아닌 아합의 집으로 말해요. 아합이라는 이름이 그들만큼 많이 등장합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주인공 아하시야에 대해서는 정말 아합의 집 길이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오늘은 우리가 절대로 밟지 말아야 할 아합의 집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합의 집 길 첫째는 불신 결혼의 악을 떠나지 않습니다.
25절 6절이에요.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십이년에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니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 나아가 이십이세 예루살렘에서 일년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라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이더라.
여호람이 하나님께 벌을 받아 창자에 중병이 걸렸다고 했어요. 아하시야는 여호람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래서 요람 십일년에 아하시야는 아버지 여호람을 도와 공동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1년 만에 여호람이 죽고 단독 통치를 시작하죠. 이때가 요람 북이스라엘의 요람 제십이년입니다. 그래서 이제 아하시야는 남유다 아하시야는 22세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요. 여기에는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을 격동시켜가지고 그 여호람의 아들이 다 죽죠. 그래서 그 형들의 죽음이란 행운이 뒤따라서 아하시야가 그 행운이라고 그래야 되나요? 그래서 왕이 됐어요. 상상도 못하던 왕이 되었는데 그릇이 안 되니까 1년 만에 죽어버립니다.
이제 죽음에 대해서는 다시 다루겠습니다. 어쨌든 엘리사에게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 왕이 된 예후에게 살해가 됩니다. 앞서 지난주 18절에서 여호람이 아합의 딸과 결혼했다고 했죠. 그 이름이 나오는데 아달랴예요. 아달랴는 어머니 이세벨 이상 악행을 저질렀는데요. 아달랴는 바로 여호람의 아내인 거예요. 그의 어머니를 기록하는 이유는 항상 어머니가 신앙의 배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데요. 여호람을 바알 숭배로 이끈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어떻게 교육시켰겠습니까? 아달랴를 아합의 딸이라고 하지 않고 오므리의 손녀라고 해요. 오늘은 아합 가문 전체를 지금 다 등장시키는 겁니다. 왜죠? 이 가문이 총체적 문제임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오므리에게서 시작된 악이 아합 때 폭발을 했고 그것이 딸 아달랴를 통해 유다 왕조에게까지 이제 미쳤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버지 여호람도 아들 아하시야도 유다의 왕이잖아요. 그 이름도 자랑스러운 다윗의 후손 아니겠습니까? 그런데요. 이 두 사람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무슨 명찰을 달고 있는지 아세요? 다윗도 아니고 솔로몬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여로함이라는 길다란 명찰을 자기 이름 위에 떡하니 붙이고 늘 무대 위에 등장을 해요. 이것이 분명히 남유다의 여호람과 아하시야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북쪽에 아합과 요람에 이름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무슨 말입니까? 악의 전염성이 그렇게 강하다는 것이죠. 우리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선한 영향력은 너무나도 미약해요. 왜 우리는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거기에는 전염이 되는데, 선행은 우리가 선한 게 하나도 없으니까 선행은 아무리 가르쳐도 잘 되지 않아요. 어렸을 때부터 큐티를 시키고 예배를 오게 하고 듣게 하고 보게 하고 이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고요. 이렇게 하다가 흘러 떠내려갔어도 반드시 어렸을 때 들은 것들을 다 기억해서 돌아올 줄 믿습니다. 그래서 애들이 듣기 싫거나 뭐 아무리 그래도 애들에게 큐티는 시켜야 되고 엄마가 하는 걸 본을 보여야 되고 그런 줄 믿습니다.
오므리 집안의 악이 왜 이렇게 유다 왕들을 잠식했나요? 27절입니다.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그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라 그냥 지금 한 절에 아합의 집이 세 번이나 이게 강조하는. 큐티 이래서 하는 거예요. 아하시야는 다윗의 집 자손이잖아요. 그런데 다윗의 집이 아닌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그가 아합의 집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래잖아요. 다윗의 후손인데 왜 아합의 집 사위가 되냐고요. 아합의 집 외손자인 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외손자도 모자라서 아합의 집에 사위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모인지 사촌 동생인지 아합 집 안 딸 중에 한 명과 결혼까지 했다는 거예요. 겹사돈을 넘어 겹불신 결혼까지 했어요. 불신 결혼 한 번도 모자라서 그냥 아주 쌍으로 했습니다. 대를 이어 불신 결혼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불신 결혼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까?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하면 믿음을 지키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에요. 우선 1차적으로는 그렇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는 불신 결혼은 결혼의 목적을 거룩이 아닌 행복에 두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내 인생에 상급으로 여기지 않고 내 소유, 명예, 성공, 만족, 쾌락을 인생의 상급으로 여기는 선택이기 때문이에요.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불신이에요.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 속에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지만 인간이 100% 악하니까 내가 세상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게 뭔 죄야 그런데 인간이 100% 악하기 때문에 결국은 악을 선택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땅의 사람이 아무리 아름답고 선해도 성품이 착해도 그거는 선이 아니라는 거예요. 불신은 악이에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악입니다. 여호사밧의 아들 여로함을 불신 결혼시켰어요. 이것이 얼마나 유다의 엄청난 구렁텅이로 몰아갔는지 몰라요.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되라고 그런 거죠. 여호람이 그 악을 이어서 아들 아하시야를 또 불신 결혼을 시켰어요. 그것도 자기 처가 아합의 집과 말이죠. 왜죠? 아합의 집이 세상의 성공과 부귀와 안녕과 평화를 보장해주는 보장해 주는 집이거든요. 경쟁자가 절대 없는 1등이거든요. 그러니 다른 집 찾을 필요가 없어요. 인륜 그딴 거 다 필요하지가 않아. 그저 나를 더 높은 자리에 올려줄 것만 같은 집안, 내 집안을 더 업그레이드 시켜줄 것 같은 집안인 아합의 집만 보여요. 그 집안이 이미 내 처가인 거예요. 그러니 겹불신 결혼도 마다하지 않아요.
게다가 아합의 북이스라엘이 요셉의 후손이잖아요. 강성한 왕가의 딸이니까 얼마든지 합리화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돈 관계가 된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바알의 딸로, 북이스라엘은 바알을 섬기는 왕의 딸을 며느리로 아내로 데려왔어. 그러니까 이제 이세벨 입장에서 보면 자기 친정의 아버지도 왕 이렇게 시아버지도 왕 남편도 왕 아들도 왕이에요. 이 딸도 아달랴도 엄마를 그대로 닮아서 아버지도 왕, 시아버지도 왕, 남편도 다 아들도 왕이에요. 그야말로 로열 패밀리 아닙니까? 그 결과가 무엇이에요? 모두가 아합의 집 길을 따라갔어요. 아 집의 불신, 그 세속적인 가풍 행복을 목적으로 한 삶의 방식을 따라갔습니다. 다윗의 DNA가 다 소용이 없어요. 아합의 집 사위라는 게 너무너무 좋아요. 그지같이 사는 게 그냥 너무 만족스러워요. 그래서 뭐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그러잖아. 그러면 게임 끝이잖아요. 아무리 화려한 게임을 한 것 같아도 결과는 패배고 다 잃어요. 영원한 죽음이에요. 밑동 잘린 나무이기 때문이에요. 문제는 아합의 집 길이 너무 넓고 곧은 탄탄대로라는 거죠. 도착지가 지옥이라는 게 안 보여요. 길 자체가 너무 화려하고 꽃길이고 비단길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곳을 떠나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불신 결혼 안 된다고 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경보를 시끄럽게 올리셔도 빨간 신호등 아무리 켜셔도 고난의 차단기를 거듭거듭 내리셔도 아합의 집 사람 되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행복에 대한 소망이 너무 커서 이 불신 결혼의 악을 떠날 수가 없어요. 이것이 아합의 집 길의 실상입니다.
근데 좀 생각을 해보세요. 더 부러운 것은 여호람의 아내 그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는 남편 여호람이 너무 자기 말을 잘 듣는 거예요. 아들 아하시야도 어머니 말을 잘 똑같이 듣는 거예요. 대체로 이 무서운 부인 밑에서 엄처시야 나오고 또 효자 효부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세상 것만 갖춘 게 아니라 모두가 부러워하는 이 신사임당상을 받아야 되지 않겠어요 신사임당이 뭔지를 모르죠. 그런데 말입니다. 자기 가족이 찰떡 같은 이 화목으로 그냥 똘똘 뭉쳤는데 이세벨은 그 남편 아합과 잘 살면서 엘리아를 죽자고 죽이고자 했던 어머니예요. 이 세상에 엘리아를 죽여야 돼. 유다로 시집 온 그 딸은 또 남편과 하나가 되어 그 어머니 그 딸이라고 엘리야를 넘어서서 유다의 예수 씨 모든 왕족들 다 죽이려고 했지요. 그래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집이 너무너무너무 부럽습니다. 이게 구속사 아니면 이거 누가 알겠습니까?
적용 질문이에요.
불신 결혼이 악이라는 것이 이해됩니까? 자녀에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너무 좋아서 떠나기 싫은 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예요. 바울 사도가 전도해 놓은 아주 기독교 종주국이에요. 거기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얼마나 질주를 하면서 왔겠습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왕이잖아요. 예. 근데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은 두 번이나 이혼을 하고 그 두 번째 부인도 자신이 주례를 맡았던 결혼식의 신부였대요. 빼앗아서 두 번째 결혼을 했다는 거죠. 그리고 이제 세 번째 결혼을 했는데 그 여자 또한 이혼하고 남성 편력이 있기로 너무나 유명한 모델인데, 세상에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세 번째 결혼을 했어요. 그 모델의 누드 사진이 전 세계 잡지에 실렸어요. 저도 봤어요. 전혀 굴하지 않고 결혼했어요. 정말 성공하기 위해서 악하고 성공하니까 음란한 거예요. 악하고 음란한 걸 보여줍니다. 아주 이런 나라에서는 불신 결혼이라는 말조차 생소할 것입니다. 근데 문제는 남녀 간에 이런 사르코지를 너무 부러워한다는 거 아닙니까? 내 행복을 위해서 못할 것이 없는 거예요. 짧은 인생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사는 거지 여러분들 영원히 기다리고 있어요. 영생과 영벌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 얘기를 진짜 누가 해줘야 됩니까? 아합의 길 첫째는 뭐죠? 불신결혼의 악을 떠나지 않아요.
두 번째는 가족 신화를 지키려고 계속 싸웁니다. 자기 집안 최고라는 거예요. 28절입니다. 그가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에게 부상을 입힌지라
요람과 여호람으로 구분해 줬으면 되잖아요. 그런데도 열왕기 기자는 아합의 아들이라는 이름표를 떼지 않아요. 제발 아합의 악을 잊지 말라고 조심하라고 그 길로 들어서지 말라고 외치는 듯 합니다. 아하시야에게 아합은 외할아버지고 요람은 외삼촌이에요. 아하시야가 외삼촌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갔어요.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우려고 갔죠? 여러분 하사엘이 얼마나 강한 왕이라고 들었죠? 길라 라못은 요단 동편 길루 지방의 중심 성읍인데요. 원래 북이스라엘 영토였지만 아홉의 부친 오므리왕 때 아람에게 빼앗긴 듯해요. 그런데 아합이 아람을 물리치고 평화조약을 맺을 때 아람 왕은 오므리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열왕기상 20장에. 하지만 아람 왕이 위기를 면하자 약속을 지키지 않아요. 여러분 이 세상 사람은 누구도 약속을 안 지켜요. 나라도 약속을 안 지켜요. 절대로 믿음의 대상이 아니에요. 구속사의 구원을 받은 사람만 약속 지키는 거예요. 다윗에게 허락하신 약속 절대로 그러니까 사람 간의 약속에 대해서 여러분 상처받으면 안 돼요. 이 세상 사람은 약속 안 지켜요. 불신 결혼 약속 안 지켜요. 그래서 돈 많았다고 약속 지킵니까? 그냥 아합은 길르앗, 라못을 되찾으려고 군대를 일으킵니다. 약속 안 지켰다고 그런데 이 전쟁에서 아합이 전사해요. 나가지 말라고 미가야 선지자가 막 얘기했잖아요. 시드게아 와서 뺨을 막 때리면서 기억하시죠? 이렇게 성경을 구절구절 읽혀드리는데도 우리들교회에서 못 알아들으면 제가 정말 너무 절망이 됩니다.
이거는요. 아합이 전사한 건 하나님의 심판이에요. 믿음이 하나도 없는 요람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걸 인정하겠습니까? 위대한 임금이었던 아버지 생각만 하면 떠오르는 그곳이 바로 길르앗 라못이에요.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공격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돌아가신 곳이에요. 요람에게 길르앗 라못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한이 맺 친 곳이에요. 후계자인 자신이 반드시 복수해서 수복해야 할 땅이에요. 그래서 군대를 일으키는데요. 혼자서는 벅찬 거예요.하사엘이 너무 능력이 있으니까.
그래서 이미 자신과 끈끈한 결혼 동맹으로 한 집안이 된 조카 아하시야를 부르는 거예요. 아하시야에게도 길르앗 라못은 사연이 있는 곳이죠. 할아버지 여호사밧이 죽을 뻔했던 곳이잖아요.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죽을 뻔했던 곳이고 어릴 적 일이었지만 들어서 알았을 것이에요. 또 자기 땅도 아닌데 이게 북이스라엘 땅인데 결코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고 싶은 땅은 아니지만은 군말 없이 외삼촌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출정해요. 왜 그렇습니까? 그가 다윗의 집보다는 아합의 집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훨씬 큰 거예요. 다윗의 집은 당연한 거고 거기에 더해진 아합의 집이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아합의 집이 더 크고 중요한 거예요. 왜 가요? 처가잖아요. 상아궁에서 으리으리하게 살잖아요. 그러니 요람이 이 어려운 부탁을 했는데도 바로 달려갔어요. 요람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영웅이신데 길르앗 라못 이 한 가지가 오점으로 남았다고 생각했어요.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오점이란 있을 수 없다고 여기니까 길르앗, 라못을 생각할 때마다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런 걸 뭐라고 하나요? 가족 신화라고 하는 거죠. 가족 신화, 집집마다 신화, 문벌 신화 하나님 보시기에 오므리나 아합은 다 악인이잖아요. 그런데 자기네들은 영웅이라고 모시고 살아요. 이스라엘에 미친 악한 영향력을 객관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 위대한 우리 할아버지 민족의 영웅 우리 아버지 하면서 아합의 집 길을 더 탄탄하게 닦고자 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해도 말씀이 안 들리니까 아합은 원수를 갚아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 이렇게 피해자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천년이 가도 그걸 해결할 수가 없어요. 항상 구원의 시각으로 봐야 되는 거지 그러니까 악의 등불을, 등불을 해서 악을 덮어야 되잖아요. 그 악을 갚아야 된다. 원수 갚아야 된다. 이 신화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거죠. 그래서 이처럼 가족 신화에 사로잡혀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게 아합의 집 길이에요. 그 가풍이에요. 전통이에요. 그래서 우리 집안을, 이 나라를 계속해서 싸움을 벌입니다. 원수를 갖고 한을 풀고 오명을 벗고 오점을 지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워요.
여기에 누가 물이 들었습니까? 다윗의 후손 아하시야가 이 악에 물이 잔뜩 들었어요. 할아버지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올 때 성견자 예후가 왕에게 나와서 얘기했어요. 왕에게 여호사밧 왕에게 선한 일도 있지만은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진노하심이 마땅히! 이 말이다. 진노하심이 이 말이다. 이렇게 경고를 했어요. 성경에 다 나온 얘기예요. 이를 심판이라고 여기지 않는 이유가 외가이자 처가인 아합의 집이 너무 좋아서 처가 말을 듣고 아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하니까 이제 그 길에 딱 붙어서 딱 풀이 돼서 떠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자기 싸움이 아닌데도 그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싸워요. 힘과 시간을 낭비하여 지금 있잖아요. 가족 신화의 효자에, 열부에 다 모여가지고 나라를 거덜내고 있습니다. 이걸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우리도 어떤 모양으로든 가족 신화를 다 가지고 있어요. 잘 나가는 집안일수록 가족 신화가 아주 두꺼운 책이죠. 그래서 우리 가족은 성공해야 돼. 돈 잘 벌어야 되고 좋은 학교 가야 되고 사고치면 안 되고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되고 온갖 한목을 가지고 신화를 씁니다. 들들 볶아요. 가족들을 그 피해를 가장 많이 보는 게 누구입니까? 자식이에요.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네가 이 원수를 갚아. 너는 반드시 서울대학 가서 우리 집에 원수를 갚아야 돼. 공부 알았지! 이게 다 가족 신화야. 부자는 부자대로 지켜야 되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네가 우리 집의 원수를 갚아야 된다. 저 집을 물리쳐야 돼. 따지고 보면 아하시야가 이런 가족 신화의 최대 피해자인 거예요. 여호사밧이 불신 결혼시켜서 들어온 그 아합의 집 가족 신화가 그 아들 여호람에게서 꽃을 피웠어요. 그 이름도 똑같은 형님 요람이 너무 좋고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는 처가가 너무 좋아요. 그러니 아들에게 너도 나처럼 아합의 집에 장가가거라 너무 좋아 최고야. 어려서부터 가족 신화를 계속 넣어줬어요. 게다가 아달랴가 욕심이 많고 야망이 크잖아요. 아들에게 너는 외할아버지 아합 대왕처럼 되거라 가르치면서 마음속에 가족 신화를 점점 더 화려하고 두겹게 새겨주었을 것이에요. 그래서 대를 물려 아합의 집과 불신 결혼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런데 여호사밧의 이 아내인 아하시야의 할머니는 왜 등장을 안 할까 존재가 없더라고. 그러니까 여호사밧이 그냥 이세벨하고 아달랴에게 뻑이 갔나 봐. 이 저기 성군인 여호사밧이 자기 아내는 여기서 존재도 없어. 왜 이름까지 등장을 하지 않았을까. 살기 싫었을까. 아이를 낳았으니까 6명을 낳고 또 여호람이 그 형제들을 죽였잖아요. 근데 글쎄 찾아본 사람이 있으면 저한테 알려주길 바래요. 근데 이렇게 가족 신화 지키려고 열심히 싸운 싸움의 결론이 뭐라고 말씀해 주세요 부상만 당하는 거예요. 아합의 집 길 끝에는 상처만 남아요.
하나님이 아합의 집 길 위에서 싸우는 싸움엔 절대로 승리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가족 신화, 가족 사랑하는 거는 그거는 개들도 하는 거예요. 자기 가족 좋아하는 거 우리는 이타적으로 살아야 되잖아요. 객관적으로 자기 자녀를 봐야 되잖아요. 근데 식구들끼리 너무 좋은데 그것이 밖으로까지 어떻게 나가게 되겠어? 그건 인간으로는 힘들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할 수 없이 한계 상황을 보라고 여러 가지 우리들교회 문제를 많이 주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몰라. 왜냐면 인간은 그냥 다 악하니까. 이 한계를 보라고 이렇게 저렇게 사건을 주는 게 축복이란 말이죠. 근데 이 땅의 기복적인 시각으로는 고난이 어떻게 축복이겠어요 그러니까 이 구속사가 여러분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적용 질문이에요.
우리 가족은 어떤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까? 가족 신화 때문에 끊임없이 벌이는 싸움은 무엇입니까? 이 가족 신화로 가족들을 아프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맨날 우리는 너만은, 이게 너만은, 주라면 해야 되는데 너만은 이 원수를 갚아주라. 내가 비록 이렇게 살지만 너는 우리 집에 등불이야. 성공해야 돼. 내가 눈을 못 감아.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맨날 가족 신화를 없애 없애 없애라 그러면 돼요? 다음 세대에 특히 청소년들 청년들을 다윗의 길로 인도해야 되겠죠. 가치관이 바뀌어야 아합의 길로 가지 않을 거 아니겠어요? 우리들 교회가 그냥 어렸을 때부터 앉으나서나 큐티 큐티 다 나누고 집에서 나누고 교회에서 나누고 이번 청소년 큐페에서 정말 내가 한절한절 난리를 쳤더니 애들이 열심히 큐티를 요새 한다고 그래요. 이렇게 한다고 할 때 선생님들은 정말 아이들을 잘 살펴주셔야 돼요. 이 청소년 아이들이 한 사람이 큐티하는 게 온 나라의 미래가 달린 줄 믿습니다. 선생님들이 너무 중요해요. 한 줄도 빠지지 마시고 한 사람의 한 선생님이 붙을 정도로 열심히 큐티하시고 아이들의 나눔을 잘 들어주시고.
엊그제는 청년 큐페가 있었어요. 우리가 진짜 2천 명이 들어갈 장소가 없어서 너무 청소년 때 힘들어가지고 이번에는 정원을 받았어요. 그냥 그래서 많이 오지 못한 청년들이 많이 있는데 그래도 1600명이 왔어요. 그거보다 훨씬 더 많이 와야 되잖아요. 근데 올해 말씀 듣고 다 이렇게 축복을 하는데 결혼하는 커플들 나와라 그랬더니 한 40커플쯤 나왔대요. 이게 있을 수가 있어요? 대한민국에서? 다 기도 받고 또 한 자매는 자녀를 7명 낳겠다고 공개적으로 이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처음으로 말씀이 사운드가 아니고 보이스로 들렸다 큐티 하겠다. 그리고 진짜 이 청년들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 그 목사님의 마음을 느낀다. 정말 내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지 않았겠어요. 청년들한테 청년들이 좋아하는 목사니까 진짜요? 아셨어? 이번 수련회를 마지막으로 교회를 떠나려고 했는데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을 접었대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대요. 또 부모님의 이혼이 나의 구원 때문에 주신 하나님의 팔복임을 깨닫게 되었대요. 이거 아이들 나눔이에요. 또 이제 저는 이틀 동안 울고 기도했는데 모두가 울고 기도하고 있다는 감동을 받았답니다. 이건 처음 왔는가 봐요.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축복사를 해주신 목사님과 직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대요. 돈 우상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주시고 얘 또 억지로 온 거였는데 터닝 포인트가 되어서 양육이 받고 싶어졌고 큐티라는 걸 해보려고 해요. 하나님 음성을 하나 들었어요. 뭔가 들었는가 하면 내용이 이제부터 십일조를 해라. 그래서 이제 이번에 조 편성이 11조로 편성이 되었습니다. 이걸 이렇게 깨달은 게 어디예요? 다시 성령님을 만났어요. 또 하나는 친어머니의 자살 사건이 있었는데 새어머니 남동생 다 우리들교회 목장에 붙어가고 잘 믿지 않던 아버지까지도 자기 죄를 보고 그냥 회개하며 온 가족이 목자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이 세상에서는 살아날 것 같지 않은 그래서 공동체의 위력이고 방언이 터지고 최근 해고 이직 실패 물질이 부족한 이 엄청나게 저기 이력서를 100곳이 넘게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매주 교회에서 만나는 지체 목장 공동체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그게 남은 것이라고 해줬어요. 당대 신앙이고 교회 온 지 4개월 정도 돼서 매주 예배 때 그냥 늦거나 졸거나 졸리지 않으면 게임하거나 그러면서 45개월을 왔대요. 그런데 그냥 이번 집회를 하면서 제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고 많이 아팠지 하시는데 제가 네 아파요 하면서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는 경험을 했대요. 4개월 된 아이가. 제 열심이 너무 강했는데 성경은 잘 모르지만 예배 때마다 말씀이 들리는 은혜로운 경험을 했답니다. 네 근데 이것도 기가 막히지만 판교 중등부의 7남매의 장남이 나눔을 했어요. 7남매 중학생인데 장남이래 동생들을 잘 보살피지 못했다는 회개의 간증을 했는데 자기는 동생들과 싸움, 스트레스 그래가지고 막 화가 났는데 동생을 차마 때리지 못해가지고 벽을 쳤더니 벽에 구멍이 나가지고 화도 안 풀리고 셋째 동생에게 수리비라고 손에 쥐어지고 밖으로 나갔다가 몇 시간 뒤에 들어와서 부모님께 혼이나고 잠들기 전에 주님께 분을 참지 못하는 마음을 다스리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를 드리고 잠을 잤더니 다음 날 욥기를 읽었는데 요의 세 명의 친구들처럼 저도 사랑하는 동생을 정죄했습니다. 그리고 정죄하고 화를 참지 못한 것을 동생에게 그래서 사과했습니다. 앞으로 친구들과 동생들에게 제 생각과 판단으로 말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가족 신화 말고 진짜 로열 패밀리는 이런 가정 아닙니까? 형제끼리 디립다 싸우고 그 다음에 말씀 읽고 회개하고 사과하고 기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치열함의 가정이 진짜 로열 패밀리 아니겠습니까? 얘는 이게 웬 은혜예요. 중학생이 벌써 7남매에. 제 그러니까 저기 아버지 제2의 아버지처럼 애들을. 애들 많이 낳으면 지네들끼리 싸우면서 이렇게 큰다니까요 우리 교회에 7남매가 있어요. 부럽죠?
아합의 집길 첫째는 뭐라고요? 불신 결혼의 악을 떠나지 않아요 둘째는 가족 신화 지키려고 계속 싸웁니다. 세 번째는 결국 제자리 걸음으로 끝나는 거예요. 아합의 집 길은.
29절입니다. 요람 왕이 아람왕 하사엘과 싸울 때 라마에서 아람 사람에게 당한 부상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더라 유다의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아의 아들 요람을 보기 위하여 내려갔으니 이는 그에게 병이 생겼음이더라.
싸움에서 이제 부상당하고 패하는 사건이 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는 큐티를 해야죠. 말씀을 펴고 하나님께 이 사건을 물어야 됩니다. 해석받고 내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되잖아요.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됩니다. 그럼 상처가 별이 되고 약재료가 되잖아요. 근데 아합의 집 길 위에는 이런 회개의 유턴 같은 거 없어요. 오직 가족 신화 자기 확신만 있기 때문에 자기 잘못 인정하는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나는 죽음으로 내 모든 것들 죽으면 영 벌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서 부상당한 요람이 돌아온 곳이 어디예요? 이스르엘이에요. 이스르엘 여기가 어딥니까? 아합이 별공을 짓고 제2의 수도로 삼은 도시예요. 이스르엘이 굉장히 지형적으로 비옥한 교통의 요지였거든요. 근데 이 좋은 곳에서 아합과 이세벨 부부가 한 짓이 뭔지 기억나세요?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아합의 집과 탐욕의 교만이 폭발한 바로 그곳이에요. 정해진 땅의 경계를 넘지 않는 것 하나님이 가문별로 나눠주신 땅의 소유권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지켜야 할 법이잖아요. 그런데 아합은 이미 하나님 위에 있기 때문에 그냥 사람을 죽이고 땅을 빼앗는 거예요. 가족 신화 지키려고 싸움을 벌인 요람이 싸움에 져서 돌아온 곳이 이스르엘이에요. 결국 제자리걸음이에요.
풍요의 땅 별궁이 있는 휴양지, 부모님이 절대 권력으로 빼앗은 이 좋은 포도원이 있는 곳. 거기서 나오는 와인을 마시면서 잘 쉬면 금방 상처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겠죠. 좀 구속사를 물으면 다 삼천포로 가는 거예요. 이스르엘에 가면 내가 치료할 수 있다 이렇게 외쳤을 거예요. 절대로 자기 자신의 죄가 안 보여요. 자기 잘못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패했는데 회개할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여러분 엘리사를 여러 번 만난 요람이에요. 게하시가 설명한 큰 일도 다 들었어요. 수넴 여인의 간증도 다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 12년 동안 왕 노릇을 했어요. 수많은 기적을 보여줬어요. 그런 게 소용이 일도 없어요. 기가 막히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저를 욕하는 게 당연해요. 이 북의 여호람도 12년 동안 하나도 안 들리니까 여호람도 안 들리고 요람도 안 들리는. 그래서 이제 기다려야 되니까 이제 눈물이 나는 거죠. 왜 왜 소용이 없어? 그냥 마음이 자기 집 안에만 있어요.
아합의 집이 세상의 전부예요. 자기 집안도 믿는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우리가 금송아지만 예수님처럼 믿는다. 자기 집안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사건이 와도 그것을 구원의 사건으로 해석하여 적용하지 않아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왜요? 치료해 줄 것 같은 이스르엘이 아직도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그 부상이 치료됩니까? 지금 마지막에 치료는커녕 더 심해져서 병이 되었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아하시야도 요람과 똑같이 움직여요. 전쟁에서 졌으면 빨리 군사를 정비해서 나라로 돌아가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디로 가요? 외삼촌 요람 보기 위해 자기도 이스르엘로 내려가는 거예요. 이건 영적 육적으로 이제 내려가는 길이에요. 다윗의 길을 완전히 버리고 아합의 집 길로 추락하는 선택이에요. 영적 육적으로 좋은 환경과 조건을 다 갖췄는데, 다윗의 길이 아닌 아합의 집 길을 가니까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는 거예요. 요람과 아하시야는 이스르엘에서 이렇게 제자리 걸음만 하다가 진짜로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 거예요. 둘 다 예후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 거예요.
여러분 이스라엘에 가서 나봇과 그 형편없는 일개 그 사람의 토지를 빼앗은 게 뭔가 이 대단한 나라가 있는데 여러분 이 사소한 것에서 우리는 목숨이 날아갑니다. 사소한 것에서 우리 인생의 전체적인 거, 모든 걸 이루었던 것 하루아침에 뺏길 수 있습니다. 이게 다 반면교사로 우리 읽으라고 써놓으신 거예요. 아합의 집 길은 멸망의 길로 정해진 길이에요. 하나님이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심판하셨어요.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오.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이 말씀을 어디서 주셨나요? 이스르엘에서 주셨어요.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은 직후에 말이죠. 이것을 요람이 몰랐을까요? 여호사밧과 여호람이 몰랐겠어요 아하시야는요. 당연히 알았죠. 그런데 그 말씀을 믿지 않아요. 화려한 아합이 너무 좋기 때문에 이 초라한 엘리야가 딱 무시가 되는 거예요.
아합의 집 길은 말씀을 무시하는 길이에요. 말씀을 거역하는 길이에요. 겉으로 화려해 보입니다. 겉으로 자기가 제일 의로워요. 하지만 결국 제자리 걸음만 하다가 끝나는 길이에요. 그러니까 느헤미야가 가장 처참한 불신 결혼의 예로 솔로몬의 이야기를 하잖아요. 솔로몬이 처음에 십일조 신앙, 안식일 신앙에 성전 짓고 예배를 열심히 드리다가 말할 수 없는 지혜와 돈과 능력을 주시고 무역으로 세계 강국을 이루게 하시니까 딱 달라졌어. 여자에게 미쳤어요. 여호와를 떠났어요. 하나님이 두 번이나 눈에 보이게 나타나시고 진노하시고 가진 말씀으로 돌이키라고 하셔도 솔로몬이 권력과 돈이 생기니까 아무 말씀도 안 들려요.
심지어 예루살렘 앞산의 이방신을 위한 산단까지 지어서 여자들에게 바쳤습니다. 솔로몬이 이러면서 아들 로호보암에게는 잠언을 썼어요. 자기는 안 들으면서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듣는다고 썼어요.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음녀의 호림에 넘어가지 말라고 보석 같은 잠언을 썼어도 아들 르호보함에게 보여준 삶은 천 명의 여자를 바꿔가며 거느린 것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문제아가 안 나오겠습니까? 어린 나이에 못 볼 꼴을 보고 자란 사람이 르호보함입니다. 은쟁반에 옥구슬 같은 기막힌 말을 해도 아버지 솔로몬의 삶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나라를 지키지 못했어요. 열지파를 잃어버렸어요. 남북이 갈라지고 후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된 모든 원인이 올라가 보면 솔로몬에게 있습니다. 그래도 이 솔로몬에게 다윗의 등불을 허락하셨어요. 그러니까 이제 옳고 그름으로 보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정말 이 구속사가 들려야 되는데 이 머리로 안 들려요. 이방 여인을 취한 것이 범죄 중에 범죄라는 걸 알아야 하는데요.
여기서 적용 질문 하나 드릴게요.
문제 자녀의 방황이 불신 결혼의 결론인 것을 깨닫습니까? 말로는 믿음을 강조하면서 세상 성공의 가치관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자녀의 불신 결혼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 너는 반드시 1등 해야 돼. 너 1등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지. 전도도 할 거 아니야 1등 해야 돼. 큐티해라. 너 아무게를 물리쳐야 돼. 걔를 물리쳐야지. 우리 집에 원수를 갚는 거야. 큐티해라. 이게 온몸으로 온몸으로 보여주는 거죠. 반면 다윗의 길은 무엇입니까?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처럼 남긴 말이에요. 열왕기상 2장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그 길로 행하라. 무슨 길이에요? 하나님의 명령 말씀을 지키는 길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곧 길이에요. 십자가를 길로놓는 순종을 말해요. 이 길을 그냥 다윗의 길이라고만 하지 않고 이 길을 내 길이라고 하세요.
열왕기상 3장에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이 말을 내 길, 내 길, 그리고 북이스라엘 초대왕 암에게도 하셨어요. 그러니까 다윗의 길이 하나님 아버지의 길이에요. 하나님의 길이에요. 그런데 다 듣지 않아요. 여로보암의 길, 아합의 집 길이 다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의 길 버리고 내 길 가는 거예요. 인생 내가 원하는 길로 가려다가 결국 제자리걸음에서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길로 한 말씀 듣고 지키는 길을 가면은 우리 인생을 제자리걸음으로 끝나지 않게 하시죠. 우리 길을 길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불신 결혼을 사르코지도 안 되고 누구도 막을 수가 없어요. 느헤미야가 13장, 느헤미야 13장이 불신결혼을 어떻게 막았는지 보겠습니다. 성전을 짓고 이제 수산궁에 가지 자기가 관리였잖아요. 갔더니 정말 우리가 이 불신결혼은 솔로몬 왕도 그때 대제사장 엘리아십도 불신 결혼에 다 예외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25절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의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느헤미야는 그 모든 귀인들, 이 모든 사람들을 책망하고 저주하고 때리고 머리털을 뽑았어요. 여기서 불신 결혼을 막을 사람은 느헤미야 한 사람밖에 없는 거예요. 유다 귀인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대제사장까지 산발락과 도비와 같은 원수와 혼인으로 동맹을 맺고 가서 잘 살면 되지 불신 결혼이 무슨 상관이야 하고 있으니까 지금 느헤미야가 목숨을 걸고 막고 있는 거예요. 불신결혼은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이 있는데 그 고통으로 이 땅에서 주님을 만나면 좋겠지만은 가서 잘 살기까지 하면은 그야말로 죽고 나서 영원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막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책망하다 책망하다는 이 리브동사는 느헤미야 13장 11절에서 십일조 문제로 민장들을 꾸짖을 때 이 단어를 써서 17절에서 안식일을 안 지킨 유다 교인들을 꾸짖을 때 이 또 책망하다라는 단어를 썼어요. 십일조 안식일 그다음에 오늘 불신 결혼을 책망할 때 이 단어를 썼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십일조를 잘하고 어렸을 때부터 안식일을 지키면 불신 결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내가 돈이 더 좋으니까 십일조를 안 하죠. 그래 돈이 생기니까 이제 안식일을 또 안 지켜요. 사업이 잘 되면 당연히 불신 결혼 안 하죠. 돈 많은 사람들끼리 이렇게 결혼하죠. 각각 사안은 달라도 영적으로는 이제 이 똑같은 죄인인 거예요.
적용입니다. 이스르엘처럼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고 치료해 줄 것 같은 곳은 어딥니까? 그런 이스르엘이 없어서 슬픕니까? 감사합니까? 내 길로 행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길로 행하고 있습니까?
목자님 간증에 우리 아들이 재혼을 합니다. 아들이 첫 결혼할 당시에 내가 저 외국에 남미 센터의 소장으로 있었는데 멀리서 아들의 얘기만 듣고 어머니가 권사님이라 그러고 며느리는 에스그룹의 가장이고 유학도 같이 한 사이고 아이고 얼굴도 좋고 그래서 이제 결혼을 해라. 결혼을 하고 보니까 며느리가 십일조를 왜 하냐. 아니 애들 지금 이제 돌쟁이 보고 강남에서 살아야지 왜 수원에서 사냐. 아들이 집을 할 때 돈을 보태주었는데 아들이 빌린 부모 돈을 왜 갚냐 이런 나타나는 것으로 이혼 소송을 했어요. 그래서 그때 왔잖아요. 아들이. 그래서 이혼을 안 하기 위해서 너무너무 애썼지만 대법원 이건 가치관의 차이니까 이혼을 해라. 말이 돼요? 이게 난 정말 사법부에 말하고 싶어요. 대법원에서 이혼이 됐어요. 진짜 밖에서 있을 때 그때를 생각해 보면은 제가 너무 무지했다고. 지난주에 이제 결혼할 재혼할 부모님들과 상견례를 했는데 저는 이제 재혼할 그 아내도 에스그룹의 과장이에요. 너는 이렇게 좋은 인류 기업의 과장이고 초혼인데 애 딸린 우리 아들하고 누가 봐도 결혼할 이유가 없는데 왜 하냐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그랬더니 같은 직장에서 아들을 4년간 봤는데 한결같이 이타적이었다고 자기도 죽을 뻔하다가 교회 와서 살아났다. 그래서 나는 재혼이라도 너무 좋고 감사하다. 전 이런 게 믿어지지 아니하고 같은 교회를 다니는데 왜 이렇게 가치관이 다른 것인가 그렇지만 아들은 이제 며느리가 그때는 불신이었잖아요. 그래서 우리 교회를 전도해서 양육 다 받게 하고 지금 목자가 됐어요. 그리고 이제 주보팀에도 있고 또 3월부터는 큐티인 간증도 쓴다고 합니다. 이 과정을 위해 신중하게 아들이 3년을 기다려 주었는데 상견례를 우리 집 앞 작은 음식점에서 했는데 이유를 물어보니까 아버님 어머님 편히 걸어오시라고 이곳으로 정했어요. 이렇게. 상견례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차 한잔하자고 했더니 완전히 목장 모임이 돼가지고 다 찬양하고 예비 사돈들도 전도해서 양육 다 받고 목장도 참석하고 있고 며느리 동생도 우리들교회에서 예배드여고 이제 큐지컬 스텝으로 섬겨서 결국 아들이 처갓집 가족 전체를 우리들교회로 전도를 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이 결혼식에 답례의 선물로 큐티인을 몇 백 권을 준비를 하셨다고 합니다. 네 우리가 아무것도 없는 우리 청년들이 결혼하는데 지금 20년 동안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행복주택이 그렇게 당첨이 잘 되네. 집도 다 있고 아이들도 매주일 나서 이렇게 유아 세례를 하고 이거 하나님이 지금 이 시대에 하도 급해서 이런 모델을 보여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이 시대의 악을 덮는 등불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감사가 됩니다.
말씀 맺어요. 아합집의 길은 불신 결혼의 악을 이제 떠나지 않아요. 불신 결혼과 이 세상 사람들의 길은 똑같아요. 그런데 그냥 모두가 가족 신화에 부들부들 떨어요. 내 아들 내 딸 아니 내 아들 내 딸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너무너무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까 여러분들에게 가족을 떠나라고 고통을 주셨어요. 식구들의 고통을 주셨어요. 그러니까 그게 너무 감사한 거예요. 짧은 인생에 가족의 고통이 없으면 어떻게 이렇게 여러분을 위해서 제가 살아갈 수가 있겠어 그러니까 거기까지 가야 되니까 이게 진짜 식구들을 힘들게 하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를 여러분 가족 신앙 지키려고 싸우지 마시고 결국 그렇게 제자리 걸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아합의 집의 길을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출처: 3월 3일 우리들교회 주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