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요약

열왕기하 7장 3절~11절 - 이제 가서 알리자

vert_mont 2024. 3. 6. 03:38

2024 1 7 

이제 가서 알리자

열왕기하 7 3~11


말씀을 드릴지어다와 역사하는 힘이 큰 기도로 송구영신을 닫고 열었습니다. 해석이 잘 되고 해결이 되었다면 이제 가서 이 소식을 알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올해 표어는 거주할 처소를 세웁시다입니다. 교회도 세워지고 가정도 세워지고 육신의 장막도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야 합니다. 우리들교회가 말씀 들고 나누어줄 것만 있는 인생이 되어서 이제는 가서 알려야 할 선교 영역이 많더라고요. 의료선교, 건축선교 교육선교, 미용선교 이제는 가서 알려야 합니다. 무엇을요? 구속사의 복음을 알려야지요. 누가요? 우리가. 어떡해요? 오늘은 이제 가서 알리자에 대해서 생각해  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죽을 것 같은 고난이 기회입니다.

3 4절이에요. ‘성문 어귀에 나병 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오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 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이제 2차 침공에서 장로들은 드디어 엘리야의 말씀을 들으러 왔고 왕은 죽이려고 하고 장관도 물가가 떨어진다는 말을 안 믿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믿는지 보겠습니다. 이제 성벽은 절대 넘어갈 수 없고 넘어가서도 안 되는 장벽이 되어버렸습니다. 넘어가면 곧 죽음이에요. 먹을 것이 동난 지금은 성 안도 성 밖도 다 죽음 아래에 있습니다. 그런데 극한 굶주림 속에서도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공동체의 보살핌도 전혀 받지 못하는 이 극과 극 사이에 끼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주인공인 나병 환자 네 사람이에요. 굶어 죽어도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는 불가촉 천민이었어요.


지금까지 열왕기하 읽으면서 나병 환자가 두 사람 나왔는데요. 나아만 장군하고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나병 환자가 4명이나 나옵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나병 환자가 또 나와요. 나병 환자가 뭐라고 주님은 열왕기하에서 이렇게 계속 등장시키실까요? 그들은 나병 환자로 육신의 병을 얻어서 구원 얻었지만 고통에 무감각한 영적인 나병 환자 같은 우리 자신을 좀 생각해 보라는 말이에요.

 

유대인의 탈무드는 여러 곳에서 이 나병 환자 4명을 게하시와 그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구원받지 못하고 끝났다는 거예요. 시간 순서로도 이게 게하시가 맞다고 보지만 시간 순서로 쓰인 게 아니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나병의 치리가 구원의 사건이 되지 않고 영원한 심판으로 끝났다면 이제 게하시를 위해 이어지는 8장에 다시 나오게 하셨겠어요?  물론 예수님 시대에 10명의 나병 환자 중에 다 고쳐주셨지만은 한 명의 사마리아 나병 환자만 감사해서 그에게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세요. 

 

그럼 병 고쳤는데 구원을 못 받는다면 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구원의 스토리예요. 판례의 집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양육과 구원의 드라마를 봐야 합니다. 탈무드처럼 나병 환자는 저주고 이래서 옳고 그름으로 따질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4명의 나병 환자 가운데 게하시가 있다고 봅니다.

 

앞서 6장에서 아람 군대가 1차 침공 때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을 포위했었잖아요. 기억나시죠? 무섭게 나병으로 치리를 했어도 치리의 목적이 구원이기에 쫓아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어요. 하지만 엘리사 옆에서 사환 역할을 한 것도 하나도 없이 아람 군대가 오니까 두려워서 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 어찌하리까만 외쳤잖아요. 그런데 엘리사는 또 눈높이를 맞춰서 그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했죠. 그래서 게하시는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어요. 대체 게하시가 뭐라고 이런 은혜를 계속 주십니까? 한 영혼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며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거기까지였어요. 2차 침공에서는 게하시가 또 사라져요. 어떤 적용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오늘 아무 이름도 없는 나병 환자 넷 중 한 명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치리 받은 후는 게하시의 이름으로 호칭된 적은 없어요. 여전히 이름만 없는 게 아니죠. 사환이라는 직분도 없어요. 아직 회개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게하시는 이제 선생님을 향한 죄송함을 넘어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에 빠졌을 거예요. 엘리사 선생님은 내치지 않으셨지만 눈을 열어보게 하시는 은혜도 주셨지만 그 은혜를 소화하지 못하는 자신을 게하시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은혜는 잠깐일 뿐 금세 악하고 음란한 자기 본성으로 돌아가 버리는 자신을 보며 절망했을 거예요.


한편 2차 침공이 일어나고 온 나라가 굶주림으로 아비규환이니 게하시 같은 나병 환자는 설 자리가 없어요. 엘리사는 지금 1차하고는 달리 장로들, 여호람 왕, 장관을 상대하고 있는데 나병 환자인 자신이 그 당시 고정관념으로 그런 자리에 있을 수도 없었겠지요. 드디어 사명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나병 환자라는 자기 분수에 맞는 자리에 이제 주저앉아 버렸어요.

 

여러분도 그러고 싶을 때가 너무 많죠. 이제 그동안 그렇게 양육을 해도 됐다, 안 됐다, 됐다, 안 됐다. 가정이고 교회고 역할이고 사명이고 환경을 탓하며 다 버리고 주저앉고 싶을 때 말입니다. 이게 다 우리 이야기예요. 게하시가 곧 우리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주제가는 죽을 것 같다입니다. 여기까지 와야 합니다. 자기의 자리는 나병 환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이 주제를 알아야 해요.


저도 이제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이렇게 활동한 지 정말 100년이 안 되는 판국에 며느리 때 아내의 때, 엄마의 때, 여자 목사 때 다 이게 여자로서 걸어왔잖아요. 근데 큐티를 하니까 그때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거 알게 해주셔서, 그래서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님들의 선교가 너무 고맙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여기서도 죽을 거고 저기서도 죽을 것이에요. 그래서 죽을 것 같은 고난 이것이 나병 환자 네 명의 인생을 요약하는 말이에요.


여기서 인내의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어찌하여 여기서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합니다. 피투성이가 되었으니 죽겠다가 아니라 피투성이라도 살겠다는 것이죠. 이게 믿음보다 이 사람들이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병이라는 죽을 것 같은 고난 가운데 있으니 하도 무시를 받아봐가지고 이게 가능한 태도예요. 낮은 마음이에요. 그러니 다 포기하고 들어온 게하시가 이런 나눔을 주도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오히려 그는 그대로 죽고 싶었겠죠. 하지만 다른 세 명의 나병 환자 친구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나병 환자 친구들이 어찌 여기서 죽기만 기다리랴 같이 살아보자 외쳐주니까 같이 끌려갔을 거예요.


환경이 겸손한 것이 겸손한 거라 그랬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끌려가서 결국 엄청난 구원의 시작이 됩니다. 이런 나병 환자에 비해 여호람 왕은 이 아람이 쳐들어와서 피투성이가 된 재앙에서 하나님을 향한 소망조차 끊었어요.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오 반문합니다. 여호람이 그 손에 의지하는 능력 있는 장관도 마찬가지예요. 구원을 약속하는 말씀을 듣고도 어찌 이런 일이 있으려 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마음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들은 피투성이가 된 삶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상식 밖의 기적을 바라며 피투성이 같은 삶을 이어가느니 현실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쿨하게 죽겠다는 거예요. 

 

게하시가 나병 환자가 아니라 왕과 장관 옆에 있었다면 또 그대로 따라갔을 거예요. 그래서 내 옆에 누가 있느냐, 어떤 공동체가 함께 있느냐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공동체가 정말 평생을 좌우합니다. 여러분 피투성이라도 살겠다는 나병 환자와 피투성이니까 죽겠다는 왕과 장관 중 누가 더 멋져 보입니까? 누구처럼 되고 싶으세요? 엉망징창이 된 결혼일지라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세속사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신뢰가 다 깨어진 결혼을 이어가느니 쿨하게 이혼하고 새 출발하는 게 훨씬 폼나는 듯합니다. 이 세속사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피투성이처럼 망가진 삶을 놓지 않고 살아내느니 미련 없이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게 더 멋진 것 같은 이웃에 이런 일을 행하는 거죠. 하지만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깨뜨리는 이혼도 하나님의 형상인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끝내는 자살도 하나님을 반역하는 악한 죄입니다. 자꾸 이거에 대해서 공감을 하고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요. 

 

이게 죄라고 무섭게 알려줘야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결론은 영원한 심판이기 때문이죠. 영생의 반대는 영벌이 있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남는 것 같지만 뒤로 믿지는 선택이에요. 구속사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수치를 쥐고 사는 유다에게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수치스러운 삶을 거부하며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 왕과 장관이 아닌 수치를 무릎쓰고 구원받기를 소망하는 나병 환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나병이라는 고난 속에 이미 이제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성 안에도 밖에도 갈 수 없는 그 죽을 듯한 고난보다 생명이 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망가질 줄 아는 거예요.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잘 망가져요. 그러나 왕과 장관은 수치를 당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망가질 줄을 몰라요.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그러니 죽을 듯한 고난이 오면 살 소망을 쉽게 버리고 말아요. 배우자에게도, 자식들에게도 무시를 받고 있습니까? 시댁에도 친정에도 속할 곳이 없습니까? 본가에도 처가에도 갈 데가 없어요. 가정에도 직장에도 쉴 자리가 없습니까? 여기서도 죽을 것 같고 저기서도 죽을 것 같은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이런 고난은 죽을 이유가 아니에요. 거듭날 기회예요. 복음을 경험할 기회입니다. 그래서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어야 합니다. 깨어진 결혼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온전히 회복시키고 구원하십니다. 

 

상상 못하게 힘든 집이 많아요. 자녀가 욕을 하고 또 아내가 남편이 욕을 하고 서로 또 욕을 하고 폭력을 행하면 살고 싶지 않죠. 그리고 어떻게 그런 집이 있어 이렇게 체휼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다 똑같아요. 너무 비참하죠. 매를 맞고 욕을 먹으면 그런데 이게 다 아파서 그래요. 제정신 가지고 그러겠어요? 그러니까 대인관계가 안 되죠. 그런 식구랑 같이 살아내야 되는 게 밑동 잘린 나무의 사명이에요. 그 힘든 여러분들을 응원합니다. 정말 살아줘서 고마워요.  하나님이 화살을 쏘셨으면 책임지십니다. 훈련이에요. 길이 참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 와서 앉아 있잖아요. 이게 택자라는 뜻이에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이러지도 말고 하나님이 만든 것 중에 질서가 위대한데 이렇게 남편을 자꾸 무시하고 그러지도 말아요.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 올리셔야 돼요. 술 먹고 난리 쳤다고 자녀들 앞에서 그렇게 아버지 무시하고 그러지 마요. 물론 아내도 무시받으면 안 되지만은 아내는 복종, 남편은 사랑이잖아요. 아내의 머리가 남편, 남편의 머리가 그리스도 그러니까 아무리 때려부시고 난리쳐도 그렇게 남편을 욕함으로 자녀를 망가지게 하지 마세요. 똑같은 자녀 되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있다면 무엇입니까? 피투성이가 되었으니 죽어야 한다와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한다. 중 어디에 동의합니까?


이제 가서 알리자. 첫 번째는 뭐라 그랬어요? 죽을 것 같은 고난은 기회입니다. 두 번째는 값 없이 받은 구원이 알릴 소식입니다.

5절부터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 하였음이라 그 나병 환자들이 진영 끝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이 죽을 것 같은 고난에서 죽기만 기다리기를 거부한 이 네 명의 나병 환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죽지 않고 살고 싶은 마음을 품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일어나는 적용도 필요한 것이에요.  실낫 같은 소망을 붙들고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난 네 사람은 아람 진영으로 갔어요. 근데 이게 웬일입니까? 진영이 텅텅 비었어요. 더 이상한 것은 군대가 먹던 식량과 쓰던 무기는 물론 의복과 장막도 그대로 있는 거예요. 심지어 말과 나귀도 안 타고 갔어요. 은도 금도 다 두고 갔어요. 그야말로 사람들만 쏙 빠져나간 거예요. 이 넷은 영문을 모르죠.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하고 따질 여유가 없어요. 그저 제일 가까이 있던 장막에 들어가서 허겁지겁 배를 채웁니다. 

 

이제 허기를 달래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뭡니까? 은과 금과 의복이에요. 돈이죠. 근데 여러분 왜 하필 은과 금과 의복일까요? 이 셋이 언제 나왔었죠?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 이스라엘에 올 때 가지고 온 선물이었어요. 그런데 그 후에 나병에서 치료받은 나아만에게 게하시가 달라고 한 건 뭐였죠? 은과 의복이었어요. 아마 금은 차마 구하지를 못했을 뿐인데, 자기로서는 은 두 달란트도 엄청난 가치니까요. 게하시가 욕심 때문에 나병의 치리를 받았는데요. 그 치리로 이제 자신에 대해 절망하며 사명을 다 포기하게 되었는데, 적군이 다 도망간 진영에서 은과 금과 의복을 보니 또 눈이 뒤집혔어요. 여기서는 게하시가 다른 셋을 주도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재물을 싹 다 가져다가 다른 사람이 찾지 못하게 잘 감춥니다. 돈 감추는 데는 또 게하시가 박사잖아요. 자기 전공 나오니까 얼마나 신나게 감췄겠어요. 그래서 장막 하나 이렇게 싹 털고 나와 보니까 이런 장막의 들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예요. 눈이 더욱 돌아갑니다. 이제 고생 끝이다. 이 돈이면 나병도 문제될 게 없어 어디든 가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다. 이제 행복 시작이네 이런 기대에 부풀어 이 장막 저 장막 다니며 보이는 은과 금과 의복을 가져다가 감춥니다. 여기 오기 전까지 통장도 없이 다 망한 인생인데 갑자기 새 통장 개설과 함께 잔고가 수천만에서 수억에서 수십억 원이 지금 이제 쌓이게 됐어요. 그런데 이 네 사람은 아람 군대가 모든 물품을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간 이유를 지금 몰라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그 이유를 알려줘요. 6 7절에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께서 아람 군대가 도망가게 하셨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해요? 주께서 아람 군대가 병거 소리, 말소리 큰 군대 소리를 듣게 하셨다고 하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들은 아람 군대는 착각에 빠졌어요. 자기들이 감히 맞서 싸울 수 없는 엄청난 적군이 이스라엘을 도울 원군으로 온다고 생각한 것이에요. 그래서 너무 급해서 아무것도 챙기지를 못하고 심지어 말과 나귀도 타지 못할 정도로 혼비백산해서 몸만 겨우 도망갔어요.


이 모든 일을 주께서 하셨다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여호람 왕도 아람 왕도 이 세상에 왕이라고 전쟁을 잘하는 게 아니에요. 전쟁을 잘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정말 오늘 이 나병 환자 네 명 주목해야 되는데 이제 열왕기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주 아도나이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여러 주들이 나와서 저마다 주인 행세를 했어요. 여호람과 아람의 베나닷 같은 왕은 물론 여호람의 장관도 자신을 실세로 여기면서 그렇게 이제 까불었어요. 

 

그런데 이제 진짜 주님이 등장하세요.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이 등장하십니다. 사마리아를 에워싼 군대를 한순간에 몰아내십니다. 여러분이 사업이 안 되고 되고 모두 주께서 하신 일이에요.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으면은 우리 하나님이 굶기지 않으세요. 늘 그러잖아요.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하고 죽으면 천국 간다. 왜냐 밑동 잘린 나무기 때문에 인생이 참 짧아요. 이렇게 구원의 능력으로 등장하신 주님의 은혜로 이 네 사람의 나병 환자는 그야말로 구원을 제일 먼저 뜨겁게 경험합니다.

 

이 구원을 위해서 아무 수고와 노력을 하지 않았어요. 저는 예상과 기대도 하지 못했어요. 이 죽을 듯한 고난 가운데서 마른 광야에 비 한 방울이 오면 그냥 너무 감사하잖아요. 애굽 땅에 애굽 나일강에 물을 아무리 부원들 감사합니까? 죽을 듯한 고난 가운데서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 아람 진영에 왔을 뿐인데요. 거기서 엄청난 구원을 아무 값도 없이 받았어요.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그들인데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신 구원을 제일 먼저 누리고 있어요. 이렇게 값없이 받은 구원이 우리가 알릴 소식이에요. 합격과 취업과 승진과 성공은 노력한 만큼 성취하는 거죠. 물론 노력한다고 되는 거 아닙니다.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내 힘으로 수고하지 않고서는 또 이런 성취를 기대할 수는 없어요. 공짜 좋아하면 어떻게 된다고 하죠? 근데 우리는 이런 성취를 너무도 전하고 싶어요.이런 소식만 전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요. 우리 자녀들이 그런 소식을 많이 많이 들려주게 되기를 너무도 간절히 원하고 빌고 또 빌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성취의 소식은 결국 내 강함을 자랑하는 거예요. 이런 자랑은 풍선과 같아요. 바람을 아무리 넣어도 작게 보이는 풍선이에요. 만족하지 못해요. 더 크게 하려고 바람을 계속 넣습니다. 자랑에 자랑을 더하고 과장하고 없는 것도 지어내 보태고 펌프질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결국 뻥하고 터져버려요. 1부 때 뻥 해가지고 내 목소리가 좀 터졌어요. 1부 때는 굉장히 가라앉았는데 한 방에 추락하고 맙니다. 처음에 잠깐 아름다운 소식처럼 보이지만 예수가 없다면 결국 더 큰 수치로 끝나고 말아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에는 사도바울은 부득불 자랑하게 되더라도 오직 약한 것만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린도후서 12장에 내 약함을 자랑할 때 그 약함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의 강한 능력이 전파되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알려야 할 아름다운 소식은 주님이 나 같은 죄인에게 은혜로 베푸신 구원뿐입니다. 모두가 100% 죄인이에요. 주님이100% 다 이루신 구원을 똑같이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모두가 값없이 받은 구원을 전해야 합니다. 구원은 아무리 자랑해도 터지지 않습니다. 자랑하면 자랑할수록 더욱 커져서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구원의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을 구원합니다. 주님의 능력이기 때문이에요. 주님을 자랑하고 자랑했는데 제가 뻥 터졌습니까? 터지지 않고 커다한 죄를 덮게. 여러분들을 그래도 살리고 살리고 또 살리는 역사를 주셨어요.

 

우리가 거저받은 구원을 나누고 알릴 때 올해 표어대로 거주할 처소가 우리 가정과 교회에 이 복음이 필요한 곳곳에 세워질 줄 믿습니다.이런 마음으로 올해 선교에도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값없이 받은 구원을 알리는 모임이 바로 목장 아니겠어요? 여기서 약함을 자랑하잖아요. 여러분 목장 가는 게 이제 선교의 첫 교두보예요. 왜 그렇습니까? 한 목자님이 목장을 마무리하면서 목원들 나눔이 너무 다 은혜로 와서 좀 읽어드리려고 해요. 

 

이 목자님은 정말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 읽기만 하면 변하세요.1년 동안 부족한 가운데 굉장히 은혜를 많이 받은 목장이었다. 목장하면서 울컥울컥한 적이 많이 있었는데 오늘은 특히 성령님이 눈물을 허락해 주신 것 같다. 구원에는 차별이 없다. 게하시나 아람 족속도 똑같이 구원을 허락하시는데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이 어떤 때는 눈을 열어주시고 어떤 때는 눈을 감게도 하시면서 그 과정에 고난과 축복이 있는데 구원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믿지 않는 둘째를 위해 간곡하게 기도해야 할 것 같고, 또 저도 기도를 하지만 목원들을 영적으로 눈을 뜨게 하는 목자가 되었으면 하는 하는 바램이다. 

 

이렇게 나눔을 하니까 부목자가 이번 목장은 목자님이 한 번도 안 쉬시고 오프라인 목장을 하시고 그래서 저도 목보를 처음으로 한 번도 안 빠지고 다 올렸다. 또 다른 분 목원은 저는 목장 식구들 외에 우리 집에 오신 분들이 없었는데 이렇게 우리 집에 오시면서 저에게 은혜가 많이 된 것이 제가 내 말을 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감사하고 큰 힘이 되었다. 또 한 분은 이번 목장 너무 은혜로웠다. 서로가 마음이 잘 통했다. 목자님이 인도를 잘하고 가신 것 같다. 처방 주신 대로 약도 일주일치 먹었는데 너무 감사했고 나잇값을 못해 죄송하고 민망하다. 너무 멋있지 않아요? 왜 아멘을 안 해요 왜요? 또 이렇게 시기질투가 납니까? 

 

또 다른 목자님은 올해 저희가 모인 횟수를 세워보니 47번이에요. 54주 중에서 47번 제가 제일 자주 만나는 본가 어머니보다 더 많이 만났고 가장 바쁘다는 금요일 저녁에 밥도 먹는 모임인데 요즘 같은 시대에 남들이 보면 역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공동체가 저와 가정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목자님은 저는 진짜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도 아내를 만났기 때문에 여기까지 안정적으로 왔다는 게 인정이 돼요. 우리들 교회 공동체에 대한 저력이 제가 힘들거나 지치거나 어렵거나 슬플 때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다 공동체 안에서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어요. 저는 이 공동체가 있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오더라도 두렵지 않아요.

 

또 한 집사님은 우리는 신불자가 되어서 엉망이 되었는데 말씀이 우리한테 꽂히고 모두 나의 이야기로 들리고 있어요. 고난이 없으면 들을 수 없는 말씀이 많은데 제가 계속 들으니 남편도 들어보자고 합니다. 속은 자와 속인 자를 듣는 순간 그냥 다 해결이 돼버렸어요. 내가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없고 내가 죄인이었구나 그걸로 다 해결되었습니다. 큐티 할 때마다 구체적인 말씀이 들어오니 기적 같아 깜짝 놀라가 있고 제가 편안해지고 있습니다. 이거는 아까 47번 목자 모임 했다는 거기에 목원입니다.

 

적용 질문이에요.

주로 자랑하는 건 뭐예요? 그래서 더 자랑하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거는 뭐예요? 과장하는 거 없습니까? 값없이 받은 구원을 알리기 위해서 자랑할 내 약함, 망가짐은 무엇입니까?

제가 늘 아프다가 주일날만 오면 목소리가 빵 터졌는데요. 오늘은 처음으로 이렇게 안 터지네요. 어저께까지 아파도 주일날이면 항상 터져서 저는 이제 걱정을 안 했어요.이제 맛이 갔나 봐요. 기계가 그래도 오늘 제가 안 할 수가 없어 가지고 이제 가서 알리자. 첫 번째는 뭐였죠? 죽을 것 같은 고난은 기회입니다. 두 번째는 값없이 받은 구원이 알릴 소식입니다. 세 번째는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도 알려야 합니다.

9절에서 11절에 나병 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국에 가서 알리자 하고 가서 성읍 문지기를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아람진에 이르러서 보니 거기에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도이다 하노라 하는지라 그가 문지기들을 부름에 그들이 왕궁에 있는 자에게 말하니 

 

나병 환자 네 사람은 게하시가 주도한 이 약탈 아닌 약탈을 지금 신나게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아마도 게하시가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 같은데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되겠도다 하는 거예요. 이게 왜 게하시라 그러냐하면 나아만의 은과 옷을 탈취했다가 선생님께 걸려서 치리 받은 것이 딱 생각이 났겠죠. 그리고 치리의 결과 생긴 그 나병이 보였을 거고, 그 이후 겪은 많은 일들이 떠올랐겠죠. 그러니까 뭐가 잘못이에요? 아름다운 소식을 사마리아 성에 알리지 않고 있는 게 잘못이라는 거예요. 기아에 허덕이는 동료 시민이 생각난 거예요. 자기가 엘리사의 제자였다는 것이 생각이 났어요. 엘리사의 오랜 양육이 그래도 빛을 바라는 순간이에요. 은과 금과 의복이 전부인 인생이 이제 은과 금과 의복 너머에 있는 구원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은과 금과 의복을 그냥 가질 수 있었어요. 근데 그걸 감추었다고 표현한 것은 절대 진리를 생각한 거예요. 사실 도둑질이라고 할 수도 없죠. 침략군이 버리고 간 거 주어담는 일이 뭘 도둑질이겠어요? 그죠? 그런데 감추었다고 표현을 했어요.

 

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지금 당장 가서 알리지 않는다면 아침까지 기다린다면 벌이 자기들에게 미치리라고 해요. 이 선지자의 말씀으로 받은 양육이 있기 때문에 벌에 대한 개념이 있어요. 자기가 치리 받았었잖아요.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당한 게 많은 것은 인생에서 손해가 아니에요. 당한 만큼만 두려워할 줄 알게 되기 때문이에요. 당한 게 없어서 무서운 게 없으면 자기가 주인 자리에 앉아 내려올 줄을 몰라요. 여호람이 두려운 게 없잖아요. 착하고 일류인 사람이 두려운 게 없어요. 거절을 당해본 일이 없잖아요. 여기 장관도 그렇죠. 그죠? 당한 게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또 당한 것만 있다고 되는 거는 아니에요. 아무리 당한 게 많아도 말씀으로 양육되지 않으면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두렵게 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니가 내 고난을 알아? 이러고 막 두려해요. 느그들이 내 고난을 알아 이러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보면 괴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어요. 인간이 선한 게 없어요. 우리 머리만으로는 죄가 뭔지, 죄에 대한 책임이 뭔지, 죄에 대한 벌이 뭔지 알 수가 없어요.


고난만 많고 양육되지 않은 사람과 고난은 없지만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누가 더 좋고 나쁘고 따지는 건 의미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자꾸 저 사람은 착해, 이 사람은 나빠 이런 소리 좀 하지 말아요. 구원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인간은 어떤 모양으로 살든 다 악하고 음란해요. 구원받을 자격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이걸 알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한 거예요. 주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양육이 없으면 좋은 교육도 꽝이고, 고난의 경험도 무용지물이에요. 드라마틱한 고난에 속아서도 안 되고,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교양과 스펙에 속아서도 안 됩니다. 엘리사의 사환이자 수제자로서 거만해져서 스승의 지팡이를 휘두르던 게하시에게는 이 겸손한 나병 환자 친구들과 있는 것이 그가 있어야 할 자리였어요. 또 고난만 충만한 나병 환자에게는 그래도 말씀으로 양육을 받은 한 사람, 게하시가 꼭 필요한 존재였어요. 양육받은 게하시 덕분에 그래도 구원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난과 양육이 만나니 절망뿐인 이들의 인생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복된 인생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들을 버린 사람들이 있는 사마리아 성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마리아 성문에 딱 도착했어요. 떠났던 자리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누구를 부릅니까? 문지기를 불러요. 그들에게 문지기는 어떤 존재입니까? 가장 못된 간수 아니겠어요? 나병 걸린 자기들을 향한 사회 전체의 배척과 조롱을 상징하는 존재가 바로 문지기인 거예요. 한마디로 문지기는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에요. 

 

나병 걸린 게하시가 이제 이거를 말씀으로 양육을 받을수록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 결국 나 때문에 내 구원 때문에 가장 수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데까지 드디어 이 복음이 깨달아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병 환자를 무시하지만 특별히 앞장서서 무시해 주는 사람은 그 문지기라 이거예요.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까. 그러니까 나를 앞장서서 무시하고 조롱하고 수치를 주는 사람이 가장 공로자라 이거예요.

 

하나님은 그런데 이 아름다운 소식을 왕이나 장관을 통해 알리지 않으십니다.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도 알리지 않으십니다. 성 밖에 격리된 나병 환자를 통해서 알리세요. 그것도 아무리 양육하고 치리를 줘도 변하지 않는 게하시가 포함된 나병 환자들을 통해서 알리십니다. 대체 왜 이렇게 어려운 방법으로 알리실까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그에 걸맞는 아름다움을 가져야 한다는 게 우리 고정관념 아니겠어요? 아름다운 소식은 하나님이 직접 은혜로 알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좋으면 얼굴도 아름다워야 될 것 같고 뭐 다른 것도 다 교양도 있어야 될 것 같고. 그게 아니고요. 정말 많은 영혼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빛난다 그랬잖아요. 그죠? 기억납니까? 그래서 그 지혜가 광채가 지혜가 뭐예요? 십자가는 지혜이고 지혜는 타이밍이에요. 지혜를 알고 이렇게 말씀을 적재 적소에 갖다 쓰는 사람 광채가 나고 별과 같이 빛날 줄 믿습니다. 그것이 이쁜 거하고 뭔 상관이에요? 성령의 광채 그거는 근데 우리는 이 세상적인 세속사로 뭔가 아름다운 사람은 믿음도 좋을 것 같고 이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자격 있는 사람 쓰실 이유가 없는 거예요. 아름다운 소식을 오히려 다 무너진 인생, 소망 없는 인생, 자랑할 게 악함뿐인 인생을 통해서 알리셔서 그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세속적인 고정관념이 너무 강해서 아름다운 소식을 듣지 않아요. 

 

2024년 첫 주일에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거주할 처소를 세우는 사명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 교회 확장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 수 늘리자는 말이 아니에요. 세속사적인 가치관이 왕 노릇하는 시대에 너무도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일인 구속사적인 말씀 묵상 운동을 일으키자는 거예요. 이것이 이제 가정 중수 인구 절벽 문제까지 해결하는 거예요. 보니까 지금 이제 0.72로 내려왔다는 거예요. 서울은 인구 출산율이 0.59라고 하는 거예요. 0.6 밑으로 내려왔잖아요. 이거보다 심각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낙태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하고 인권이 어디까지 왕 노릇을 해서 그렇게 마음대로 결혼 안 하고 낙태하고 이혼하고 이걸 언제까지 할 예정입니까? 근데 우리들교회는 적어도 목장마다 가임 19세에서 49세 가임 거기에 자녀가 몇이 있는가를 부부로 나눠보면은 그 수치가 나온다고 그래요. 우리들 교회는 적어도 2.0 1.5는 됩니다. 그러면 말씀 묵상해서 나라를 살리는 구체적인 적용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걸 알려야 되지 않겠어요? 교회 생길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 부흥이 아니에요. 정말 이 나라를 살리고자 개척 첫날부터 이 부르짖었어요. 우리 교회를 통해 지금까지 베푸신 모든 양육이 정말 다 열매 맺기를 바라요.

 

인권이 왕 노릇해서 자꾸 낙태해라. 결혼하지 마라. 그래 다 반려견 키우는 거 좋아요. 그렇지만 자녀 대신에 키우면 그건 안 되는 거예요.땅에 떨어지는 양육이 하나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게하시 같은 제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분수령적인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돌이키기를 소망해요. 몸과 마음으로 아름다운 소식을 세상에 알리는 사명을 감당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힘든 사람에게 가라고 했는데 이번 주에 보니까 이혼하겠다는 아들 부부를 놓고 이제 아버지 마을님께서 아들 내외와 사돈댁 다 불러서 이거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고 해요. 그랬더니 이제 며느리가 일찍 결혼해서 놀지도 못하고 자기는 젊은데 해외 출장이 잦은 남편 때문에 외롭고 힘들어서 이제 실수를 좀 했다. 그러니까 이 남편이 그냥 뭐 직장도 그냥 근사해요. 근데 계속 이혼하겠다고 지금 펄펄 뛰었어요. 그랬더니 이 마을님 아버지께서 자신이 이혼해서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 이야기하고 내 죄 때문에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도리어 아들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들은 아빠 일어서라고 이러지 말라고 하니까 이 마을님은 네가 이혼을 취할 때까지 내가 무릎을 피지 않겠다. 아버지가 아픈데 지금 뇌도 이렇게 되셔서. 그 아픈 데 가가지고 무릎을 꿇고 비니까 드디어 아들이 알았다고 했어요. 아들 며느리 부부를 다 안아주고 아이가 셋이나 됐는데 절대로 가정은 중수해야 된다. 이런 것이 우리들교회의 저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선교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부부가 부부가 결혼하려면 부모가 구속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될 것 같아요. 애가 셋이나 돼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죠? 그래서 정말 우리는 부모가 될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도 양육받고 목장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무릎을 꿇고 비는 거 이혼 말리는 거 자기 아들 보고 참으라고 얘기하잖아. 아들 잘난 이러셔야 되는 거야. 항상 잘난 사람이 참아야 되고 잘난 사람이 기다려줘야 되는 거예요. 알았슈.

 

적용 질문이에요.

고난과 양육이 조화를 이룹니까?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를 아름다운 소식을 그에게 어떻게 가서 알리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게 다 선교인 거예요. 여러분들이 목장에서 나눈 모든 것들이 내가 또 여러분을 통해서 알려주잖아요. 이게 전 세계로 나가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목장에 가는 게 선교예요. 그게 선교의 첫걸음이 목장 가는 거예요. 아셨죠? 오늘 영상 좀 틀어주세요.


결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여학생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모습을 코로나19 사망자보다 정말 이 본질적인 그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한 마음이 주여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한 사람이라도 말씀이 들리게 도와주시옵소서. 내가 여태까지 외쳤던 그 현대에 존재하는 초대교회와 같은 사역과 그 모임이 실제로 가능하구나 가장 큰 그 자신의 죄를 고백하잖아요. 근데 그 어떤 죄라도 거기 있는 모든 목사님들이 다 같이 그것도 공감해 주는 거 다 제 설교 때문에 변화됐다고 말씀하지 않으세요? 다 큐티 때문에 변화되었다고 말씀 이게 바로 나를 살리는 길이고 이게 바로 내 가정을 살리고 이것이 바로 이 나라를 살리며 우리 교회를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한번 확신을 가지고



저 이제 포항에 이 큐티 운동에 제가 이게 큐티 책이 우리 에덴스쿨을 지금 살려가고 있고 신앙을 애들이 더 돈돈 하게 만들어주고 있고 시켜주고 있고 그래서 너무 고마운 책이죠. 아 오랫동안 사역에 지쳐 있던 저에게도 샘물 같은 그런 기쁨과 감사의 시간을 갖도록 동기부여를 해줬어요. 이 아시아 문화권에서 특별히 한국 이 문화권에서 우리들교회는 성공하면 안 되는 교회에요. 이렇게 모든 수치를 다 그냥 하는데 사람들이 도망가야지 숨어야지, 복음이 역사하니까 하나님께서 부흥을 허락하셨습니다. 말씀 묵상 운동이 이루어지게 도와주시고 가정 중수 운동이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고난과 양육이 조화를 이루니까 다들 이렇게 힘든 가운데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합니다. 이게 나병 공동체가 가장 큰 구원을 가지고 왔듯이 새해에는 우리 모두 이런 뜨거운 공동체가 되어서 이제 가서 이제 가서 알리는 이 선교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말씀 맺어요. 이제 가서 알리자는 죽을 것 같은 고난이 기회입니다. 값없이 받은 구원이 전할 소식입니다.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도 알려야 합니다. 

 

출처: 2024년 1월 7일 우리들교회 김양재 담임목사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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